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개정판은 처음읽은 셈이지만, 그 사이 심지어 '정치학 교과서'로 쓰이고 있다는 본서를 사실 처음 접한 것은 아니다. 소위 '노풍'이 잦아들며 보수세력의 집권이 코앞에 와 있는 듯 싶었던 2002년 여름에 행해진 강의에 기반하여 쓰여진 본서의 너무나 힘있는(?!) 첫 문구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를 대한민국 건국이래 가장 진보적이라 평가되는 대선결과를 지켜보며 읽은 처음에는 글쎄,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민주주의의 발전과정과 시민사회에 대한 다소 비관적인 분석과 전망이랄까 그런것이 당시로썬 다소 시의적절하지 못해보였고, 운동이 제도화로 수렴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와닿은 것은 사실이지만, 첫번째 읽었을때의 느낌은 그저 깔끔하게 쓰여진 정치학 서적 같았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두번째로 읽었을 때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되어 총선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학부 마지막 학기에 타과 전공강의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최장집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고, 탄핵사태와는 무관하게 파병문제 등 참여정부가 삐딱선(?)을 타는 것을 목도한 터라 정당중심의 정치와 정치는 나쁜 것이라 매도하며 정치바깥에서 정치를 하려는 정권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강하게 와닿았다. 그리고 이번에 개정판은 처음 읽었는데, 흘러간 옛노래같은 사회과학 서적을 굳이 다시 찾아 읽은 것은 그사이 본서가 '오늘의 고전'이자 '교과서'로 읽히고 있더라는 사정도 그렇고, 무엇보다 최장집 선생님의 근작인 '어떤 민주주의'인가 에서 저자가 언급한 바, 민주주의적 현실을 체험한 뒤 책을 다시 읽었더니 내용이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바로 그 언급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가 과연 이 책을 과거에 몇번씩이나 읽은게 맞을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통시적이라던지 형식적 구성을 갖추지 않고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논점 하에 쓰여진 본서는 그로인해 얻어진 '박진감'때문이랄까, 통상의 교과서로 분류하기에는 매우 애매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300페이지라는, 교과서로는 그리 많지 않은 내용이지만, 한국민주주의에 관한 가장 심도있는 분석과 비판이 이루어지며, 그 속에 이론과 역사가 서술되어 외려 일반적인 교과서보다 더 풍성한 논점과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책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극복해 낸 것을 넘어서 오늘의 현상마저도 너무 적확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선출된 정부와 관료간의 관계와 역학작용에 관한 문제라던지 정치의 소외와 그로인한 CEO리더쉽의 부상같은 대목은 그 전에 가볍게 읽었던 것과 달리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니 굉장히 절실히 다가왔다. 사실 본서는 여러모로 볼 때, 최근 저자의 다종다양한 학술적 결과물의 총론격이라 할법한데, 아닌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본서에 관한 시사적 접근으로 보면 될 것 같고, '어떤 민주주의인가'는 본서의 보론, 거기에 '위기의 노동'이나 '미국헌법과 민주주의'서문의 경우 본서의 몇몇 논점에 대한 강조 정도로 생각해도 될 정도이다.

본서에서 저자가 강하게 주장하는 '정당중심 정치'라던지, '정치적 영역의 복원'이라던지, '운동에서 제기한 의제에 관한 제도적 수렴', '경제적 영역의 민주화'는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한 정치'로 수렴되는 듯 싶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그 '더 나은 삶'이라는 목표에 항상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가치이다. 저자는 물론 민주주의 외에도 정부의 '능력' 또한 더 나은 사회 구성을 위한 별개의 덕목으로 분명히 꼽고있다.(많은 독자가 오해하는 바, 저자는 결코 민주주의가 '전부'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능력과 민주주의는 모두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이자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사람 하나하나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기본적인, 너무나 기본적인 가치라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민주화 하는 작업은 피곤한 '노동'이 아닌 생활이 될 수밖에 없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결국 정부와 개인의 사회경제적 능력 자체도 향상시킨다는 점에서(마치 역으로 산업화가 민주화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서로 상보적이다. 때문에 본서를 읽으며 마치 우리가 시지프의 신화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굴러내려온 돌을 끊임없이 다시 굴려 올려야 하는 고통스런 운명을 짊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진정 풍요로운 삶을 살기위한 너무나 당연한 작업이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소외된 노동이 아닌 생활이며,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기에 민주주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민주주의를 더 민주화 하는 작업을 포기하거나, 기존의 민주화된 부분마저도 누군가가 먹여살려줄 것이라는 허위의식에 빠져 포기하려는 흐름이 생기고 있다는 점은 심히 유감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충격적인 것은, 사회전반의 보수화 때문이라기보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황우석이 천문학적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며 열광했고, 새로운 대통령이 '잘살게 해줄것'이라며 열광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아울러 풍요롭게 살수 있는 사회는 '누구나 자유로운 사회'이며 '노력이 올바른 댓가를 주는 사회'이다. 그 사회를 위해서는 시민 스스로 시민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이는 곧 민주적 인간의 민주적 사회를 요구한다. 자신의 주권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잠시나마 포기한 듯 했던 지난 선거의 결과는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그전보다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올바른 민주주의 구축과 행복한 삶은 결코 동떨어진 덕목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한 삶과 올바른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서 그 답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것을 차치하고라도-많은 부분 그 드라마틱한 문체(?)에 기인하는 바-정치학 서적답잖게 재미있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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