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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알렙 간행) 첫 번째____구보 씨, 누드모델을 꿈꾸다

이 글은 e시대와 철학에 한 코너로 연재되었던 것을, 단행본에 수록하였던 것입니다.
문성원 교수님(부산대 철학과)은 수년 전부터 본인의 닉네임을 '구보씨'라 하여, 글을 써오고 있죠. 자칫 어려워지는 철학의 형식을 부드럽게 해보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마침 연재 지면에서 콘텐츠가 아주 사라지기 전에, 글을 읽을 수 있답니다. ...
이 글을 읽고 나서 좋으시면, '댓글'과 "퍼담기", 꼭 해주세요.^^

이참에 80년 만에 부활한 한국문학사의 가장 독특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 중 하나인 "구보 씨"를 철학자로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원래 지면에서 읽고 싶으면, 아래 주소를 누르세요.

http://ephilosophy.kr/han/?p=203

구보씨 누드모델을 꿈꾸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제 목
구보씨 누드모델을 꿈꾸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더운 날씨다. 무덥고 갑갑하다. 훌훌 벗어던지고 싶은 때다. 구보씨가 딱히 여름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벗는 건 좋아한다. 아니, 그보다는 걸치고 입는 것을 그닥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렇다 보니, 이런 날씨에 집에 있을 때면 거의 벌거벗고 있을 때가 많다.

원래 인간은 열대 동물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퍼져가기 시작한 것은 대략 4, 5만 년 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 기간은 생물학적 변이가 일어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오늘날도 지구상에서 인간이 옷가지나 보온 장치 없이 살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니까, 온대(溫帶)인 우리네 환경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는 계절은 여름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물학적 본성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 여름인 셈이다. 자연스러움으로 잘 지낼 수 있는데 거기에 굳이 인위(人爲)를 덧붙일 필요는 없어, 라고 구보씨는 벗은 몸으로 생각해 본다.

인위는 과잉(過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특정한 목적에만 딱 들어맞는 것은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은 대부분 예기치 않은 문제들을 야기한다. 물론 인간의 문화는 그런 과잉의 자극으로 말미암아 발전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옷은 열대의 ‘털 없는 원숭이’ 출신인 인간이 그 활동 범위를 한대(寒帶) 지역으로까지 넓혀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막상 더운 계절에는 거추장스러워지는 것이 옷이다.

어찌 옷뿐이겠는가.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장치와 제도들이 그렇다. 거추장스러워지기만 하면 다행이다. 쉽게 억압적이 되어버린다. 인위의 질서가 자연스러움을 덮고 순응을 강요한다. 그렇게 하여 인위의 본성이 마련된다. 이제 자연은 낯선 것이 되고 만다. 아마존의 조에 족을 생각해 보라. TV 화면에 비친 그들의 벌거벗은 자연스러움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인위의 문명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신체 부위를 가리는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옷에 배어있는 인위의 질서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복식(服飾)에서다. 하지만 복식은 사극(史劇)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보씨는 옷차림새 때문에 대우가 달라지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요즘도 옷이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옷에 대한 태도는 사회 질서에 대한 태도를 함축한다. 히피들이 괜히 옷을 찢고 벗어던졌겠는가. 그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쉽게 찢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으며, 도리어 벗은 몸에 파고든다. 오늘의 실태를 보라. 몸짱 열풍을 거쳐 신체 부위 하나하나를 지배하는 촘촘한 시선. 꿀벅지니 빨래판 복근이니 하는 따위의 웃지 못 할 규정들이 판을 친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 들게 하며, 알몸까지 스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오늘날 전시된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다.

이런 세상에서 구보씨는 누드모델을 꿈꾼다. 물론 구보씨가 몸짱일 리는 없다. 빨래판 복근? 그의 배는 전통의 중년남자가 지닌 봉긋한 여유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 구보씨가 엉뚱한 꿈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본 영화 한 편 때문이었다.

「캐쉬백」이라는 제목의 영국 영화였다. 주인공 청년이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그 실연의 상처 가운데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졌던 것 같다. 세상이 정지된 속에서 자신만 움직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멈춰진 시간, 그 속에서 홀로 누리는 자유로움 ― 이것이 힘든 상황을 잠시나마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유머는 현실에 대한 이런 종류의 거리두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상상의 특권적 거리가 당장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비틀어보게 하고 그 틈에서 숨 쉴 수 있게 한다.

정작 구보씨에게 필이 꽂힌 것은 영화의 전개에 핵심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한 장면에서였다. 주인공 청년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난한 미술학도였는데, 실연을 당하고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처지에서 미술실기 수업에 들어왔다. 누드 데생 실습 시간이다. 당연히 누드모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누드모델이 머리가 백발인 할아버지였다. 몸매는 물론 몸짱과 거리가 한참 멀다. 그래도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다. 모델을 서면서 ‘뿌우윙’하고 방귀까지 뀐다.

“익스큐즈 미.”

영화 ‘캐쉬백’의 한 장면.

구보씨는 ‘익스큐즈 미’라는 표현이 그토록 적절하고도 미묘한 톤으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색함과 미안함, 뭐 그래도 생리현상인데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약간의 뻔뻔함까지 적절하게 담겨 있다. ‘뿌윙’. 그 시퀀스가 끝나기 전에 할아버지 모델은 다시 방귀 한 방을 날린다.

“익스큐즈 미.”

그래, 바로 저거야, 하고 구보씨는 생각했다. 누드모델이라고 꼭 잘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 오히려 필요한 것은 감춰져 있고 억압되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용기야.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약간의 용기 말이지. 그런 것만 있으면 누구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저렇게 할아버지도 모델을 설 수 있다면, 철학자에게 적절한 노후의 부업은 바로 누드모델이 아닐까. 모름지기 철학자란 은폐된 것을 파헤치고 드러낼 줄 알아야 하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쉽게 벌거벗지 못하는 까닭은 추워서가 아니다. 옷의 질서가 주는 안정을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다. Y도 예외가 아닌 것일까. 그만하면 멋진 몸매인데도 그녀는 노출을 싫어했다. 밝은 곳에서는 좀처럼 맨몸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구보씨가 갑자기 불을 켰을 때 알몸이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시트를 끌어당겼다.

“아깝다, Y야. 너야 말로 누드모델로 딱인데…”

구보의 농담을 Y가 차가운 시선으로 받는 바람에, 구보씨는 황급히 다시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넌 여전히 남성 위주의 시선으로 날 보는 거야. 난 그게 싫다구.”

“엉? 어차피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잖아.”

“그런 뜻이 아니거든. 대체 그게 철학자가 할 말이야? 니들은 항상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폭로니 탈은폐니 하고 떠든다구. 그러면서 실제로 이용당하고 유린당하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아.”

“아니, 그건 오버센스야. 내 얘긴 때로 불필요하고 억압적인 틀이나 감싸개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야. 인위적인 것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그런 반성에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말한 여자, 남자는 자연스러움 속에서의 얘기일 뿐이라구.”

구보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이런 식의 어설픈 변명이 그대로 통할 리 만무했다. 성(性)의 사회적 성격이니 젠더(gender)니 하는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벌거벗음 앞에서 공평치 않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잘못하다간 버티기 어려운 논란에 말려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스스로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수긍하느니만 못하다.

“자연스러운 남자와 여자는 없어.”

Y는 단호했다. 그렇다. 엄격히 말하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거벗어도 진짜 자연스러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니 더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만큼 우리는 더 더듬고 더 갈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하는 우리의 눈길과 손길이 그래서 더 절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도 니들의 속임수고 도피처야. 포착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 그 따위 말로 너네가 노리는 게 뭔지 생각해 봐. 결국은 눈에 보이는 문제를 덮고 회피하는 거야. 남자들이 여자의 몸이나 성을 노리개로 삼고 지배하는 현실, 그건 눈에 보이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문제를 놔두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 철학자들이 자꾸 외면당하는 거라구.”

“하하, Y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그런 면이 있겠지. 하지만 우리도 나름 진지하다구. 그리고 내가 누드를 얘기하는 건 성(性)의 대상화나 상품화, 그런 것 하곤 상관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네 말대로 히피들이 옷을 벗는 데에는 아마 진정성이 있을 거야. 그런데 누드모델은 좀 아니잖아. 그런 게 우리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겠어? 옷을 벗어던지는 용기라구? 그런 건 차라리 동물보호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누드 시위에서 찾는 게 나을 거야.”

“그럼, 넌 나보구 누드모델의 꿈을 포기하라는 거야?”

“꿈? 그런 게 꿈이라도 돼? 그건 그냥 자족적인 냉소거나 유머야. 네가 그랬잖아, 유머라는 게 현실에 초연한 척해서 위안을 얻는 거라구.”

이크. 구보씨는 이쯤 되면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벌거벗음에 대해 아직 할 말은 많지만, 이럴 때는 굳이 열을 올려가며 대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옷을 벗어젖히는 것만으로는 자연스럽게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라고 구보씨는 여전히 벌거벗은 몸뚱이로 생각해 본다.

문성원(부산대,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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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문성원 지음|256쪽|13,000원
2013년 10월 10일|ISBN 978-89-97779-29-1 03100

분야 : 인문/철학/철학 에세이

 

 

 

 


 
- 누드모델을 꿈꾸는 철학자 구보 씨의 철학 강좌!
-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개성 있는 인물, 구보 씨가 재치 있는 입담가로 다시 등장하다.
- 철학의 현황을 드러내고 진짜 ‘철학’에 남은 문제를 이야기하다.

 

 

 

 

책 소개
한국 문학사의 가장 개성 있는 인물,
구보 씨가 지금 여기에 서서 세상을 본다면?

 

 

∥ 1934년 박태원이「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발표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최인훈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연작을 발표하여 구보 씨를 다시 불러냈다. 주인석은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라는 부제로 『검은 상처의 블루스』라는 연작소설집을 냈다. 2002년에는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앨런 테인 더닝&존 라이언, 그물코)라는 환경 책이 나왔다.
∥ 그리고 2013년에 구보 씨는 철학자로 다시 등장하였다.


20세기 소설가 구보 씨가 근대 조선의 지식인상을 보여주었다면, 21세기에 다시 철학자로 태어난 구보 씨는 ‘지금, 여기’ 이 세상을 어떻게 볼까?
구보 씨가 재치 있는 입담과 유쾌한 생각을 가진 ‘철학자’로 돌아왔다. 문학과 철학, 현실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철학자 구보 씨는 경쾌한 사유의 향연을 펼친다. 이 책에서 문성원 교수(부산대 철학과)는 철학의 현황과 지평을 보여주기 위해, 구보 씨라는 캐릭터를 철학자로 되살려냈다. 저자는 구보 씨를 통해 벌거벗음의 사유를 선보인다. 그것은, 오늘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너머를 지시하고자 하는 사유의 몸짓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벌거벗음, 뱀파이어, 크기와 소통, 동물과 인간 등 현대 철학의 독특한 영역을 거침없이 횡단하며, 유쾌한 생각의 담화들을 펼쳐보인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개성 있는 인물이었던 ‘구보 씨’를 다시 등장시켰다. 구보 씨는 처음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인 박태원에 의해 등장했을 때부터, 소시민이자 지식인의 표상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최인훈의 ‘구보’도, 1990년대 주인석의 ‘구보’도, 시대를 걱정하는 반성적인 지식인이었다. ‘구보 씨’만큼 사색적이고 철학적이었던 사람도 찾기 힘들다고 저자는 말한다. 철학자 ‘구보 씨’는 저자의 생각을 대변하면서도 현실 공간이 아닌 가상현실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체험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철학의 대작들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철학을 논의하는 경우가 많다. 문성원 교수도 어려운 내용을 딱딱하게 하지 않고, 쉬운 이야기를 경쾌하게 하기 위한 방식으로 ‘구보 씨’를 철학자로 등장시켜 그의 연인인 Y와의 담화를 통해, 세상의 온갖 실재적인 것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다.

문성원 교수는 전작 <해체와 윤리> <배제의 배제와 환대> 등에서 해체의 철학과 윤리의 철학을 접목하는 등 현실 철학의 새로운 조망을 시도한 바 있다. 논증적 글쓰기와 학문적 엄정함으로 철학의 첨예한 핵심 부분만을 연구해 오던 문성원 교수는 이 책에서 논증 대신 진실한 말하기(발본적 파르헤지아) 방식을 택한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 원래 철학은 어려운 학문이다. 아직 분명한 해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하는 게 철학이므로, 어렵고 골치 아플지 모른다. 오늘날 철학자는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며, 개념적 사고를 오래된 직업병처럼 갖고 있다. 철학자 구보 씨의 강의에 대한 평가에도 위와 같은 평이 달렸었다. 문성원 교수가 철학자 구보 씨를 세상 속으로 끄집어내고, 발가벗겨 보고, 진실한 말하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는 이유는, 이제 “쉬운 얘기를 쉽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처지 내지 철학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고투(苦鬪)인 것이다.

 

 

철학의 남은 문제는 무엇일까? 존재 아닌 윤리!

 

문성원 교수는 “철학에서 제1의 과제는 존재가 아니고 윤리”라고 말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지적과 같이 철학에 남은 과제를 가치(규범)의 영역이라고 본다. 과거에는 중요하게 여겨졌던 철학적 문제들 가운데는 이미 해결되었거나 탐구 영역이 다른 분야로 넘겨진 것들도 많다. 이를테면, 우주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은 천체 물리학이나 미립자 물리학이 다룬다. 인식론적 문제들은 심리학과 생리학의 소관이 되었다. 인간 사유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조차 오늘날은 진화심리학이나 뇌생리학 등에서 다루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결국 철학에 남은 것은 이제 사실의 문제들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 규범의 문제들이라고 할 만하다. 사고의 규범을 다루는 논리학, 행위의 규범을 다루는 윤리학이 아직 철학의 고유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오히려 철학의 본래 영역에 가깝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행적을 보여주었다. 그저 사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함을 역설한 책이 <대화편>이다. 문성원 교수 역시 철학자 구보 씨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철학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현실에서 철학에 남아 있는 문제가 바로 가치의 영역, 규범의 영역이라 보기 때문이다.
“가치의 문제는 의미의 문제와 엮여 철학을 겨냥한다. 모름지기 철학자란 여전히 삶의 의미나 세상의 존재 의미 같은 거창한 문제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은 예술이나 종교와 같은 전선에 선다. 물론 예술이나 종교의 무기가 감성이나 신앙인 것과는 달리, 철학의 무기는 사유다.”(253쪽)
결국, 철학자 구보 씨는 철학의 제1의 문제인 가치의 영역과 의미의 영역을 탐색하고자 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세상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 영역이다. 문성원 교수는 이런 주제들을 탐색하기 위해, 현대 철학에서 논의되었던, 생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영역들을 탐색한다. 바로 사유라는 철학의 무기를 가지고 말이다.

문성원 교수는 철학자 구보 씨를 여러 가지 알레고리로 표상하였다. 무엇보다, ‘벌거벗은 누드모델’이 표상하는 바를 보자. 구보 씨는 무엇보다도 ‘누드모델이’ 되기를 꿈꾼다(문성원 교수는 구보 씨의 생각을 빌려 철학자에게 적절한 노후의 부업은 누드모델이 아닐까 하고 쓰고 있다). 이때, 벌거벗음(노출)은 진실한 말하기(발본적 파르헤지아, 푸코의 용어)로 이어지며, 또 벌거벗음은 초월, 즉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철학자 구보 씨가 누드모델을 꿈꾸는 이유는, 진실한 말하기 혹은 초월(새로움의 추구)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또, 구보 씨는 뱀파이어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를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것을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다.
주로 존재와 진리, 의미와 주체 등을 논하는 대신, 이 책에서 철학자 구보 씨는 누드모델, 뱀파이어, 크기, 동물 등 낯선 영역들을 탐색한다. 그렇지만, 조르조 아감벤이나 질 들뢰즈의 논의에서 진행된 이러한 주제들이 생소하지만 사소한 것은 아니다. 아감벤식으로 보면 벌거벗음의 사유, 들뢰즈식으로 보면 뱀파이어의 사유, 스티븐 제이 굴드식으로 보면 크기의 사유이다. 또, 동물과 인간성, 식육과 채식에 대한 사유도 빼놓을 수 없다.
문성원 교수는 유쾌한 상상력으로 철학자 구보 씨의 벌거벗은 사유를 펼쳐 보여, 세상에 철학의 쓴 소리를 내뱉고자 한다.

 

 

벌거벗음의 사유, 유쾌한 상상력으로
‘돈의 맛’ 아는 세상에 철학의 쓴 소리를 내뱉다!

 

구보 씨, 벌거벗다!
구보 씨가 탐색하는 첫 번째 영역은 벌거벗음이다. 구보 씨가 생뚱맞게 누드모델이 되겠다고 꿈꾸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옷을 입는 것은 인위이고 과잉이다. 히피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하지 않다. “오늘날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라고 구보 씨는 본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 들게 하며, 알몸까지 스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이런 세상에서 구보 씨는 누드모델을 꿈꾼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영화감독)는 “수치심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돌아보라는 얘기다. 그래서 수치란 인간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라고 본다. 구보 씨는 디나 알 카심(주디스 버틀러의 제자)이라는 여성 학자와의 가상(꿈) 대화를 통해, 노출(벌거벗음)을 발본적(radical) 파르헤지아(진실한 말하기)라는 미셸 푸코가 말년에 자주 썼던 용어로 풀이하고 있다. 이것을 ‘노출’과 연관 지으면, 스스로를 과감히 드러내는 것, 자신의 박탈당한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형성하는 능동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적나라한 노출은 자기 성찰의 조건이 될 것”이고 “생각으로만 하는 성찰이 아닌 삶으로 꾸려지는 성찰”이 될 것이다. 이후의 구보 씨와 디나 알 카심의 담화를 통해, 노출은 말하기와, 파르헤지아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구보 씨는, 벌거벗음을 초월과 연관짓는다. 옷을 입는 것은 현재의 차원을 지키는 것이고, 벌거벗음은 현존의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다.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것을 준비한다. 만일 새로움과의 관계가 고갈된다면 그것은 생명이 다함을, 즉 죽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새로움의 추구를 지속해야 한다. 구보 씨가 누드모델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이런 면에 대한 고려가 있었던 것이다.

 

구보 씨, 소통하다!
구보 씨는 소통을 생각한다. 소통 부재의 사회가 돼버린 작금의 현실 때문이다. 정치나 정권의 차원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이 어렵다. 진정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라는 막연한 것이었을까?
구보 씨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한 존 그레이(『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의 논의에서 시작해 본다. 자연은 인간을 지푸라기 개(추구, 芻狗)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겸손함을 깨우치라는 얘기다. 자연과의 소통은 자연을 매개로 한 인간의 소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구보 씨는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는 맑스식의 발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윤구병 선생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명제는 ‘만드는 문명’의 소산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만드는 문명’이 한창이지만,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은 이미 진부해졌다. 현대 철학의 주요 흐름이 이 만드는 문명의 자기 폐쇄성을 공격해 온 지도 오래다. ‘만드는 문명’은 ‘기르는 문명’을 압도하고 잡아먹었다. 농작물도 가축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이 생산과정에 종속되어, 그 수단의 일부로 취급받는다. 소통은 그저 만들기의 효율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현대 철학은 이런 생산의 모델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모든 폐쇄적 체계는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애를 써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환경 문제(원전 등)를 단순히 관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잘못일 것이다. 결국 철학의 문제고, 현실적으로는 원전과 같은 생산물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결국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의존해 산다. 자연과 우리 문명의 비대칭성을, 자연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이고,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는 소통방식이라고 구보 씨는 덧붙인다.

 

구보 씨, 뱀파이어가 되다!
구보 씨의 세 번째 탐구 영역은 뱀파이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물론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한다. 돈은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것을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다.
저자는 뱀파이어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대비시키기 위해, 이와 관련된 문학, 예술 작품들을 동원한다. 예를 들면, 들뢰즈의 『카프카』에서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 그리고 영화 「박쥐」나 「렛미인」 , 그리고 <나꼼수>를 들어, 뱀파이어의 여러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유비시킨다.

구보 씨는 먼저 ‘흡혈’의 개념을 연결시킨다. 질 들뢰즈는 뱀파이어를 철학적 논의에 끼워 넣은 보기 드문 철학자이다. 들뢰즈는 펠릭스 가타리와 같이 쓴 『카프카』라는 책에서, ‘흡혈’의 개념을 들었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카프카와 들뢰즈와 K를 거치는 인연을 통해 구보 씨에게 이른 셈이다.
“펠리체와의 관계에서 카프카가 두려워한 건 무엇보다 결혼이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육욕의 관계고.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천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어. 그러나 정작 만난 건 몇 번뿐이라구. 그리고 두 번이나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하거든. 나는 들뢰즈가 카프카의 편지를 흡혈과 관련지은 건 탁월하다고 생각해. 육식 동물에 대한 채식주의자의 흡혈. 이건 세상에 대한 카프카의 관계를 잘 형상화하고 있거든. 카프카는 세상의 살을 뜯어 삼킬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기에는 이 현실이 너무 탐욕적이고 맹목적이며 공포스러웠던 거지. 그래서 그는 항상 출구를 꿈꾸면서 외설적 세상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흡혈을 하는 방식을 택했던 셈이지. 너 혹시 우리가 어렸을 때 추송웅이 공연했던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을 기억해? 최근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 나온 추상미가 그 딸이라구. 뭐, 몰라? 하여튼 너는 디테일에 문제가 있어. 어쨌든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이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잖아. 거기서 카프카는 원숭이의 입을 빌려 말하지. 그 대산 알지? ‘저는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구를 찾았을 뿐입니다.’ 카프카가 흡혈의 에너지로 연명하려 한 건 자기의 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면 탈주하기 위해서라구.”(113쪽)

또, 뱀파이어는 경계 외적 존재이다. 하지만 체제 내적 관점에서 보아서 그렇다. 세상이 선이라면, 뱀파이어 같은 괴물은 악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일종의 체제 내 수법과 같다. 말이 막히면 말 많다고 내친다. 또 말 많은 놈은 빨갱이라고 하는 식이다. 예컨대 <나꼼수>의 경우, 일종의 내화(內化)한 뱀파이어의 모습일지 모른다. ‘쫄지 마’라는 구호는 내화한 뱀파이어의 증식 수단인 셈이다.

뱀파이어는 욕망과 초월의 키메라다. 영화 「박쥐」를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는 구보 씨는, 욕망이 지배하는 수평적 공간의 세계와 가치가 만드는 상승과 하강의 깊이가 나란히 간다고 생각한다. 내재와 초월은 부딪혀 얽히지만,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한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가의 문제는 아니다. 카르페 디엠의 쾌락과 영원성의 약속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박찬욱이 내놓은 답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고 구보 씨는 생각한다. 그것은 낡은 구두의 이미지로 잘 드러나는 사랑이다.

뱀파이어는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영화 「렛미인」에서 엘리와 같은 뱀파이어도 그렇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못하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어둠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장치다. 우리는 뜻대로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찾고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대가가 따를 수 있음을 어렴풋하게 예감한다. 구보 씨는 “뜻이 여럿인 세상을 뜻대로 사는 손쉽고 안락한 길은 없지 않을까.”하고 덧붙인다.

 

구보 씨, 크기를 생각하다
구보 씨는 사회적 크기에 대해서 사유한다.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100여 명 정도, 많아야 200명이 못 되는 규모의 집단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제 아무리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백 명 남짓이다. 군대로 따지면 중대 규모의 집단이 정서적 교감을 지니고 가장 큰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 단위이다. 그런데 집단이 이 크기를 넘어서면 서로 속속들이 알기도 어렵고 정서적으로 일체감을 느끼기도 곤란해진다. 직접적인 접촉으로 유지될 수 있는 집단의 크기가 생래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삶을 꾸려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마음과 사회 환경, 심정과 사회 조직 사이에 괴리가 생겨난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무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령 일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관계하는 일차적인 집단의 크기는 백여 명 남짓이다. 물론 각각의 사람들이 관계하는 일차 집단은 서로 같지 않게 중첩된다. 그러나 이런 중첩적인 관계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퍼져가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틈새들을 따라 서로의 간극은 크게 벌어지며 집단들끼리의 엮임도 쉽게 적대적인 선들로 균열된다. 심정적 집단의 크기와 실제의 사회적 관계로 얽힌 집단의 크기 사이에서 온갖 문제들이 생겨난다.”(189~190쪽)
이 점은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자유주의냐 공동체주의냐를 나누는 차이도 여기서 나타난다. 구보 씨는 자유주의자들이 이런 문제를 도외시해 왔고, 인간을 일종의 레고 조각처럼 보고 필요에 따라 이어다 붙이면 어떤 규모의 어떤 사회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왔다고 비판한다. 공동체 단위에 대한, 즉 코뮌 단위에 대한 생각이 없다.

구보 씨는 생물의 크기에 대해 생각한다. 구보 씨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에 실린 ‘크기와 형태’라는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

언젠가 나는 뉴욕 시의 어느 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소녀 둘이 개의 크기를 따지고 있었다. 한쪽이 물었다. “개가 코끼리만큼 자랄 수 있을까?” 다른 아이가 대꾸했다. “아니야. 코끼리만큼 커지면 모양이 코끼리 같을 거야.” 정곡을 찌른 대답이었다.

지상의 동물들은 일정한 크기를 넘어서면 형태상의 제약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거미나 벌이 일정 정도 이상 커지면 중력을 이겨낼 수 없다. 대왕오징어나 고래처럼 거대한 생물은 중력의 부담이 적은 물 속에서 산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꼭 크고 복잡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구보 씨는 본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이 이 지구의 지배적인 생물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적인 편견이라는 것이다. 굳이 지구에 주인인 생물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박테리아 같은 종류다.

구보 씨는 먹는 것과 크기를 연관시킨다. 먹는 행위는 파괴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먹는 일은 내가 아닌 것들을 부수고 찢어서 나의 일부로 재구성해 내는 절차다. 철학적으로 풀자면, 타자의 해체와 동일화가 먹는 행위의 목표다.
물론 먹는 일은 중요하다. 먹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키우고 유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라는 포이어바흐의 말은 이런 의존성을 잘 드러내 준다.

 

 


저자 소개
문 성 원 文晟源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했고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경기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문화철학, 역사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철학의 시추』(백의, 1999), 『배제의 배제와 환대』(동녘, 2000), 『해체와 윤리』(그린비, 2012) 등의 책을 썼고, 철학적 사유가 오늘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를 꾸준히 모색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는 철학 단체의 웹진에 2010년 봄부터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해 왔는데, 이번에 그 글들을 묶어 책으로 내게 되었다.


 

 

 

책 속으로

누드모델을 꿈꾸는 구보 씨의 철학 강좌

 

▩ 구보 씨, 누드모델을 꿈꾸다


“음냐, Y야, 초월은 뭐 그렇게 거창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지. 초월이란 말이 원래 그런 거잖아. 초월(超越), 넘어서 건너가는 것.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런 걸 준비한다는 얘기지. 그래서 벌거벗음은 생명의 견지에서 보면 에로틱한 거야.”(59쪽)

 

▩ 구보 씨, 소통을 말하다


 ‘만드는 문명’은 ‘기르는 문명’을 압도하고 잡아먹었다. 이제는 농작물도 가축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이 생산과정에 종속되어, 그 수단의 일부로 취급받는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이런 모델을 잘 따르는 모범적인 사례다. 만드는 공정, 그것도 반성도 검증도 결여된 급속한 만들기의 공정을 통해 온 땅과 물을 덮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소통은 이런 만들기의 효율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것으로 대접받는다.(77쪽)

 

▩ 구보 씨, 뱀파이어가 되다


“어쨌든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이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잖아. 거기서 카프카는 원숭이의 입을 빌려 말하지. 그 대산 알지? ‘저는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구를 찾았을 뿐입니다.’ 카프카가 흡혈의 에너지로 연명하려 한 건 자기의 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면 탈주하기 위해서라구.”(113쪽)

 

▩ 구보 씨, 크기를 생각하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무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령 일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관계하는 일차적인 집단의 크기는 백여 명 남짓이다. 물론 각각의 사람들이 관계하는 일차 집단은 서로 같지 않게 중첩된다. 그러나 이런 중첩적인 관계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퍼져가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틈새들을 따라 서로의 간극은 크게 벌어지며 집단들끼리의 엮임도 쉽게 적대적인 선들로 균열된다. 심정적 집단의 크기와 실제의 사회적 관계로 얽힌 집단의 크기 사이에서 온갖 문제들이 생겨난다.(189~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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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그지기입니다.

 

알렙 책 통신 최신호가 발행되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신간>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의 편집후기, 김운회 선생님의 저서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 오마이뉴스 인터뷰 기사 등이 실렸습니다.

 

이 통신지는 알라딘서점에서 인문사회 도서를 구입하면 우연히 받아보실 수 있으며,

정독도서관, 아람누리도서관, 구로도서관, 광진도서관 등에서 우연히 발견하실 수도 있습니다.

 

파일로 첨부하였으니, 웹상에서 보시고, 널리 배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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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

생태적 지혜를 위한 철학 산책

 

신승철 지음|280쪽|13,000원

2013년 8월 1일|ISBN 978-89-97779-27-7 03100

 

분야 : 인문/철학/사회철학/생태철학

 

 

 

 

 

- 성미산 마을 공동체에 대한 최초의 철학적 접근.

- 녹색과 적색은 만나야 한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적 지혜다!

- 대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마을살이, 집단 지성, 협동조합, 생태 운동…… 공동체의 관계망은 생태계와 닮았다!!

 

 

 

책 소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태적 지혜!

 

 

∥ 지율스님의 100일 단식처럼, 한 사람의 혁명은 전체 네트워크와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원천이 된다.

∥ 천 명의 사람이 모이면 천 개의 마을이 생긴다.

∥ 따로 떨어진 100그루 나무보다 숲을 이루는 50그루의 나무가 더 강한 항상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 생태계의 시너지 효과다!

∥ 지금 한국 사회에는, 공동체의 관계망에서 싹튼 <생태적 지혜>가 소수자의 욕망, 마을 공동체, 생명권 등과 어우러지는, 미래 진행형의 사유가 필요하다.

 

 

 

‘생태적 지혜를 위한 철학 산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생명 위기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대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다루었다. 저자는, 201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서 열망처럼 일어난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 소수자의 욕망, 생태 운동 등 미시 영역에 대해서 본격적인 사상적 탐색을 하고자 하였다.

저자가 던진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서울시 마을 만들기 사업을 철학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까? 도시 속의 작은 마을 공동체인 성미산 마을 공동체와 어떻게 접속할 수 있을까? 성미산 마을 공동체의 관계망은 생태계와 닮았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할까? 집단 지성과 생태적 지혜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즉, 저자는 공동체의 관계망 속에서 생태적 지혜가 어떻게 발아되는지, 우리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특이점이 생산되고, 어떻게 배치와 재배치가 이루어져서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주목한다. 저자 신승철은 2012년 총선 시기에 녹색당 생명권 정책의 초안을 쓴 이력을 갖고 있다. 그해에는 <성미산 마을 연구 조사 사업>에도 참여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러한 미시 영역에서의 변화의 조짐을 사상적으로 조망해 보고자 했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을 묶어서 책으로 내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최근에 대중의 관심과 열망이 한데 모아져 있는 마을 공동체와 협동조합 등에 대한 철학적 탐색의 첫 발자국을 내딛는 작업이다.

 

 

“녹색과 적색이 만나야 하는 이유”

생명 위기 시대에 우리는 어떤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가?

 

 

성장주의와 개발주의 덕분에 이제 먹고살 만해졌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더 이상 성장주의로는 생명, 생태, 환경을 지켜낼 수가 없다. 생명 위기 시대인 것이다. 특히 적색으로 불리는 전통적 좌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생산력주의라는 성장주의를 기반으로 일자리와 복지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한계가 지구의 유한성으로 인해 분명해지고 생태적인 위기가 적신호를 보이고 있는 요즘이야말로, 이러한 좌파의 관점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관계의 성숙을 추구하는 발전(development)의 노선과 외연적이고 실물적인 개발을 추구하는 성장(growth)의 노선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은 필수적이다.

이 책은, 공동체의 관계망은 생태계와 닮았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나고 있는가? 협동조합 운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부엌과 같은 미시 공간에서 어떤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다룬다. 이 모든 개념의 구도는, 프랑스에서 녹색당을 만들기 위해서 13년 동안 활동했고, 지방 의회 생태파 마지막 후보로 나섰던 펠릭스 가타리의 사상에 기대고 있다. 저자는 가타리의 욕망의 미시정치론과 『세 가지 생태학』에서 배태된 생태 철학에 기반하여, 주체성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대안은 어떻게 가능하며 공동체의 관계망에서 어떤 특이점을 생산할 것인지를 탐색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미시 정치는, 세상을 바꾸려면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탈피하여, 기계 부품들의 연결처럼 이루어진 사회 시스템 속에서 작은 기계 부품 하나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전체 시스템을 고장 내거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에 주목한다. 미시 정치는 특이성 생산이 만든 정치의 또 하나의 이름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가능케 한 것은, 미시 정치가 이루어지는 성미산 마을 공동체와 접속했던 경험 때문이었고, 저자는 “도시 속의 작은 마을 공동체가 만들어낸 아주 참신하고 색다른 관계망을 들여다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최근 협동조합 운동의 발흥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자극을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공통의 것에 매료되어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협동조합의 관계망의 단상을 정리해 보고 싶은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그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생태적 지혜”에 주목한다. 저자가 내린 결론은,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생태적 지혜가 아니라, 관계의 밖에서 사유하는 철학적 전통은 그것의 역동적인 내부 원리를 단순화․평면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세상을 더 살기 위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어떤 관계에 주목해야 할까(대안)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저자의 탐색은, “대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펠릭스 가타리의 󰡔카오스 모제󰡕에 대한 요약과 논평을 담고 있는, 「카오스모제의 생태학-미학」이라는 글은 공동체, 마을, 협동조합, 생태운동 등을 하는 활동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 활동 지침서이자 요약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 글의 주제는 “주체성” 생산이며, 어떻게 우리 사이에서 색다른 주체성이 생산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응답의 성격이다. 저자는 특히 가타리의 카오스모제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왔다. 카오스모제(chosmose=chaos[혼돈]+cosmos[질서]+osmose[상호침투])는 생태계가 보여주는 혼돈 속의 질서라고 할 수 있으며,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프랙털 차원을 지도 그리기처럼 개념으로 그려내는 작업이다. 이 카오스모제는 욕망, 정동, 무의식과 비기표적 기호의 흐름, 공동체적 관계망, 네트워크와 공동체의 상호작용 속에서 대안 사회를 위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주체성을 생산해 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생태적 지혜를 위한 첫 발자국들을 다룬 글에서 저자는, 우리 자신을 만드는 생태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또한 프랑스에서의 탈핵 운동에 주목하면서, 적색과 녹색이 만나는 지점이 생태적 지혜를 위한 첫 발자국이라 본다.

 

 

책의 구성과 요약

녹색과 접속하는 사유의 경로

 

 

제1부 마을살이의 철학

녹색과 적색은 만나야 한다. 이런 생각은 펠릭스 가타리의 실천에서 중요한 명제였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적색이 성장주의와 개발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미시 정치의 영역에서는 모든 해방적 행동이 미래로 미뤄질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만들어내야 할 특이성 생산의 영역으로 사고된다.

미시 정치가 새로운 화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사랑과 욕망의 힘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기획을 가지고 현실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기존 변혁 운동은 구조, 이성, 규범, 제도 등의 변화만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면서 우리가 숨 쉬고 느끼고 교감하는 모든 행위 양식과 변혁을 분리시켰다. 그러나 미시 정치는 색다른 삶을 창조하는 것이 사랑과 욕망으로부터 시작되며 이를 통해 특이성 생산이 이루어지며, 이것이 전체 네트워크나 공동체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의 시작이라고 얘기한다.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의 세계 재창조가 가능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유형의 물리적 현실과 무형의 가상적 현실이 함께 공존하는 유-무형의 현실이며,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존재하는 배치(arrangement, 配置)이다. 현실은 배치될 수 있고 재배치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체성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결코 구조와 같이 불변으로 존재하는 틀이 아니다. 그래서 해방은 사회 변혁 이후의 시간으로 미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내재적인 과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미시 정치를 통해서 흐름ㆍ관계망ㆍ상호작용을 바꾸는 것이 바로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제2부 배치와 관계망

제2부의 글들은 우리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SNS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1장)라는 장에서는,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마투라나/바렐라) 이론과 소셜 미디어를 연결시켜 그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자 하였고, 이어지는 “누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2장)라는 장에서는, 전자 감시 사회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시도하였다.

저자는, 3장과 4장을 통해, “우리의 관계 속에서 무엇이 생산될 수 있는가?”“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떤 관계를 만들어야 할까?”를 묻는다. 각각 협동조합의 철학과, 배치 예술을 논하기 위해 쓰인 글이다. 저자는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생태적 지혜가 아니라, 관계의 밖에서 사유하는 철학적 전통은 그것의 역동적인 내부 원리를 평면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또한, 2012년에 문화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펠릭스 가타리가 핵심 개념으로 사용했던 배치(agencement)라는 개념이 주는 실천적인 효과에 주목하면서, ‘배치 예술’이라는 장르를 말할 정도로 논의가 활성화된 바 있다. 배치는 구조와 같은 불변항이 아니라, 찢어지거나 수정되거나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국지적이고 유한한 것이다. 그렇지만 활동가들이 영원하게 지속될 구조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성좌에 심원한 변화를 초래하면서도 유한하여 언젠가 사라질 배치를 만들어보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혁명을 영원한 구조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국가 외부에 있으면서도 가장 국가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반면 자율성에 기반하여 사회를 점차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은 제도와 비제도를 넘나들며, 집합적/기계적 배치 속에서 판단하고 움직인다. 이러한 활동은, 구조와 재현의 정치를 넘어 자율적 배치와 관계망을 만들어보려는 구상인 것이다.

 

 

제3부 생명과 욕망의 미시 정치

3부에서는 “대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통해, 펠릭스 가타리의 카오스모제 사상의 핵심을 전달해 보고자 했다. 생활, 생태, 생명의 문제와 위기의 대안으로 사고되는 공동체, 협동조합, 마을 등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펠릭스 가타리의 사상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노동 해방 이후에 사회 해방, 그 후에 인간 해방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미시 정치의 영역에서는 모든 해방적 행동이 미래로 미뤄질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만들어내야 할 특이성 생산의 영역으로 사고된다. 생활, 생태, 생명은 서로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어서 생태계 보존을 위해서 탄소 소비적인 삶의 무의식적 배치를 바꾸어야 하고, 다른 생각과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의 세상을 바꾼다는 기획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의 문제에 응답하여야 하며, 거대 계획뿐만 아니라 삶의 미시적인 영역에서의 변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생태학적 주체성은 주체성이 창조되고 새로운 양식의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 주지하며, 삶의 위기로서 다가오는 생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감수성과 인식, 지각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생태적 지혜가 만들어냈던 생명 현상처럼 섬광과 같은 변화가 가능하며, 그것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차원의 특이한 주체성의 생산이 가능하며, 그것이 문명의 위기와 생태 위기 시점에서 새로운 변화의 물꼬를 틀 것이라는 점을 전망한다. 그것은 카오스모제는 Chaos(혼돈)+Cosmos(질서)+osmose(상호 침투)의 결합어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 생태, 생명을 의미한다.

또 4장 ‘욕망가치론’에서는 68 혁명이 문제제기 했던,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욕망을 갖고 있는 소수자와 민중의 존엄성과 대안적 가치를 담고 있다. 욕망자본론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재독해와 새로운 해석은 노동가치의 패러다임을 벗어나 욕망가치라는 패러다임을 등장시킨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 역시 프랑스 녹색당의 펠릭스 가타리이다.

 

 

제4부 생태적 지혜를 위한 첫 발자국들

저자는 4부에서 우리에게 맞는, 우리 자신을 만드는 생태 운동을 하자고 제안한다. 가타리의 생태는 자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회 더 나아가 마음까지 생태의 원리가 적용된다. 마음도 사회도 자연도 생태를 이룬다는 생각은 어렵게 느껴지는 개념이다. 그러나 네트워크를 생각해 보면 금방 그림의 구도를 그릴 수 있다. 생태계는 마치 네트워크처럼 직조되고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나 주위에서 끊임없이 특이한 것을 생산하는 창조적인 관계망이다. 이러한 ‘생태적 지혜’의 원리를 가타리는 ‘주체성 생산’이라는 개념으로 언급한다.

사회적 관계망에서는 욕망과 물질, 에너지가 순환된다. 부엌조차도 오페라의 공간이다. 물의 흐름, 불의 흐름, 음식물의 흐름, 쓰레기의 흐름이 지나가는 곳이다. 그 흐름이 자본주의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은 특이한 움직임이 만들어질 때이다. 특이한 움직임은 관계망에 색다른 에너지와 힘을 전달한다. 그러면서 이전 관계망과 완전히 다른 관계망으로 만들어버린다. 네트워크에서 별난 사람들이 만나면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그것에 전염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생명 현상 전부는 특이한 것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특이함이 공동체와 네트워크에서 나타나는 순간은 생명의 들꽃이 작렬하며 발화하는 순간처럼 혁명의 순간이다. 네트워크와 공동체의 연결망은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다. 그래서 분자 혁명과 같이 색다른 주체성의 움직임이 앞으로 공동체 전부의 행로를 결정한다. 아주 미세한 영역에서의 변화는 전체 네트워크와 공동체에서 전대미문의 변화를 촉발할 수 있다. 그러한 섬광과 같은 변화를 위해서 생태적 지혜를 모으자는 것이다.

 

 

 

 

저자 소개

 

신승철

 

2010년에 동국대에서 「펠릭스 가타리의 분열분석과 미시정치」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1년부터 동물보호무크 《숨》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2012년 총선 시기에 녹색당 생명권 정책의 초안을 썼으며, 그해에 <성미산 마을 연구 조사 사업>에도 참여했다. 현재 동국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철학공방 별난> 공동 대표, 동물보호교육센터 추진위원, 가톨릭 생명윤리연구소 전문연구위원, 경희대 약학대학 실험동물윤리위원, 한국환경철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욕망공화국』(2008), 『에코소피』(2008), 『대한민국 욕망보고서』(2011), 『펠릭스 가타리의 생태철학』(2011), 『사랑과 욕망의 영토』(2011), 『분열과 혁명의 영토』(2011), 『루저의 심리학』(2012), 『식탁 위의 철학』(2012), 『눈물 닦고 스피노자』(2012)가 있으며, 공역서로는 『사이버-맑스』(2003)가 있다.

 

 

 

 

차례

 

여는 글 : 녹색과 적색이 만나야 하는 이유?

 

제1부 마을살이의 철학

1장 부엌에도 정치가 있다고?—미시 정치로 대안 만들기

2장 마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마을과 단독성

3장 공동체의 관계망은 생태계와 닮아 있다—성미산 마을과 공동체 관계망

 

제2부 배치와 관계망, 그 희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1장 SNS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오토포이에시스와 소셜 미디어

2장 누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전자감시사회에 대한 철학적 고찰

3장 우리의 관계 속에서 무엇이 생산될까?—협동조합의 철학

4장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야 할까?—배치와 예술 생산

 

제3부 생명과 욕망의 미시 정치

1장 멸치국물은 어쩔 건데?—채식의 시작, 비덩의 변명

2장 우리의 밥상은 먼 나라의 공장식 축사와 연결되어 있다—세계화와 공장식 축산

3장 대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카오스모제의 생태학-미학

4장 우리의 욕망에도 가치가 있다면?—욕망가치론

 

제4부 생태적 지혜를 위한 첫 발자국들

1장 우리 자신을 만드는 생태운동을 시작하자!—아주 특이한 책 『세 가지 생태학』

2장 적색과 녹색이 만나야 하는 이유는?—프랑스 녹색당과 탈핵

 

참고 문헌

 

 

 

 

 

 

본문 속으로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

적색은 녹색과 만나야 한다. 이런 생각은 가타리의 실천에서 중요한 명제였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적색이 성장주의와 개발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적색은 발전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생명ㆍ아이ㆍ소수자 등과 만나야 한다. 그랬을 때 성인-백인-자국민-인간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적색의 진보의 내용이 자본주의적 진보로부터 벗어나 색다른 대안을 제시하려면 녹색과의 만남은 필수적이다. 한국 사회의 진보 진영에서도 녹색과의 만남을 중시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고 들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지만 그것은 적색과 녹색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 258쪽

 

 

이 책은 펠릭스 가타리의 독특한 생태 사상에 기반해서 생명 위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다룹니다. 먼저 지율스님의 100일 단식처럼, 네트워크나 생태계에서 분자 혁명이 전체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합니다. 또한 ‘천 명의 사람이 모이면 천 개의 마을이 생긴다’는 슬로건은 마을공동체지원센터의 홈페이지에 있는 아포리즘으로, 마을 만들기가 하나의 모델에 수렴되는 방식이 아니라, 각기 다른 특이성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성되어야 하는 메타모델이라는 점을 말합니다. 특히 생태계의 시너지 효과는 따로 떨어진 100그루 나무보다 연결되어 숲을 구성한 50그루 나무가 더 강한 항상성을 갖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한 공동체의 관계망 속에서 생태적 지혜가 발아되어야지 관계의 외부에서 관찰자나 감시자처럼 진리를 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이 모든 개념의 구도는, 프랑스에서 녹색당을 만들기 위해서 13년 동안 활동했고 지방 의회 생태파 마지막 후보로 나섰던 펠릭스 가타리의 사상에 기대고 있습니다. ••<여는 글> 중에서

 

 

미시 정치는 재현의 정치나 문화적 구경꾼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관계망을 넘어서 가장 아마추어적이며 특이점으로서 존재하는 주변적인 풍경을 조립한다. 아이, 동물, 식물, 광인, 장애인, 노인, 여성, 이주민 등이 이러한 특이점으로서 등장하여 공동체적 관계망을 혁신시킨다. 공동체의 순환과 재생의 흐름이 특이성 생산과 관계망 창발의 절대적인 흐름이 되어 자본과 국가를 이용(착취)하도록 만드는 것이 미시 정치의 목적이다. 미친 선비의 진취성은 미시 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역 주민들이 생성과 창조, 특이성 생산의 순간을 만들 때마다 미친 선비의 진취성, 즉 미시 정치는 다시 언급될 수밖에 없다. 30~31쪽

 

성미산 마을이 성립 가능했던 것은 나와 너 사이에서의 관계 맺기와 정동, 무의식, 욕망이 흐르게 만들고, 자본주의적 문화의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하고, 네 것과 내 것을 나누는 소유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공유 자산을 만들어 갔기 때문이다. 그것의 출발점은 너와 나의 구분을 넘어선 그 사이에서의 공감과 소통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출발점에서부터 마을은 시작한다. 내가 나를 버리고 나를 내려놓고 너와 가까이 가려는 것에서부터 작은 공동체가 출발한다는 점이 성미산 마을에서 발견되며, 그것을 토대로 다양한 일, 사업, 놀이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계의 위력은 어떤 고정관념으로부터도 벗어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늘 새로운 사람들로 다시 만들어주고 세상을 재창조하게끔 하기 때문일 것이다. 67쪽

 

 

오토포이에시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말을 하는가?” 커뮤니케이션이 자기를 생산해 내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루만(Niklas Luhmann)이었다. 루만은 ‘오토포이에시스’라는 개념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분석한다.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J. Varela)가 언급한 생명 현상으로서의 오토포이에시스, 다시 말해 ‘생명은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주로 활동한다’는 기본적인 발상은 소셜 미디어 환경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는 autos(자기)와 poiein(생산하다, 창조하다)의 결합어로서 생명체에 있어서 대부분의 에너지와 영양소가 자기 자신의 세포, 살, 뼈, 피부를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오토포이에시스 이론을 계승한 루만은 사회 시스템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이것을 확장하였다. 루만에 따르면, 웹상에서든 현실에서든 우리가 말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자신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73쪽

 

 

협동조합을 관계망 내부에서 사유한다면 생태적 지혜를 배태할 것이지만, 관계 외부에서 이를 분석하려고만 한다면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플라톤적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가치의 내부, 관계의 내부 속에서 협동조합을 사유하기 위해서 관계망 자체에 대한 탐구를 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내포적 발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협동조합을 설명할 수 있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유한한 자원을 순환시키고 대안적 가치를 유통시키면서 어떻게 관계가 성숙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의 모델, 표상이나 의미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래서 더욱더 너와 나 사이에서 내 것도 아닌 네 것도 아닌 것을 만드는 관계의 흐름에 대해서 주목하게 된다. 109쪽

 

 

제까지의 세상을 바꾼다는 기획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문제에 응답하여야 하며, 거대 계획뿐만 아니라 삶의 미시적인 영역에서의 변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생태학적 주체성은 주체성이 창조되고 새로운 양식의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 주지하며, 삶의 위기로서 다가오는 생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감수성과 인식, 지각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생태적 지혜가 만들어냈던 생명 현상처럼 섬광과 같은 변화가 가능하며, 그것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차원의 특이한 주체성의 생산이 가능하며, 그것이 문명의 위기와 생태 위기 시점에서 새로운 변화의 물꼬를 틀 것이라는 점을 전망한다. 그것은 카오스모제는 Chaos(혼돈)+Cosmos(질서)+osmose(상호 침투)의 결합어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 생태, 생명을 의미한다. 이 카오스모제는 욕망, 정동, 무의식과 비기표적 기호의 흐름, 공동체적 관계망, 네트워크와 공동체의 상호작용 속에서 대안 사회를 위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주체성을 생산해 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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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청춘의 고전> 카페지기입니다.


프레시안, 한철연, 알렙, 정독도서관, 알라딘이 공동주최하는 이 프로그램은 고전과 철학, 음악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강연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정독도서관측의 적극 후원과 배려로 청중들께는 무료로 들으실 수 있도록 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좀 일찍 서둘러 등록하셔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2강 접수도 마감됐습니다만, 당일 접수/등록이 가능하니 참여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수요일 강연 때에는 음악 감상 시간이 있습니다. 라율, 최윤정의 바이올린과, 최계주의 피아노로 베토벤 협주곡이 연주됩니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음악 감상>♪♪♪


정독도서관에서 진행 중인 <청춘의 고전>은 철학과 음악의 연관성을 탐색하여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돕는 강연입니다.

2강(2013.1.23)은 ‘21세기! 왜 아직도 베토벤인가’ 라는 주제로 강연이 이루어지는 데, 강연에 앞서 재능기부자의 연주로 베토벤 음악을 감상하고, 이로써 강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다음과 같이 <인문학과 함께하는 음악감상>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가. 일시: 2013.1.23(수) 19:00

    나. 연주자: 최윤정(바이올린), 최계주(피아노)

    다. 연주곡목: The Romance for Violin and Piano No. 2 in F major, Op.50     - Ludwig van Beethoven

    라. 연주시간: 10여분

    마. 장소: 시청각실

    바. 대상: 청춘의 고전 수강자 및 관심 있는 누구나

    사. 기타: 연주시간은 약 10분 가량이며, 연주 시작 후 입장이 불가하니 시간에 맞춰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아. 문의: 문화활동지원과 사무실(2011-5758)

 

정독도서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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