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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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스타 인문학자'라고 하며, 본업은 문학평론가이지만 인문학의 '대가'라 불리우는 학자의 저서라면 늘상 그러하듯, 책은 자신의 분야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부문에 대한 코멘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칸트의 미학과 철학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윤리학의 지평을 열고자 한 본서는, 저자 말마따나 '칸트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며, 아울러 칸트를 내세워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본서에서 언급되는 칸트에 대한 수많은 인용과 설명에도 불구하고 칸트에 대해 다소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물론 모르는거보다야 아는게 낫긴 하겠지만) 저자는 칸트를 '빌어다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고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본인 답게) 전쟁책임이라는 문제를 고민하다가 책임은 무엇이며 윤리란 무엇인지라는 생각을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러한 생각의 도중에 칸트에 관심을 갖게 되어 본서를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한다면 이 세상에 진정 자발적인 인간의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원인을 따져들다보면 정신분석학적, 사회학적, 시공간적 요인 등으로 인해 개인의 자발적인 의도로 이루어진 행동은 사라지며, 따라서 책임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자유'란(그리고 그로인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되는 '책임'이란) 진정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그러한 자유는 실천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언급한다. 즉, 자유란 '자유로워지라'는 의무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자유'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에 따른 '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에 기반하여 저자는 우선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한다. 저자가 말하는 도덕이란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윤리라는 말은 '자유'라는 의무에 관련된 용어로 이해된다.(물론 이것은 저자의 자의적인 개념설정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선 칸트의 미학적 관심에 주목하여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논한다. 우리는 잔인한 장면을 그린 고전 영화를 보며 아름답다거나 쾌감을 느낀다. 이는 그 영화를 보는 동안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잔인함에 대한 분노나 공포를 '괄호에 넣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단순히 예술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닌것이 이를테면 의사들은 어찌보면 징그러운 수술도 가볍게 해내고는 저녁으로 편안히 삼겹살을 구워먹곤 하며, (바람직한) 판사들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그 친구에 대해 공정한 판결을 내릴 줄 안다. 이는 같은 대상을 판단함에 있어 다른 부문을 '괄호에 넣어'판단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굉장히 많은 훈련이 필요함은 자명한데, 저자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한 훈련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모든 원인을 탐구하여 무엇이 진짜 원인임을 밝히는 것과 별개로, 그러한 원인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하여 책임의 영역이 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적 기준 앞에서 모든 것을 동일시하여 결국 '오십보 백보'로 모든 실천적 영역까지 상대화하여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원인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상대론적 결과와는 별개로, 그러한 연구들을 토대로 한 '책임'영역의 검토가 엄중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저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뿐만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여기서 저자는 칸트가 "수단으로가 '아니라'"가 아닌, "수단으로 '뿐만아니라'"라고 말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즉, 칸트는 같은 대상을 바라봄에 있어 다른 영역에 다른 시각이 필요함을 전제로 했다는 것이다.)는 말에 기반하여, 공리주의적 윤리관이나, 하버마스나 아렌트 식의 '내부적 합의'에만 주목하는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사실 하버마스나 아렌트의 합의론에는 외부인에 대한 배려는 없다. 결국 사회 안에 존재하는 자들간의 합의만이 중시되어 어찌보면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의 결정적인 판단기준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외부인-여기에는 죽은자나 다음세대도 포함된다(이 점이 본 저서의 또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생각이 든다)-이 배제되는 결과가 도출되어 책임문제는 사라지고 말게 된다. 아울러 공리주의는 자유, 즉 자기원인적인 것이 아닌 외생적인 요소(그러니까, 주변과의 비교를 통한 이익?)에 의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간을 피폐시키며 수많은 문제-이를테면 환경이나 생명-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저자의 지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더 절실하고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물론 저자는 윤리적인 판단과 실천을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 윤리적인 실천을 하는 일은 공동체의 도덕에 상충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문에 윤리적 실천은 종종 그러한 실천을 한 사람 본인을 불행에 빠뜨리곤 한다.(심지어-그 어려움때문에-칸트는 '윤리적으로만큼은' 종교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저자는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윤리적 개입'이 더더욱 절실히 요구됨을 역설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윤리적 개입은 맑스의 사상에도 알게모르게 이어져, 그는 단순히 결정론적으로 사회주의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 그대로라면 빠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야만을 제거하기 위해 '윤리적 개입'의 요청으로서 사회주의를 이야기했다고 주장한다.(저자는 이러한 주장의 결정판(?)으로 얼마 전 '트랜스크리틱'이라는 두툼한 책을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이 책 또한 여기저기서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 본서는 이러한 짧은 서평으로는 차마 그 내용의 일부조차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광범위한 의미를 담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도 한두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세기의 '야만'이 채 제거되지 못한채 21세기를 겪어 나가고 있는 오늘(지금도 중동에서는 '20세기의 여파'로 인한 또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저자가 말한 윤리적 요청이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되기에, 본서는 더더욱 읽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끔씩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다소 두서없이 엮어져 간다는 느낌도 들고 다소 산만하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읽다보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음이 느껴질 것이다. 어렵지 않은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수많은 모티브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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