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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글의 위력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것은 글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혹자는 한권의 책이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냐며 조소어린 시선을 보내고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한권의 책이 세상을 뒤흔든 사례는 결코 드물지않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뉴요커'에 기고한 글을 모아 펴낸 본서는, 지금은 거의 몰락해버렸지만 당대 매우 일반화되어 쓰인 DDT를 위시한 방역제(참고로 DDT가 인체에 무해하다며 사람몸에 마구 쏴대던 모습은 우리도 다르지 않아서, 70년대 '대한늬우스'같은 걸 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나 제초제가 환경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인간이 그 시시껄렁한 목적으로 뿌린 유독성 화학물질이 어떤 식으로 이전되어 이 땅을 병들게 만드는지를 이야기하는 본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어느덧 상식처럼 되어버렸다해도 될만한 이야기들-유독성 물질이 체내에 어떻게 쌓이는지,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뿌려지는 화학물이 생태계를 어떻게 유린하는지, 먹이사슬의 단계를 거치며 유독성물질이 어떻게 증폭되는지-을 조금 지루하달만큼 늘여놓고 있다.
이러한 지루함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 듯 싶은데, 무엇보다 본서가 결국 '잡지 기고문 모음'에서 연원한 책이라는 점에 그 가장 큰 원인이 있는 듯 싶다. 어떠한 보편성이나 깊이보다는 시의적절함을 도모하는 잡지글의 성격상, 본서가 시간의 풍화작용을 훌륭하게 이겨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않다. 이제는 사용되지 않은 화학물질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초등학생 때부터 교육받을 정도로 정말이지 시대의 '상식'이 되어가는 내용이 매 꼭지마다 비슷하게 변용되어 이어진다. 물론 잡지에 실렸을 당대에야 이러한 사실들이 대중들에게 새로이 조명된 것들이기도 했거니와 각각의 글이 시간을 두고 읽혀져 매번 새롭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내용의 사례들로 채워진 글을 17번이나 읽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저자의 연구결과나 해결책 또한 다소 고전적(?)인 면이 종종 발견된다. 일단 '대중'을 향해 쓰여진 글이기에 당대에 '선동'으로 치부되었을만큼 다소 거두절미된 논리는 그렇다치더라도(그런 면에서 본서에 가해진 당대 과학자들의 비판이 일면 이해가 가는 구석도 없지 않기는 하다.) 천적을 이용하는 방식의 해충 방제같은 것이 또다른 생태계 교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을 살고 있는 대중의 상식이 그녀가 살던 시대의 전문가의 정보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다소 당황스러운 감상마저 느끼게 된다.
해서 본서를 통해 환경문제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자 하는 독자라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는 다소 어려울 듯 싶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외려 우리는 저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역설적이게도, 상당부분 우리는 저자가 자신의 시대에 당면했던 문제보다 더 많은 위기앞에 놓여져 있음에 기인한다. 저자는 새들의 지저귐을 듣지못하는 봄을 한탄하며 이 글을 썼지만, 우리는 숫제 봄철에 푸른 하늘을 보는 것조차 힘든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그저 해충을 잡기위해, 혹은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쓰이는 유독성 화학물 이야기만 늘여놓고 있는 본서의 '정보'가 우리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의 시대에 본서가 무가치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단순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다루는 시각과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구조적 고찰이 책 전반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당대를 뒤흔든 책'이라는 딱지를 붙혀 박물관에 집어넣기에는 다소 아쉬운 구석이 있다. 본서의 장르를 '문학'으로 구분해야 하는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저자의 문체에는 생명을 다룸에 있어 얼마나 섬세해야 하는지가 구구절절이 묻어나며, 환경문제에 대한 예산과 인력부족을 고민하는 저자의 한탄에서는 자본주의 사회 '보이지 않는 손'의 비합리성과 야만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환경문제가 단순히 인간 삶의 양태를 바꾸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켐페인 몇번하는 것보다, 환경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자본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제도적인 틀을 고민하는 것이 외려 효율적일 수도 있다.)
여하간에 당대 본서의 위력은 대단하였다고 하고, 우리도 본서가 구성한 담론의 세례를 조금은 받게 된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순간, 눈에 들어온 뿌연 하늘이 짜증나서 땅으로 다시 눈을 돌리는 순간, 이 책이 세상을 '뒤흔드는'수준을 넘어서서 세상을 '바꾸었는가'라는 자문을 한다면,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 싶다. 여기에는 환경에 대한 지식은 늘었지만, 환경을 다루는 자세는 하나도 바뀐것이 없어 보이는 듯한 인류의 태도에 많은 부분 그 책임이 있는 듯 싶다. 저탄소 녹색성장을 이야기하며 대운하 이야기를 슬그머니 끼워넣고 새시대 성장동력 운운하는 우리의 한심한 대통령과 관료들을 보라! 어쩌면 환경문제는 애초부터 지식의 문제가 아닌, 인류의 '태도'문제는 아니었을까. 해서 역설적으로, 본서는 그 너무나도 '옛스러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읽어볼만한 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다른 누구보다 청계천을 사랑하고, 녹색성장 운운하며 대운하 만만세를 외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