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이하 '초상')에 이어 두번째 접하는 츠바이크의 책이다. 츠바이크는 역사의 피뢰침같은 순간, 잠깐의 실수와 잠깐의 선택의 순간, 정작 그 실수와 선택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는 그 순간의 중요함이 동시대인에 의해 깨달아지지 못했던 바로 그 순간을 매혹적으로 서술해 나가고 있다.

'초상'에서도 이미 본 바이지만, 역사소설가로서 츠바이크의 문체는 다른 역사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격조가 있다. 사실, 어찌보면 심심풀이 잡담처럼 들릴 수 있는 그 역사의 순간들이 이처럼 괜찮은 하나의 '작품'으로 발전한 데에는 츠바이크의 뛰어난 능력 덕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츠바이크 또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살아간 서양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극복하지 못한부분이 종종 엿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술에는 지속적으로'발견'과 '개척'이라는 미명하에 서양이 자행한 야만을 간과하지 않는 점이 보이며, 그 점에서 그의 혜안 또한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이 주로 서술하는 것은 마치 시간의 피뢰침 같이 중요한 순간, 이후 역사를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이 한사람의 평범한 개인에게 맡겨진 경우이다. 이 때의 개인은 어려운 선택을 통해 이후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고 유리한 상황을 그저 지나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쪽문 하나 안잠궈서 영웅적인 저항이 허무하게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 동로마제국의 사례나, 라마르세이유의 작곡가 루제 드릴의 아이러니도 흥미진진했고, 그루쉐 원수의 충성이 오로지 그 맹목적인 측면 때문에 그의 주군인 나폴레옹을 패망시키게 된 이야기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개척 당시 서양인들의 이야기 또한 굉장히 재미있었다.(인디언들은 별 관심도 없는 황금나부랭이에 눈이 돌아가 아웅다웅하는, 그럼에도 스스로'문명인'이라 자부하지 않는 서양인들의 모습은 한편의 코메디에 가까웠지만, '오늘의 난 어떤가?'를 생각해보곤 대략 모골이 송연해졌다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톨스토이의 미완성 마지막 작품의 후편을 츠바이크가 가공하여 이어서 쓴 '그리고 어둠 속에 빛이 비친다'부분이었는데,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주장만 할 뿐 자신이 누리고 있는 오늘의 편안함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이야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편안하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하지만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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