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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평점 :
인간은 상징의 동물이다. 매주 주말마다 종교집회에 참석한다던가, 쾌락을 거부하고 금주나 금연을 한다던가, 아침마다 꾸준히 운동을 하는 행위는, 그 실용적인 의미 이상의 상징적인 무언가를 담지한 행위이다. 그 상징 행위는 단순히 무엇을 한다 안한다의 규범적 성격을 뛰어넘어 행위 자체의 의미로서 한사람의 인생에 작지 않은 상징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런것일까? 그러한 상징적인 행위에 예외가 발생했을 경우, 멀쩡한 사람이 의외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잖게 볼 수 있는데, 때문에 인간은 주변에서보기 참 쓸데없는 행위라도 종종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생활을 상징화하고 조직화하려는 시도를 하곤한다.
소설 속 주인공의 상징적인 행동은 '나무위에 올라가서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열두살때 자신이 먹고싶지 않은 요리를 강제로 먹이려는 아버지에 반발해 나무위에 올라간다. 이 단순한 어린아이의 음식 투정은 주인공이 나무위에서 평생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비치는 순간 단순한 음식투정 이상의 상징적인 행위로 넘어간다. 이후 소설의 에피소드 속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가족에 대한 사려깊은 언행을 보면 이러한 음식투정이 단순한 '이유없는 반항'이 아닌 기존의 보수적인 관습과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죽을 때까지, 아니 심지어 죽음 이후까지도 단 한번 나무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과 그가 살아가는 사회를 불굴의 의지로 조직해나간다. 물론 나무에 올라가 세상을 좀더 잘 볼 수 있게 된 대신, 평생 안고 가야할 고독은 그가 감내하여야 할 쓰디쓴 댓가가 되지만.
역자의 말마따나 칼비노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식인 상을 소설 속 주인공에 투사하려고 시도한 부분이 없진 않다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소설속 주인공인 '코지모'를 이상적인 인물로 만들기엔 저자의 애정이 주인공에게 너무 많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심지어 '혁명'의 와중에서도 군대라는 '집단'이 아닌 '개별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고수하던 코지모가 '황제군'이 되어버린 프랑스군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과 맞부딪히지 않았던 것은, 분명 스탈린주의의 폐해를 알면서도 공산당을 탈당하지 못한 칼비노 본인의 사정이 주인공에 투사되었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코지모는 이상적인만큼 그 한계도 온전히 담지하고 있으며 실수와 갈등속에 성장하기도 후퇴하기도 한다. 차라리 칼비노는 코지모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인간상과 사회상을 이야기하려는 듯 한데, 그것은 결국 한마디로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사회'로 귀결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상이나 사회상은 소설 그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독자는 그저 코지모의 몇번의 실패와 몇번의 영웅적인 성공담 속에서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즉 코지모조차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비올라와의 연애가 결국 자신의 부자연스런?! '이성'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 이를 암시한다) 결국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칼비노 본인조차도 당위는 있지만 그 실천적인 얼개조차도 기획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러한 솔직함 속에 이 소설의 위대함이 존재하는 듯 싶다. 코지모가 마치 슈퍼맨처럼 언제나 진보와 성공만 거듭했다면, 이 소설은 그저그런 영웅담정도로 끝났을 것이다.(운이 좋았다면 '허풍선이 남작' 정도는 되었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러한 영웅담을 뛰어넘은 데에는 나름대로 판타지적 경향을 보이면서도 내면의 솔직함이 깔려있다는 점에 있는 듯 하다. 차라리 코지모는 '슈퍼맨'같은 비현실적 영웅보다는 현실에 존재했던 한 인물을 떠오르게 한다. 생애동안 치명적인 실수도 많았고, 오판도 많았지만, '죄많은 존재'로서의 지식인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언제나 정의의 편에서 정열적인 활동을 했기에 역설적으로 '신화'로 남아버린 장 폴 사르트르, 바로 그이다.
본서는 칼비노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이도저도 아닌 불확실한 서술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은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간행된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비하자면 본 소설은 굉장히 잘 읽히는 편이다. 하지만 그만큼 쉬운 책이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꼭 그렇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본서는 기본적으로 동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우화이지만 굉장한 사실성을 담고 있다. 그러한 사실성은 인간이 통상 옳다고 생각하는 미덕이나 나쁘다고 전제하는 악덕에 대한 것 마저도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결국 칼비노는 본 소설에서 굳이 '열린형식'으로서의 소설을 도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린내용'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열린형식의 소설을 만들어버린 셈인데, 이러한 지극히 '민주적'형태로서의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고민과 해석을 이끌어내는 듯 하다. 가볍지 않은 고민을 즐거운 내용으로 끌어내는 흔치 않은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