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협력인가 - 비시 프랑스와 민족 혁명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7
박지현 지음 / 책세상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서구의 전간기는 어찌보면 또다른 세계대전을 이미 예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혼란의 시기였다. 자본주의 발달의 극점이 결국 대공황으로 귀결되고, 다른 한편에선 볼셰비키의 혁명이 성공함에 따라 기존의 지배계층이 보기에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이념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당시의 분위기는, 어찌보면 애초부터 자본주의나 기술혁신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당시의 서구 보수주의자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대체적으로 '민족혁명'을 위시한 '정신적 측면의 혁명'을 내세운다는 점에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본서는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비시정부'에 대한 역사와 정신을 논하고 있다.

비시정부의 수립과정과 역사, 그리고 그 정부의 정신을 서술하는 저자가 결론적으로 비시정부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우리가 알듯 그렇게 단선적으로 악(惡)이라 명명할 성질의 정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혼란스러운 시대, 토크빌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른바 새로운 '모럴'을 세워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당대 프랑스 보수세력의 일종의 정치적 운동이었으며, 따라서 간단하게 '나치 부역자' 혹은 '나쁜놈'으로 몰아세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흐름은 프랑스에서만 있던 것도 아니고 당대의 영국, 이태리, 독일 등에도 있었고,(독일의 경우 전진성씨의 '보수혁명'에서 잘 서술되어 있다.) 저자 말마따나 미테랑 등 당대의 좌우파를 막론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실험에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동조한 것도 사실이다.

허나 석연찮은 것은 이 사실을 다루는 저자의 태도다. 비시정부가 시도한 민족혁명, 혹은 정신혁명이란 것이 당대의 좌우파를 막론한 많은 유명 인사들이 지지를 보냈고, 아울러 그것이 단순히 '유태인 나쁜놈' '독일 착한놈'이란 감정에 기반해 이루어진 정권이 아닌 나름의 이론과 기획을 근거로 구성된 정권이라 한들, 그 정권의 행태와 그 정권이 낳은 역사적 결과물이 합리화 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비시정부 뿐 아닌 이탈리아 파시즘에 대해서도 종종 '진지하게'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한데, 위기에 빠진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고자 시도했고, 역사상 그나마 어느정도 하나로 묶어내는데 거의 유일하게 성공했다는 이탈리아 파시즘이 과연 그 생각보다 진지한(?) 동기와 결과물로 인해 합리화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동기가 선하다면 모든 것이 무죄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국가주도의 민족혁명을 위시한 가부장적 색체를 띤 정신적 혁명이 하나같이 파시즘이나 반민주, 불관용적 정치문화, 혹은 인종차별이라는 깊은 골을 남기는 것으로 귀결되어버린 역사적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동기 뿐 아닌 그것이 잘못된 길을 걷게 되는 과정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 인간의 정신과, 그 정신의 복수성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좋은 명분'을 내걸고 '아버지'의 성격을 가진 국가와 민족 아래 그 구성원을 하나의 기계처럼 돌아가게 만들기를 원하는 보수주의적 '정신혁명'은 그 자체에 이미 파시즘으로의 예정된 경로를 노정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비시의 유산이 아직도 프랑스에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유산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 유산으로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저자가 조금이나마 더 고려했다면, 이렇게 나이브한 서술을 하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오늘 우리 사회의 비시정부에 대한 담론이 종종 친일청산문제의 소극성을 공격하는 근거로서 단순화되어 쓰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비시정부의 성격이 구체화된들, 우리 사회가 적극적인 친일청산을 함에 있어 제지할만한 근거가 될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든다. 저자는 프랑스의 역사는 그들의 역사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며, 우리의 친일청산과 그들의 나치 부역자 청산이 다른 문제임을 강조했지만, 이는 그저 뜬금없이 읽혀질 따름이다. 외려 저자 자신이 너무 우리의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책을 서술하느라 다소 중언부언하면서 중심을 잃게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점에서 참신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다소 아쉬움이 남는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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