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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쇄 기념 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2001년 여름, 이 책을 읽을 당시 내가 본 책은 2001년 당시 나와있던-왼쪽 그림같은-쌔끈하고 잘빠진 책이 아닌 70년대, 내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된 세로로 쓰여진, 종이는 나달나달해서 혹여 부서지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당시 가격으로 1500원하는 책이었다. 책은 아마 내가 고등학교 때였나, 아버지께서 서재정리를 하다 한번 보라고 꽂아놓으셨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로부터 근 5년 이상지나서 읽게 된 셈이지. 그리고, 이 책은 단숨에 '내 평생 가장 소중한 책'으로 남게 되었다.
물론 책 내용부터가 굉장히 가슴에 와 닿았다. 그간 다분히 '부르주아적(?)'이었던 내 주변 환경 덕택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 있다는걸, 그리고 내가 몰라왔던 그런 세상이 우리 시대 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이라는걸 왜 이제서야 알게된걸까. 노동자나 농민이라고는 가끔 집회나가서 보는게 전부였던 내가 얼마나 세상을 모르고, 잘못알아오고 있었던가에 대한 반성. 세상의 일부만을 보고 있으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함에 대한 부끄러움.
하지만, 그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책을 읽은 맨 뒷부분에 적힌,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책을 읽고 적어놓으신 메모였다. "1979년X월X일 완독""常數와 變數의 차이" 그 외에도 몇가지 낙서같은 메모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읽고 난 감상이 어떠셨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쭈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느끼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명을 한다면 이해될 수 있을까. 아버지께서도 이런 젊은 시절이 있으셨구나. 이런 일로 메모를 남기고 그걸 다시 썼다지웠다썼다지웠다 하시면서(참고로 이런건 적어도 내가 알아 온 아버지의 모습과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적잖은 고민을 하셨구나.
여하간 나는 그때, 그저 너무 좋았던 책 덕분에 나 자신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어렴풋이 가늠해보게 되었고, 너무도 뜻하지 않은 감동에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아마도 난, 그 해 2001년 여름, 이 책과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의 묘한 기쁨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