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의 생각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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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종교라면

나는 비종교인이다. 대학 다닐 때 학생 식당이든 어디든 내가 혼자 있기만 하면 어김없이 달려들어 성경공부를 권하는 사람들의 공격적이고 집요한 전도 방식,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단선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가톨릭은 다르겠지 하는 마음에 서른 즈음에는 성당에 다닌 적도 있는데 성당 앞 온갖 소원 내용이 담긴 포스트-잇을 읽어보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모 빌딩 203호가 몇 달째 비어 있으니 임차인을 구해달라거나(월세를 내리면 간단할 것을) 늘푸른 고등학교 3학년 몇 반 아무개가 무슨 대학 무슨 과에 합격 하게 해달라거나(기도를 안한 애는 그 이유로 불합격해도 좋은가) 하는 아주 구체적이고 기복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거나 힘든 이웃에게 힘을 달라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하나님이 공인중개사나 입학 컨설턴트도 아니고 무척 머리가 아프거나 바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 중인 이슬람 국가 아프가니스탄에 기독교를 선교하러 간 기사를 접하고는 해당 교인들의 행동이 무모하거나 무례하게 느껴졌다. 최근 코로나 팬데믹에도 신천지 등 교회가 집회를 강행해서 교회를 집단감염의 진원지로 만들고 광화문의 기독교인 집회가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과격한 교회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도 나에게 종교에 대한 혐오를 강화시켰던 것 같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코로나가 왔다는 말을 들을 때면 이러면 하나님은 뭐가 되나 한숨이 나왔다. 헌금을 둘러싼 지저분한 이권 싸움, 교회를 목사 아들에게 증여하는 등 신앙을 돈벌이 수단으로 쓰는 흔한 소식도 종교 혐오에 한몫했던 것 같다. 신에게 복을 빌고 한편으로 신의 겁박에 두려움으로 떨며 자기만 옳고, 자기만 잘살자고 하는 것이 종교라면, 종교가 왜 필요한가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오강남 선생님의 책을 읽고보니 나처럼 뜨악한 경험을 통해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유럽, 미국, 우리나라 등 전세계적으로 종교인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비종교인이 60%가 넘는다고 한다. 선생님은 오강남의 생각에서 편협하고 기복적인 종교를 비판하고 종교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문제는 애꿎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며 그 의미를 호도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이 문제라기보다 신에 대한 인간들의 낡은 생각이 문제이다. 진정한 종교란 서로 미워하고 자기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서로 엮여 상호작용하고 있는 신비를 깨닫는 감수성으로 비움이라는 자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한다.


상호 연관이라는 우주의 신비

오강남 선생님은 주위를 둘러보면 만물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이 서로 연결된 것이 바로 우주의 신비라고 한다. 그 예로 먹는 밥 하나에도 벼를 키우기 위한 땅, , 공기, , 농부, 농부의 조상, 농기구,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과 쇠붙이, 그 쇠붙이를 만들기 위한 광부와 불 등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든다. 쌀 한 톨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고, 내 속에도 우주가 다 들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는 신비로움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나 혼자 산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학자이자 깊은 종교심을 가졌던 아인슈타인도 지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간접적이고 여린 그림자로만 다가오는 아름답고 숭고한 신비로움을 감지하는 것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경험이라고 했다. 종교의 핵심은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두가 하나이며 우리는 그것의 일부임을 아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참된 종교인이라면 나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얌체 감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참된 종교인은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이때 자비(compassion)는 영어로 함께(com) 아파함(passion) 공감능력을 뜻한다. 나와 세계가 연결되어 있고 나도 그 세계의 일부분이라면 나 혼자에게만행운이 찾아오고 불행은 비켜가라 빌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갈 방식을 찾고 공감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어느 누구도 외딴 섬일 수는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종교란 나의 행복과 안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이도 외딴 섬일 수 없이 서로 연결된 망에 있음을 감지하는 감수성을 갖는 것이다.

 

정보(information)대신 변화(transformation), 비움

오강남 선생님은 종교의 문자주의를 청개구리식 해석이라고 비판하고 시대적, 문헌적 맥락을 파악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날마다 죽노라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무덤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영적 죽음과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삶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만약 성경을 문자 그대로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면 단순히 동성애만 반대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서 지시한대로 동성애자들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 성경은 동성애뿐만 아니라 다른 행위들도 금지하는 조항이 많은데 선별적으로 다른 조항은 무시하고 동성애만 금지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맥락이 중요한데 성경이 명한 동성애금지는 당시 어린아이들을 돈으로 사서 성적 쾌감으로 삼던 관행을 금지를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종교가 상호연결된 우주의 신비, 자기 변화, 비움을 깨닫고 찾는 일이라면 나도 기꺼이, 그리고 절실히 종교를 공부하고 탐구하고 싶어졌다. 불교는 부처라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라는 스승에게 배우는 종교라는 말도 생각났다. 오강남 선생님은 현실적으로 생각보다 별로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기독교도 예수를 일단 믿으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많이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포도원의 주인 구절 해석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임금 노동자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당 노력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 발상의 전환, 가치 전도, 역지사지의 원리가 작동하는 곳일 것이다.

선생님께서 책 들어가는 글에서 처음 인용하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인상 깊다. 오강남 선생님은 우연히 만난 종교를 절대화해서는 안된다고, 어디에 태어났다는 것이 곧바로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특정 종교를 결정하는 이유가 된다면 백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KKK단원이 된 것과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한다. 종교는 우연히,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또는 어떤 일을 계기로 무조건 거부하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관찰하고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은 생각이 바로 자기변화를 이끌기 위한 감수성을 깨우는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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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북드라망 클래식 (북클)
오선민 지음 / 북드라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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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해석한 책이다. 슬픈 열대라는 여행기는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행을 통해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관을 외부에서 확인하려거나 단순한 이국 유람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레비스트로스는 여행을 왜 떠나고 거기서 무엇을 얻었을까? 오선민 작가는 ’, ‘어떤이라고 목적에 연연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가두는 그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오 작가는 레비스트로스의 열대 여행이 타인의 시선으로 내 삶을 돌아봄으로써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 해석한다. 여행이란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서 어디론가 새롭고 특별한 무엇인가를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새롭게 해석하기라는 뜻이다. 오 작가가 지적한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주관적 경험 양식인 움벨트(Umwelt)를 가지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정말 다른 것을 볼 수 있을까?’ 오 작가는 레비스트로스가 남아메리카 네 부족 중 마지막 투피 카와이브족을 설명할 때는 그들 부족 설명보다 일상과 심상을 클로즈업한 것에 주목한다. 어쩌면 어떤 문명도 그 최고 목적은 자연으로 돌아갈 길을 모색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라고 해석한다.

 

나도 슬픈 열대를 읽은 적이 있다. 슬픈 열대700페이지라는 두꺼운 분량도 힘들었지만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건지 알 수 없었고, 공간적으로도 열대 이야기는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인도, 파키스탄까지 마법 융단을 타듯 날아다녀서 이해가 어려웠다. 레비스트로스의 본인 이야기, 생각과 원시 부족 이야기가 뒤섞여 있었다. 일몰 묘사나 적도 농무지대 설명은 이 책의 장르가 여행기인지 문학인지 알 수 없을만큼 장르도 혼재되었다. 하지만 시공간, 장르가 뒤섞인 책을 읽으면서 묘하게 계속 읽고 끝까지 읽게 되는 매력이 무엇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젠체 가르치려 하지 않은 백인 인류학자의 열정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원시인들을 재단하거나 불쌍해하거나 그렇다고 칭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관점이 좋았다. 하지만 관찰력과 어휘력(특히 명사)이 부족해서 재미있다는 말 이외에 슬픈 열대를 설명할 말이 많지 않았다.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을 읽고 <타인의 시선으로 내 삶을 돌아본다>는 주제문을 중심으로 슬픈 열대라는 고전을 해석한 책을 토대로 해서 슬픈 열대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덕에 해석과 관점의 다채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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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도 끝도 없는 모험, 『그림 동화』의 인류학
오선민 지음 / 봄날의박씨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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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림동화의 그림이 그림일기의 그림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림동화란 독일 그림(Grimm)형제가 19세기 초반 채록한 독일 민담이라고 한다. 또 동화란 애들 재울 때 읽어주는 이야기, 과자로 만든 집이 나오거나 난데없이 여우가 나타나서 이래라 저래라하고 개구리가 왕자로 바뀌는 등 허무맹랑하고 개연성 없는 이야기, 갑자기 이후로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급마무리되는, 아이들에게나 통할 이야기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동화에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보살펴주는 부모는 애초부터 없거나 매우 초반에 죽고 아이들은 고아가 된다. 주인공 아이들은 가도 가도 끝없는 검고 빽빽한 숲으로 다짜고짜 던져져서 온갖 간난신고를 한다. 숲은 배고픔, 추위, 피로로 가득찬 통과의례의 장이 된다. 숲을 나오려면 친구를 사귈 수 있어야한다. 친절하고 착한 친구가 아니라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서로 다른 ‘필요’가 있는 친구이다. 작가는 동화는 반드시 집을 떠나 고생하면서 남과 함께 살아갈 방도를 깨닫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작가에 따르면 현대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되도록 오랫동안 부모 품안에서 보살핌을 받고 최대한 안전하고 튼튼하게 지켜줄 보험같은 부모가 아닌 모양이다.

 

동화는 예쁜 공주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 때의 ‘예쁘다’는 비주얼이 인형같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처지에 연연하지 않고 살길만 생각하는 담대한 소녀를 ’예쁘다‘라고 한다’라는 해석도 재미있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도 얼굴이 이쁘다고 어이없는 짓만 하고 자기 이쁜 것만 봐달라고 하는 이를 누가 이뻐하나. 현명하고 담대하게 앞 길을 헤쳐나가는 소녀가 멋진 것 같다. 또 동화는 시작과 끝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다루는 동시에 지금이라고 하는 바로 여기를 크게 강조한다는 해석도 흥미로웠다. 내가 품고 있는 두려움이란 것이 주로 ‘내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는 심판의 목소리, 사후 세계, 잊히지 않는 과거의 기억, 그리고 자연 안에 회오리치는 무차별적인 우연’ 등 나의 바깥에서 내 삶을 규정하는 요소들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에 따르면 내가 두려워해야할 것은 ‘내 배를 때리는 이 차가움, 물고기들의 펄떡거림’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 내가 먹고 싸는 것, 이 구체적인 순간만이 우리가 정말 예민하게 주시해야 하는 지점이다’

 

이 책의 제목은 <시작도 끝도 없는 모험, 그림동화의 인류학>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지금, 구체적인 순간만 있는 모험 이야기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그림동화는 물론이고 레비스트로스, 마르셀 모스, 스티븐 미슨 등의 인류학 저서와 근대 문학과 그 밖의 많은 인문학 책들이 그림동화 해석을 돕기 위해 등장한다. 작가는 어린 아이들을 키우면서 동화를 읽다가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의 아이들 덕분에 나도 이런 멋진 해석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훌륭한 표지와 목차 디자인에도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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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시간 그리고 작가의 길 북드라망 클래식 (북클)
오선민 지음 / 북드라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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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을 한마디로 한다면 ‘이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었나!’ 이다. 이 책은 2014년 나온 책의 개정판이다. 나는 이 책의 원판을 2018년에 읽었는데 그 때는 이렇게 재미있었다는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책을 손에 잡고 중간 멈춤 없이 끝까지 다 읽었다. 밤은 깊었는데 중간에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뒤에 올 이야기가 궁금했다. 작가의 말대로 개정을 하면서 머리말과 약간의 내용 수정만 있었을 뿐인데 그간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마도 내가 3년의 시간동안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일로 달라졌고 무엇보다 최근에 읽고, 쓰기 공부를 하면서 글쓰기의 태도에 관한 관심이 컸기 때문에 이 책과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이 이유 같다.

 

책꽂이에 꽂힌 이 책의 원판을 찾아서 읽어보니 작가는 머리말을 완전히 새로 썼다. 원판에는 책을 쓸 것을 제안 받았을 때 이제 막 백일이 된 쌍둥이 딸들을 두고 책을 쓰려는 급한 마음과 육아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쳐 목표와 의무에 사로잡힌 채 흘려보냈던 시간들, 그러다 문득 그런데 왜 프루스트는 작가가 되려고 했을까? 라는 질문을 해보게 되고, 프루스트가 쓰려던 것은 줄거리(인과)가 아니라 작가의 태도에 관한 것임이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미치고 나서 작품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었다고 한다. 거기서부터 작가는 새롭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만에 다시 이 책은 출판사를 바꾸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고 작가는 한결 여유로운 어조로 개정판의 머리말을 쓴다. 나는 어쩌면 작가도 개정판 작업을 하면서 7년 전 자신이 쓴 작품의 독자가 되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작가가 이 책에서 강조했던 자신에게 던지는 천 번의 질문, 절차탁마하는 수도승, 수련하는 삶에 대한 깨달음은 깨달음에서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 개정판뿐만 아니라 2020년 9월 출간된 『자유를 향한 여섯 번의 시도-카프카를 읽는 6개의 키워드』(나는 이 카프카에 대한 책도 읽었는데 프루스트에 대한 책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2021년 중 출간될 예정인 ‘그림동화 인류학’(가제)가 그 응답이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기획하고 집필하는 데 14년이 걸렸다. 작가는 머리말에 “프루스트는 소설을 쓰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많은 질문들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보려고 했다. 동시에 끝도 없이 매번 달라지는 답들에 기뻐했다.”라고 적고 있다. 작가가 프루스트의 작품을 그렇게 해석한 것은 아마도 그 인용문에서 ‘프루스트’ 자리에 ‘오선민’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넣어도 문장이 성립할 정도로 그가 계속해서 수련자의 태도로 책을 써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가 14년에 버금가는 시간동안 이 책을 고쳐 써서 개정 작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텍스트를 달리해서 그의 생각에 계속해서 하루하루 살을 붙이고 색을 입히고 있는 것 같다. 수련자 작가가 차례로 내놓을 책들을 기다리며 작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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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향한 여섯 번의 시도 - 카프카를 읽는 6개의 키워드
오선민 지음 / 북드라망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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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카프카의 소설, 일기, 편지 등 글쓰기를 ‘자유를 향한 여섯 번의 시도’로 해석한 해석서이다. 카프카의 작품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벌레가 되지만 왜 애초에 벌레가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고(「변신」),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체포되지만 죄의 내용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소송』). 또 주인공들은 원래 가려던 목적지에서 비켜 나와 길바닥 골목을 헤매 다니기 일쑤다(『성』,『실종자』). 내용에 ‘왜’, ‘목적’이 없고 형식에도 3편의 장편 모두 미완으로 끝나는 등 마무리라는 ‘목적’이 없다.

작가는 카프카의 작품이 무작정 좋아서 읽기를 시작했지만 막상 카프카에 대한 책을 쓰다 보니 각각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테마가 충돌하고 문장들을 아무리 맞춰보아도 퍼즐처럼 딱 떨어지지 않아 힘들었다고 한다. 이리저리 붙인 조각들이 이어지지 않아 다 외워버리겠다는 각오로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기도 하고 카프카를 해석한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질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의 책, 그 철학자들의 카프카 해석을 해석한 책까지 확장해보기도 하였으나 카프카와는 더 멀어져만 갔다고 한다. 급기야 무릎으로 툭 친 이야기만 며칠째 계속하는 카프카의 일기를 읽고는 카프카는 미쳤고, 자신도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포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책 마무리를 위해 간 프라하에서도 서둘러, 확실하게 마무리하려는 급한 마음에 해도 안될 일에 왜 그런 공을 쏟았는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카프카의 작품을 읽었던 수많은 시간이 무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카프카에 대해 뭔가를 써야한다는 목적을 내려놓자 카프카의 매일같이 고쳐 쓴 글쓰기가 완벽한 문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퇴고가 아니라는 점, 무릎을 끝도 없이 툭치는 이야기는 Ctrl C, Ctrl V가 아니라 무한한 차이가 발생하는 반복이라는 점이 보이기 시작하자 문득 자기 물건이라고는 거의 없는 작은 방에 책상 하나를 갖다 놓고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종이를 마주하여 무술을 익히듯 글을 쓰고 또 쓰고, 또 고쳐 쓰고 있는 수련자, 카프카가 보였다고 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대학원에서 근대문학을 공부한 대한민국 40대 주부로서 아이들의 엄마로 소개한다. 밥, 빨래, 육아,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 해석 글쓰기를 병행한 것이다. 작가는 책 서문에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 이후 본문 어느 곳에서도 자기 생활이라고는 내보이지 않는다. 일기에서조차 자기 일이라고는 쓰지 않았던 카프카 작품의 해석서이기에 자기 이야기 부재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작가가 카프카에게서 수련자의 모습을 본 것은 작가 역시 매일 글쓰기를 하는 수련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 스스로도 카프카 덕분에 프라하까지 왔으면 됐고 정답은 없지만 스스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으면 됐다고 한다. 작가는 카프카의 작품을 자유와 그를 위한 시도로서 유목, 독신, 소송, 측량, 변신, 문학 등 6가지 키워드로 설명한다. 결국 그 키워드들은 글쓰기로 귀결된다. 나는 이 책을 ‘카프카의 작품을 ‘자유를 향한 글쓰기’로 해석한 한 수련자의 글쓰기‘로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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