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별 1 - 나로 5907841 푸른숲 어린이 문학 18
이현 지음, 오승민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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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해서 꼭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 동화 속에서 강하게 흐르는 맥이다.  

1. 로봇은 사람이 만들었다.
하지만 로봇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며 사람을 닮아간다.
로봇에게는 마음이 있으니 이미 철조각을 넘어선 생명이 되었다.  

2. 당연히 새로운 흐름이 생겨나게 된다. 
자신들의 독자적인 삶을 주관하려는 로봇들은 로봇의 별로 떠나려 하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횃불들이 되려 한다.  

이상하게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연상된다.
1.의 경우에는 신의 손에 만들어진 사람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려는 것처럼 들리고,
2.의 경우에는 한때 광화문을 뒤덮었던 촛불들이 스쳐지나간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그리 만들어졌다 해서 꼭 그리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들린다.
1.의 경우를 종교적으로 본다면 불경할 것이고,
2.의 경우를 정치적으로 본다면 (심하게 우향우를 한 시각에서는) 좌경으로 볼 것이다.  

로봇의 별은, 본격 SF동화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사고의 폭을 넓히는 동화다.
한참 시간이 흐른 미래의 상황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정확한 예측이 될지도 모른다.
사람은 너무도 욕망이 강한 존재라 이보다 더한 상황을 가져올지도.  

내 아이가 읽을 때는 흥미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서 그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상력은, 곧 힘이 될 거라 믿는다.
내게 주어진 상황을 무조건 부정하라는 말을, 작가는 하지 않는다.
다만 불합리한 상황이 나를 촛불로, 횃불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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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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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었던 한 남자 이야기, 라고
이 소설의 표지는 큼직하게 써 놓았다.
그는 이전에는 정말 걷어차 버리고 싶은 삶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분수령을 거치면서 그 삶을 진정으로 되찾고 싶어하게 되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지금 내 삶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건 누가 만들어준 삶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온 삶일 테니까.  

그러니까 진정 '나'를 위한 삶이라는 건, 사실 모순일 수 있다.
내가 살아온 길에서 나로 인해 세상에 나온 생명과,
그 생명을 함께 만든 사람 역시 기실 '나'를 위한 삶 속에 동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해서 걷어차 버리게 되면
끔찍하게도 '나'는 사라진다.  

우연찮게도 이 소설 속에는 나와 비슷한 인물이 있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읽기도 하고, 다시 그를 끌고 나와 내 마음을 읽어보았다.
정체되어 있는 삶들이 이 세상 어느 구석에도 널려 있을 테니
소설 속 한 인물이 나와 비슷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원한다면 위로를 받을 수 있겠다.  
'나'를 위한 삶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삶 전체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다시 만들어가야 하는 인물도 있었으니까.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한은 끝도 없으며 지워지지도 않는다.
적어도 소설 속 주인공의 경우는 그랬다.
이 소설은 작가가 원했다면 더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분명 이 주인공은 또 한 번의 분수령을 넘을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그 어느 삶보다 정체된 삶으로 마감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의 내 삶, 사랑할 수 없다 해도 노력하는 게 옳다.
그래야 정체를 극복할 길도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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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 3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5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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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하느님의 뜻일까, 생각해보는 소설이었다.
1권부터 이야기는 진행되었지만 3권에 이르러서는
과연 정의가 힘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끝까지 정의를 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할까,
읽는 것만으로도 삶이 거칠어진 사람들의 아픔이 느껴지는데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감탄스러웠다. 
물론 살아남는 데는 남다른 것이 있어야 했다.
그건, 포기하지 않는 신념, 이었다.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불행한 선택을 했던 전 백작의 딸 엘리에너는,
결국 부친의 유언을 접고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젖먹이를 품에 안고 그녀는 길을 떠났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의 여자가 젖먹이까지 안고 길을 떠날 수 있다는 건,
(물론 실제의 인물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서도 얼마나 감동스러운지! 
그는 한때 돼지 같은 악당에게 인생을 짓밟혔다는 저주에 사로잡혔지만
그건 오히려 기회였던 게 틀림없다.
그 불행을 딛고 일어설 용기가 그녀에게 있었고,
그 용기를 스스로 저버리지 않는 신념도 있었던 것이다.  

악당의 최후는 꼭 드라마틱해야 할까, 하는 문제도 마음에 걸렸다.
물론 악당의 최후는 있어야 하고, 그것도 평안한 말로가 아니어야, 이야기는 산다.
또 정의의 미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악당이 꿋꿋이 살아남는 과정에서 부질없이 죽어가는 삶들은 어떻게 하나. 
엘리에너의 숙적 윌리엄의 최후는 비참하고 끔찍했지만
나는 오히려 엘리에너처럼 강단을 갖지 못해
어이없이 희생당한 많은 사람들의 삶이 안타까웠다.  

또 하나, 무척 절묘한 인물상이 하나 있다. 
정의로운 수사 필립 앞에 나타난 인물, 피터 부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자면 이렇다.  

 

 
 

피터 부주교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기독교인 중에서 가장 나쁜 부류에 속한 사람이다, 필립은 생각했다. 그는 부정적인 것이면 모두 포용하고, 금지된 일들이라면 무엇이든 행동에 옮기고, 온갖 형태의 극기를 강요하고, 모든 위반 행위에는 엄격한 처벌을 요구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모든 동정심을 무시하고, 그 자비를 부인하고, 사랑의 행위 규범에는 극악무도하게도 불복하고, 공공연하게 예수의 너그러운 율법을 조롱하는 자였다. 그가 바로 바리새인이 아니겠는가, 필립은 생각했다.

 
   

그런 사람, 어디나 꼭 있다.
그들은 옳고 그름에 꽤 정통하기에 말로는 도무지 이겨먹을 수 없다.
더구나 그름에 속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던질 돌을 들고 있다.
그름에 속한 사람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따지기는 하나,
그건 논리 따지기 좋아하는 습성의 발로일 뿐, 아량을 베풀 수는 없다.
그에게는 그런 자질이 없으므로.  
그들이 정의롭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정의가 힘을 발할 때
그 속에 속하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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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 2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5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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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 들어서면서 글의 호흡은 더 빨라졌다.
대성당도 위기를 전면으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한층 우뚝서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고비는 위기이면서도 기회인 것이다.
몰락한 백작의 딸 엘리에너도 무참히 쓰러졌지만 거기서 다시 시작했다.
그녀가 고귀한 백작가의 딸로만 평생을 보낼 수 있었다면
기회로 잡아 일어선 삶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위기에 넘어진 나를 위해 기다리고 선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
또, 그 반면에 쓰러지고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날 위해 서 있지 않았지만
내가 누구의 소매라도 붙잡고 일어설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얼마 전에 읽은 동화처럼 기다리고 섰다가 손을 내밀어준 듯한 세상은 없는 것이다.
내 주위의 누군가는 말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무 쉽게 굴러가면 불안하다고.
너무 쉬운 진행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백작의 딸도 날 때부터 손에 거머쥔 부귀와 영광이었지만 결국 다 잃고 무너졌다.
하지만 거기서 일어서서 다시 살아남았다. 
최고의 권력자 왕이라 하더라도 그처럼 엎치락뒤치락 반복되는 반역 속에서는
행운과 불운이 불안한 동거를 하는 법.
수도원장쯤 무릎 아래로 보던 왕도 한순간 포로가 되어 쇠사슬에 묶이는데
누군들 쉬운 인생이 보장될 수 있을까.  

다만 필립 같은 인물도 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악인과 손을 잡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는 악이 물든 전장에서 고뇌한다.
자신이 그 속에서 아무도 구할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한다.
마치 영화 미션의 마지막 장면과도 같았다.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을 섬기는 거라고 확신했던 필립이지만
그는 자신이 살육 속에서 그 어떤 생명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너졌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쓰러진 엘리에너가 일어서듯, 대성당이 다 무너진 폐허 속에서 세워지듯,
톰이 헤어진 엘렌을 만나듯, 권세 당당한 왕이 포로가 되듯,
필립이 사악한 무리들 속에서도 성당의 기초를 만들어내듯,
모든 건 움직이고 변한다. 그것이 무엇을 향해 가는지, 지켜볼 일이다. 
아마 일어선 엘리에너도 다시 쓰러질 때가 있을 거고,
톰도 다시 만난 엘렌과 헤어질 때가 있을 거고,
대성당의 기초가 다시 폐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의 움직임 속에서 죽고 살아남는 삶들은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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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5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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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보면 누군가에게 감정이입이 되기 마련이다.
이 엄청난 두께의 소설에서는 띠지의 인물들이 나열된 것처럼
여러 갈래의 감정이입의 통로를 만들어놓은 것 같다. 
그리고 대지의 기둥을 세워 올릴 주인공으로는  
아마 석수장이 톰이 유력한데... 왠지 나는 그에게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몇 가지 짚이는 데가 있다.
그는 식구들을 부양하려는 의무는 강했으나 성당을 건축하고픈 욕망이 너무도 강했다.
결국 식구들이 길거리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상황에 처했고 아내는 아이를 낳다 죽었다.
하긴 그 욕망이 없었더라면 이 장대한 소설도 만들어질 수 없었겠다.
한데 나는 왜 식구들을 길거리로 나앉게 했다는 게 이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을까.
게다가 아내를 잃은 날, 그는 숲속의 여자 엘렌를 받아들였다. 
왜 거기서는 죽은 아내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톰이 그처럼 어처구니가 없는 건지. 
대성당을 짓게 된 데는 엘렌의 아들이 혁혁한 공헌(!)을 세웠는데
그럼에도 엘렌과 아들은 숲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화나는 지점.
또 하나 지적하자면, 톰은 미련하고 덩치만 좋은 맏아들을 두둔해왔는데
그건 사실 내게는 가장 밉살스러운 점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우습게도 소설의 큰 줄기는 다 놓치고 세세한 줄기에서
감정을 쏟아놓고는 톰이 미워, 하고 말하는 독자가 됐다. 
나는 일찌감치 톰의 행로에 대해선 포기를 하고
(그러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일지도 모를 사람을 내려놓고는)
수도원장이 된 젊은 필립의 움직임을 필사적으로 쫓게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꼼꼼이 따라가며 그가 어떻게 성당을 건립하게 되는가,
유심히 지켜볼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어제 미사에 참석하면서 괜스레 이 소설이 생각났다.
누군가는 내가 다니는 이곳이 개신교의 교회였다가 가톨릭 성당이 되었다는 데 분을 품던데,
글쎄 어떤 절차로 종교의 색을 달리한 집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종교가 사실 독이 된다는 생각은 한다.
빅토르 위고는, 종교는 사라지나 하느님은 영원하다, 고 말했고
빈센트 반 고흐는 한때 열렬한 복음주의 전도사로 일했으면서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도 동감한다.
종교의 색이 짙어진 곳에는 그것이 과연 하느님의 색일까,
인간의 색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거라 짐작한다.
이 소설에서처럼 소위 신의 집을 짓는 것에도
이처럼 권모술수가 물밑에서 작업되어야 하다니 씁쓸하다.
아니, 당연한 것일까.  
2권을 읽으며 좀 더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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