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경험 - 김형경 독서 성장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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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전 책, 사람풍경,을 보다가 만 채로 오래도록 서가에 꽂혀 있었다.

그때는 그 책에서 얘기하는 모든 것이 따분하고 지루했고 재미가 없었다.

이 작가의 심리 관련 책은 별로 보고 싶지 않네,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이 책이 검색되었다.

뭘 하려다 내 눈에 밟혔는지 몰라도 나는 이 책을 설 음식을 하러

시댁에 가면서도 가방에 넣었다.

 

한데 꽤 오래 붙들고 있었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내용도 이해하기 쉽고 재미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전력으로 걷는 산책을 하다 숨을 돌리듯 그렇게 뚝뚝 끊었다 읽었다를 반복했다.

 

실은 이유가 있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더 정확하게는 두려웠다.

나는 웬만하면 나의 내면을 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다채로운 감정들이 우수수 떨어져 쌓일 때는 그걸 한꺼풀씩 들어내고

넌 정체가 뭐더라, 하고 갸웃거리며 묻는다.

대체로는 익숙하고 고질적인 감정들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웬만큼은 나를 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며 살짝 어깨가 뒤로 밀렸다.

앉아서 읽으니 뒷걸음질을 치듯 물러난 것이랄까.

아, 그게 그런 스토리를 품고 있어 그렇게 드러나는 거였군.

이해와 동시에 수모 같은 비슷한 감정이 슬몃 끼어들었다.

누구에게 들킨 것도 아닌데,

다만 둔하지 않은 척하나 둔하기 짝이 없는 나에게

이해된 것뿐인데,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러지 않았다면, 같은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이럴 때.

인생은 돌릴 수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몇 차례 아팠고, 아무도 모욕하지 않는데도

혼자서, 이건 수모감인가? 하고 의아해하며 책을 다 읽어냈다.

작가는 아마 여러 군데 칼럼기고한 내용을 모은 것이지만

각 꼭지는 호흡이 짧아서 읽고 숨쉬며 성찰하고

다시 다른 꼭지에 들어가기 좋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을 읽을 때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다 읽고 나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가벼워졌다.

어차피 글러먹은 인생 어떻게 하겠어, 따위의 포기는 절대 아니고,

그렇게 상처가 주는 삶에서의 모습이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 그래서 내가 늘 그런 류의 사람과는 어려웠구나, 하고 이해하면서

나의 고단함이 다시 되짚어졌고, 다독이고 싶어졌다. 

그것이 내게는 일종의 아킬레스건이니 그쯤 하나 안고 살면서

불편하고 때로 아프기도 하는 게 뭐 어떠랴 싶었다.

 

누구나 고유한 상처가 있는 거다.

그건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질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른 질료는 그저 다를 뿐이고,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 내 것을 만들어내면 된다.

그러면 된다.

 

*

성당에서 성서백주간이라는 걸 한다.

성서를 읽고 각자의 묵상을 나누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나는 성경으로 독서모임을 했구나 싶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생각 없이 서로 묵상을 나눌 뿐이다.

한데 그 과정에서 조금씩 내밀한 조각들이 수면 위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그 조각들이 얼마나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꼭 틀어박혔던

내밀한 다른 조각들을 꺼내게 하고 따듯하게 보듬어주는지, 나는 안다.

물론, 이 독서모임만큼 역동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성경을 읽을 뿐인데, 왠지 세상을 모두의 눈으로 보고

그 본 것을 종합하여 조금 쭈글거리는 나를 매만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 나도 근 몇 년을 독서모임을 해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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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을 보면서 뭔가 시원한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얼마 전 성당 아이들과 다육이 테라이움을 만들어 나눔제를 했다.

작은 다육이를 유리용기나 토분에 아담하게 심어 저렴하게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기부하는 걸로 성탄제를 대신한 것인데,

꽃시장을 들락거리면서 준비하는 과정이 무척 난감했다.

이름을 모르는 다육이는 인터넷을 뒤져 찾아보려는데

당최 실물을 식별하기 어려웠던 것.

 

마찬가지로 식물이 시름거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도통 그 이유를 알아낼 수가 없다.

누런 잎이 보이면 뭐? 하고 찾아보지만

그건 무척 일반적인 이론이라서

더 구체적인 사안, 예를 들어 개운죽에 흰줄무늬가 죽죽 생기는 현상,

혹은 아데니움의 잎끝이 갈변되며 말라가는 건

책의 어떤 대목에서 그 해당 현상을 찾아낸담.

 

우리 집에서 정말 꼼짝도 않고 일 년을 버틴 식물들이 있다.

하나는 팔손이, 또 하나는 녹보수.

팔손이는 손가락이 여덟이어야 하는데 우리 집에 올 때부터 다섯 손가락밖에 없었다.

게다가 녹보수는 정말이지 꿈쩍도 않고 그렇다고 시드는 것도 아니고

살았나 죽었나 물어보고 싶을 지경.

 

하도 답답해서 어느 날 둘을 나란히 놓고 말을 걸었다.

너희들 뭐~ 하는 거니?

뉘앙스로 굳이 그 행간을 말하자면,

대체 왜 이래? 이 엄동설한에 베란다로 확 쫓겨나고 싶어?

이쯤되는 노여움이 있었던 거다.

 

한데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나 깜짝 놀랐다.

둘 다 드디어 꼼짝거렸던 거다.

연둣빛이 생생한 팔손이의 손과 길다란 녹보수의 움이

꼼지락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매일 들여다보며 응원했다.

아니, 넌 다섯손이가 아니라 칠손이네?

넌 완전히 기지개를 켜는구나?

그러면서 팔손이 공부까지 했다.

난 우리 집에 있는 것이 팔손이가 아닌 다른 식물인가 보다 하며

잘못 샀나 하고 체념했는데, 알고 보니

팔손이는 다섯손이부터 구손이까지 그때그때 상황따라 다를 수 있었다.

그걸 알고 난 후에는 스스로 뿌듯해지며 그 이유까지 만들어냈다.

내가 손이 많아질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 거지? 하면서.

 

그 후에 이 책들을 다시 한가롭게 들여다보는데, 웬걸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예전과 달리 내용이 분명하게 다가오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한데 묘한 자신감으로 쓱쓱 페이지가 넘어갔다.

다시 말하면, 이제 정말 취미용 책이 된 것이다.

그렇지, 이런 내용을 공부하려들면 얼마나 힘든데, 하며

기분이 마냥 좋아졌다.

 

그러니까 이런 책들은 정말 식물의 속내를 알 수 없을 때는

보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이해는커녕 식별력조차 떨어지니까.

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런 것.

식물을 숱하게 이해 못하고 내 손에서 장례치르면서 보낸 시간들이

이 책을 재미있게 하는 거라, 지금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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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는 야구에서 투수와 포수를 일컫는다고 한다.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다, 는 대사가

영화 속에 나온다.

넌 던져. 난 받을게. 뭐 이런 식.

하긴 그게 세상의 운용법칙 같은 거다.

던지는 사람만 있어서는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

받는 사람만 있어도 마찬가지.

 

문제는 내가 내 역할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

포수로 포지션을 잡고 앉았는데,

아냐 난 던지고 싶은 사람이란 말야, 하고 갈망한다면

그보다 큰 불행이 어디 있을까.

예전에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나오는 <마지막 4중주>에도

그런 삶을 목조르는 갈망이 나온다.

나는 왜 늘 제2바이올린을 해야 하지?

이거 다른 사람에게는 우스울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충분히 울분을 쌓게 한다.

 

한데 영화 속의 두 아이는 서로 그런 갈등에 휩싸이지는 않는다.

포수는 충분히 좋은 공을 받고자 하는 데 열망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투수는 자기의 공을 받아낼 수 있는 포수를 열망했으니,

이런 갈등으로 스토리라인이 만들어지진 않았다.

 

누구나 삶을 혼자 살다가 떠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배터리의 관계를 살아보는 건 아마 삶에서 큰 행복일 것이다.

다만 삶의 시간들에서 배터리가 한쪽 극으로 잘 살아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게 탈.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에서 정희진 여성학자가 소개한

윤동주 시인의 글이 절묘하다.

"동무는 괴로운 존재요... 우정은 위태로운 잔에 떠 놓은 물이다."

나이 다 들어서도 친구에게 절교선언을 들었다 하는

이 여성학자의 삶보다 내 삶이 덜 위태롭지 않다.

나도 작년에는 사랑보다 우정에 더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 시간은 의외로 사랑에 배신을 당한 것만큼 고통스러웠다.

 

배터리에서 음과 양은 그 어느 것도 우위가 없다.

사실 삶에서도 그래야 한다.

투수와 포수, 솔리스트와 반주, 발표자와 작성자, 혹은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등등.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짝을 이뤄야 하는 포지션들이 있다.

그것에 우위를 두는 건 원래 그 포지션이 내포했던 가치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나 세대가 부여한 새로운 편견.

 

그걸 편견이라 생각하고 순수한 배터리의 양극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 삶이라는 게 훨씬 더 가볍고 수월할지도.

하지만 괴로운 존재임에도 동무를 사랑하며,

위태로운 잔에라도 물을 떠 놓아야 하는 게 사람의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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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빨간 열매를 주웠습니다 - 황경택의 자연관찰 드로잉
황경택 글.그림 / 도서출판 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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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고 사랑스러운 책. 가만 보고 있으면 나뭇잎 하나, 열매 하나, 찬찬히 보며 연필로 명암 줘가며 그리는 저자의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생명의 한 부분을, 비록 잎사귀 하나지만 꼼꼼히 관찰하는 것이 남의 콧구멍쯤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데 그건 잎조차도 생명처럼 느껴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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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을까?
윌리엄 C. 버거 지음, 채수문 옮김 / 바이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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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피우는 식물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이 책의 두툼한 분량 속에서 흥미롭게 읽고 즐겼다.

 

무엇보다도 나는 식물을 공부하면서 생명의 순환을 배운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줄기에 이어 이삭을 낸다.

그 이삭에서 낟알이 영글어 사람은 추수를 하게 된다.

이게 엊그제 읽은 마르코복음의 한 대목.

 

한데 이 책을 읽으며 그 대목과 겹쳐졌다.

꽃을 피우는 식물은 빠르게 번식하고 빠르게 성장하여

겉씨식물보다 더 빨리 썩는다. 

또 땅에 스며들어 많은 양분으로 그 존재가 변화되어

많은 종들을 먹여 살린다.

생명의 순환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한참 읽고 나니 세상이 조금 달리 보였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인지 실감한달까.

내 삶의 길이라는 게 있다면, 그 길에서 고개를 좀 더 쳐들고

혹은 좀 더 떨구며 내 길을 다른 생명을 둘러보며 갈 수 있는 방향으로

좀 더 틀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식물을 공부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공생이다.

담쟁이의 꽃말이 공생이라는 걸 얼마전에 알게 됐는데,

순전히 기생하며 산다고 오해받았던 담쟁이의 삶마저도

실은 공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관계 속에서는 순전한 기생이란 없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도 스쳤다.

 

식물 속에서 사람의 살 길을 보게 된다.

그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이 땅에서 함께 사는 생명이니

그 본연의 길이 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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