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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음모 1
데이비드 리스 지음, 서현정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단 한 줄의 평을 남겨야 한다면 일단 이 말부터 하겠다. “요즘 나온 책 치고는 촌스러운 표지와 요즘 나온 책 치고는 재미있는 내용”이라고.
표지만 본다면 조금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책을 펴보면 그 거부감이 좀 더 구체화될지도 모르겠다. 표지만 요즘 책답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글자의 크기나 줄간격도 꽤 오래전 책처럼 꾸며져 있으니. 그렇다고 책장을 넘겨 초판이 언제인지 확인하지는 말아라. 내가 확인해본 결과 2006년이 확실하다.
그러나 내용은 최근 내가 읽었던 몇몇 역사 스릴러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다. 역사 스릴러나 팩션계의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다빈치 코드>와 비교해서도 그렇다. 사실, 자랑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꽤 추리소설을 즐겼던 나는 <다빈치 코드>의 범인을 꽤 일찌감치 눈치 챘던 터라 그 긴박감 없음에 꽤나 역정을 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 전까지 범인에 대한 확신이 없게 만든다. 물론 그것은 책에서 적절한 힌트를 주지 않았던 탓이 크지만, 앨러리 퀸의 팬이 아니라면 그 정도는 긴박감 있는 진행을 위해 눈감아 줄 수 있을 정도이다.
단순한 소설적인 긴박감을 떠나서, 이 책은 우리 시대의 1순위가 된 그것, 바로 경제에 관한 아주 재미있는 우화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책에서 종이라 이르는 그것, 바로 지폐(은행권)와 채권의 초기시대를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오늘날, 누구나 다 주식이니 채권이니 하는 것을 말하지만 사실 주식의 의미나 채권의 의미, 그리고 더 나아가 지폐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 그것들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일단 그것들의 초기의 모습과 함께, 그 초기의 모습에서 나오는 그 ‘종이’들의 진정한 근원에 대해 알려준다. 아직 경제에 대해 어렵게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만하다. 친절하게 우리의 주인공 역시 금융의 금자도 모르는지라, 다른 등장인물들이 그에게 쉽게 ‘종이’의 가치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금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 책이 지루하지는 않으리라. 우리가 모든 물건의 기원에 대해 언제나 흥미진진해하듯이 이 ‘종이들’의 기원 역시 흥미진진하기 때문에다. 아직 돈이라는 것이 낯설던 시절, 영국인들이 돈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엿보는 경험.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경험이 아닐까?
또한 단순히 금융의 여명기에 대한 흥미가 아니더라도, 과거 영국의 사회상을 알아보는 데에도 이 책은 역시 유용하다. 1인칭 주인공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영국-뒷골목과 신사의 세계를 두루 둘러보는 데다, 심지어 유태인들의 세계까지 그려내고 있다-은 이국적이면서도 친숙한 느낌이 든다. 비록, 그 느낌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영국식 화법’에 조금은 익숙해져야 할 것이지만 말이다. 주인공의 화법이, 후기에 작가가 다듬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무언가 에둘러 말하는 것이 분명 현대인에게는 조금 낯설다. 덕분에 속독을 하는 편인 나조차도 거의 하루를 투자해서 이 책을 읽어야만 했고, 그래서 지금 허리가 꽤 아프다. 하지만 그만큼 소설의 배경에 빠져들게 하는 장치이니 이 역시 조금만 양해한다면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질 매력이다.
내 소개글은 여기까지다. 이제 흥미를 느끼신 분들이 여행을 떠날 차례다. ‘종이의 음모’를 두 눈으로 목격할 준비가 되신 신사숙녀 여러분. 모쪼록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