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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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이후 24년'. 출판사의 광고문구만 보면 에코가 장미의 이름 이후 소설은 하나도 쓰지 않았구나라는 인상을 받을수도 있겠지만, 그 사이 에코가 낸 장편만도 세편이다. 하지만 본 소설이 저자가 낸 그간의 작품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어느덧 에코의 전매특허가 되어버린듯한 '중세' 이야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아울러 무엇보다 소설의 주인공이 에코의 분신임이 공공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숫제 에코의 어린시절 사진까지 등장한다.) 즉, 이전 소설들이 단순한 이론서로 이야기하기 어렵던 것을 소설로 표현한 것이라면, 이번 소설은 자서전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역설적으로 자서전의 형식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들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하고자 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얌보'는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깨어나 공적인 기억을 제외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기억은 잃고 만다. 즉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억은 이미지가 아닌 텅 빈, 건조한 기억 그 자체이다. 문학 작품의 구절구절과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들은 줄줄 꿰면서도 자신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어린시절 기억을 찾기위해 '솔라라'에 가서 자신과 관련된 옛 기록을 찾아볼 때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 집에 있는 수집품들을 통해 논리적으로 기표와 기의를 이어맞추는 형식의 기억 자체는 해 내지만, 이러한 기록과 수집품에 대한 자신의 느낌은 구체적으로 기억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서, 주인공은 차라리 자신의 옛 기억이라고 모아놓은 기록을 하나, 둘 연결해가며 바로 그 과정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과거-추억이라고 이야기되는-를 만들어간다고 보일 지경인데, 이는 다분히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쓰게 된 이유-학술서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소설을 썼다는-를 떠오르게 만든다.

기표는 분명 그 기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아니, 외려 기표는 그 자체에 수많은 왜곡과 공백들을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호의 그러한 트릭을 기호에 대한 담론으로 극복해 내는것, 즉 그 기표가 왜곡하거나 공란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을 까발려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또한 간단한 일은 아니다. 담론 또한 기호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추억은, 그리고 그 추억의 소재가 되는 문화와 예술은 그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기호는 단순히 기호가 아닌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에, 기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또다른 이미지이고,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이성적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개개인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추억이라고 일컬어지는)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한 추억을 잃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추억의 복구가 아닌 새로운 추억의 구축 정도일 뿐일런지도 모르겠다. 해서 망각이란 누가 뭐래도 안타까운 것이며, 기억이란-설령 그것이 아무리 아픈 것일지라도-아름다운 것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편을 되찾지 못하듯, '전날의 섬'에서는 섬에 죽어도 도달하지 못하듯, '바우돌리노'에서는 숫제 진실이라는게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듯,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무언가는(스포일러 같아서 밝히진 않겠지만, 이 정도 써도 스포일러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_-;;;)결국 등장하지 않는것 또한 흥미롭다. 아니, 어쩌면 주인공이 찾고자 하는 무언가는, 그것이 마치 자신이 평생 살아갈 조건처럼 되어버린 무언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와 매한가지인 것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처럼 텅빈 기호라는 것이 무의미한 것일까? 이에 대해 에코는 이렇게 말하려는 듯 하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심술궂은 귀신에게 속아 허깨비를 보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음에도 마치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야 계속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p.685) 너무 허무주의적이지 않냐고? 꼭 그런것 같지는 않다. 그라뇰라와 주인공의 굉장히 정치적인 신학 논쟁은 그러한 지적에 대한 에코의 답변인듯 하다.  "하느님이 악하다면, 우리라도 선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자....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니 우리끼리라도 서로 도우며 살자."(p.573) 텅빈 기표는 우리의 해석과 태도에 따라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것은 정작 우리가 기호로 표현할 수 없는 것-그것이 바로 '신비한 불꽃'이려나?!-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에코의 소설이 늘상 그렇듯 본 소설 또한 굉장히 다양한 견지에서의 독해가 가능할 듯 싶다. 주인공이 '자신만의' 기억(추억!)을 찾기위해 공적인 기록들을 반추해가며 기억해내는 에피소드들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단편으로 읽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일 뿐더러, 독자들은 본 소설의 내용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로도, 익살 넘치는 재담모음집으로도(여담이지만, 에코의 모든 글들은-그것이 학술서적이건 소설이건간에-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저 유명한 '장미의 이름'마저 등장인물들은 결국 '웃음'때문에 죽고 죽이지 않는가), 기호학, 철학, 정신분석학적 장치들로 가득한 학술적 소재로도, 혹은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인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주제에 관한 역사적, 정치적 성찰로도 읽을 수 있다. 마치 어느 날씨좋은 한가한 날, 발길닿는대로 정처없이 산책하는 느낌이랄까. 이는 에코의 유년시절 기억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80년대-이는 곧 나의 유년시절이기도 하다!-를 연상케 만들기 때문인듯 듯 싶기도 한데, 아무튼 저자의 잡학다식함은 설령 에코보다 더 훌륭한 소설을 쓰는 소설가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에코처럼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전무후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자아내게 한다. 즐거우면서도 가슴한켠을 아리게 만드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ps. 출판사의 광고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 운운하는 부분도 있나보다.(개인적으로는 확인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작가에게 '마지막 소설'운운하는 것에 다소 호들갑스럽다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에코가 소설의 형식을 빌어 무언가를 말하는건 이것으로 마지막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이 소설이 소설가로서 그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소설가보다도 계획적이고도 완벽한 은퇴식을 치뤄 낸 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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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08-08-07 15:04   좋아요 0 | URL
다들 로아나 여왕..로아나 여왕..그러기에 판타지소설인가했더니..에코님 소설이군요.
고혈압으로 쓰러져 보지도 않았고, 건조한 기억이 아닌 따뜻한 기억을 가진 저도 애타게 찾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데요...아..잼있겠다.

率路 2008-08-07 19:05   좋아요 0 | URL
아마 에코의 다른 소설에 비해 읽기엔 가장 수월할 듯 싶어요.
개인적으론 '중세'얘기 시시콜콜 안나오는 것만해도 대략 감사라ㅋ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