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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 ㅣ 하룻밤의 지식여행 13
폴 코블리 지음, 조성택 외 옮김 / 김영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문화 현상을 이해하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우선 기호학을 알고 있어야죠.' 서두의 다소 과장섞인 소개처럼 오늘의 문화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기호학이 '우선'알아야만 할 것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호학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우리로 하여금 좀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기호학은 접해볼만한 학문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것이 기호로 이루어지지만, 그 기호 자체의 일관되면서도 또 한편 그렇지 못한 성격은 기호학으로 우리를 이끄는 무언가가 있는 듯 싶다.(아님말고ㅋ)
기호학이란 것이-대부분의 새로운(?!) 학문분과가 그렇듯-역사를 굳이 거슬러 올라간다면 고대 그리스까지 갈 수 있겠지만, 결국 오늘 우리가 아는 정리된 의미로서의 '기호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19세기 소쉬르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길지않은 역사를 가진 학문인지라 입문서를 구성하는 것이 쉬운 듯 보이지만,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고, 더군다나 그 학적 난해함과 사실상 '기호학자'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본업은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내놓은 아이디어가 자신의 분과로 수렴되곤하는 기호학의 학적 특성상 자칫하면 어떠한 흐름을 잃고 중언부언할 수 있는 위험을 본서는 잘 돌파해나가고 있는 듯하다.
기호학의 간단한 의미를 고대 그리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의를 통해 암시적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본서는 기호학의 양대 흐름을 만들어낸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소쉬르와 퍼스의 연구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서술을 이어간다. 책은 기호학의 짧은 역사를 감안해서인지 통시적이라기보다는 공시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어 구성한 듯 싶은데 먼저 소쉬르의 전통('인간'의 기호, 즉 언어 연구에 중점을 둔 흐름)을 이어간 유럽 대륙의 흐름을 서술한 후 퍼스의 전통(인간 뿐 아닌 동물이나 자연의 기호까지 아우르는 흐름)을 이어간 미국의 학적 흐름을 서술한다. 그리고는 형식주의 이래 예술을 중심으로 기호학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한 소비에트 기호학과 소쉬르와 퍼스의 흐름을 통합하려는 야콥슨과 에코의 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기호학이 오늘날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어떤 효용이 있는지를 몇몇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으로 책을 끝내는데, 다양하고 어떻게 보면 일관된 흐름을 찾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까지도 시종일관 흥미롭게 서술해나가고 있다는 점이 본서가 갖는 강점인 듯 싶다.
기호학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학문이다. 사실 우리의 학적 창조나 이해라는 것 또한 결국 모두 기호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기호학의 이러한 자신으로의 수렴현상(?)은 기호학이 탄생하는 그 순간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유예되고, 모든 것이 해체되며, 모든 경계가 사라져버린듯한 오늘의 시대. 기호학은 그 모든 불확실성과 다양성마저 자신의 틀 안에 껴안아버림으로서 총체적 프리즘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기호학을 접한 사람의 삶이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할 것 같다는 점에서 기호학은 어렵더라도 한번쯤 접해볼만한 학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