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
페리 앤더슨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을 한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서구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정도 될 것 같다. 책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라는 제목과는 달리 그닥 맑스주의 사상가들의 사상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전개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몇몇 맑스주의자들-그람시, 아도르노, 마르쿠제, 사르트르 그리고 알튀세르 등등등-이 만들어낸 몇가지 독창적인 '개념'을 하나의 장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책은 개개의 사상을 설명하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전후 서유럽 맑스주의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이유는 저자도 밝혔듯 자명하다. 즉, 이론가들과 학파사이에 다양한 견해 차이와 적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건 서구 맑스주의의 통일성을 규명할 수 있는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 유산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정리하자면 서구 맑스주의는 따지고보면 유럽좌파의 '패배의 산물'이었다. 1차대전 이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패, 러시아 혁명의 고립화, 이후 스탈린 치하 소련의 관료주의화에서 서구 맑스주의는 이론과 실천이 완전히 분리된 채 발전되었고 이론의 영역 또한 정작 고전적 맑스주의가 주력해왔던 분과였던 경제학과 정치학은 외면되고(그람시정도가 여기에서 예외가 된다) 맑스 본인조차 그닥 많이 다루지 않았던 철학분야로 그 중심이 이동한다. 아울러 서구 맑스주의자들은 이전의 그들의 선배세대와는 달리 노동자들의 삶과는 유리되어-이는 당시 유럽 좌파정당의 행태에도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과거와는 달리 알아먹지 못할 이야기들로 도배(?)를 하고, 이론적 탐구는 상부구조, 그 중에서도 맨 꼭대기라 할만한 미학적 영역에 집중하였으며, 과거의 국제주의적 전통은 외면한 채 협소한 강단에서만 맑스를 언급하게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타락'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변적인 방식으로의 궤도이탈은 유럽의 상황과 맞물려 시종일관 염세주의적 색체를 드러냈고, 이는 따지고보면 애초 서구에서의 맑스주의가 '패배의 산물'로서 발전된 것이기에 어찌보면 당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애초의 고전적 맑스주의로부터 상당한만큼 궤도이탈을 해버린 서구의 맑스주의가 일종의 보편적 맑스주의로 세계 각국에 수용되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처럼 그 대상적, 지정학적 범위면에서 '협소'했던 서구 맑스주의가 '국제주의'적으로 언급되는 현상을 비롯하여 60년대 서구의 5월 '봉기'의 영향으로 이론과 실천의 괴리가-만족스럽진 않지만-다소 좁혀졌다는 점,(여기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좁히기위해 노력했던 트로츠키가 비로소 '발견'된다.) 정치이론이나 경제학에 관심을 갖는 젊은 맑스주의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서구맑스주의가 비로소 청산-즉,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것은 취하여 조금더 나은 맑스주의로 발전한다는 의미에서-되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라며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견해를 밝힌다.(여담이다만, 책이 쓰여진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자가 여전히 낙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을지는 조금 의문스럽다ㅋ)

아울러 저자는 서구 맑스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이후, 책이 다소 오독될 수 있겠다는 노파심 때문인지 '후기'를 덧붙히고 있다. 서구 맑스주의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때문에 저자는 본서를 통해,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줄여야 하며, 혁명이론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뒷받침이 될 때라야 비로소 올바른 것이 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는 개혁주의에 빠지지 않은 '혁명적인'대중이 존재할 때, 그와의 연합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언급이 이론과 실천 속에서 또다른 한쪽 편향 즉, '활동가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음을 저자는 바라고 있다. 즉, 이론과 실천간에는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저자는, 서구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전통적인 맑스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서구맑스주의만큼이나 고전적 맑스주의 또한 끊임없이 재평가가 요구된다는 전제하에 대표적으로 맑스와 레닌, 트로츠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아무튼 책은 일반적으로 잘 다뤄지지는 않아왔던 서구 맑스주의의 사상사적 측면을 깔끔하면서도 나름 깊이있게 정리하고 있으며, 맑스주의가 해명해야 할-즉, 서구맑스주의에서건 고전적 맑스주의에서건 해명되지 못한-사안들을 자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맑스주의와 관련하여 아무런 지식이 없으신 분이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기도 하겠거니와, 놓치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이 들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리 어려운 책은 아닌 듯 싶다. 맑스주의와 관련하여 어느정도 개론적 이해를 가지고 계신 분은 한번쯤 읽어보시면 앞으로의 학습(?)에 괜찮은 방향타가 될 듯 싶고, 그게 아니더라도 맑스주의와 관련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개괄적으로 검토할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을 듯 싶다. 3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놀랍게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 정합성(?)을 갖고 있는 듯 싶은데, 따지고보면 맑스주의가 양차 세계대전 후 '서구'맑스주의로 귀결되는 과정과 80년대 이후 맑스주의가 '우리'의 맑스주의로 귀결되는 과정이 묘하게 흡사한 면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ps.얼마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본서의 저자인 페리앤더슨과 '상상의 공동체'로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형제지간이라고. 뜬금없게도 참 엄한(?) 집안이라는 생각이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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