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는 야구에서 투수와 포수를 일컫는다고 한다.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다, 는 대사가

영화 속에 나온다.

넌 던져. 난 받을게. 뭐 이런 식.

하긴 그게 세상의 운용법칙 같은 거다.

던지는 사람만 있어서는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

받는 사람만 있어도 마찬가지.

 

문제는 내가 내 역할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

포수로 포지션을 잡고 앉았는데,

아냐 난 던지고 싶은 사람이란 말야, 하고 갈망한다면

그보다 큰 불행이 어디 있을까.

예전에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나오는 <마지막 4중주>에도

그런 삶을 목조르는 갈망이 나온다.

나는 왜 늘 제2바이올린을 해야 하지?

이거 다른 사람에게는 우스울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충분히 울분을 쌓게 한다.

 

한데 영화 속의 두 아이는 서로 그런 갈등에 휩싸이지는 않는다.

포수는 충분히 좋은 공을 받고자 하는 데 열망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투수는 자기의 공을 받아낼 수 있는 포수를 열망했으니,

이런 갈등으로 스토리라인이 만들어지진 않았다.

 

누구나 삶을 혼자 살다가 떠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배터리의 관계를 살아보는 건 아마 삶에서 큰 행복일 것이다.

다만 삶의 시간들에서 배터리가 한쪽 극으로 잘 살아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게 탈.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에서 정희진 여성학자가 소개한

윤동주 시인의 글이 절묘하다.

"동무는 괴로운 존재요... 우정은 위태로운 잔에 떠 놓은 물이다."

나이 다 들어서도 친구에게 절교선언을 들었다 하는

이 여성학자의 삶보다 내 삶이 덜 위태롭지 않다.

나도 작년에는 사랑보다 우정에 더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 시간은 의외로 사랑에 배신을 당한 것만큼 고통스러웠다.

 

배터리에서 음과 양은 그 어느 것도 우위가 없다.

사실 삶에서도 그래야 한다.

투수와 포수, 솔리스트와 반주, 발표자와 작성자, 혹은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등등.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짝을 이뤄야 하는 포지션들이 있다.

그것에 우위를 두는 건 원래 그 포지션이 내포했던 가치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나 세대가 부여한 새로운 편견.

 

그걸 편견이라 생각하고 순수한 배터리의 양극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 삶이라는 게 훨씬 더 가볍고 수월할지도.

하지만 괴로운 존재임에도 동무를 사랑하며,

위태로운 잔에라도 물을 떠 놓아야 하는 게 사람의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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