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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평점 :
고3때 수능 국어 공부하며 처음 접했던
나희덕 시인의 '못 위의 잠'이라는 시가 있다.
당시에는 그저 문제 풀이의 대상으로만 생각했기에
깊이있게 느껴보지 못하고 지나친 시였다.
18살의 나이로는 이 시의 참뜻을 다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졸업하고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을 읽게 되면서
다시 한번 이 시를 읽었다.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하러 나온 실업자인 남편과 어린 아이들, 노동으로 인한 아내의 창백한 얼굴, 좁은 골목길을 함께 걸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
실업과 가난의 현실을 고발하는 시 중에 가장 감각적이며, 슬픈 시라고 생각한다.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라는
아내의 창백한 낯빛을 묘사하는 문장이,
하루종일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모든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너무나도 잘 나타내준다.
1993년도 이전에 쓰인 시라고 알고 있는데,
이때와 30년이 지난 지금이 어찌 나아지거나 달라진 것 없이 참혹할까.
얼마전에 xx 기업의 물류센터에서 장시간 고된 노동 때문에 심장 이상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뉴스기사를 봤다.
고인의 사망 직전 업무 cctv 영상을 보면,
심장을 움켜쥐고 박스에 기대어 서 있는 직원을 그 누구도 본척 만척 당연하다는듯이 다들 자신의 업무를 하고 있다.
조금 이상이 있었을때 휴게실로 데려가 몸상태를 보고 바로 병원으로 옮겼다면 살 수도 있었을텐데.
현장에 있던 다른 직원들의 탓이라고 하기엔 'xx'라는 한국 최대의 유통기업을 위해 1분1초가 바쁘게 움직여야 할 모든 직원들이 어쩌면 피해자에 속하지 않을까.
물류센터에 즐비한 박스들보다도 못한 것이 사람 목숨이라니.
빠른배송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홍보하는 대한민국의 물류 시스템이 원망스러웠다.
노동량에 걸맞는 수만큼 직원들을 채용했어야하고, 일의 강도에 따라 적절한 휴게시간을 보장해야만 하는게 법이자, 기본 상식인데도 기업은 인건비를 아끼고자 엄청난 노동량에 적은 직원들로 대응시켜 강도높은 노동을 부여한다.
산업현장에서 당당히 육체 노동으로 밥벌이하는 사람들의 인권은 아직도 제자리이다. 아니, 그 안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 모두가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열심히 살아내려는 노력이 허망한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좀 더 서로를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대부분이 고단한 밥벌이를 하느라 지친 몸으로 퇴근하고, 겨우 일어나 출근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도 다들 웃고 희망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에겐 살아갈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세상 그 누구도 빼앗을수도 없고, 빼앗어서도 안되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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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그녀의 시선으로 본 일상의 풍경이 담긴 담백한 수필들이 들어있다.
그녀의 시만큼이나 문장들이 아름답고 간결하고 감각적이다.
수필은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통찰이 담겨있는 예술이기에,
그 작가만의 진솔한 이야기들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독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뽐내는 글은 적어도 수필이라는 장르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유식함을 드러내고, 타인을 깎아내리는 내용은 '수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희덕 시인의 수필을 참 좋아한다.
오래전에 읽은 이 책을,
문학 문제집을 넘기다 발견한 그녀의 시를 읽다가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못 위의 잠'을 시린 가슴으로 다시 적어보며 마무리한다.
<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로만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샜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 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