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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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예술이기에, 자신에게 가장 솔직하고 진실했을 때, 독자들은 그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삶의 경험을 소박하고 겸손하게 표현한 그녀의 모든 문장들이 아름답다. 살아있다고 느껴지게하는, 호흡을 정갈히 가다듬게 만드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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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 - 사랑에 관한 뜨거운 탐구로 전하는 차가운 위로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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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려운 것처럼 이 책도 어려울 수 있겠지만 ‘사랑‘의 실체에 대해 차근차근 분석해나가는 과정에서, 분명 나에게는 지금까지 사랑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인 편견들을 긍정적인 것들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남,녀 서로의 입장을 바꿔서 이해해볼 수 있는 부분들이 좋았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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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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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때 수능 국어 공부하며 처음 접했던
나희덕 시인의 '못 위의 잠'이라는 시가 있다.
당시에는 그저 문제 풀이의 대상으로만 생각했기에
깊이있게 느껴보지 못하고 지나친 시였다.
18살의 나이로는 이 시의 참뜻을 다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졸업하고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을 읽게 되면서
다시 한번 이 시를 읽었다.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하러 나온 실업자인 남편과 어린 아이들, 노동으로 인한 아내의 창백한 얼굴, 좁은 골목길을 함께 걸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
실업과 가난의 현실을 고발하는 시 중에 가장 감각적이며, 슬픈 시라고 생각한다.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라는
아내의 창백한 낯빛을 묘사하는 문장이,
하루종일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모든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너무나도 잘 나타내준다.
1993년도 이전에 쓰인 시라고 알고 있는데,
이때와 30년이 지난 지금이 어찌 나아지거나 달라진 것 없이 참혹할까.
얼마전에 xx 기업의 물류센터에서 장시간 고된 노동 때문에 심장 이상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뉴스기사를 봤다.
고인의 사망 직전 업무 cctv 영상을 보면,
심장을 움켜쥐고 박스에 기대어 서 있는 직원을 그 누구도 본척 만척 당연하다는듯이 다들 자신의 업무를 하고 있다.
조금 이상이 있었을때 휴게실로 데려가 몸상태를 보고 바로 병원으로 옮겼다면 살 수도 있었을텐데.
현장에 있던 다른 직원들의 탓이라고 하기엔 'xx'라는 한국 최대의 유통기업을 위해 1분1초가 바쁘게 움직여야 할 모든 직원들이 어쩌면 피해자에 속하지 않을까.
물류센터에 즐비한 박스들보다도 못한 것이 사람 목숨이라니.
빠른배송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홍보하는 대한민국의 물류 시스템이 원망스러웠다.
노동량에 걸맞는 수만큼 직원들을 채용했어야하고, 일의 강도에 따라 적절한 휴게시간을 보장해야만 하는게 법이자, 기본 상식인데도 기업은 인건비를 아끼고자 엄청난 노동량에 적은 직원들로 대응시켜 강도높은 노동을 부여한다.
산업현장에서 당당히 육체 노동으로 밥벌이하는 사람들의 인권은 아직도 제자리이다. 아니, 그 안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 모두가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열심히 살아내려는 노력이 허망한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좀 더 서로를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대부분이 고단한 밥벌이를 하느라 지친 몸으로 퇴근하고, 겨우 일어나 출근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도 다들 웃고 희망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에겐 살아갈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세상 그 누구도 빼앗을수도 없고, 빼앗어서도 안되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그녀의 시선으로 본 일상의 풍경이 담긴 담백한 수필들이 들어있다.
그녀의 시만큼이나 문장들이 아름답고 간결하고 감각적이다.
수필은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통찰이 담겨있는 예술이기에,
그 작가만의 진솔한 이야기들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독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뽐내는 글은 적어도 수필이라는 장르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유식함을 드러내고, 타인을 깎아내리는 내용은 '수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희덕 시인의 수필을 참 좋아한다.
오래전에 읽은 이 책을,
문학 문제집을 넘기다 발견한 그녀의 시를 읽다가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못 위의 잠'을 시린 가슴으로 다시 적어보며 마무리한다.

<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로만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샜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 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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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당신의 손을 잡을 때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지음, 이창식 옮김 / 푸른숲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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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당신의 손을 잡을 때'
몇 년전에 헌책방에서 중고책들을 구입한 적이 있다.
책을 엄청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시길래,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구매할 수 있었다.
택배박스를 여는데, 주문하지 않은 낯선 책이 들어있었다.
포스트잇에 '서비스 책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그게 이 책과의 첫만남이었다.
선물과도 같은 책, 겨울철 난로보다도 참 따뜻한 책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 책의 저자인 '잭 캔필드'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이 부모님 세대에 유명한 책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류시화 작가님이 번역하셨다고 해서, 그 이후에 개정판으로 읽어보았고, 잭 캔필드 작가님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책 제목에서 그렇듯이 이 책은 사랑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은 책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친절함'에 대한 이야기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랑'이라는 것이 단순히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본 최초의 사랑은 무엇이었나?
지난 날들을 떠올려보았다.
참 많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상하게 사랑이 녹아있던 추억은 언제나 눈물과 함께 찾아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수업이 끝나고 청소당번이라서 담임 선생님과 함께 청소 중이었는데, 복도에서 기침을 심하게 하는 아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기침 소리만 듣고도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갑자기 복도로 뛰어나가 그 아이에게 '기침 소리가 심하니깐 꼭 부모님하고 병원가야되 알았지?' 라며 거듭 당부했다. 당시 나는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선생님이 왜 그렇게 놀란 표정으로 그 아이에게 달려 나갔는지 이해가지 않았고, 중학생이 되어서야 선생님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내 막내 동생이 어렸을 때 폐렴에 심하게 걸려서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았었고, 간병하신던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몇번의 심각한 고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동생이 잘못될까봐 학교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동생에게 줄 편지를 울면서 썼던 기억이 있다. 그제서야 그때 선생님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 아이의 기침소리만 듣고도 선생님은 혹시라도 급성폐렴으로 아이가 위독해질까봐 갑자기 뛰쳐나가 아이에게 부모님과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말한 것이었다. 선생님 반의 학생도 아니었고, 전혀 모르는 아이였는데 그때 선생님의 세상 무너진 듯 걱정스러운 표정이 바로 내가 처음으로 느낀 '사랑'의 얼굴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하는 그 무엇, 그것의 행동.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느끼고 배웠다.
선생님같은 어른이 되어야지, 라고 그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얼마전에 도서관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첫출근 일주일 전, 나는 내가 일할 곳의 업무를 파악하기 위해서 주말 아침 일찍 도서관을 방문했다.
우리 지역의 시립도서관은 매년 50만명의 이용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곳이라, 특히 주말에는 아침 9시 문 열자마자 1시간도 안되서 자리가 다 찬다.
그날도 역시 자리가 빨리 차서, 앉을 곳이 없어 학생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잠깐 물을 마시러 휴게실에 갔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 둘이 책가방을 옆에 두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딱 봐도 도서관에 자리가 없어서 휴게실에 쪼그려 앉아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께서 차 태워서 도서관에 내려줬을테고, 아마 부모님께서 데릴러오시기 전까진 이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야만 할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 혹시 자리가 없어서 여기 있는거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그렇다고 했다.
알고보니 둘이 형제였고 형은 이제 중1, 동생은 초등학생이었고, 공부하러 왔는데 자료실에 자리가 없어서 휴게실에서 공부하려고 했단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1층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에 가면 공부할 수 있는 자리가 많다고 했고, 동생이 초등학생이라서 같이 이용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그러자 갑자기 세상 가장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형과 동생이 두 손 꼭 잡고 1층 어린이 도서관으로 뛰어갔다. 사실 모르는 꼬마들한테 다가가서 말걸기가 부끄러웠고, 그 아이들이 공부할 자리가 없어 휴게실에 쪼그려 앉아있는 걸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용기내서 아이들에게 다가갔고, 그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절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것에 어떤 책임감이 갑자기 느껴졌었다.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장면은 그 형제의 뒷모습이었다.
오늘 도서관에서 동생이랑 같이 책도 읽고 공부하고 집에 갈 수 있다는, 그 생각에 너무 좋아서 동생 손 꼭 잡고 세상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뛰어가는 그 형제의 뒷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동생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동생을 챙겨야 하는 첫째들의 책임감과 사랑을.
사실 첫째들도 동생을 챙기기엔 너무 어리고, 무섭고, 모든 게 다 처음인데 말이다. 그래도 첫째기에 언제나 강한 척, 모범을 보여야하는 숙명. 그런데도 그렇게 좋아서 동생 손 꼭 잡고 공부하러 도서관으로 뛰어가는 형제를 보며, 또 나는 '사랑'을 보고 느꼈다.
도서관에서 일할 때도 역시나 사랑을 경험한 순간이 참 많았다.
그 중 가장 기억나는건
도서관 마감시간 전, 책 정리하느라 가장 바쁜 시간이었고
아이들이 드넓은 도서관 구석구석마다 숨겨놓은 책들을 챙겨서 서가에 다시 꽂아야 할 때,
길게 줄지어진 소파 뒤로 아이들이 떨구어 놓은 책을 모조리 꺼내야하는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근데 소파에 어떤 아저씨께서 앉아계셨고, 그 아저씨 자리 뒤쪽으로 넘어간 책을 다 꺼내야되서 아저씨께 잠깐 비켜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니 이게 웬걸. 이미 그 아저씨께서 소파 뒤로 넘어간 책들을 다 꺼내서 소파 위에 두셨던 것이다.
아마 내가 땀 뻘뻘 흘리며, 힘들게 구석 틈틈이 책을 꺼내는 모습을 보셨나보다. 정말 바뻤었고, 도저히 웃을 수 없을만큼 업무량이 많았을 때라 좋지 않은 표정으로 하루종일 일했을텐데. 내가 해야할 일이었는데, 책을 미리 다 정리해주신 아저씨께 너무 감사했다. 세상엔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있구나. 나는 그때부터 더 책임감을 갖고 아무리 힘들어도 웃으며, 열심히 일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친절함'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사람을 돕고 또 무심히 지나간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정치인들의 거대한 신념과 담론보다,
그저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친절함을 베풀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사랑'의 참모습이다.
그저 누군가를, 혹은 어떤것을 좋아하는 '감정'에 놀아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 감정만을 생각하고 그 감정 속에 빠지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겠는가.
사랑은 대상에서 다른 대상에게로, 어떠한 영향이나 변화가 이루어지며 발생하는, 알수 없는 '에너지'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각자가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들이 다르지만, 나혼자만이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들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질 수 있는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적어도 어떤 것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나의 행동이 어떤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 그것이 다른 것으로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고.
'반향(反響)'이라는 단어가 사랑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라는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대상에서 대상에게로 끝없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간의 의지. 나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느끼며 말하는 것들은 결국 어떤 감정이나 우리가 가진 것들이 절대 아니고,
그저 알 수 없는 원인과 결과들의 향연이라고 생각한다.
존재하는 건 다만 우리의 선택과 행동, 그리고 의지일뿐이다.
사랑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눈 앞에 펼쳐진 결과들 속에서 우리의 의지가 이끌어낸 어떤 영혼의 울림을 느끼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이야기들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영화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면'에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대사 있었다.
"보다시피 모든 사소한 행위 뒤에는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무한한 진실이 실려있네. 다시 말하면 끝없는 반향과 결과를 내포하는 거지" 라는.

마지막으로 이 책의 표지에 적힌 몇가지의 문장들을 적는다.
내가 그동안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잘 나타내주는 문장들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가진 것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주어야 한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실천은 작은 친절을 습관처럼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아닌 친절함 때문이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던 때가 인생에서 가장 인상깊은 순간이었다.'
'사랑으로 지어진 집은 천년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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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붉게 물들다 1
김라온 지음 / 현대문화센터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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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아마 '인소'라는 단어를 알 것이다.
'인터넷 소설'의 줄임말.
현재 네이버의 '웹소설', 혹은 '라이트 노벨'이라고 불리우는.
한국 정통 순수문학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지만,
누구는 분명 이 유치하고 논리적이지 않은 판타지같은 어설픈 소설을 왜 읽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2000년대 초중고 시절 우리가 한때 미쳐서 읽었던 인터넷 소설이 있었다.
한국 문학에서 아름다운 묘사로 손꼽는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만큼이나,
나에게는 미치도록 아름답고 설렜었던 인소들.
그 중에 제일 좋아했던 작품이 바로 '심장은 붉게 물들다'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인소의 세계에 푹 빠졌었다.
그 전까지는 피아노와 음악과 만화에 빠졌었고,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은 모범생이었다.
그런 내가 고2 때 도도퀸단비의 '열병'이라는 인터넷 소설을 읽고부터는 미친듯이 인소에 빠져서,
당시 음악과 동영상, 텍스트파일까지 다 저장할 수 있었던 MP3에 세상 모든 인소를 다 집어넣고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감독선생님 몰래 읽었었다.
나한테는 이것이 크나큰 일탈이었다.
학교 자습시간에 다들 내신, 수능 공부할 때 소설을 그것도 인터넷 소설을 읽다니, 그땐 진짜 미쳤었다.
그래도 감독쌤 몰래 그 방대한 양의 텍스트파일을 빨리 읽어내느라 덕분에 수능 국어영역 점수는 좋았었다. 긴 지문을 빠른시간 내에 정확히 읽어내는 데에 인소가 확실히 도움은 되었다.
이 소설의 작가는 김라온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당시 내가 텍스트파일로 다운 받았을 때의 필명은
'틀에박혀'였다.
아마 이 작가님도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서 오로지 대학 진학을 위해 고등학교 3년의 수업이 수능 위주로 흘러갔던 재미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타파하고자 '틀에박혀'라는 닉네임을 쓴 것이 아닐까, 그때는 어린마음에 그렇게 추측했었다.
소설의 내용은 비운의 운명 속에서 자신을 연민하며,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여주를 무척이나 사랑해주는 남주가 등장하면서부터 여주는 밝은 모습으로 점차 달라지게 되고 둘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딱 그당시 유행하던 인소들의 패턴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근데, 설렌다 미치도록. 이게 인소의 매력이다.
별거없는 내용에 유치하게 짝이 없는 대화와 감정의 전개, 간혹 말도 안되는 판타지적인 설정들.
인소를 정상적인 소설의 범주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 쯤이야 다 이해하고 넘어가면 그만이고,
인소가 그 당시 그렇게 유행했던건
아마도 한창 사춘기였던 소년,소녀들의 말도 안되는 이상한 로망들이 인터넷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완벽히 구현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또래들도 그랬겠지만, 유독 나는 상상을 많이 했다.
나는 걸어서 초중고를 다녔었고,
아침에 등교하는 길,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 자연, 건물 등의 풍경을 매일 보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도 않을까? 라는 식의 모든 사건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게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하루는 학교에 나를 데릴러 온 어머니와 함께 걸어오는 도중에 숲을 지나오며,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 편의 시같은 언어들을 읊어대었고,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너 사춘기니?' 하시면서 웃곤 하셨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참 신기하다.
그 정도로 나는 학창시절에 문학에 빠졌었나보다.
인터넷 소설은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정통 순수문학에는 없는 설레임과 떨림을 무한정으로 느끼게 해준다.
정말이지 입 틀어막고 볼 빨개지면서 속으로 비명지르면서 그렇게나 설레면서 인소를 읽었던 기억은 아마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닐거다.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 휩싸이며, 어른들이 보기엔 말도 안되는 것들로 고민하고 상처받았을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이상한 머릿 속 세계를 그대로 소설에 옮겨놓고 온갖 로망들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인터넷 소설이었다.
거기서 위로받고 또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해내었던 학생들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 소설은 우리 세대의 혁명이었고, 우리가 사랑했던 문화였다.
한가지 더.
90년대 생들은 음악을 MP3로 들었고, PMP라는 기계에 인강이나 동영상, 텍스트파일을 넣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에겐 그 기기들이 추억 속에 가장 아름다웠던 것들로 남아있다.
MP3가 없었다면 음악을 못 들었을테고, PMP가 없이는 자습시간에 인강을 들을 수가 없었으니깐.
물론 그마저도 고3 끝무렵, 애플사의 스마트폰이 아닌 국내 회사의 스마트폰이 처음으로 출시되면서 MP3는 더이상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든 자신의 세대에서 문화를 즐겼던 수단과 도구가 있었을 것이고, 그건 세월이 얼마나 흘러도 잊을 수 없어 소중히 간직하는 추억이 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학창시절에 사용했던 MP3를 가지고 있다.
최고급 기기는 아니었지만,
내가 상상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상상하게 해주었고,
모든 감정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고마운 MP3였기에.
나는 그걸로 음악을 들으며 힘든 순간을 지나왔고,
글을 읽으며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매우 들떴었다.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건
음악이나 문학, 미술, 영화 등의 '예술'이다.
끝내 예술가는 될 수 없지만,
인생 살아가는 내내
그 아름다운 것들을 최대한 보고 느끼며 가슴에 품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
.
내 방 책꽂이 한 켠에 있는 이 인소를 발견하고선 이렇게까지 추억에 잠겨 버렸다.
서평 쓰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큰일이다.
당분간 여기가 내 일기장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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