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시덥잖아 보이는 동기로 도입된 제도가 괜찮은 결과를 내놓는 것을 목도할 때가 종종 있다. 아마 이런 유형의 책의 출판도 그러한 사례로 들법한데, 본서는-특히나 말미의 '영어로 보는 원문'같은 꼭지로 유추해볼 때-상당부분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도 염두해 두고 출판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이 오로지 논술만을 위해 현상학 씩이나 들춰볼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하여간 시리즈의 목차라던지 구성을 볼 때 본서의 출판에 그러한 구매층을 어느정도 고려한 것도 사실인듯 싶다. 여하간에 그런 의도로 본서가 출판된 것이라면, 본서는 입시의 한 제도로서 도입된 논술이 얼마나 좋은 결과물을 내놓았는가에 대한 괜찮은 사례로 꼽힐 듯 하다.
사실 전공자가 아니라면 현상학이나 구조주의같은 철학이론이 우리 삶에 어떤 실천적인 의미를 갖는지 잡아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그것이 독일어라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언어에 기반하여 수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철학을 전개해나간 하이데거나 당대 유럽의 정신적 위기상황 속에서 철학적 돌파구를 모색한 후설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난망한 일이다. 결국 후설이나 하이데거를 위시한 현상학자들의 경우, 그들의 철학이 괜한 시간적 정신적 노력을 들여 그저 지적 사치나 즐기기 위한 도구 정도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말로, 우리 현실에 적합한 실천적 방향을 제시해 줄만한 해설서가 더욱 절실하다는 이야기인데, 이 책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듯 보인다.
본서를 후설이나 하이데거에 대한 충실한 '해설서'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사실 이런저런 내용을 빼고 본서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이론'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는 부분은 채 60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현상학의 문제의식과 오늘날의 실천적 함의를 논하는데 할애되는데 이것은 본서의 독자가 대부분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실 현상학이라는 것이 현상학적 운동으로 발전할 정도로 윤리적 색체를 강하게 띄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더군다나 객관주의나 물신화로 인해 '존재'의 문제마저 수치로 계산하는게 익숙한, 그리고 그것이 굉장히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착각이 만연한 오늘의 우리사회에 현상학적 시각은 윤리학적 측면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설과 하이데거는 같은 현상학자이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측면에서 묘한(아울러 합의될 수 없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둘의 철학은 각각의 보편적 기획과 특수성의 강조라는 측면에서 윤리적 실천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상보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든이가 자신만의 객관을 내세워 상대와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시대, 끊임없이 질문하기보다는 빨리 답을 내리는데 익숙한 오늘의 우리의 시대는 다른 어느 시공간보다 현상학의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어렵잖게 후설과 하이데거를 설명하며 그들의 철학의 실천적 함의를 서술하는 본서는 한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마디로 잘쓰여진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