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은 붉게 물들다 1
김라온 지음 / 현대문화센터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아마 '인소'라는 단어를 알 것이다.
'인터넷 소설'의 줄임말.
현재 네이버의 '웹소설', 혹은 '라이트 노벨'이라고 불리우는.
한국 정통 순수문학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지만,
누구는 분명 이 유치하고 논리적이지 않은 판타지같은 어설픈 소설을 왜 읽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2000년대 초중고 시절 우리가 한때 미쳐서 읽었던 인터넷 소설이 있었다.
한국 문학에서 아름다운 묘사로 손꼽는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만큼이나,
나에게는 미치도록 아름답고 설렜었던 인소들.
그 중에 제일 좋아했던 작품이 바로 '심장은 붉게 물들다'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인소의 세계에 푹 빠졌었다.
그 전까지는 피아노와 음악과 만화에 빠졌었고,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은 모범생이었다.
그런 내가 고2 때 도도퀸단비의 '열병'이라는 인터넷 소설을 읽고부터는 미친듯이 인소에 빠져서,
당시 음악과 동영상, 텍스트파일까지 다 저장할 수 있었던 MP3에 세상 모든 인소를 다 집어넣고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감독선생님 몰래 읽었었다.
나한테는 이것이 크나큰 일탈이었다.
학교 자습시간에 다들 내신, 수능 공부할 때 소설을 그것도 인터넷 소설을 읽다니, 그땐 진짜 미쳤었다.
그래도 감독쌤 몰래 그 방대한 양의 텍스트파일을 빨리 읽어내느라 덕분에 수능 국어영역 점수는 좋았었다. 긴 지문을 빠른시간 내에 정확히 읽어내는 데에 인소가 확실히 도움은 되었다.
이 소설의 작가는 김라온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당시 내가 텍스트파일로 다운 받았을 때의 필명은
'틀에박혀'였다.
아마 이 작가님도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서 오로지 대학 진학을 위해 고등학교 3년의 수업이 수능 위주로 흘러갔던 재미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타파하고자 '틀에박혀'라는 닉네임을 쓴 것이 아닐까, 그때는 어린마음에 그렇게 추측했었다.
소설의 내용은 비운의 운명 속에서 자신을 연민하며,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여주를 무척이나 사랑해주는 남주가 등장하면서부터 여주는 밝은 모습으로 점차 달라지게 되고 둘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딱 그당시 유행하던 인소들의 패턴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근데, 설렌다 미치도록. 이게 인소의 매력이다.
별거없는 내용에 유치하게 짝이 없는 대화와 감정의 전개, 간혹 말도 안되는 판타지적인 설정들.
인소를 정상적인 소설의 범주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 쯤이야 다 이해하고 넘어가면 그만이고,
인소가 그 당시 그렇게 유행했던건
아마도 한창 사춘기였던 소년,소녀들의 말도 안되는 이상한 로망들이 인터넷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완벽히 구현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또래들도 그랬겠지만, 유독 나는 상상을 많이 했다.
나는 걸어서 초중고를 다녔었고,
아침에 등교하는 길,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 자연, 건물 등의 풍경을 매일 보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도 않을까? 라는 식의 모든 사건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게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하루는 학교에 나를 데릴러 온 어머니와 함께 걸어오는 도중에 숲을 지나오며,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 편의 시같은 언어들을 읊어대었고,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너 사춘기니?' 하시면서 웃곤 하셨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참 신기하다.
그 정도로 나는 학창시절에 문학에 빠졌었나보다.
인터넷 소설은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정통 순수문학에는 없는 설레임과 떨림을 무한정으로 느끼게 해준다.
정말이지 입 틀어막고 볼 빨개지면서 속으로 비명지르면서 그렇게나 설레면서 인소를 읽었던 기억은 아마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닐거다.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 휩싸이며, 어른들이 보기엔 말도 안되는 것들로 고민하고 상처받았을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이상한 머릿 속 세계를 그대로 소설에 옮겨놓고 온갖 로망들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인터넷 소설이었다.
거기서 위로받고 또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해내었던 학생들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 소설은 우리 세대의 혁명이었고, 우리가 사랑했던 문화였다.
한가지 더.
90년대 생들은 음악을 MP3로 들었고, PMP라는 기계에 인강이나 동영상, 텍스트파일을 넣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에겐 그 기기들이 추억 속에 가장 아름다웠던 것들로 남아있다.
MP3가 없었다면 음악을 못 들었을테고, PMP가 없이는 자습시간에 인강을 들을 수가 없었으니깐.
물론 그마저도 고3 끝무렵, 애플사의 스마트폰이 아닌 국내 회사의 스마트폰이 처음으로 출시되면서 MP3는 더이상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든 자신의 세대에서 문화를 즐겼던 수단과 도구가 있었을 것이고, 그건 세월이 얼마나 흘러도 잊을 수 없어 소중히 간직하는 추억이 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학창시절에 사용했던 MP3를 가지고 있다.
최고급 기기는 아니었지만,
내가 상상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상상하게 해주었고,
모든 감정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고마운 MP3였기에.
나는 그걸로 음악을 들으며 힘든 순간을 지나왔고,
글을 읽으며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매우 들떴었다.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건
음악이나 문학, 미술, 영화 등의 '예술'이다.
끝내 예술가는 될 수 없지만,
인생 살아가는 내내
그 아름다운 것들을 최대한 보고 느끼며 가슴에 품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
.
내 방 책꽂이 한 켠에 있는 이 인소를 발견하고선 이렇게까지 추억에 잠겨 버렸다.
서평 쓰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큰일이다.
당분간 여기가 내 일기장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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