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자본론 - 욕망의 눈으로 마르크스 자본론 다시 읽기
신승철 지음 / 알렙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욕망 자본론

욕망의 눈으로 마르크스 자본론 다시 읽기



회계 담론에 빠진 세계 자본주의를 구하라!

 

노동가치론에 기반한 자본론을 욕망가치론으로 새로 읽기

마르크스는 욕망의 자본화와 자본의 욕망화를 읽지 못했다!

 

 

신승철 박사(철학공방 별난 대표)는 작년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를 출간하고 나서, 이 책에서 간략히 소개한 욕망가치에 관해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게 실제 있는 개념이냐며, 이 개념의 효용성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올해 신승철 박사는 생태문화협동조합 달공과 철학공방 별난을 꾸려가면서, 공동체 경제를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소수자의 주체성은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들뢰즈/가타리가 주목한 소수자, 가타리가 제기한 욕망가치에 대한 지난 수년간의 문제의식과 연구들을 모아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글로 책을 엮었다.

마르크스는 욕망(desire) 개념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보고자본론각주에서 필요욕구(need) 이외에는 예외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사실 욕망은 색다른 것을 창조하는 생명 에너지의 흐름이다. 이 책에서는 욕망가치와 기본소득을 연결시키는 색다른 사유의 구축물을 만들고자 했다. ‘욕망의 자본화와 자본의 욕망화라는 색다른 국면을 욕망가치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이 기획은,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에서 다룬 생명 위기 시대에 우리는 어떤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시도이다

책 소개

욕망은 생명 에너지! 소수자의 욕망에 주목하라!!

욕망 자본론소수자와 생명 등이 어떻게 자본주의 가치 질서에 들어와 있으며 공동체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서술한 경제 철학 비평서이다. 저자 신승철이 제시하는 욕망가치론은 노동가치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대대적인 전환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저자는 장기 비상 시대에 접어든 자본주의 경제의 가치 질서가 재편성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가진 가치론의 공백을 아주 색다른 질문과 문제제기를 통해 메워 보고자 시도하고 있다.

저자가 대결하는 영역은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통념화된 노동가치론에 대한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넘나들고 횡단하면서 욕망의 지도 그리기로 그려낼 수 있는 색다른 개념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욕망가치를 공동체 경제, 생태 경제의 색다른 생명 에너지이자 활력으로 여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입장에서 세상을 재창조하고 개념의 지도를 그려냈던 위대한 사상가이지만, 그의 노동가치론에는 커다란 공백이 있다. , 마르크스는 욕망 개념을 자본론각주에서 예외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소수자의 욕망에 기반한 욕망가치설의 단초를 제공한다. 뒤이어 펠릭스 가타리는 분자 혁명이라는 책에서 처음 욕망가치라는 개념을 언급하는데, 신승철의 욕망 자본론은 이 욕망가치론을 토대로 대안경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 하나의 가설이자 시론이다.

 

자본주의는 화석 연료 고갈, 기후변화, 생물 대량 멸종 등 장기 비상 시대로 이미 접어 들어간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기존의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이 아니라, 발전 노선에 주목하게 만드는데, 저자는 발전 노선에서 욕망가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소수자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것이 욕망가치 입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회적 경제에서의 자본의 욕망화와 욕망의 자본화라는 색다른 국면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자본론의 공백인 욕망가치 영역을 통해서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어떻게 초래해야 할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쉽게 말해서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욕망을 가진 소수자들은 그저 수혜적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색다른 관계망을 창발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이 사회를 풍부하게 만들면서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욕망가치론의 핵심적인 명제이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좀 더 간략히 정리하자면, “자본주의 경제는 소수자와 비노동 민중의 욕망가치의 생산성과 창조성에 기반하는 발전 전략’, ‘기본소득’, ‘사회적 경제로 이행하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저자는 스피노자-라이히-칼 폴라니-들뢰즈/가타리-가라타니 고진에 이르는 사랑과 욕망의 정치경제학 노선을 따르고 있다. 특히 가타리가 제기한 욕망가치론을 바탕으로 현대의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이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대안이란, 욕망가치와 기본소득을 연결시키는 색다른 사유의 구축물이다. 저자는 성장(growth)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의 발전(development) 전략을 욕망가치론에 기반해서 재구성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발전 전략이 좌/우파의 공리계를 넘어선, 관계망의 성숙을 추구하는 경제 전략이라는 점에서 욕망가치가 그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읽지 못했던, 욕망가치는 무엇인가?

노동가치론에 기반한 자본론을 욕망가치론으로 새로 읽기

 

욕망가치는 어디서 나온 개념인가? 저자는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알렙, 2013)에서 욕망가치론을 언급했는데, 사람들은 어디에서 나온 개념이냐고 또 실효성이 있냐고 묻기도 했다. 저자는 이 욕망가치론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 다 채워주지 못한 가치론의 빈 곳을 메꿔줄 숨은 열쇠라고 감히 생각한다. 사실 욕망가치론은 펠릭스 가타리의 빛나는 책, 분자 혁명(푸른숲, 1998)의 후반부 5장 기호적 구축물부분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거기에서 가타리는 마르크스가 얘기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이외에도 욕망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욕망가치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의를 욕망과 정동의 강렬한 가치라는 암시적인 말만 하였다. 자본주의 상품 경제를 설명할 때 사람들은 흔히 마르크스의 상품의 이중성에 입각해서 설명하지만, 상품 이외에 존재하는 선물과 호혜의 경제가 상품 질서 내부로 침투해 들어와서 정동과 욕망의 강렬도를 형성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바라보지 못한다. 상품이라는 물건에는 사랑, 정성, 인격이 담겨 있지 않지만, 선물이라는 물건에는 사랑, 정성, 인격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비자본주의 영역인 호혜 경제는 상품의 외부나 경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욕망가치를 형성한다.

욕망가치는 어쩌면 바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당신이 매일 하는 살림이 바로 욕망가치를 생산하는 욕망노동이다. 사실 욕망가치는 여성, 아이, 장애인 등의 소수자가 갖고 있는 욕망의 존엄을 밝히는 가치이기도 하다. 욕망가치는 정동의 흐름, 돌봄이라고 불리는 영역의 흐름이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유통되는 것과 불가분한 관련이 있다. 보통 사회와 공동체에서 돌봄에 대해서 말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수자 되기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공동체에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이 소수자를 부드럽게 감싸고 보살피는 것은, 이미 욕망가치가 공동체의 가치 질서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욕망가치가 굳이 가치론의 영역으로까지 들어와 설명되어야 하냐?” 마르크스가 언급했듯이 상품의 이중성, 유용성으로서의 사용가치와 교환 가능성으로서의 교환가치를 언급하면 과학적으로 자본주의가 해명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 상황에서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만 해결될 수 없는 차원이 새롭게 가치화되었다. , 어떻게 욕망의 차원을 충족하고 욕망의 흐름을 전달하는가의 영역이 그것이다.

 

욕망가치의 실존을 가정하면 공동체 경제의 가치 질서 역시 해명된다. 공동체가 풍부하고 다양해지는 것은 소수자라는 특이점을 통과하면서 돌봄노동이나 정동노동으로 간주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이 발생될 때이다. 소수자에게 되기(becoming)라는 진행형적 과정으로서의 사랑을 투여할 때, 공동체는 생명 에너지와 활력에 넘치게 된다. 이러한 생명 에너지의 흐름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에 따라 나타나는 자본주의 가치 질서의 고정된 의미를 흔든다. 왜냐하면 사랑, 욕망, 정동, 돌봄과 같은 영역은 내가 네가 되는 흐름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 흐름으로 인해 책상은 책상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방식으로 의미화되어 있는 상품의 의미 좌표에서 분열과 흔들림이 생기게 된다. 한편으로 사회적 가치에 가장 충실한 자본이 출현하고,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의 파견자들에 의한 협동조합 등으로 나타나는 자본의 사회화와 사회의 자본화가 나타나는 이유도 흐름의 시너지효과에 대한 탐색에 기반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영역 사이의 명백한 구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교환가치/사용가치와 함께 욕망가치의 영역이 등장한다.

 

욕망가치를 말하면, 아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자본주의의 객관적 가치 질서 외부에 있는 주관적 가치 질서는 경제학에서 논외의 대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서비스 정신노동의 발전 과정을 보면, 감정조차도 노동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감정조차도 노동의 형태로 직조해 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감정의 가치화가 현실화되었다. 이미 자본주의는 주관적 가치 질서라고 여겼던 감정, 욕망, 사랑, 정동, 믿음, 희망, 꿈과 같은 영역으로 가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의 포섭 작용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가치 영역들을 객관적 가치와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투박한 분류가 좌파들에게는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가치의 영역은 자본주의의 내부에서 엄연히 작동하고 있는 가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욕망가치를 생산하는 것을 욕망노동이라고 부른다. 욕망노동은 아이들이 문자와 색채, 음향, 몸짓, 언표 등의 기호를 습득하는 학습노동, 여성의 돌봄과 가사노동, 장애인의 재활과 이동을 위한 정상화노동, 정신질환자가 상담자를 만나서 자신에 대해서 분석하게 되는 분석노동, 다음날 출근하기 위해서 TV를 보며 쉬는 시청각노동 등을 망라할 수 있다. 이렇듯 욕망노동은 이미 가치화되어 있는 영역이며, 실존의 좌표를 획득하고 있다.

 

자본의 상품은 공동체의 선물을 흉내 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마스의 산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코카콜라이다. 산타클로스의 온화하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입힌 코카콜라의 이미지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달콤하게 들어온다. 문제는 우리의 무의식에까지 들어온 자본주의가 이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특이성들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첨단기술사회에서 기계류의 창조와 생산은 이제 특이성을 어떻게 조성하고, 관계 성좌를 어떻게 배치하고, 생각의 경로를 어떻게 개척하는가의 여부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비자본주의 영역에 있는 공동체적 관계망에서 생산되는 생태적 지혜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다. 생태적 지혜는 관계 내부에서 싹트는 지혜이며, 사랑과 욕망의 비표상적인 흐름이 의미 좌표를 흔들 때, 소수자라는 특이점이 공동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때 발생되는 관여적 지성의 산물이다. 이에 따라 생태적 지혜의 필요성과 다양성과 차이의 풍부함은 자본 역시도 말하고 있으며, 공동체를 먹잇감으로 둔 자본이 추구하고 있는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저자 신승철의 욕망 자본론은 기존의 소수자들에 대한 통념에 대대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 소수자들은 특이성 생산을 함으로써 공동체 발전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관계망, 흐름, 상호작용에서 특이점으로서 작동하여 관계를 성숙시키고 발효시켜서 일반지성의 성숙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색다른 사유는 요강기계에 대한 단상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소수자의 욕망이 이 사회의 집단지성의 성숙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충분히 기본소득의 주체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일갈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빠진 3가지 주체성: 아이, 광인, 동물

자본론은 소수의 입장에서 쓰일 수 없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는 아이, 동물, 광인과 같은 소수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읽다 보면 대부분 노동자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주체성이 숨어 있을 뿐이다. 책을 어느 주체성의 시각에서 쓰느냐도 굉장히 중요한데 소수자의 시각에서 쓰이지 않은 자본론은 정상인/성인/백인/남성/노동자들의 주체성의 입장에서 서술된 책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자본론은 왜 소수자 입장에서 쓰일 수 없었을까?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 점에서 출발한다. 소수자의 욕망가치를 말하고, 소수자의 생태적 지혜를 말하고, 소수자의 욕망이 가진 생산성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배제한 주체성으로, 아이, 동물, 광인 등을 대표 사례로 제시한다.

자본론은 자본주의적 주체성 중에서 말하지 않는 공백이 있다. 그래서 욕망 경제의 현존에 대해서 사유할 수 없었다. 욕망 경제에 대한 시도는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계열에서 출발하여 라이히에 의해서 기본적인 구도가 그려지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연구자들은 욕망 경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욕망과 자본의 관계와 욕망가치에 대한 연구는 맥이 끊겨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에서 언급된 기계에 대한 단상이 소수자의 욕망 경제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는 주춧돌로 간주될 수 있는 여지는 풍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단으로 불리는 이 전통은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설득되고 수용될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낮다. 소수자라는 주체성은 자본론의 외부로서 위치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발언이나 목소리에서는 배제되어 왔다. 물론 발전 노선하에서는 소수자들의 욕망가치를 승인하는 역사적인 행동이나 제도가 반짝 나타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노선이 가진 풍부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그것이 수용된 과정은 그리 길지 않다.

사실 자본론의 외부는 자본주의의 외부와 공명하는 바가 있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처럼 근대 초기 사회가 광인들을 바보선으로 추방했듯이 자본주의하에서는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소수자들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들어서 생태적 지혜와 집단지성을 산출하는 주체성으로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펠릭스 가타리로부터 출발한 욕망가치론의 적용과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소수자를 말할 때, 사회적 약자나 양적 소수, 피해자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공동체와 사회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특이점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이 공동체적 관계망의 시너지 효과와 집단지성, 생태적 지혜에 주목하는 현 단계의 첨단기술사회에서 소수자가 관계 성좌를 풍부하게 만듦으로써 기계를 산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매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보이지 않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에게 전기를 주듯이 소수자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 없다. 저자는 2000년 초반에 사회보장소득이라는 문제의식에 접근하여 비노동 민중의 삶과 욕망을 보장하는 데 초점이 맞추었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10여 년 동안의 지적 여정을 거쳐 기본소득으로 연결지어 정리할 수 있었다.

 

 

특징과 차별성

 

이 책의 특색은 서한문 형식이란 점이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아내에게 편지 형태로 전달하고 있다. 그의 기획 의도는 매우 좁으면서도 넓다. 노동자의 노동이 아닌 소수자의 욕망을 말한다는 점에서 매우 좁은 부분에 대한 저술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노동가치를 벗어난 욕망가치로 자본주의 세상을 설명하고 바라보겠다는 의도에서 상당히 광범위한 지적 작업을 해내고 있다. 이런 의도를 잘 투영한 관계가 별난’(욕망을 뜻함)을 공동체의 필명으로 갖고 있는 철학공방 별난이라는 아내와의 공동체이다. 그의 편지는 세헤라자데의 끝나지 않는 천일야화처럼 색다른 세상의 재창조로 우리를 이끈다.

이 책은 에세이풍의 편지 형식과 비평 서적의 내용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경제철학이라는 분야가 자칫 개념의 유희나 개념의 미로를 형성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책은 현학적인 요소보다 성찰적인 요소를 가지고 출발한다. 저자의 다른 저작에서 보이듯이 표현의 현란함을 최대한 자제하고 문제의식과 생각의 경로를 개척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아내에게 부드럽고 자상하게 말을 걸고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욕망 자본론이 갖고 있는 무거움을 덜어내고자 독자를 고려한 소프트한 글쓰기의 형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저자는 방황하며 모색하고 성찰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각이 거침없고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다. 이런 점을 편집 과정에서 충분히 살려 원석대로 보여줄 부분은 그대로 살렸다.

 

주요 내용과 구성

 

이 책은 저자가 전공한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가치론이라는 개념의 구도를 더 확장하고 심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출발했다. 특히 소수자의 욕망이 공동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듦으로써 일반지성의 성숙에 도움을 준다는 점은 특이하다. 이를 통해서 일반지성이 기계류의 혁신에 원천이 되며, 소수자는 자본주의에 보이지 않게 기여하는 존재들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소수자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욕망가치론의 내용은 저자가 그의 박사논문과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2013, 알렙)에서 이미 개략적인 설명을 해놓은 내용이지만, 그것의 현실적인 논증과 사례화가 가능한지를 이 책에서 처음으로 타진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1부 욕망인가? 노동인가?>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이라는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시리즈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욕망이라는 차원을 도입한다. 욕망을 생산하면서도 억제하는 자본주의는 분열의 이중 구속(double bind)을 내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와 욕망 경제가 수렴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의미화와 분열이라는 한 쌍을 갖고 있고, 질문과 대답이 분열된 사회이다. 노동의 패러다임은 이익과 이해라는 점에서 정확한 의미화가 가능하지만 욕망의 패러다임은 질문과 문제의식 속에서 의미가 미끄러지는 색다른 구도를 그린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의미화할 수 없었던 욕망가치, 생명가치 등을 주석에서밖에 다룰 수 없었다.

<2부 욕망가치론과 기본소득>은 성장이 아닌 발전 노선에서 필요한 욕망가치론을 제기한다.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역할을 할당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내부 상점처럼 사회를 바라보면서 관계를 성숙시키는 내포적 발전을 기약할 때, 소수자의 의미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 점에서 욕망가치론은 기본소득을 가장 필요로 하는 비노동 민중에 대한 이론이다.

<3부 욕망은 상품 물신성을 어떻게 보는가?>는 자본주의의 상품과 공동체의 선물을 구분하면서 상품 물신주의의 기원을 탐색한다. 함수론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가 아닌 확률론적인 경우의 수가 중요한 공동체를 통해서 상품 물신성으로부터 벗어난 대안 경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공동체 경제의 선물은 욕망과 사랑의 움직임처럼 뻔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 어느 누군가를 향하며 확률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마치 양자역학의 경우의 수나 주사위 던지기처럼 순환하고 유통되는 선물은 상품 물신성으로부터 벗어난 대안 경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4. 욕망의 정치경제학은 가능한가?>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개념인 욕망하는 기계를 통해서 네트워크와 같이 작동하는 공동체 경제를 사고한다. 이에 따라 아주 커다랗고 불변항으로서의 구조가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 간의 연결 접속의 성격에 따라 변이되고 횡단하며 이행하는 정치경제학의 구도가 그려진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접속(connection), 이접(disjunction), 연접(conjunction)이라고 규정했던 연결 접속의 특성에 따라 어떻게 욕망의 정치경제학이 달라지는가를 볼 수 있는 장이다.

<5부 욕망과 기호의 경제>에서는 가타리의 흐름으로서의 도표와 고정관념으로서의 기표 간의 대결, 환상의 수다스러움과 사랑의 수다스러움의 대결이 그려진다. 자본주의는 기표와 같이 의미화하고 모델화될 수 있는 것들을 기성 상품으로 만들어, 사랑과 욕망의 흐름에 따라 의미 좌표가 흔들리는 것을 억압한다. 이에 따라 뻔한 상품, 뻔한 소비자, 뻔한 생산자로 규정되어 고정관념에 따라 상품이 거래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공동체 경제는 욕망의 기호 흐름을 통해서 의미화되어 재현될 수 있을 선물을 유통한다. 상품은 사랑과 정성, 인격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선물에는 사랑과 정성, 인격이 담겨 있다.

<6. 욕망 자본론>은 자본론의 외부가 바로 욕망이었음을 적시하면서, 욕망 자본론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장이다.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와 풀뿌리 공동체 간의 생활에서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어디를 가든 아파트, 육식, TV, 자동차와 같은 통속적 삶을 유지하고, 자본이 지나간 곳에 백화점, 마트, 편의점, 호텔 등이 자리잡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지자체에서는 국경을 넘나들며 매끄럽게 이동하는 초국적 자본을 머물게 하기 위해서 축제, 특산물, 디즈니랜드, 박물관 등으로 호들갑을 떤다. 욕망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외부인 아이, 동물, 광인의 비표상적인 흐름을 다시 받아들여 사랑과 욕망의 비표상적 흐름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 자본론은 자본이 사회화되고 사회가 자본화되는 이중적 경향을 갖는 현 시점에서 사회적 경제의 활력과 생명 에너지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글을 마친다.

욕망 자본론은 색다른 사유의 실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연관, 생활연관, 세계연관 속에서 세계를 재창조하려는 철학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마치 만화경을 쓰고 거리로 나선 사람이 좌충우돌하듯 의미의 성좌를 새롭게 형성하기 위해서 의미의 분열과 흔들림에 의존하는 방법에 따르고 있다. 이 책이 공동체 경제와 발전 전략, 사회적 경제에서 등장하는 주체성 생산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이 책이 사실은 생명 에너지와 활력으로서의 욕망을 촉발하고 고무하기 위한 실천적인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 신승철(申承澈)

 

2010년도에 동국대학교에서 펠릭스 가타리의 분열분석과 미시정치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1년에는 동물보호 무크지 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2012년에는 녹색당 생명권 정책의 초안을 썼으며, 당해 <성미산마을 연구조사 사업>에도 참여했다. 현재 동국대, 한성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철학공방 <별난> 공동 대표, 생태문화협동조합 <달공> 준비위원, 카라 소속 동물사랑도서관 아카이브 위원, 가톨릭 생명윤리연구소 전문 연구위원, 경희대 약학대학과 식약처 실험동물윤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역서로는 사이버-맑스(이후, 2003)가 있으며, 저서로는 대한민국욕망공화국(해피스토리, 2008), 에코소피(, 2008), 대한민국 욕망보고서(당대, 2011), 펠릭스 가타리의 생태철학(그물코, 2011), 사랑과 욕망의 영토(중원문화, 2011), 분열과 혁명의 영토(중원문화, 2011), 루저의 심리학(삼인, 2012), 식탁 위의 철학(동녘, 2012), 눈물 닦고 스피노자(동녘, 2012),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알렙, 2013),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서해문집, 2013), 공저로는 인문학 박물관에서(인물과사상사, 2010), 철학자의 서재2(알렙, 2012), 달려라 청춘(삼인, 2014)이 있다.

 

 

 

차례

 

 

머리말 장기 비상 시대에 눈뜬 욕망

 

 

1 욕망인가? 노동인가?

 

생명 욕망인가? 자본 욕망인가?

욕망은 마조히즘인가?

욕망을 생산할 것인가? 욕망을 억제할 것인가?

시장 자유주의인가? 공동체 자율주의인가?

흐름인가? 고정관념인가?

노동가치인가? 욕망가치인가?

 

2 지금, 기본소득이 필요한 까닭

 

마르크스가 알지 못했던 욕망가치

발전인가? 성장인가?

내포적 발전 단계에서, 욕망이 필요하다

관계망 성숙에는 비밀이 있다

일반지성의 기본 전제들

완전히 색다른 욕망 경제

지금, 기본소득이 필요한 까닭

 

3 욕망은 상품 물신성을 어떻게 보는가?

 

세계 자본주의, 욕망을 포섭하다

상품 물신성의 기원, 등가교환

선물과 증여의 욕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상품 물신성에 혁신은 없을까?

자본주의적인 욕망은 허구 상품을 가능케 한다

욕망화폐론

 

4 욕망의 정치경제학은 가능한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왜 욕망하는 기계를 등장시켰는가?

욕망하는 기계의 3가지 연결 방식

욕망하는 기계와 기관 없는 신체

욕망은 특이성을 생산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의 경제학을 넘어서

 

 

5 욕망과 기호의 경제

 

의미는 지독한 권력이다

도표적 욕망인가? 기표적 욕망인가?

사랑인가? 환상인가?

공동체의 수다스러움과 이미지 영상의 수다스러움

구조 환상을 넘어선 욕망의 기호 흐름

 

 

6 욕망 자본론

 

코드의 잉여가치와 사회적 경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를 필요로 하는가?

자본의 욕망화와 욕망의 자본화

자본론의 외부: 아이, 동물, 광인

 

결론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와 풀뿌리 관계망

 

 

 

 

미니 인터뷰

 

 

편집자 안녕하세요. 선생님. 2013녹색은 적색의 미래다(알렙)를 내신 이후로, 선생님께서는 몇 권의 책을 더 내셨지요? 20010년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이후로, 공저 포함하여 벌써 15번째 저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책이 선생님의 저작 중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궁금하네요.

 

신승철 이 책은 박사학위 논문에서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점을 갖습니다. 그간 욕망자본론과 관련되어 여러 가지 단상과 아이디어를 블로그나 발표 글에 실어 왔지만, 이렇게 일관된 맥락 하에서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실 저의 욕망자본론은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가치라는 개념을 더 발전시킨 내용입니다. 좀 더 논의를 전개하고 구체화하면서 지금 여기의 한국사회에 맞게 쓸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의 지적 여정 속에서 맑스주의자들에게 가장 많이 질문을 받아 왔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맑스의 가치론에 대해서 대대적인 수정을 가한다는 것을 매우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자의 시각에서 다시 자본론을 검토한다는 입장에서 밑그림을 그리면서 이 책을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2010년 박사논문을 쓸 때, 욕망자본론이라는 개념의 구도를 그려내고 몹시 흥분했지만, 그간 기회와 시간이 없어 구체화할 수 없었습니다. 늘 빚진 기분이었죠. 이제야 빚을 털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이 갖는 독특한 위상은 맑스주의의 개념지도와 주류경제학의 논의를 벗어나서 대안사회를 꿈꾸고 사유한 책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책 역시도 배치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에 대해서 동의하게 되는군요.

 

편집자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모음집이 사실은 어려운 경제철학 책이에요. 특별히 이런 형식을 갖춘 이유가 있나요?

 

신승철 사실, 개념과 논증이 난무하는 철학 책이란, 공허하거나 현학적이기 쉬워요. 사실 철학은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참신하고 신선한 문제제기를 던지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아내와 저는 철학공방 <별난>이라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공동체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죠. , 우리 둘을 포함하여 문래동 예술가와 활동가들과 함께 생태문화협동조합 달공을 만들어가고 있기도 해요. <욕망 자본론>은 공동체 경제, 생태 경제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문하는 것이기도 해서, 우리 둘 사이의 관계망에서 싹트는 욕망과 생태적 지혜에 기반해서 써내려갔습니다.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처럼 실증 자료와 도표, 예시는 없지만, 너와 나 사이의 관계망이 주는 생태적 지혜, 집단지성, 공통의 아이디어 등에 기반해서 문제의식을 풀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실험적인 형식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망에서 산출되는 생각의 경로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편집자 편집자가 여러 번 읽어보아도, 이 책의 내용을 숙지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책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몇 가지 명제와 주장을 하고 계시죠. 저자께서 직접 본인의 명제와 주장을 서너 가지로 정리해 주실 수 있나요?

 

신승철 자본주의는 화석연료고갈, 기후변화, 생물대량멸종 등 장기비상시대로 이미 접어 들어간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기존의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이 아니라, 발전노선에 주목하게 만드는데요, 저는 발전노선에서 욕망가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소수자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것이 욕망가치 입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회적 경제에서의 자본의 욕망화와 욕망의 자본화라는 색다른 국면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자본론>의 공백인 욕망가치 영역을 통해서 통합된 세계자본주의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어떻게 초래해야 할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욕망을 가진 소수자들은 그저 수혜적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색다른 관계망을 창발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이 사회를 풍부하게 만들면서 기여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욕망가치론의 핵심적인 명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저의 문제의식을 좀 더 간략히 정리하자면, “자본주의 경제는 소수자와 비노동 민중의 욕망가치의 생산성과 창조성에 기반하는 발전전략’, ‘기본소득’, ‘사회적 경제로 이행하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요즘 기본소득이나 부유세등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보니, 신승철 선생님께서는 상당히 오래전에 사회보장소득이란 개념을 얘기하셨더군요. 욕망가치와 기본소득에 대해 연관성을 좀 깊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신승철 우리가 소수자를 말할 때, 사회적 약자나 양적 소수, 피해자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공동체와 사회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특이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본이 공동체적 관계망의 시너지효과와 집단지성, 생태적 지혜에 주목하는 현 단계의 첨단기술사회에서 소수자가 관계성좌를 풍부하게 만듦으로써 기계를 산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매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보이지 않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에게 전기를 주듯이 소수자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제가 2000년 초반에 접근했던 사회보장소득의 문제의식은 비노동 민중의 삶과 욕망을 보장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10여 년 동안의 지적 여정을 거쳐 이제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편집자 욕망에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있고 생명 에너지인 욕망이 있다고 하셨는데, 사랑과 욕망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조금 말씀해 주세요.

 

신승철 기존 생태주의자들은 욕망=자본주의적 욕망이라는 공식 속에서 금욕이나 절욕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생명에너지로서의 욕망은 공동체의 활력과 생명에너지로 흐르기 때문에 지나친 금욕주의는 공동체를 폐색시킬 위험을 노정합니다. 저는 욕망에 대한 자주관리의 행동을 공동체에서 감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의 미시정치라는 개념도 이를 설명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서 사랑과 욕망은 미래를 향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면서 미래를 향해서 탈영토화를 감행하고 있는 진행형적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욕망의 순환과 재생의 흐름에 입각한 대안적인 경제 질서를 생각하는 것은 색다른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편집자 짧은 인터뷰지만, 끝으로 독자에게 해주실 말씀은요?

 

신승철 욕망자본론은 미래진행형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철학자가 의미화하는 모델이나 답이 아니라, 참신한 문제의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색다른 문제의식에 접속하여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독특한 욕망을 유통시킬 때 독자 역시도 아주 색다른 생각의 경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 미에서 이 책은 대안 경제 모델이라는 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각자가 갖고 있는 욕망을 통해서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어주고 대안 경제를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 박정희 vs 마오쩌둥 - 한국 중국 독재 정치의 역사
박형기 지음 / 알렙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간 소개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박정희 vs 마오쩌둥

 

한국·중국 독재 정치의 역사

 

박형기 지음33616,000원 출간일 2014년 10월 25ISBN 978-89-97779-43-7 03910

 

분야 역사동아시아사한국사

국내도서 사회과학 정치학/외교학/행정학 정치인


 

동북아시아 영웅 3인의 인생 역정을 탐험해 보는 시간 여행

 

박형기는 그동안 언론사에서 홍콩 특파원과 국제부 기자 등을 거치면서친디아』『중화 경제의 리더들』『덩샤오핑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 중국 문제와 국제 경제에 관심을 두고 천착해 왔었다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박정희라는 역사 인물에 대해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선을 찾고자 하는 이 기획에서저자는 해외로 시각을 돌려보자고 제안한다

 

 

 

 

 

주소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373-4 성지빌딩 615 전화 325-2015 팩스 325-2016 

E-mail alephbook@naver.com 휴대전화 010-9383-8534 

  

 

작품 소개 

 

 

■ 중국 혁명의 마오쩌둥개혁개방의 덩샤오핑유신의 박정희

독재의 세 얼굴을 통해 중국과 한국의 현대사를 재구성하다!

 

산업화 세력은 박정희를 반신반인으로 미화해 왔고산업화 세력으로부터 탄압받았던 민주화 세력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업적을 애써 무시해 왔다이에 따라 박정희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진영 논리의 틀에 갇혀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이에 따라 필자는 국제적 시각으로 박정희를 재평가해 보는 것이 박정희를 객관화하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다른 나라 지도자와 비교해 보면 박정희가 과연 반신반인의 자격이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멀리 갈 것도 없다마침 중국에는 반신반인이라고 불리는 지도자가 있다바로 마오쩌둥이다

신중국을 건설한 마오쩌둥은 집권 후 수천만 명을 아사시키는 등 실정을 거듭했다그래도 중국인들은 그들을 먹고 살게 해준 덩샤오핑보다 마오쩌둥을 훨씬 더 좋아한다

저자가 중국 취재 여행을 다닐 때중국인들에게 왜 당신들은 잘살게 해준 덩샤오핑보다 수천만 명을 아사시킨 마오쩌둥을 더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약속이나 한 듯 덩샤오핑은 우리에게 돈을 벌게 해주었다. ‘마오주시(毛主席그들은 반드시 이렇게 부른다)’는 우리의 체면을 살려주었다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지만 한번 깎인 체면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는 답을 듣곤 했다

마오쩌둥은 중국 땅에서 모든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중국의 자주를 확보했다만약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했더라면 중국은 제2의 일본이 됐을 것이다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었겠지만 자주를 잃었을 것이다일본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가는 순간일본이 세계 최강국이 될 가능성은 사라졌다장제스가 집권을 했더라면 중국은 제2의 일본이 됐을 것이다그러나 중국은 마오쩌둥 덕에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가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만큼 뛰어난 업적이 있었고또 마오보다 훨씬 세련된 리더십을 구사했다만약 덩샤오핑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소련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그러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덕분에 중국은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위협하는 유일한 나라가 됐다덩샤오핑은 또 천안문 사건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중국을 통치했다이에 비해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을 위협받자 문화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탈환했다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마오는 권력으로 통치했지만 덩은 권위로 중국을 통치한 것이다덩이 마오보다 한 차원 높은 리더십을 구사한 셈이다.

그럼에도 덩은 중국에서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중국에서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는 현대 인물은 마오쩌둥이 유일하다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지만 한 번 잘못 쓰인 역사는 다시는 바로잡을 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박정희도 덩샤오핑처럼 한국의 백성들을 먹고 살게 했다그러나 그는 덩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덩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만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젊음을 바쳤을 때박정희는 일본군(만군)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의 첨병 노릇을 했다그리고 박정희는 집권 과정도 정당성이 없었다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했다마오와 덩도 무력으로 집권했다그러나 이들은 정당성이 있었다중국은 쑨원이 청조를 무너트리고 중화민국을 열었으나 위안스카이의 반정으로 공화정이 곧바로 막을 내렸다이후 중국은 군벌과 국민당 공산당이 내전을 벌였다마오와 덩은 이 내전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난세의 영웅들이었다그러나 한국은 1948년 해방 이후 민주주의를 채택했다박정희가 정치를 하고 싶었다면 출마해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것이 규칙이었다박정희는 이 같은 규칙을 무시하고 쿠데타로 집권했다

 

저자는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을 평가절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그가 한국의 경제 발전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박정희는 조국을 근대화한능력 있는 정치인이었다그러나 반신반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정통성이 너무 취약하다박정희가 위인도 아닌 반신반인이라면 그의 이력도 완벽해야 한다그러나 박정희는 혈서를 써가면서까지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했고헌정 질서를 유린하고 정권을 잡았으며그것도 모자라 유신이라는 제2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실 박정희는 반신반인은 물론 위인의 범주에 넣기도 힘들다위인은 보고 배울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박정희가 위인이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식민 시대가 다시 온다면 식민 종주국에 충성해라앞으로 다시 군부독재 시절이 온다면 군부독재에 협력해라그리고 반칙을 일삼더라도 무조건 출세해라.”

 

내용 속으로 

 

 

■ 정당한 권력”(마오쩌둥덩샤오핑) vs “부당한 권력”(박정희)

 

저자는 먼저 박정희마오쩌둥덩샤오핑의 공통점을 찾는다이들은 모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고 독재자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권력의 재구축을 위해서도박정희는 유신마오쩌둥은 문화혁명덩샤오핑은 천안문 학살을 지시했다

이들은 젊은 시절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마오쩌둥의 어록)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마오는 대장정항일 전쟁국공 내전을 치렀다덩샤오핑도 항일 전쟁과 국공 내전 과정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박정희도 만주에서 팔로군과 싸웠고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저자는 이들이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마오와 덩은 정당성이 있었지만박정희는 정당성이 없었다박정희는 헌정 질서를 무너뜨렸지만마오와 덩은 그렇지 않았다마오쩌둥은 농민의 영웅이었을 뿐 아니라중국 땅에서 모든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신중국을 건설한 민족의 영웅이었다그러나 박정희는 정권을 잡기 위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총칼을 사용했다박정희가 정치를 하고 싶었다면 군복을 벗고 출마해 국민의 심판을 받았어야 했다

 

 

■ 경제 실정”(마오쩌둥) vs “경제로 제건국”(덩샤오핑박정희)

 

마오쩌둥은 집권 후 대약진운동문화혁명 등 실정을 거듭했다특히 그는 대약진운동으로 중국 경제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붕괴 직전의 중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지도자가 바로 덩샤오핑이다박정희도 기아선상을 헤매던 한국의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박정희와 덩샤오핑은 경제로 제2의 건국을 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박정희와 덩샤오핑은 집권 후 세계의 보편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박정희는 만주와 일본미국을 직접 경험한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코즈모폴리턴(국제인)이었다덩샤오핑 또한 젊은 시절 대부분을 프랑스와 소련에서 보냈다실제 이들은 집권과 함께 조국을 세계의 보편 질서에 편입시켰다박정희는 국민의 엄청난 반대에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함으로써 한미일 삼각동맹에 가입했다한미일 삼각동맹은 전후 동북아시아의 보편 질서였다박정희는 한미일 삼각동맹에 가입함으로써 안보와 경제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덩샤오핑도 집권 이후 대외에 문호를 개방했다덩샤오핑은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야 하고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미국 등 선진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집권 직후 잇따라 일본과 미국 방문에 나서 양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다중국에 있어 일본과 미국은 한때 전면전을 불사하던 불구대천의 원수였다그러나 중국은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들의 자본과 기술이 필요했다그리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화가 긴요했다.

박정희와 덩샤오핑이 조국을 세계적 보편 질서에 편입시킨 덕분에 한국과 중국은 빠르게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이들 때문에 중국은 미국과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대한민국은 세계 15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경제적 관점으로만 볼 때박정희와 덩샤오핑 모두 반신반인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박정희와 덩샤오핑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덩샤오핑이 중국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청춘을 바쳤을 때박정희는 일제를 위해 젊음을 바쳤다이뿐 아니라 덩샤오핑은 박정희보다 훨씬 세련된 통치술을 구사했다

 

 

■ 폭력으로 통치한다”(마오쩌둥박정희) vs “권위로 통치한다”(덩샤오핑)

 

박정희와 마오쩌둥 리더십의 핵심은 폭력이었다이들은 정치적 리더십이 바닥났을 때 동원한 것이 폭력이었다박정희와 마오쩌둥은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특히 이들은 문화혁명과 유신이라는 체제를 동원했다마오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을 위협받자 문화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탈환했다박정희는 더 이상 법률에 의한 정상적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유신을 선포했다유신과 문화혁명 기간 수많은 사람이 박정희와 마오쩌둥에 의해 희생됐다이들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하거나 억눌렀다마오의 제물은 류샤오치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등이었고박정희의 제물은 김대중장준하 등이었다.

세 독재자 중 그나마 정당한 리더십을 행사한 인물은 덩샤오핑이다덩샤오핑도 집권 후 폭력을 쓴 적이 있다덩은 천안문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그러나 이는 일시적 폭력이지 구조적 폭력은 아니었다이에 비해 문화혁명과 유신은 일시적 폭력이 아닌 구조적 폭력이었다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건 이후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중국을 통치했다권력이 아닌 권위를 빌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박정희의 유신과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은 그들이 죽자마자 부정됐다이들은 권위가 아닌 권력으로 통치했기 때문이다권력이 아닌 권위로 통치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덩샤오핑은 마오쩌둥박정희보다 한 차원 높은 리더십을 구사한 것이다.

 

 

■ 박정희를 반신반인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까닭은

 

그럼에도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중국에서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고 있는 현대 인물은 마오쩌둥이 유일하다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이라는 탁월한 업적마오와 함께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항일 전쟁에도 직접 참전한 정당성그리고 마오와 박정희보다 한 수 위의 리더십을 갖추었음에도 반신반인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정당성 또는 정통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단연 김구 선생이다김구 선생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국 현대 인물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1위를 도맡아 한다김구 선생은 업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는 독립운동을 했다그러나 독립은 김구의 광복군이 아니라 미국에 의해 이뤄졌다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은 항복했고이에 따라 한국은 독립했다김구 선생은 또 정권 쟁취에도 실패했다그만의 업적을 쌓을 기회조차 잡아보지 못한 것이다그럼에도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그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국민을 먹여 살린 덩샤오핑이 아니라 국민을 굶주리게 했지만 중국 현대사의 정통성을 한 몸에 구현한 마오쩌둥이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자는 반신반인이라는 단어는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업적도 업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정당성을 완벽하게 갖추어야 한다박정희보다 정당성을 더 갖추고 한 차원 높은 리더십을 행사한 덩샤오핑도 반신반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하물며 일제 타도의 선봉에 서기는커녕 일제 침략 전쟁의 첨병 노릇을 했고헌정 질서를 유린해 가며 집권한 박정희가 반신반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 한국·중국 독재자 3인의 12가지 리더십

 

마오쩌둥

정통성 마오쩌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때마다 정통성이란 무기로 그 위기를 돌파했다.

지적 능력 마오는 정치가이기 이전에 당대 최고의 사상가였다마오는 지적으로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자주 마오는 평생을 자주로 일관한 정치가였다.

폭력 마오쩌둥은 폭력의 화신이었다특히 반대파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억눌렀다.

 

 

덩샤오핑

화합 정치의 달인인 그는 친구의 극대화적의 극소화라는 명제를 뼛속 깊이 체화한 인물이었다.

권위 덩샤오핑은 권력이 아닌 권위로 중국을 통치했다

유연 덩샤오핑은 유연한 발상을 했다덩샤오핑은 발상뿐 아니라 정치 리더십도 부드러운 지도자였다.

보편 덩샤오핑은 평화를 지향했고합리적이었다그는 특히 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존중했다.

 

 

박정희

가난 극복 박정희의 개인적 가난은 그 자신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우리 국민에게는 행운이었다그의 가난 극복 리더십이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실력과 소탈 박정희는 탁월한 실력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박정희는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마이웨이  박정희는 반대가 많아도 국익 또는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면 자신의 길을 걸었다.

폭력 집권 이후 박정희 리더십의 요체는 폭력이었다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을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는 빠른 승진을 선물했다.

 

 

 

저자 소개 박형기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성곡재단 펠로우로 홍콩 중문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광주일보홍콩특파원을 지내면서 중국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다. 10여 년 동안 <머니투데이국제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브릭스와 친디아’ 개념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등 국제문제에 천착했다. <머니투데이국제부장온라인 총괄부장 등을 지낸 뒤 현재는 고향에서 가업을 잇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친디아덩샤오핑-개혁개방의 총설계사중화경제의 리더들친디아의 비밀병기 화교 인교』 등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반신반인이라는 말을 한국에서 처음 듣고…… 

 

 

1부 독재자와 권력자:

한국·중국 독재 권력의 세 얼굴

 

1 자주의 마오쩌둥 vs 보편의 덩샤오핑

2 박정희마오쩌둥덩샤오핑 권력의 유형

 

 

2부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박정희마오쩌둥덩샤오핑의 권력 쟁취 과정

 

1 박정희와 군사 쿠데타 

 

2 마오쩌둥과 공산혁명

 

3 덩샤오핑과 신중국 건설

 

3부 잘살아 보세” vs 개혁개방:

베이징 컨센서스서울 컨센서스

 

1 대한민국 근대화의 기수박정희

 

2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덩샤오핑 

 

4부 독재 권력은 어떻게 합리화되었는가?

마오쩌둥덩샤오핑박정희의 권력 재구축 과정

 

1 마오쩌둥과 문화혁명

 

2 덩샤오핑과 천안문 사태 

 

3 박정희와 10월 유신

 

에필로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 - 개그와 함께하는 3일간의 논리 여행 청소년 인문학 캠프 시리즈 3
김성우.송진완 지음 / 알렙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

개그와 함께하는 3일간의 논리 여행

 

김성우, 송진완 지음|232쪽|판형 국판변형(140*205)|13,000원 

2014년 11월 25일|ISBN 978-89-97779-45-1 43170

 

 

 

 

 

분야 : 청소년 / 인문

 

<열여덟을 위한 철학 캠프>, <신화 캠프>에 이어, 청소년 인문서 제3탄 <논리편> 출간!

개그 공연을 즐기면서 논술을 공부하는 초ㆍ중ㆍ고 공통 창의체험 활동

「논술 개그」시즌 1 공연 단행본 출간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부러웠던 지점은 내가 만들고 있고 만들어왔던 코미디 콘텐츠도 누군가가 숨어 있는 의미와 철학을 끄집어 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코미디는 그 시대의 문명, 문화 그리고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는 내가 꿈꾸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고맙고도 고마운 책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해 학생들과 대중들이 보다 쉽고 친숙하게 논리학에 접하고, 생각하는 재미에 푹 빠지시기를 바란다.

─ 김석현 PD(tvN 「코미디빅리그」 대표 PD)

 

 

 


인기 개그 코너 속에 숨은 웃음의 코드는 무엇일까?

 



 

 

경고: 이 영화를 보다가 어패류 이름을 말하면 죽는다. 

 

김준호: 야 심현섭! 머리가 왜 이 모양이야. 나랑 같이 머리 하러 미장원 가자.

심현섭: 아이, 귀찮어.

김준호: 그러지 말고 나랑 가자 미장원 (당황하며) 가자미장원!! 가자미!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스크림>, 「개그콘서트」(1999)

 

「개그 콘서트」 <스크림>은 요즘 보면 다소 썰렁할 수도 있는 추억의 말놀이 개그이다. 그런데 이 개그는 단순한 말놀이, 말장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논증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논증의 구조가 큰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철학자 김성우와 공연 기획자 송진완이 만나서, 웃음과 유머를 논리와 철학에 결합하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개그 프로그램을 소재로, 그 속에 숨은 통찰과 가치에 대한 도전, 그리고 웃음 코드를 짚어내는 책이다. 

웃음은, 철학자들의 오랜 탐구 대상이자 일반 대중이 철학적 문제의식에 쉽게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이었다. 특히, 현대 철학에서는 웃음을 철학적 사유 방법으로 삼아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연구와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철학과 웃음이 모두, 날카로운 통찰과 창의적인 표현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획은 웃음에 관한 여러 콘텐츠 중에서 특히 TV 속 개그 코너를 철학에 접근하는 로 사용하여 일반인들이 더욱 쉽고 재미있게 철학과 인문학에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논리 지식은 덤이다. 

 

 

「개그 콘서트」, 「코미디빅리그」, 「웃찾사」, 「코미디의 길」…… 

수많은 개그들의 웃음 코드를 논리와 철학으로 풀어보는 유쾌한 사색의 시간!

 

이 책은 독자가 실제로 즐겨 보고 있는 유명 개그 코너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개그 콘서트」 「웃찾사」「코미디의 길」「코미디빅리그」 등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선보였던 수많은 개그 코너들을 통해 웃음의 철학과 웃음의 논리를 다루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개그 콘서트」의 <스크림>이라는 코너는 철학자 베르그송의 기계적 경직성이라는 웃음 이론으로 분석할 수 있다.(39쪽) <꺾기도>가 선보였던 개그계 최고의 필살기 꺾기라는 웃음 코드는 철학자 칸트의 웃음의 불일치 이론과 쇼펜하우어의 웃음의 지혜, 그리고 그를 숭배했던, 인류가 낳은 최고의 코미디언인 찰리 채플린의 웃음 철학과 맞닿아 있다.(67쪽)

 

그뿐인가? 「코미디 빅리그」의 <사망 토론>, 「개그 콘서트」의 <박대박>이라는 토론 개그 코너는 프로이트가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말한 농담 기술, 즉 전치(前置, 자리바꿈)와 관련 있다.(108쪽)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는마요네즈 소스와 연어 요리라는 유명한 유머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바로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이용한 유머다. 

 

어느 몰락한 남자가 부자 친척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호소한 결과 돈을 빌렸다. 그러나 바로 그날 그 부자 친척은 식당에서 마요네즈 소스를 친 연어 요리를 앞에 놓고 있는 그와 마주치게 된다. 친지가 비난을 퍼붓는다. 

아니, 나한테서 돈을 빌려 연어 요리를 먹다니! 이러기 위해서 내 돈이 필요했던 거요?

그가 대답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돈이 없을 땐 연어 요리를 먹을 수 없고, 돈이 있을 때는 연어 요리를 먹어선 안 되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난 언제 연어 요리를 먹어야 합니까?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중 마요네즈 소소의 연어 요리라는 유머

 

박영진은 유명한 야구 선수이다. 기자인 박성광이 야구 선수인 박영진에게 질문을 한다.

박성광: 야구는 어떤 계기로 하게 되었나요?

박영진: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선수가 있었는데 그 선수를 보면서 꿈을 키웠어.

박성광: 그 선수가 누구인가요?

박영진: 데이비드 베컴.

박성광: (당황하며) 축구 선수를 좋아했다면 축구 선수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박영진: 무슨 소리야, 그럼 여자 좋아하면 여자 되냐? 난 여자 좋아하는데 왜 여자가 안 됐어?

박성광: ?                                                                                    ――『개그 콘서트』 <박대박> 중에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이 책에서 논증의 오류를 이용하여 농담을 만드는 다양한 기술을 소개한다. 위처럼,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의도 확대의 오류)를 활용한 농담 기술도 이 책에 등장한다. 이 농담 기술을 그는 자리바꿈(전치, displacement)이라고 부른다. 전치는 심리적인 에너지가 투자되는 대상의 바꿔치기가 일어남을 의미한다. <박대박>에서 박영진 씨가 박성광 씨의 주장을 왜곡하여 엉뚱한 것으로 제시하며 논점을 일탈시키는 행위가 바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자리바꿈에 해당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논증의 오류들이 개그에서 활용되는 방식들을 분석한다. 개그는 구성이 매우 압축되어 있고, 웃음 코드도 핵심을 찌르는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논증의 오류를 공부하기에 매우 적합한 교재이다.

그동안 유머, 위트 등 웃음의 일반적인 사례를 논리적 사고력의 소재로 다루는 책들이 출간된 적은 있지만, 독자들이 직접 흥미를 느낄 수 있고 TV를 통해 실제로 잘 알고 있는 개그 코너들을 논리 훈련으로 풀어내는 것은 이 책이 최초로 시도하는 작업이다. 논리 훈련에는 명칼럼, 명연설, 명문장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 책은 개그 코너를 소재로 다루어 공부와 함께 재미까지 추구하고 있다. 

 

 

개그가 논리, 철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웃음에 관한 짧은 철학사

 

이 책은 개그가 논리, 철학과 관계를 맺는 기본적인 측면을 주목한다. 

 


우선, 개그가 논리적인 사고력을 높여줄 수 있음을 제시한다. 1부 첫 마당에 등장하는 개그 코너인 <마른인간 연구소>는 완벽히 연역적인 논증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개그 속에 숨어 있는 논리적인 구조가 나타나며, 이로써 개그가 논리적인 사고력과 관계 맺는 단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서기 2222년 지구는 우리 비만인들이 지배하게 됩니다. 마른인간들은 거의 멸종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비만인들은 과거에 지구에 살았다는 마른인간에 대해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마른인간들은 앉아서 다리 꼬기가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 비만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마른인간들이 먹던 초콜릿은 뒷면에 알 수 없는 칸이 있다. 혹시 나눠먹는 용도였을까? 비만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 마른인간들은 몸짱이라는 질병을 앓았다고 한다. 몸에 왕(王) 자가 나타나고 몸이 근육으로 딱딱하게 굳어간다고 한다. 비만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질병이다.

       ――「폭소클럽」 <마른인간 연구소> 중에서

 

 

요즈음 「개그 콘서트」의 대세인 개그맨 유민상 씨가 갓 데뷔할 무렵 선보였던 <마른인간 연구소>라는 개그이다. 유민상 씨는 이처럼, 외모 지상주의라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꼬는 내용의 황당한 전제를 통해 황당한 결론들이 이끌어져 나오는 논리적인 상황(필연성)을 제시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개그 코너는 표면적으로는 전혀 논리적인 사고와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논리적인 구조로 재구성되거나 논리적인 사고력을 전제로 한다. 이런 면에서 개그 프로그램은 논리적인 사고 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강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캐릭터가 등장하는 「코미디 빅리그」 <죽지 않아>에서는 연역 논증의 기계적 논리성을 예증하며, 찰리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통해서는 귀납 논증의 약점을 보여줌으로써 보통사람들에게 논리학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줄 수 있다.

이 책의 3부는 개그를 통해서 인문학 고전에 쉽게 접근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실제로 웃음에 관한 저서를 남겼던 쇼펜하우어, 베르그송, 프로이트, 니체, 브레히트의 저서를 분석하며 그들이 학문적으로 관심을 보였던 코미디와 웃음에 관한 이론에 그들의 철학적 핵심이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베르그송의 웃음론은 베르그송의 핵심 사상인 삶의 철학을 웃음이라는 관점에서 실험적으로 드러낸 것이며, 프로이트의 웃음론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농담을 통해 무의식을 파헤친 작업이다. 웃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상가, 즉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헤겔, 라캉, 지젝 등에 대해서도 에필로그를 통해 철학사적으로 개괄해 보았다.

이런 내용 전개를 통해 개그가 논리와 철학의 주요한 측면, 논리적 사고, 인문학적 문제의식, 명쾌한 표현 능력과 연관성이 있음을 재미있게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내용적 특징이다.

 

1부 <웃음과 논리>에서는 개그 코너를 논리학 차원에서 논리적 구조물로 재구성하여 논리 공부에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일반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2부 <논증의 오류>편 역시 대표적인 논리 오류 사례를 통해서, 논리적 사고력을 갖추기 위한 훈련을 해보고자 한다. 

3부 <웃음에 관한 짧은 철학사>에서는 웃음을 연구한 주요 철학자들의 생각을 개괄해 보고, 그들의 웃음 연구가 일회성 외도가 아니라 인류 지성의 발전 과정이라는 큰 맥락에서 역사적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을 밝힌다. 또한 철학자들의 웃음 연구가 단순히 사변적인 차원에서 머무른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일반사람들이 즐겨보는 개그 코너에도 담겨 있다는 사실을 분석함으로써, 어렵게만 느껴지는 인문학 고전을 보다 쉽게 접근하고 읽을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 이 책은 애초에 「개그 논술」(대학로 공연)의 기획자인 송진완 씨가 김성우 교수에게 공연의 자문을 부탁하면서 기획되기 시작했다. 개그 코너와 논리·철학 지식을 결합한다는 발상에서, 두 사람의 공저가 이루어진 것이다. 웃음과 논리가 만나고, 유머와 철학이 만나는 낯선 융합이 시도되었다. 공저자 두 사람은, 지난 1년 동안, 개그 코너 속의 웃음 코드를 발견해 내는 유쾌한 지적 작업을 해왔다. 주로 개그의 웃음 코드를 분석하며, 논증의 기본 구도와 연결하는 작업은 송진완 씨가 맡았고, 김성우 교수는 이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하지만 공저자들의 작업은 형식논리학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코미디철학의 짧은 역사를 다룬 3부와 에필로그를 통해, 웃음의 철학의 내용적 측면을 다루고자 한 것이다. 논리와 철학은 추상적이지만, 개그는 구체적이다. 공저자들이 찾아낸 건강한 시민의 웃음은 반전과 전복의 웃음이다. 공저자들은, 이러한 모순과 불일치의 유머, 해방과 저항의 개그, 위대한 화해와 지혜로운 통찰의 코미디들이 우리 사회의 웃음의 철학적 코드를 드러냈다고 본다. 공저자들은 정치인들의 블랙유머와 냉소는 가짜 웃음이며, 권력에 도구로 이용되는 웃음, 현실에 복종하는 웃음이라 말한다. 그것은 우리 시민에게는 한숨이며 불편함일 것이다. 

공저자들은 결국, 형식논리학이 개그의 반전과 코미디의 전복과 결합한다면 저항의 논리와 통찰의 논리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웃음과 유머에서 삶과 현실의 모순에 대한 통찰과 전통 가치에 대한 도전을 읽어낸다.


추천의 글

 

흥미 있게 읽었던 책 중에 「철학개그콘서트」라는 번역서가 있었다. 하버드대 출신의 두 명의 철학자가 쓴 책으로 유머 속에서 철학을 끄집어내어 알기 쉽게 설명해 주려는 노력이 녹아 있는 책이다.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부러웠던 지점은 내가 만들고 있고 만들어왔던 코미디 콘텐츠도 누군가가 숨어 있는 의미와 철학을 끄집어 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코미디는 그 시대의 문명, 문화 그리고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는 내가 꿈꾸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고맙고도 고마운 책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해 학생들과 대중들이 보다 쉽고 친숙하게 논리학에 접하고, 생각하는 재미에 푹 빠지시기를 바란다.

─ 김석현 PD(tvN 「코미디빅리그」 대표 PD)

 

 

저자 소개

김성우

 

비극을 좋아하는 인간, 우습게도 코미디에 관해 쓰다. 난해함을 사랑하는 학인,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의 대중화에 앞장서다.『스무 살의 철학 멘토』로 대학생을 지적으로 고문하고, 『로크의 정부론』으로 청소년을 테러하다. 영화를 철학으로 읽는 『청춘의 고전』, 미술 걸작의 철학적 분석을 시도한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문학 고전과 철학의 융합을 시도한 『열여덟을 위한 철학 캠프』 등을 공동 기획/저술을 하다. 우리 눈으로 다시 읽는 교양 수준의 철학사인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를 공동 기획/저술을 하다.

존재의 논리와 실천의 논리의 연계를 고민하는 철학도, 떠돌이처럼 가끔씩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 칸트, 로크, 롤스도 흘겨보며, 한동안 하이데거, 푸코, 아도르노, 니체, 마르크스주의에 열중하다가, 지금은 주로 헤겔, 지젝, 불교, 정신분석학을 읽다. 가르치기보다 책보기를 더 좋아하는 연구자, 역설적이게도 현재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및 『ⓔ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을 맡고, 여러 대학과 도서관에 출강하며, 초등학생부터 일반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철학으로 만나다.

 

송진완

 

코미디를 좋아하는 인간, 우울하게도 철학에 관해 쓰다. 온라인 언론사, 홍보대행사, 광고대행사 등 미디어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던 직장인, 우연히 개그 극단의 창립에 참여하며 공연 예술이 주는 미학적 힘에 매료되다. 개그 콘텐츠의 인문학적 가치에 눈을 뜬 공연인, 겁도 없이 철학 전공과는 무관하게 10년간 일하다가 철학의 대중화에 뛰어들다.학습과 인성에 도움이 되는 개그 공연을 만들자는 목표를 세워 제작한 「논술 개그」 시리즈를 손에 들고 신인 개그맨들과 무작정 학교로 돌진하여 유쾌한 배움의 장을 열다.

현재 대학로 명품 코미디 연극 「당신이 주인공」을 제작하고, 개그맨 안상태 1인 코미디 연극 「상태 좋아?」를 만들고, 개그 극단 김대범 소극장의 공연기획 실무를 맡고 있으며, 공연기획사 구운피망의 대표이기도 하다. 서울교육대학교 산학협동단과 MOU를 체결하고 「유쾌한 인성교육을 위한 개그 공연」 개발에 여념이 없다.

 

 

 

차례 

 

 

서문  웃음과 유머에 바치는 서

 

첫 날. 웃음을 모르고 논리를 따지남?

 

1마당논리와 뒤집기: 웃음의 코드에는 논리가 있다

2마당기계라서 웃음이 나와: 연역 논증의 웃음 코드 

3마당바보짓에 숨은 논리: 연역 논증의 웃음 코드 

4마당반전은 힘이 세다: 귀납 논증의 웃음 코드 

5마당성급한 일반화는 위험하다: 귀납 논증의 웃음 코드 

 

둘째 날. 오류를 알아야 논리가 보인다람쥐

 

1마당형식에 오류가 있어 웃는다: 형식적 오류

2마당논리 말고 심리!: 비형식적 오류

3마당너의 근거는 불충분해: 불충분한 근거가 문제가 되는 오류

4마당오류투성이 말장난 개그: 애매함과 가정에서 오는 오류

5마당우물에 독 풀어라: 반박을 미리 봉쇄하는 오류

 

셋째 날. 웃음에 관한 짧은 철학사

 

1마당때로는 독설도 웃기다: 쇼펜하우어의 웃음 철학

2마당웃고 춤추자!: 니체의 웃음과 부정의 철학

3마당인간은 왜 웃는가?: 베르그송의 웃음론

4마당유머는 반항이다: 프로이트의 유머론

5마당웃음, 너 되게 낯설다: 브레히트의 웃음론

 

에필로그. 망각에 갇힌 코미디 철학의 짧은 역사

 

 

 

 

책 속으로

 

<스크림>의 등장인물들은 전제의 참, 거짓에 상관없이 곧이곧대로 기계처럼 타당하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어패류 이름을 말하면 죽는다고 했으니 어패류 이름을 말하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크림>을 보고 웃었다면 베르그송의 웃음 이론이 적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스크림>의 등장인물들이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계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웃은 것입니다. 물론 베르그송은 『웃음』에서 연역 논증이니 논리적 타당성이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웃음 이론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기계적인 경직성이 바로 연역 논증의 기계적인 타당성과 유사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베르그송의 웃음 이론은 연역 논증과 깊은 관련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개그 코너가 다름 아닌 <스크림>입니다.(39-40쪽)

 

개그맨뿐만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웃음의 비밀을 연구한 철학자들도 웃음의 불일치 이론을 통해서 꺾기가 매우 중요한 웃음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순수이성비판』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바로 웃음의 불일치 이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칸트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1권 13장과 2권 8장)를 통해서 불일치 이론을 더욱 집대성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의 웃음 이론들은 비록 쉽게 읽을 만한 저작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 생활의 웃음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코미디언이라고 평가받는 찰리 채플린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평생 쇼펜하우어의 웃음 이론을 공부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쇼펜하우어 필생의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40년 넘게 읽어보려 애를 썼지만 끝까지 다 읽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비평가들은 채플린의 주옥같은 영화들 속에서 쇼펜하우어의 웃음 이론이 번뜩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67쪽)

 

이제부터 살펴볼 비형식적인 오류들은 논리가 아닌 마음이나 인간에 호소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의도나 주장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공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천만 명이 관람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매우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 논증은 전형적으로 대중이나 다수에 호소하는 오류를 보여줍니다. 다수가 봤다는 전제와 뛰어난 작품이라는 결론 사이에 필연적이거나 개연적인 연관성이 없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다수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소수자가 된다는 서러움과 차별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 논증은 두려운 마음이라는 심리적인 요소에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천동설이 지배하던 당시에 소수의 몇몇 학자가 지동설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면 다수의 사람들이 주장한 천동설이 진리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숫자로 진리를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대중이나 다수에 호소하는 것이 오류가 됩니다. (99-100쪽)

 

<큰 세계>에서는 뚱뚱함이 곧 세상을 살아가는 권력이다라는 엉뚱한 가정을 참인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고, <부산특별시>에서는 부산이 대한민국의 서울이다라는 거짓 상황을 참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일어나는 황당한 상황들이 웃음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그들이 성공하려면 단순히 거짓된 가정을 참인 전제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결론 역할을 하는 상황들이 매우 자세하고 디테일하게 제시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전제는 거짓임을 알고 있지만 그 전제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들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럴 때 웃음이 생기는 것이죠. (130쪽)

 

안어벙은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Made in Indonesia)에서 메이드(Made)를 독일어 식으로 소리 나는 대로 마데로 읽습니다. 이를 마치 회사 이름인 것처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언어를 애매하게 사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론을 이끄는 경우도 전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오류입니다. 논리학에서는 이를 애매한 언어를 사용하는 오류 또는 이중 의미의 오류라고 부릅니다. 위의 에피소드에서는 마데 인 인도네시아를 인도네시아의 마데전자로 번역했지만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인도에서 네시에 만들어진이라는 의미로 웃음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3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이 뭐 대단한 존재라고! 절망이 오히려 희망이라네! [철학자의 서재]

 

마크 트웨인의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김의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내가 보기에 진화는 엉터리다. 인간은 정말로 한심한 실패작이다.”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19쪽)

아동 작가에서 신랄한 독설가로

10년 전만 해도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모험 소설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70년대를 유년 시절로 보낸 또래들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읽은 추억담이 있을 것이다. 소설만 아니라 TV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도 방영됐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아동 모험 소설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사회 비판가, 아니 독설가로 더 유명하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대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는 유년기의 기억 외에 그에 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실상을 알고 크게 놀랐다. 오히려 사회 비판가로서의 말년 행보가 그를 이해하는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마크 트웨인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작가 커트 보네거트를 통해서였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직한 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나라 없는 사람>, 126쪽)

커트 보네거트의 소개에 따르자면, 마크 트웨인은 노년기에 이르러 미국이란 나라와 나아가 인류에게 희망을 잃은 듯하다. 실제로 그의 책 번역본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시기는 60세를 바라보는 시기였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부인 올리비아는 책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은 책 출간을 만류했다. 그래서 1904년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906년 처음 발간되긴 하였으나, 특히 성직자들의 반응이 두려워 250부만 찍어 주변 지인들만 돌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 사후 7년이 되어서야(1917년) 정식 출간되었다.” (마크 트웨인,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 할까>(박영선 옮김, 북인 펴냄) 203쪽, 내용 요약)

선행은 자기만족에 불과

그런 마크 트웨인이 보기에 애초에 인간은 기계에 가깝다. 이 기계가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아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이때 외부의 힘은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 그리고 교육도 외부에서 받은 영향의 결과물인데 그 영향의 대부분은 인간관계다(위의 책 90쪽). 즉 기질 차이만 제외하면 인간은 소속된 사회의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판단과 행동이 좌우된다. 여기서 인간관계는 사회적 관계로 풀어도 무방할 듯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구절이 연상된다.

마크 트웨인(1835~1910)



기질은 타고난 성질인데 이것만은 아무리 교육을 해보아도 없앨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기질에 압력을 가해 살짝 눌러 놓을 뿐이라는 것(위의 책 103쪽)이다. 프로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인간의 공격 충동을 영구히 없앨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조절하는 노력은 가능한데 그게 바로 (교육을 포함한) ‘문화’다.

 

“인간의 공격적 충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격적 충동을 전쟁으로 발산할 필요가 없도록 그 충동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입니다.” (…) “문화 발전은 어떤 종의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비교할 수 있고, 신체적 변화를 수반하는 게 분명합니다. (…) 문화 발전에 수반되는 ‘신체적’ 변화는 두드러지고 명백합니다. 그것은 본능이 지향하는 목표를 차츰 다른 데로 돌리고, 본능적 충동을 억제합니다.”

프로이트가 볼 때 본능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방향을 조절할 뿐이다. 마크 트웨인이 볼 때 타고난 성질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관리할 뿐이다. 그래서 양자 공히 인간 형성의 주요 기제로 문화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격렬한 논란은 선행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무릇 선행이란 누구에게나 지지와 동의를 얻는 보편적 행위, 즉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우하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힐링’하는 그런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의 의미를 굳이 궁색하게 말하는 건 당시 미국 사회상과 관련 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 종교계의 비난이 두려워 초판 간행수를 최소화했다는 게 단서다. 19세기 미국은 청교도 영향 하에 있었으니까, 사고방식과 행동 전반은 종교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주홍글씨>(1850)가 그렇고,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 <크루서블(The Crucible)>(1998)의 어처구니없는 마녀사냥도 그렇다. 행동강령이 외부에서 주어지면 행동을 규제하는 건 당연지사고 규제의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니까.

“오로지 타인을 위해 선의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네, 온전히 우선 의무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 자기희생의 행위를 하라는 식의 요구를 내놓는 거야. (…) 인간의 내부에 깃든 절대 최고의 군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 인간들 모두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서 그 절대군주에게 호소하는 것이지. 그런데 거기가 틀리지. 다른 무리들은 교묘하게 속여서 몸을 바꾸니까.”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108쪽)

때문에 애써 밖에서 찾지 말고, 나를 진정 기쁘게 하는 행위를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타인이 느끼는 감사함, 고마움은 부차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일단 선행의 이유가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야 한다. 나아가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행에서 만족감(일종의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유도해야 한다.

“스스로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이웃과 넓게는 사회에도 선을 뿌리는 행위가 있어야 해. 그래서 그런 행위 속에서 우선 최대의 기쁨을 발견해낸다는 경지에 오르도록 뜻을 두어야겠지.” (위의 책, 106쪽)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선행에서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은 일정 수준의 도야를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기쁨이 반드시 선행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일상다반사니까.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자기만족의 전제 – 타인의 행복, 상호 존중

그런데 읽으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선행의 원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어떤 행위를 해야 나도 만족할 수 있으며, 또한 타인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타적 행위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주도적 행위라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 될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배님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가져왔다. 다소 길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어서 인용한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묻는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

이 가르침은 이미 서(恕)라는 글자 안에 다 들어 있다. 서(恕)는 마음(心)이 같다(如)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는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라’는 식의 긍정형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형으로 표현했을까? 공자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의 가르침 거의 모두가 부정형이다. 우선 긍정형으로 가르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자가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했다면, 세상 끝장나게 돌아간다. 알다시피 우리는 그리 도덕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힘이 센 나쁜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가진 좋은 것을 빼앗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공자가 거기에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하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빼앗게 될 것이다. 착한 사람은 자기 것을 남을 위해 내놓고 싶을 것이다. 마침 착한 사람과 게임을 하게 되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돌려받겠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을 만나서 자기 것을 내놓으면 그것으로 거래는 끝이 난다.

반면에 부정형으로 하면 사정이 바뀐다. 누구도 자기 것을 남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 따라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대로 남을 대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부정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나쁜 사람이 더러운 게임을 하고 싶더라도, 이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런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나쁜 짓을 그만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부정형은 무엇보다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남이 나에게 해를 끼쳤을지라도, 내가 보복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줘라’는 말의 숨은 뜻이다.”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박사), ‘철학 강의(15) 사람의 도움원리’ 중에서 인용, ☞바로 가기 다음(DAUM) 카페 ‘fridaybeer’)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인류사에 등장한 모든 참혹한 반인륜 사건, 인권침해의 공통점은 이 가르침과 상반된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강요에 의해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친위대장교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강제로 타인의 강압에 의해 성행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광주 인화학교 직원은 장애인 학생을 성추행한다.

결국 자기만족은 타인에게 억압이나 폭력이 아니어야 하며 타인의 행복이 전제될 때 비롯한다. 그리고 타인의 행복은 내 즐거움을 원해서 나 스스로가 선택한 행동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 주도적인 선행은 타인의 행복을 동반할 수 있다. 결국 이 원칙은 상호 존중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인권침해 예방의 원리로서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착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책 전반에서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변변치 못한 존재임을 누차 강조한다. 허나 책을 읽고 나서는 그 일관된 냉정한 태도야말로 인간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 위한 역설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정녕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다면 그런 주제에 관한 책을 쓸 의욕조차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마크 트웨인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붙어 있는 화려한 수사와 막연한 믿음을 제거해야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 섣부른 희망은 결국 착각인데 이 착각이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조급한 희망의 결과는 상반된 현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직면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결과적으로는 절망의 과잉 상태에 빠진다.

지난 대선에서 나는 정권의 변화를 염원했다. 하지만 야당이 실력 없고 긴장감 없고, ‘허당’이라는 인식은 이미 지난 총선과정에서 확인됐고, 그 불안의 전조는 민선 5기 지방선거의 승리를 해석하는 당시 야당지도부의 태도에서 조짐이 보였다(기존 여당이 싫어서 반대급부로 찍어준 것뿐인데 자기들이 잘해서 이긴 거라고 자화자찬 하다니!). 하지만 이 정권 하에서 사는 게 하도 고통이라 이번만큼은 무조건 야당 단일 후보에 ‘올 인’했다. 그 후 회자되는 단어는 ‘멘붕’이다. 대선 이후 한 달 넘게 미디어의 정치면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나는 뉴스를 다시 보는데 2주일 걸렸다).

어떻게 보면 멘붕은 좀 더 냉정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선택한 착각의 결과일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해서 조급히 선택하는 미완성의 희망은 후폭풍이 거세다. 그럴 바에야, 냉정을 유지하는 것, 그 버티는 힘이 오히려 희망의 싹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버팀의 시작은 나와 타자가 동시에 행복해지도록, 거기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 프로그램으로 제안해야 한다. 상호존중과 연대 그리고 냉정! 마크 트웨인의 독설에서 얻은 교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알렙 간행) 두 번째 포스팅...... 이번엔 구보 씨가 뱀파이어를 생각합니다. 이 글은 e 시대와 철학에 한 코너로 연재되었던 것으로, 책으로 엮을 때 개고되었습니다. http://bit.ly/1aI9IhS

 

 

구보씨 뱀파이어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

이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09)에 나오는 대사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김옥빈 분)가 자신을 책망하는 상현(송강호 분)에게 내뱉는 말이다. 상현도 뱀파이어다. 그는 가톨릭 신부였는데, 수혈을 받고 뜻하지 않게 뱀파이어가 되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지만,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의 피나 자살하는 사람의 피를 받아먹는다.

반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당당하다. 그녀는 신선한 피를 위해 거리낌 없이 인간을 죽인다. 그녀는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녀가 인간을 죽이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태주는 상현의 어정쩡한 태도를 비웃는다.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주는 건 그렇게 아깝냐?”

이것도 <박쥐>에 나오는 대사다. 눈 먼 노(老)신부(박인환 분)가 자길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길 거부하는 상현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서라도 다시 이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렇게도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상현은 그러한 욕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피를 탐하는 노신부를 찔러 죽인다. “가서 쉬세요.” 그러면서 상현은 그가 죽인 노신부의 심장에서 솟아나는 피를 빨아먹는다.

상현은 스스로의 욕망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면서도 그런 욕망의 탐닉을 막으려 든다. 그는 뱀파이어지만, 윤리적이고자 하는 뱀파이어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정녕 윤리적일 수 있는가? 상현의 말과 행동이 블랙 코미디가 되는 바탕은 여기에 있다. 그는 비닐 팩에 피를 담아 냉장고에 두고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조금 빨아먹다 버리는 건 일종의 인명경시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블랙 코미디의 무대는 영화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틀림없는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게다가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물질적 지배와 안락만이 아니라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돈의 위력을 가진 이들은 이제 인간 세상의 한 부류로 자리 잡는다. <트와일라이트> 시리즈의 뱀파이어가 어둠과 경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인간 사회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닭을 잡아먹는 여우가 동네에 내려와 닭들과 동거하며 닭들을 관리하기에 이른 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닭이 아닌 여우가 되고자 한다. 기왕이면 멋지고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한다. “뱀파이어면 어때?” 사람들은 피를 탐하는 <박쥐>의 노신부처럼 되뇐다.
영화 ‘박쥐’의 한 장면구보씨가 DVD로 영화를 여기저기 돌려보아 가며 여기까지 얼기설기 썼을 때다. 어느 틈엔가 옆에 와 있던 Y가 끼어든다.

“구보야, 너는 어떻게 영화를 봐도 그렇게 기괴한 영화만 보니? 그 박쥔지 생쥔지 하는 영화는 벌써 몇 번째 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참 취미도 괴상하다, 너.”

“어, 미안. 시끄럽다면 헤드폰 끼고 볼께. 난 곧 이 영화로 강의도 하고 글도 써야 하거든. 이제 겨우 한 페이지 썼어. 강의 노트는 아직 시작도 못했고…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영화 진짜 볼 만한 영화야. 박찬욱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다구.”

“글쎄, 난 박찬욱 좋은지 모르겠더라. 그 사람 영환 어딘지 좀 구겨진 것 같애.”

“하하…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어딘가 구겨진 마음이 없다면 영화건 문학이건 불가능하지 않겠어? 구겨진 주름에 세상이 이렇게 또 저렇게 담기고, 그걸 풀어내는 데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치, 그럼, 주름 많은 사람은 다 예술가겠네? 박찬욱은 그것도 아니고 이제 쉰이 다 된 얼굴이 뺀질 통통하던데?”

“유심히도 봤다. Y, 너 은근히 박찬욱 좋아하는 건 아냐?”

“아니라니까. 난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 싫어해. 그런 걸 왜 우리가 영화에서도 봐야 하니?”

“외면한다고 그런 면이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그런 걸 극적으로 제시해서 우릴 자극하고 정화(淨化)하는 게 필요한지도 몰라. 거기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것이고 말이야.”

“기껏 뱀파이어가 그런 거야? 덜떨어진 서양 귀신이 피 빨아먹는 게?”

“Y야, 그게 꼭 그렇진 않다구.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어.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런 걸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원래 뱀파이어는 경계적 존재였어. 이런 존재에게는 정상적 존재에게선 찾기 힘든 갈등과 문제가 있다구. 생각해 봐. 뱀파이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라구 할 순 없어. 그렇다구 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네 말대로 귀신인 것도 아냐. 분명히 몸뚱이를 가진 생명체라구. 그러나 짐승이라고 할 수도 없어. 말하자면 일종의 괴물인 거지. 경계적 괴물. 그래서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흥미로운 얘기들이 나올 수 있는 거야. 박쥐라는 동물도 원래 경계적 존재잖아. 그런 점에서 이 영환 우리말 제목이 영어 제목보다 나아.”

“영어 제목은 뭔데?”

“Thirst. 갈증… 너무 평면적이지. 하긴 뭐, 저주스런 갈증, 그런 정도의 뜻이고 이미지겠지만.”

“저주스런 갈증? 거기 저주는 왜 붙어?”

“Y야, 이거 뱀파이어 영화라구.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 살잖아. Y 네가 뱀파이어가 됐다고 생각해 봐. 피를 빨아먹는 게 기꺼운 일이겠어? 근데 이걸 욕망 일반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 욕망이라는 게 대부분 희소성이 있는 대상을 향하는 거고, 그래서 누군가를 밀쳐내야 충족될 수 있으니까. 때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해서 말이지. 그거 일종의 피 빨아 먹는 거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고 또 만일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면 저주스런 거지. 저주스런 욕망, 저주스런 갈증.”

“구보야, 그건 정말 난센스고 오버센스야. 네 말은 우리 모두가 일종의 뱀파이어란 말이잖아. 그게 말이 돼?”

“내 참, Y야, 그건 내가 좀 전에도 했던 말이야. 넌 대체 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한 거니? 내가 그랬잖아, 뱀파이어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다른 생물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꼭 사슴피를 받아먹고 곰의 쓸개즙을 빼내먹는 인간들만 뱀파이어가 아니라구.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해 먹어치우는 방식은 정말 잔인한 거야. 뱀파이어가 차라리 고상할 정도지. 입가에 피 안 묻히고 점잖은 척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한다고 해서 잔인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당하는 동물 입장에서는 더 기가 막힐 노릇 아닐까. 사람들이 사는 부근엔 사육당하는 동물 이외엔 대형 동물들이 남아나질 않아. 특히 육식 동물들은 거의 멸종이야. 경쟁자가 없는 뱀파이어가 인간인 거지. 그뿐만 아니라구. 인간은 인간도 사육하고 착취하잖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말이지. 서로가 서로 피를 빨아먹는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이 박쥐라는 영화에는 서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이 있어. 상현이 제 피를 태주에게 먹이면서 태주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 말이야. 실은, 박찬욱이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머리 속에 그려뒀던 장면이 바로 그거라는 거야. 그걸 중심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거지. 재밌잖아?”

“재밌다구? 구보야, 넌 정말 이상해. 잔인하다고 하더니 재밌다는 건 또 뭐니? 잔인한 게 재밌다는 거잖아. 도대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소리야? 박찬욱이나 너나 괜한 과장을 해서 잔인한 면을 만들어내고는 그걸 재밌다고 즐기는 거 아냐? 그건 가학 취미라구. 니들이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거구,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여기는 거야. 니들이야말로 뱀파이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도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겠어? 안 그런 척 하는 너희들도 다 뱀파이어다, 이렇게 세상에 대구 외치는 거잖아. 그거 꼬리 잘린 여우 심정인 거야.”

“아니, Y야, 난 가학적인 걸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욕망의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거야. 박찬욱은 그런 걸 영화로 표현해 보는 거고… 박쥐의 상현을 봐.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구.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수렁에 말려들어가면서도 거기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 그가 악을 행하는 건 다른 악을 막기 위해서야. 가령 뱀파이어가 되려는 신부를 죽인다든가, 태주를 학대한다고 생각하고 강우를 죽인다든가 하는 일이 그래. 그리고 그런 게 더 큰 악을, 파국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자 태주와 함께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하지. 물론 내 얘긴 그런 결말이 좋다거나 필연적이라는 건 아냐. 중요한 건 그렇게 벗어나려는 자세와 시도가 있다는 거지. 그게 일종의 희망 아닐까. 저주받은 갈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 같은 거…”

“구보야, 내가 보기엔 욕망을 적대시하는 네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된 거야. 구원은 무슨 구원이니? 그건 병주고 약주는 것일 뿐야. 옛날부터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작자들이 해 온 짓이라구. 욕망이 있으면 잘 충족시킬 길을 찾아야지, 억지로 억누르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그게 없어지니? 사실은 그렇게 해놓고 뒷구멍으로 지들만 즐기는 놈들이 따로 있잖아. 구보, 너 같이 정신 못 차리는 철학자나 괜히 구원이니 뭐니 하며 헛물켜는 종교인들이 거기 들러리를 서고 말이야.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 구겨지는 거야. 박찬욱도 철학과 출신이지? 그것도 가톨릭 계통 학교를 다녔잖아. 그래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

“어, Y야, 그거 인신공격이야. 그리고 근거 없는 얘기라구. 박찬욱이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철학과를 나와서 영화에 조금이라도 더 깊이가 있는 걸 거야. 박찬욱 영화는 생각보다 치밀하고 섬세하다구. 예를 들어 여기 이 장면도 봐. 장면 배치나 소도구 하나까지도 예사롭지 않아. 동양과 서양, 근대와 현대 따위를 섞어놓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구.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까지 경계적인 면을 찾아 표현하려 한 거야. 한 오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 자, 이걸 좀 볼래…”

“됐거든. 구보야, 나 바쁘거든. 그리고 그 영화엔 볼만한 남자 배우 하나 없이 다 구보 너처럼 칙칙한 애들만 나와서 관심 없거든. 그러니 너나 열심히 보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