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게 아니었어요. '날을 잡아'라는 말은 야수의 그림자가 아니라, 빛을 잡으라는 거였어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죠. 다른 걸 잡으라고, 미지의 것을 향해 가라고.

인생을 향해 가라고. 

이제는 그곳에 가고 싶네요. 미지의 것을 향해."


인생을 향해, 미지의 것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생까지 파멸시킨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을 파괴할 만큼,

한 사람의 비극 속에 오랫동안 숨겨져 온 야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소설 속 주인공인 앙투안, 그의 인생 전체를 이해할 때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불행했던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부모님의 따스한 손길과 사랑을 갈구했던 한 소년의 마음에는

'비겁함'이라는 존재가 뿌리 내렸고, 그건 그의 인생 전체를 갉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침묵하고, 비겁하게 자신을 숨겨왔던 그가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소리를 내었던 순간.

바로 그의 딸 조세핀에게 총을 겨눈 순간이었다.

이 말도 안되는 행동을 이해하기까지는, 적어도 두 가정의 붕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가족이 어떻게 탄생하고 해체되는지 지켜보면서, 현실 속 우리들의 가족은 어떠한 모습인지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반성은 고통을 동반하기에 이 소설은 참 아프게 읽어야만 했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 총을 쏜 행위는 명백하게 범죄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소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이 비극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여정' 속에 있다.


"이해한다는 건 타인을 향해 성큼 다가서는 거예요. 용서의 첫걸음인 셈이죠."


주인공 앙투안의 말이다.

앙투안의 비극적인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용서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가 총을 겨누었던 그의 딸 조세핀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파괴한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을 담았기에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용서'에 초점을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용서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용서함으로써 사랑보다 더 큰, 그 너머에 있는 인간의 행복과 기쁨을 나는 이 소설에서 보았다.

사랑받고자 했고,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한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정답은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독자들은 알 수 있게 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에서 행복이 실현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사랑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소리 없이 전달하고 있다.

그럼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그 답을 찾는 것은 역시나 독자들의 몫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왠지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것에 큰 의문을 가져왔다.

것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이 있을거라는 막연한 느낌.

그러나 내가 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것이기에, 사랑 그 너머에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알았기에 그 누구로부터 사랑을 갈구하지는 않았다.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사랑으로 인한 외로움은 없게 된다.

원래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앙투안의 외로움을 따라가려면 나도 어떻게든 내 인생의 외로움을 돌아보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건, 사랑받길 원하지 않는 이에겐 사랑받는 일 또한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은 내게 참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좋아한다는 고백도, 감정도 이해되지 않기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그래서 이소라의 노래 중에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는 가사가 있는 걸지도.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어느 쪽도 서로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앙투안과 그의 어머니,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앙투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시를 사랑했고, 화학을 전공하는 20살의 청년과 작가를 꿈꾸었던 17살의 소녀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혼을 했으니, 그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자식들은 불행을 선택할 수 없다.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는 순간부터, 그 아이의 운명에는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게 된다.

태어나서 내가 자라게 될 가정이 화목한지, 부모님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지, 이 가정이 오래도록 존재할 것인지.

이런 것들은 온전히 아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화목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가족이 깨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면 

앙투안이 이렇게 마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아무리 애원해보아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


이렇듯 앙투안의 기억 속의 가정의 모습은 화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앙투안의 어머니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작가가 되길 희망했으나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주부가 되었다.

그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이른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고, 멘톨 담배를 끊임없이 피웠다.

현실도피. 그녀는 아이와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족 내에서 끝없이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앙투안과 아버지는 짐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의 '비겁함'이 드러난다.

어머니는 앙투안에게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지 말 것을 얘기했다.

아버지의 '비겁함'을 문제삼으면서.

아버지의 비겁한 모습은 아버지 자신이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면,

어머니의 비겁함은 주어진 현실보다 자신의 허황된 꿈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정말 작가가 되고 싶었다면, 그녀는 맥주 대신 펜을 집어들었어야 했다.

물론 육아를 하면서 집필까지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만 있었지,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 속에서 언젠가 눈 앞에 펼쳐질지도 모르는 허황된 삶을 꿈꾸셨어.

어머니는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이었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셨거든.


앙투안의 말에서 어머니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드러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

현실 도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신이 속한 가족을 보려하지 않았고, 결국 가정 내의 자신의 삶조차 내던지게 된다.

앙투안이 5살 때, 부모님은 쌍둥이 여자아이 둘을 또 낳게 된다.

'안'과 '안나'.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안'은 원인 모를 이유로 죽게 되고, 안의 죽음을 핑계 삼아 어머니는 집을 나간다.

처음에는 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집을 나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을 나가 수많은 애인들을 만나고 술과 담배에 절어 살게 된다.

앙투안과 안나가 엄마를 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도 답장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녀가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행위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집을 나가서도 역시 현실 도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었던 것.

앙투안과 안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되찾아 올 것을 바랬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붙잡지 않았다.

앙투안의 가슴 속에 야수가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아버지의 침묵과 소극적인 행동들이 깔려있다.

아버지로서 행동해주길 바랬던 것들과 아버지가 결국 하지 않았던 것들이 맞물려

앙투안의 가슴 속에는 폭발적으로 표출될 수 밖에 없는 야수가 점점 자라게 된 것이었다.

앙투안은 아버지의 비겁함을 줄곧 비난했지만, 어머니 역시 비겁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앙투안은 부모님이 그랬듯 '침묵과 숨김'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앙투안은 사랑을 갈구하기 이전에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앙투안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고,

실험할 때마다 풍겨오는 냄새, 실험이 잘 되지 않을 때 들리던 고함소리, 잘 될 때의 기쁜 외침도 

앙투안은 너무나도 좋아했다.

아버지가 아침마다 신문을 펼치던 모습.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건네는 시시콜콜한 몇 마디에 무심하게 핀잔주는 어머니의 모습도 앙투안에게는 예뻐보였다고.

어머니가 담뱃불을 붙일 때의 팔뚝의 움직임이 마치 루돌프 누레예프가 '소 드 샤 saut de chat'를 하듯 우아해 보였다고 한다.

누군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어마어마한 애정이 있다는 것.

앙투안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저 가정 내의 역할로서가 아니라, 그와 그녀로써 사랑했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비극이 탄생했다.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지만,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때.

엄밀히 말하자면, 앙투안의 부모님은 앙투안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줄 '용기'가 없는 비겁한 사람들에 가까웠다.


장장 30년 동안 아버지가 미소 짓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어.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은 단 한번도 웃질 않으셨지.


여기서 말하는 30년은 어머니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게 되고, 아버지께서 새로 맞이하신 새어머니와의 30년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나서도 붙잡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잠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새로운 여자에게 반하게 되고 그녀를 새 부인으로 맞이한다.

앙투안과 안나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새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그들의 친어머니와는 전혀 달랐다.

'안'이 죽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나서, 안나는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렸고, 앙투안은 벽을 내려쳤다.

새어머니는 아이들을 걱정해서 아버지로 하여금 정신과 상담을 받게 했다.

자신의 자식들도 아닌데 헌신적으로 챙기고, 30년간 가족을 하나로 묶어왔다.

그것이 그저 어머니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

가족을 지탱하려는 노력은 앙투안의 친어머니에게는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가족에게든 반드시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 위기 앞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슬픔 속에 빠진다.

사랑이 저절로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사랑의 충족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가족에게 찾아온 하나의 시련을 두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려 한다.

앙투안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앙투안의 아내 나탈리는 새로운 남자에게로 가서 가정을 꾸렸다.

하나의 가족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 속에는 상처가 자리 잡게 된다.

안나는 비록 실어증에 걸렸지만, 자신의 반쪽짜리 언어를 채워줄 따뜻한 '토마'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앙투안과 아내 나탈리는 한때 서로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나탈리는 바람을 피우고 결국 새 남자에게로 갔다.


앙투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기낸 행동으로 인해 회사에서 해고 당하고,

그의 아버지는 말기 암에 걸리고,

아내 나탈리는 바람을 피운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인 조세핀과 레옹도 아내의 새 남자를 영웅처럼 따르게 되자,

앙투안 속에 억누르고 있던 수많은 모욕과 마음의 상처들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루거 LCR 22 한자루.

조세핀과 레옹과의 인생 가장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재우고선,

그는 딸 조세핀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앙투안은 의사에게 말한다.

그날 밤 날려버리고 싶었던 것은 '불행'이었다고.

자신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자신과 아이들이 죽는다면,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총알은 빗겨나갔고, 조세핀의 턱이 날아가는 것에서 그쳤다.

조세핀은 턱뼈와 피부 이식 수술을 마치고 언어 치료를 받고 무사히 발음할 수 있을 때까지 거의 4년이 넘게 걸렸다.


마지막 제 3부 <행복만을 보았다>는 조세핀의 시점에서 쓰여졌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었던 아버지에 대해 증오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조세핀은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고통이란 이물질 같은 것. 사람은 외피를 만들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지만, 느끼지 못하면 치유될 수 없는 것."


정신과 치료는 조세핀에게 닥쳤던 비극을 그녀가 제대로 마주할 수 있도록 진행된다.

처음에 '아빠'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마지막에는 아빠라고 말하면서 아버지 앙투안과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 중요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언젠가 나한테 있었던 일을 꼭 얘기하게 된다면 좋겠다.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왜냐하면 한때는 이 모든 두려움 이전에, 공포 너머에 사랑이 존재했을 테니까.


아버지를 원망하고 증오했던 조세핀이 치료를 거듭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정말 압권이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결국 그 상처를 들여다봐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스러운 일.

시간이 흘러 조세핀이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하게 되고, 그렇게 성장하면서

점점 더 아버지 앙투안의 내면에 다가가게 된다.

조세핀이 드디어 '날 위한 행복과 평화를 찾고 싶은 마음. 나의 가족과 나의 자리를 되찾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상담 선생님은 '예전에 살아왔던 모습이 아니라 이제 지금 네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라고 좋은 현상이라고 했다.

그동안 자신의 비극적 삶에 대해 품었던 연민, 고통, 환멸, 멸시에서 벗어나, 드디어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조세핀의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났음을 알 수 있다.


조세핀이 아버지 앙투안이 멕시코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상담 선생님 앞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눈물을 쏟는다.

아버지에 대한 모든 증오를 다 해소하게 된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여기서 아주 아름다운 한마디를 건넨다.


"원래 탄생의 순간에는 언제나 엄청난 양의 물과 눈물이 동반되는 거란다.

반갑다, 조세핀, 반가워."


아버지를 드디어 용서할 수 있게 된 조세핀은 그를 만나러 멕시코로 떠난다.

두렵지만 '기쁨'을 한가득 품고선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조세핀이 아버지 앙투안의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하기까지의 여정은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녀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기쁨 때문에 몸이 벌벌 떨린다고 했을 때,

나는 사랑보다 더 큰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사랑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드디어 보았다.

인내와 용서와 이해 끝에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기쁨'.

행복은 바로 그 '기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상처에서 두려움 너머의 사랑을 볼 수 있게 되고, 그 사랑 너머에 있는 '기쁨'을 진정 느끼게 되기까지.

앙투안과 조세핀은 자신들의 얼룩진 삶 속에서 행복만을 보기까지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조세핀이 비행기에서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데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신비한 노래 가사가 흘러나온다.

이 가사를 읽으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 사람 얘기 좀 들려줘요, 어떻게 지내죠? 이젠 행복해하나요?"


아버지와 딸이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찾고, 마침내 진정한 가족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축복하면서...





->사랑 너머에 있는, 사랑보다 더 큰 '기쁨'을 잘 알고 있는 토마와 안나.

이 둘은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실어증으로 인해 반쪽짜리 말만 하는 안나에게 나머지 반쪽의 언어를 채워주는 토마.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관계라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야제 2024-12-20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공백기에 부지런히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있습니다. 사실 ‘행복‘이란 단어에 꽂혀서 구매한 책인데, 내용은 정말 정반대여서 당황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장 넘기는 순간 홀가분해지면서 한 편의 영화를 본 것처럼 많은 감정들이 떠오르더라구요. 서재라는 공간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서재 이웃님들의 책에 대한 열정과 좋은 글 덕분에 저도 많은 힘이 납니다ㅎㅎ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4-12-20 11:33   좋아요 1 | URL
오래 전에 이 작가의 <내 욕망의 리스트>를 읽었는데 좋았던 느낌이 있어요.
전야제 님의 리뷰로 만난 이 소설도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아요. 남은 연말 평온하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요.

전야제 2024-12-20 11: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내 욕망의 리스트> 꼭 읽어보겠습니다. 넘 기대되요ㅎㅎ 연속 2번 읽을만큼 문체가 넘 개성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작품 찾아볼 생각도 못했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자목련님도 건강하고 무탈한 연말 보내세요^^
 
헌법강의 - 제6판
김하열 지음 / 박영사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헌법 시험 준비하면서 공부했던 책들 중에 쟁점을 깊게 다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좋았다.

다른 헌법 전공서적과 비교하면 분량은 1000페이지 정도로 압축되어 있지만,

다른 수험서에서 놓친 쟁점들을 좀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하열 교수님은 오랜기간 헌법재판소 연구관으로 근무하셨고,

그만큼 다양한 사례들에 대해서 깊게 고민한 결과물이라서 수험서와는 별개로 접근해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대학 수업 교재로 저술된 책이지만, 헌법에 관심 있는 모든 분께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5급 공채(행정고시)나 7급 공무원 시험 준비하시는 수험생분들은 김유향 교수님의 헌법 기본서(김유향 기본강의 헌법)와 병행해서 같이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수저를 공부하는 것이 객관식 헌법 시험에는 사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객관식 시험은 기출 선지를 비롯해서 이론,조문,헌법 부속 법률,판례를 엄청 반복해서 암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법을 암기하는 수준을 넘어서 제대로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나중에라도 꼭 교수저를 읽어보면 좋겠다.)

김유향 교수님 헌법 기본서는 5급 공채용과 로스쿨용 두가지가 있는데 분량 면에서 로스쿨용이 거의 교수저에 가까울 정도로 양이 방대하다. 

5급 공채 준비하시는 분들은 <5급 기본강의 헌법> 교재로 충분하고, 7급 공무원 시험 준비하시는 분들은 2차 시험에 헌법이 있는 만큼 지엽적이고 까다롭게 출제되기 때문에 시간적 여건이 충분하다면 로스쿨용 기본강의 헌법 교재를 추천한다. (인강 들으시는 분들은 해당 강사님의 인강 교재로 공부하시는 게 최고! 독학하시는 분들은 인강 교재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수 있어서 교수저 같은 수험서 중에 가장 설명이 잘 되어있는 김유향 교수님의 기본서를 추천~)

개인적으로 헌법 수험서 중에 가장 좋았던 건 김유향 교수님의 <기본강의 헌법>, <헌법중요판례 250>.

전공서적 중에 가장 좋았던 건 허영 교수님의 <한국헌법론>, 정재황 교수님의 <헌법학>, 김하열 교수님의 <헌법강의>.

김유향 교수님의 <헌법중요판례 250>은 판례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장점이기도 하지만, 사례형 시험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니, 관련 분야 시험 준비하시는 분께 추천드린다.

다만 이 판례집은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서 시험이 얼마 안 남은 수험생분께는 추천드리지 않고, 평소에 헌법 공부하면서 틈틈이 보시는 걸 추천!

시험에 임박했을 때 간단히 판례 정리하시려면(객관식 시험에 해당) 김건호, 강성민,윤우혁 강사님 등의 최신 판례집이 훨씬 더 고득점 맞을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

어쨌든 모두 건승하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12-17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헌법이라구요?
ㅎㅎ
전야제님 정체가 몹시 궁금합니다!

전야제 2024-12-17 15:50   좋아요 1 | URL
공무원 시험 과목에 헌법이 있어서 공부했었습니다. 올해 초까지요ㅎㅎ 다른 과목은 몰라도 헌법만큼은 진심으로 공부했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과목이라서 그런지 시험에 관계없이 푹 빠지게 되더라구요. 저도 혼자 공부하느라 이책 저책 사면서 여러 시행착오들이 많았는데, 혹시나 다른 분들께 제가 공부했던 교재랑 방법이 도움이 될까 싶어 조심스럽게 글을 남겨보았습니다ㅎㅎ 연말되면서 올해 했던 것들 정리하는데 눈물이 조금 나지만, 그래도 공부했던 순간들만큼은 행복했던 것 같아요! 공부했던 것들을 기반으로 또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그레이스님 글 읽으면서 항상 새로운 관점을 배웁니다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극'을 사랑했다.

이야기가 있고 사람이 있는 세상 모든 '극'이 나의 놀이터였다.

한창 밖에 나가서 뛰어놀 나이에, 나는 그것들의 무대 앞에 앉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야기 속 세상이 내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커 보이는 느낌에 압도되었다.

이야기 속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거짓과 비현실적인 행동이 진실처럼 느껴졌고 달콤했다.

현실로 눈을 돌리자, 극과 현실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되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이라고 어떤 영화 감독이 말했다.

그건 영화가 세상의 일부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 극은 현실보다 더 큰 '우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인간의 상상과 창작의 세계의 지극히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100년도 채 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육체 속에 갇힌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가볼 수 있을 것인가?

그 탐험과 여행의 종착지가 바로 예술.

인간 세상 속에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 밖으로 나를 해방시킬 때

바로 거기에 예술이 있다.

평생 극을 보아오면서, 나를 이 세상에서 해방시킬 수 있게 되었다.


'무대'는 나에게 있어 가장 환상적인 공간이다.

지방의 초라한 예술 공간에서도 무대가 있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바로 그것이 '연출'의 마법이다.

한참 길을 잃고 방황했을 때, 극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막이 오르고 배우가 등장하여 뭐라 대사를 건네는데, 굉장히 신비한 것을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사들이 허공에 춤추듯 흘러 다니면서 객석 사이로 바람처럼 불어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배우들의 움직임과 호흡을 따라가고 있었다.

현실과 무대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연극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고, 연극 연출을 배우고 싶어서 공부했었다.

희곡, 시나리오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영화, 드라마, 연극 모든 것을 보고 공부하며 그 속의 세상에 빠져 살았다.

중학생 때부터 좋아해왔던 강은경, 서숙향 각본 작가님.

이 작가님들의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극의 세계에 빠졌었고,

드라마가 사람에게 주는 '에너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노지마 신지 각본 작가님.

그 분의 작품 세계는 정말 환상적이다.

노지마 신지의 작품을 중학생 때 처음 접했는데, 무려 그것이 <고교교사> 였다.

표면적으로는 '교사와 학생의 사랑'을 다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약함과 두려움의 실체를 아주 섬세하게 인물들의 심리로 보여주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90년대 일본의 사회 상이 배경이고, 작가가 생각하는 문제의식들이 인물들의 행동으로 하여금 강렬하게 나타나서 당시에 TV에 방영되었을 때 엄청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진실을 외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노지마 신지의 각본과 그 드라마의 연출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비극적이고 아름다웠고,

겨우 중학생이었던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때부터 꾸준히 노지마 신지의 작품을 보아왔고, 많은 것을 배웠다.


또 일본의 천재 작가, 연출가로 알려져 있는 미타니 코키.

연극이 외면받고 있는 현대에서 연극 무대를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이다.

심지어 영화 촬영 현장도 그에게는 연극 무대일 정도로, 연극의 요소를 생생하게 표현하며 온갖 마법을 부린다.

그의 작품 중에 '매직 아워'라는 것이 있다.

영화 속에 연극이 있고, 연극 속에 영화가 있다는 말은 그 작품을 위한 것.

난 그 영화를 볼 때마다 운다. 심지어 그 영화는 코미디인데도.

연극과 예술의 형식, 내용, 표현, 기술 등 모든 면에서 어느 것 하나 깨부순 것이 없는데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미타니 코키만의 무대를 보여준다.

그리고 관객을 웃게 만들고 울게 만든다.

내가 꿈꿔왔던 '무대'가 이미 그의 작품에 있었다.

거기에 나오는 '타카세 마코토'라는 원로 배우의 대사를 소개한다.


"이제 금방이군, 매직 아워. 하루 중에 최고의 순간.

그걸 놓치면 눈 깜빡하는 사이 밤이 되어버리지.

무라타군, 매직 아워를 놓쳤을 때의 대처법을 아는가?

간단하네. 내일을 기다리면 돼. 

매직 아워는 반드시 다시 오네. 이 세상에 해가 뜨는 한. 


호텔의 마담에게 들었네. 배우 그만하려 한다고.

여기서만 하는 얘긴데, 난 카메라가 무서워서 지금도 촬영을 알리는 소리에 다리가 후들거려.

스크린 속의 내가 당당하게 보이는 건 스탭들의 덕이네. 좋은 스탭들을 만났던 거지.

암흑가의 용심봉 라스트 씬, 자네는 내 표정을 칭찬했지. 

그건 촬영지가 너무 추워서 콧물이 나오려고 해서, 그걸 감추려고 한 표정이야.


너무 이르지 않나? 포기하기에는. 자네는 아직 젊어.

거기다 비밀이지만, 나도 아직 기다리고 있다네. 다시 올 매직 아워를.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이대로 쓰러질 순 없지 않나!"


타카세 마코토는 젊었을 때 유명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이후로 그 다음에는 흥행한 작품이 없는 배우로 설정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한물 간 배우로 사람들에게는 각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촬영 스탭들도 그의 예전 명성을 모르는 것인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할아버지' 라고 부른다.

그런데도 이 배우는 인생에 달관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 유쾌하게 촬영에 임한다.

머리가 다 하얘진 나이에도, 지팡이를 짚으면서도 연기를 계속해서 한다. 배우로 살아간다.

배우를 포기하려는 한 젊은 배우에게 건네는 말이 바로 위의 대사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저 부분에서 운다.

평생 배우로 살아왔음에도 아직도 촬영할 때 다리가 후들거린다는 말이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두려운데도 그가 보여주는 연기는 전혀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연기라서 더 그렇다.

어렸을 때는 이 대사가 그저 감동이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이 대사를 다시 접하고서 달리 보이는 것이 있다.

젊은 배우가 동경했던 노배우의 전성기 시절 카리스마 넘치는 장면은, 사실 콧물을 참기 위해 경직되었던 것이라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동경하는 것에는 이런 웃픈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것을 동경할 때에는 그 안에 아픈 이야기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 나를 구성하는 토대에는 이렇게 멋진 각본 작가들과 연출가들의 작품이 자리 잡고 있다.

비록 나는 연극 연출 공부를 하다가 입시도 치르기 전에 교통사고가 났고, 

그로 인해 연출가의 꿈을 접고 다른 길을 가게 되었지만.

많은 작품들을 보고 배우고 공부하면서, 세상과 나에 대해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질문하고, 끊임없이 변화해나가는 과정은 어쩌면 연출의 기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변해야 세상도 변하고, 세상의 변화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연출에는 변화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바로 이제부터 소개할 이상우 연출가의 책 <야생연극>에서 배웠다.

이상우 감독님은 극단 <차이무>를 창단하셨고, 한예종에서 오랫동안 연출을 가르치셨다.

교수님으로서의 면모보다는 철저히 연극인, 연출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너무 멋지다.

한예종의 어떤 학생분께서, 이상우 감독님은 나이가 들기는 커녕 점점 더 어려지시는 것 같다고 말한 영상을 보았다.

그만큼 생각이 나이 들지 않다는 뜻. 

우리나라에 거장 연출가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속상하지만.

연극에 대해, 예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이상우 감독님이 평생 생각하고 적어오신 창작노트에서

나 또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책은 짤막한 글들이 거의 1000개쯤 되는 연극의 막 형식으로 전개 된다.

<야생연극>에서 나는 연극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한 인간이 연극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가' 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저 한 사람의 생각을 끄적인 생각 노트이니, 연출 공부하는 분들이 있다면 가볍게 읽어보면 좋겠다.

사실 짧은 글들이 모여있지만, 절대 가볍지 않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아이디어로 방대한 분량의 글을 적어야만 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야생연극>을 통해 많이 느껴보길 바란다.


아래 부분부터는 이 책에서 인용한 구절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야생은 자연, 생명, 힘, 신비, 발견, 경이, 길들지 않은,

아직 모르는, 두려운, 새로운, 설레는, 끔찍한, 그런 세상.

그래서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너무나 섬세해서 오염되기도 부서지기도 쉬운 그런 세상.

야생에는 까닭 없는 형태도, 까닭 없는 행동도 없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야생'에 대한 낭만적인 정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애매몽롱한 태도로 이 시대의 연극을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감독님의 질문이 있다.

어느 허리케인 연구자의 말로는, '허리케인은 가장 치명적이 되는 순간 가장 아름답다'고.

그런데 그 순간, 그 허리케인 속으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한다.

'치명적인 아름다운' 연극이란, 죽음으로 치닫는 열정까지도 결국 자연의 일부인 것임을 아는

'야생 속의 생명'이 보여주는 연극인 것일까?

야생 그대로의 무대를 보고 느끼고 만들어 오셨을 감독님의 눈 앞에 수없이 펼쳐진 풍경들을 상상해본다.

그 야생 같은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과 두려움을 가져야만 했을까.

그러나 진정 행복했으리라.

그냥 아름다움이 아닌, '치명적인 아름다움'.

야생의 것이 되었을 때 비로소 빛날 수 있는 아름다움!


바둑에서 고수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승패보다 활기가 앞서야 한다."

당연히 이기는 게 목표지만, '살아 있는 바둑'이 아니면 둘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겨도 기분이 좋지 않은 바둑-'죽은 바둑'


내 연극은 '죽은' 연극인가? '산' 연극인가?


->내가 만든 작품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멋졌다. 나는 진정 살아있는가?

생리적인 작용으로서의 '살아있다'가 아닌, 내 온전한 정신과 의지로 삶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가?

나의 생각과 행동에 철저하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언제나 그럴 것.

그리고 잘못된 것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


연극의 생명이란?

끊임없는 움직임, 끊임없는 관계, 끊임없는 변화.

변화는 생명의 첫 번째 증거-살아 있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

살아 있는 연극은 스스로 변화합니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연극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다니. 나도 '무대'라는 공간을 그렇게 보아왔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향연, 축제. 살아 있는 것들의 부단한 움직임.

연극은 거대한 생명체이다. 감독님이 말했듯 '우주' 그 자체.

그러니 연극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연극이 우주라면, 그 속에서 빛나는 모든 존재들이 보여주는 무대, 그 자체가 정답!


연극은 구성 요소들의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효과'

배우와 무대와 음악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생명 효과'

그래서 연극은 '요동상태Fluctuatiion'

무언가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일본의 생물학자인, '후쿠오카 신이치'의 저서들에서 감독님이 통찰한 연극의 특성.

연극 무대를 보고 있으면,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정말 마법처럼 느껴진다.

그건 연출, 배우, 무대의 모든 요소들의 온 에너지가 결합한 화학의 세계인 것이다.

온갖 분자들이 부딪히고 결합하고 분해되는 요동상태!

무대 위의 세계도 이렇게 시시각각 사건이 벌어지고, 에너지가 부딪히고, 변화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그렇다. '변화'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숙명!


'브라운 운동'-물 위에 꽃가루를 떨어뜨리면 꽃가루들이 춤을 춥니다.

꽃가루 미립자가 주위의 물 분자에 끌려다니면서 끊임없이 요동칩니다.

무대 위에서도 '브라운 운동'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길.


"생명은 멈추지 않고 요동치는 것."


->브라운 운동은 1827년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이 물에 떠 있는 꽃가루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서, 꽃가루의 미세한 입자들이 수면 위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에서 불규칙한 입자들의 운동을 설명한 것이다.

액체 속의 물질에 액체 분자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불규칙하고 불균등한 충돌이 규칙과 균등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올려보면 된다.

우리 사는 세상과 비슷하다. '충돌과 평화'.

왜 평화는 충돌 뒤에 오는 것일까? 어째서 그것이 자연의 섭리일까.

감독님은 이런 자연 현상에서 연극 무대를 발견한 것이다.

얼마나 연극을 사랑하면 세상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다 연극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사랑만으로는 안되겠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없었을 테니.

나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아나갈 것이다, 끊임없이!


1995년 여름에 극단을 만들고 '차원이동무대선'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줄여서 '극단 차이무'

뜻을 설명하자면, "연극이라는 우주선을 타고 일상에서 차원이동하여 우리 세상을 새롭게 내려다보게 하는, 그런 연극을 만들자"입니다. 

연극은 '차원이동', 무대는 우주선같은 '무대선Stageship'

극단 차이무의 모토는 '생각은 깊게, 표현은 경쾌하게.'


->감독님께서 창단하신 극단 '차이무'의 본래 뜻.

'무대선 Stageship'이라는 단어가 환상적이다.

우주를 떠돌아 다니는 무대, 우주를 여행하는 무대와 그 위의 연극!

연극은 호흡과도 같아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거장의 연극도 탄생과 동시에 소멸한다. 그것 또한 '치명적인 아름다움'의 하나인 것인가?


그렇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연극은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연극판에 '이단異端'이 필요한 때.

참고로, '이단Heresy' 의 어원은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어 HAIRESIS.

뜻은 '스스로 생각하다'


->그렇다. '이단'의 원래 의미는 '스스로 생각한다' 라는 아주 신성한 뜻이었다!

이보다 더 자유를 뜻하는 것이 있을까?

그러나 지금 우리 세상은 스스로 생각하려는 의지를 용인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로의 생각들이 충돌하고 튕겨나가고 대립하면서 끝내 평화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다.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문제는 '욕심과 이익'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싸움이 끝나지 않는 것.

때로는 손해볼 줄도 알고, 나에게 아무 이득이 없어도 타인과 세상을 위한 선택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서로 조금만 더 양보하면 좋을텐데.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셰익스피어도 브레히트도 그때는 아방가르드였습니다.

가장 파격적이었거나 가장 대중적이었거나 관습에 가장 저항적이었습니다.

그들의 태도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신화로 만드는 데만 골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느 분야가 되었건 성공 사례들을 '신화'로 치부하고 떠받드는 행위는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는 새로운 '창작'의 기회들은 탄생하지 못하고, 어떻게 세상에 주목을 받아도 비난만 받게 된다.

'신화'적인 작품들과 비교당하게 되니깐,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듯, 작품도 있는 그대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기준과 비교는 작품의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방해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 사랑해야지, 내게 다가온 모든 작품들을.


독일 지식층에서 사용하는 'Brechtieren'이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뜻은 '지 맘대로 하다'입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그의 시대에 '지 맘대로' 했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도, 연극을 생각하는 관점도 '지 맘대로'였습니다. 관습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데 왜 브레히트의 제자들은 '브레히트 그대로' 하려고 할까?


->위와 같은 맥락! 기준과 표준을 만들고 그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은 적어도 '예술' 분야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될 것.

얼마나 끔찍한가. 창작의 세계에도 법률이 존재하고, 안 지키면 '추방'.

왜 추방이냐고? 독자들에게 외면 당하게 되니깐.

그러나 이것은 예술이 '형식'을 깨뜨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T.S 앨리엇이 말했듯이 예술이 형식을 파괴해서는 안 될 것!

형식은 예술을 담는 그릇, 예술의 일부. 예술의 육체.


창작자는 '새로운 정보를 송신하는 사람'

창작은 재방송도 반복 송신도 아닙니다.


창작자라고 하는 사람들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 듯합니다.

하나, 늘 새로운 정보를 송신하는 자.

둘, 남의 정보를 베껴서 송신하는 자.

셋, 같은 정보를 죽을 때까지 반복 송신하는 자.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있으라는 뜻.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것.

맨날 똑같은 것 만드는 창작가들에 대한 경고 메세지!

아무 변화 없는 모습을 관객들이 그저 받아준다고 해서 그대로 믿지 말 것.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 하고 '변화' 할 것!


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서 조정석 배우가 그랬다.

'자기 인생에 물음표 던지지 말고 느낌표 던지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나도 명대사라고 생각했던 장면이었고.

자기 확신이 필요한 때에 '느낌표!' 던지라는, 확신을 가지라는 뜻.

그러나 그 외의 일상에서는 물음표, 느낌표 그냥 마구 쏟아부어야 한다.

질문을 멈추면 인생도 멈추는 것이다.

생각이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학문이나 예술이나, 언제나 어디서나,

높은 의자에 올라앉은 자들은 질문을 아주 싫어합니다.

안타깝게도 인류 역사 내내 "왜?"라고 질문한 사람은 늘 왕따였습니다.

그래도 그대가 창작자라면 감당할 수 밖에.


창작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해내는 것 아닌가?

그만큼 고통스러울 수 밖에.


->EBS다큐에서 본 적이 있다. 인간이 더 위로 올라가려는 행위에는 질문에 답하기 보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라는 욕망이 숨겨져 있는 거라고.

그만큼 질문에 답하는 것이 어렵고 난감한 문제이고,

답을 하는 사람이 사회에서는 더 '낮은 사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사람' 이라는 것.

웃기지 않은가?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얼마나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사회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경직되고, 고정되어 있는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왜'라고 질문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창작은 시작되고, 나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작품은 흘러가게 된다.

그 길고 긴, 지난한 여정의 끝에 다다르면 작품은 완성되는 것.

평생 남한테 질문만 '던져내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길인지 모를 것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치열하게 답을 생각해보는 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다.

사람을 진정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위대한 능력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개선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남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답을 찾아오라는 권위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래서 반성도, 개선도 없는 것!


학자들의 '사람' 에 대한 정의,

알버트 슈바이처: 사람은 멍청하게 행동하는 똑똑한 동물.

폴 블룸: 사람은 타바스코 소스를 좋아하는 유일한 동물.

쿠르트 괴델:

기계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 기계는 자신의 작동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의 뇌가 개구리의 뇌를 해석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뇌가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해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사람의 운명은 바로 그 자신이다. 사람은 바로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들의 총체이다.


->슈바이처의 정의에서 완벽하게 공감했다. 나는 도대체 왜 그런 멍청한 행동을 했을까? 이런 생각을 늘 달고 살기 때문에. 생각 따로 행동 따로.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경지에 오른 것이라 하던데, 누구나 어려운 것인가보다.

폴 블룸의 정의에서 뿜었다. 내가 타바스코 소스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쿠르트 괴델도 위 맥락과 비슷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벽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함을.

완벽하게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

연극의 언어로 말하자면, 내 안의 수많은 나를 밖으로 해방시키는 것! 


연극은 '사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


소포클레스도 아리스토파네스도 셰익스피어도 브레히트도 그 시대의 사람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 관계를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연극은 우리 시대의 사람 관계를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현대 연극의 새로운 흐름 하나는

'사람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연극은 '사람의 예술'.

막이 오르고 사람들이 등장하고, 뭐라 말하고, 부단히 움직이고, 흘러가고.

무대 위의 세상은 인간 세상의 축소판.

그러나 나에겐 무대 위의 세상이 현실보다 더 커보였다.

무대가 보여주는 세상이 '진짜'의 세상으로 보였다.

감독님이 늘 말씀하시는 매직! 이것이 연극이, 예술이 보여주는 '매직'이겠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시대와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 그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연극무대!

인간의 존재도, 사랑도, 그 무엇도 모두 '관계'속에서 보여주는 것, 이해하는 것.


과학과 예술은 '할 수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다'면 예술이 아니다. '할 수 없다'면 또한 예술이 아니다.

과학과 예술은 '할 수 밖에 없음'에서 나온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머리로 재고 계산해서, 손익을 따지면서 과학과 예술을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문학의 본질이 불온한 것이고, 꿈과 불가능을 담는 것이라고 말했던 김수영 작가의 말처럼

과학 연구도, 예술 창작도 돈키호테의 정신을 가지고 때로는 무모한 용기로 나아가야 하는 걸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모두가 비난해도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호기심과 열정을 가지고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진격의 거인>에서 '앨빈'이 인류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것처럼.

무엇보다 나는 진격의 거인에서 '한지'라는 캐릭터를 좋아했다.

거인은 인간을 잡아먹고 인류를 파괴하는 존재이지만, 한지는 거인에 대해 증오심을 갖기 보다는

거인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

하지만 과학자라면 그것보다는 궁금했을 것이다.

나를 파괴하는 것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순수한 호기심'이 과학자로서의 자세인 것 같다.


사람의 행동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한테 하는 행동은 반드시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안 그러면 분노합니다.


->슈바이처의 인간에 대한 정의와 비슷한 뜻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생각만큼은 합리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문제를 제대로 볼 줄도 알고, 각자 좋은 해결 방안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어째서 이것이 행동으로 드러나면 어긋나고 방향을 잃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어리숙한 존재라는 걸 서로 인정한다면, 서로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관용'의 자세가 이 시대에는 많이 부족하다.

자신이 손해보는 걸 조금도 참지 못할만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탓만은 아니다.

생존에 위협을 느낄만큼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두려움 때문에 서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행동이 계속 된다면

사회 전체는 점점 병들어갈 수 밖에 없다.


미국 아이오와 주 워털루에 사는 마버 드루라는 아이 엄마 이야기:

선생이 아들한테 "1부터 100만까지 세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답니다.

선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결심한 이 엄마가

종이 2473장에다 1부터 100만까지, 5년 동안 타이핑했다고.


->100만까지 셀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 이득도 안 되지만,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말했듯, 과학과 예술은 계산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그것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부터 가능성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나도 가끔 마음 속에서 불현듯 어떤 일을 도전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 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먼저 든다.

창작과 도전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이 '가능성을 점치는 행위'이다.

그러나 오늘이라는 시간도 어찌 흘러갈 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돈키호테처럼 전진하는 것, 그렇게 무모하게 내딛은 한 걸음을 믿자!

적어도 지금은 그럴 때.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공포'

항공모함 함재기 조종사들은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착륙할 때마다 공포를 느낀답니다.

사람은 결코 공포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포 영화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김창옥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 우리가 사랑할 때 느끼는 감정도 '두려움'.

인간의 모든 감정을 압도할 만큼,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두려움인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잘못된 선택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도 이 두려움에 기초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가 아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소방관은 두려움이 없어서 뛰어들까?

아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 속에서도 '반드시 해야 되기 때문에' 뛰어드는 것이다.

두려움을 뛰어넘은 그 불굴의 의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걸 '사명감'이라는 단어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사명감이라는, 직업에서의 의무를 제대로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 사건들이 사회엔 참 많다.

물론 의무를 다하지 않는 태만한 태도는 잘못이지만, 사명감은 강요한다고 해서 그 진가가 다 발휘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자기 안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강요해서 될 것도, 무리해서 행해질 것도 아니기에 사명감은 숭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미래를 걷는 소녀>에서 1912년에 살고 있던 소설가 토키지로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든다.

아이는 살았고, 자신은 죽었다.

그 때 토키지로는 이미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100년 뒤의 세상에 살고 있는 미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죽게 된다는 예언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토키지로는 역시 물 속으로 뛰어든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소설가였고, 직업에의 의무도 다할 필요가 없으니 그건 '사명감'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직업에 상관없이,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강력한 마음을 무엇이라 부를까?

<명탐정 코난>의 명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것에 논리적인 사고 따윈 존재하지 않아'

그렇다. 생명을 구하는 데에 이유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살리는 것'

거기에 그 어떤 이유도, 의미도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은 목숨 하나 살리는데 너무 많은 돈이 든다면서 계산을 먼저 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이국종 교수님의 말씀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돈과 생명이 같은 선에서 줄다리기 하고 있는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참담함이 느껴진다.

주어진 운명의 굴레에 갇혀 체념하고 한탄하고, 또 운명을 극복하려는 내용이 문학과 예술의 끊임없는 소재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어떻게든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답을 찾아내는 사람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의지가 아니라,

오늘 내 눈 앞에 단 한사람이라도 구하겠다는 열망이 더 위대하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노력해야지.


예술은, 연극은 질문. "내 연극은 질문하고 있나?"

그대가 질문하지 않으면 연극은 껍질만 남습니다.

체제의 도구, 독재의 도구로 애용되는 예술은 '질문하지 않는 예술'


->영화 <타인의 삶>에서 동독의 문화부 장관인 헴프는 자신의 사회주의 이념으로 연극을 조종하고 '정화'시킨다.

연극은 사회주의 이념에 철저히 부합하면서 공연되고, 헴프 장관은 그 연극 무대의 빛나는 여배우를 마음껏 유린한다.

저항에는 생업과 목숨의 위협도 따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예술이 질문을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내지 않는 사람도 저마다의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도 '질문'할 것! 저항할 것.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면 된다. 남한테 강요하지 말고, 자신의 뜻대로 나가면 된다.

나에게 씌워진 운명의 굴레를 남에게 씌우지도 말고. 나의 신념이지, 타인의 신념이 아니지 않은가?


티베트 불교에 '모래그림' 이라는 게 있습니다.

불교 축제 여러 달 전부터 스님 여럿이 커다란 상에 둘러 앉아 색색 모래로 환상적인 만다라를 그립니다.

축제가 끝나면 모래 그림을 그 자리에서 엎어버립니다.

만다라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연극도 그러하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영상으로 영원히 기록되는 것과는 달리,

연극은 무대 위에서 공연되고,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는다.

탄생하자마자 소멸한다.

눈 앞의 몇 안되는 관객만이 볼 뿐이고, 그마저도 기억 속에 자리하지만 곧 지워진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왜 연극을 보는걸까?

그건 '인간은 왜 숨을 쉬는가?'와 같은 질문일 것이다.

기껏 힘들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고, 내뱉고. 

'살기 위해서' 호흡한다.

연극도 마찬가지. 감독님께서 이 책에서 자주 언급하신 것처럼,


'이 순간 이승에 살아 있음을 함께 누리려고!'

'지금 이 순간, 이승에 살아 있는 게 너무 소중하니까!'


너무 멋지지 않은가.

나는 내가 하는 일에서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


배우뿐 아니라 연출에게도 자신감이 중요.

자신감은 터무니없는 자만심이나 똥고집이 아닙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면 배우와 배후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나? 준비! 그리고 또 준비!

하루에도 몇 번씩 읽고 또 읽고 조사하고 의심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것밖에 없습니다.

나르시씨스트들이 흔히 저지르는 '자신감 착각'은 정말 치명적.


->어느 대기업 인사담당자께서 면접과 일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영상을 봤다. 

진짜 실력있는 사람은 실수를 하면 곧바로 인정하고 회복할 방법을 찾는다는 것.

실력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도 하지 않고 숨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는 자만한 모습을 보인다고.

실수를 인정하는 건, 본인이 그 실수를 해결할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에서 나오는 자신감 덕분이다.

살면서 매 순간 배우고 공부하고 준비하며 쌓아온 '내공'은 내가 무너졌을 때, 나를 지탱하고 다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내가 다 아는 거라고, 내가 다 겪어봤다고 자신만만하며 초심을 잃는 순간,

세상은 상상도 못할 난제를 폭풍처럼 날려보낸다.

언제나 '처음'의 마음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고 배우는 마음으로 일하기!


연기는 '나' 에게서 떠나, '다른 나' 를 찾아 떠나는,

'내 껍질' 을 버리고 '내 안의 나' 를 찾아 떠나는 여행.

'나' 라는 껍질 속에 들어 있는 배우를 '해방' 시키는 일.


->'자연스러운 연기'란 내 안의 수많은 나를 바깥으로 해방시키는 혹독한 훈련 뒤에 찾아오는 경지.

부자연스럽다는 건, 아직도 내 안의 나를 다양하게 마주하지 않았고, 꺼내지 못했다는 것.

자신에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아프게 베어내는 훈련.

다 벗어내고 '진짜 내'가 되어가는 과정.

나를 해방시키는 경지!

배우 훈련은 일반인이 인생의 한 주체로 살아가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만큼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들을 꺼내는 과정은 그 무엇보다도 유쾌한 일이다.

경직된 근육과 마음을 유연하게 만들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공을 발휘하는 것.

인생에 달관한 유쾌함이란 어떤 느낌일까?


"너 자신을 모르면 아무것도 될 수가 없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애벌레 앱솔럼이 앨리스에게 하는 말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의 변주.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도 다양한 상황 속에서의 '나'를 마주하기 위한 것이니깐.

참고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명대사 하나 더!


"지도만 보면 뭐해? 남이 만들어 놓은 지도에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있을 것 같니?"

"그럼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에 나와 있는데?"

"넌 너만의 지도를 만들어야지!"



'퍼스낼러티'를 '개성'이라고 번역하면 뜻이 좀 모자랍니다.

'퍼스낼러티'는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를 포함하는 '인격'.


->Personality의 의미를 제대로 번역한 문장.

그렇지! 한 사람의 개성, 독창성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전체가 반영이 되어 있다.

일본 밴드 B'z의 <일부와 전부>라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전부도 무언가의 일부라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만 보고 실망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상대방의 모든 것에서 완벽함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이 노래 가사의 내용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확실히 좋아한다고 느낀 것들, 오직 나와 너만이 알고 있는 서로의 매력적인 '일부'의 모습들은 '진짜'의 것들이고 바로 그것이 Personality겠지.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를 나타내는 것인데,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Personality가 그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하면서 서로에게서 전부를 가지려고 하는 오류를 범한다. 


'정말로 있는 것은 유무를 논하지 않아'

노래 가사에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캐릭터'는 연습 과정에서 찾아내는 것이지만,

'퍼스낼러티'는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퍼스낼러티'는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고

내 안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


->정말 중요한 것! 모든 정답은 내 안에 있다.

연기에서든, 공부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내 안에 있는 걸 끝내 끄집어내지 못하고 죽는다면 아쉬울 정도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독창성이 숨겨져 있다.

어째서 개성은 찾기 힘들게 깊숙히 숨겨져 있는 걸까?

눈에 딱 명확하게 보인다면 이렇게 고된 훈련은 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지만 각자의 독창성을 꺼내는 가장 쉬운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서로의 개성을 알아보고 말해주는 것'

남이 볼 때는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만의 개성과 독창적인 부분들을 유심히 본다.

그리고 꼭 알려준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자신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게 해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보면 다 아름다운 사람들인 것을.


모두가 한 작가의 이야기를 제각각 전달하고 그러면서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는 것, 그게 내가 연극을 사랑하는 이유에요.

오직 동료배우들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 나는 이걸 꽤 일찍, 1957년에 '올드빅Old Big'극단에서 배웠어요.

극단의 모든 사람들이 다 중요하고 저마다 기여하는 게 있다는 걸 배웠어요.

연극은 중요한 배역을 맡은 몇 사람만의 것이 아니에요.

절대적으로 단원 모두의 것이지요.

나 자신 51년 동안 연극을 하면서, 그 무엇보다 이걸 지켜내기를 바라면서 무대에 섰어요.

연기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에요. 하면 할수록 공포심이 커져요.

그런데 거기에 무언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게 있어요.

두려움은 커다란 도전이에요. 그게 바로 나한테 필요한 거에요.

연극이 참 좋은 건 기회가 다시 온다는 거에요.

나는 끊임없이 배우는 기분이에요. 지난 51년 동안 쉽게 한 연극은 정말이지 단 한 편도 없어요.

그리고 51년 동안 딱 세 번 빼고는 출연하는 공연마다 무대에서 엎어졌어요.

51년 동안이나 무대에 서고도 아직 똑바로 서지도 못한다니까요.

연기라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항상 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그냥 보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항상 봐야 해요.

내가 출연할 장면뿐 아니라, 출연 안 하는 장면도 모두 다.

왜냐하면 보면 항상 배울 게 있으니까.

그리고 무대에 서서도 항상 관객을 바라보고 관객의 반응을 봐야 해요.

그래야 다음 장면의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지요.

-선댄스 채널, 배우 주디 덴치Judi Dench 인터뷰


->꽤 긴 글이지만 여기에 많은 감동을 받아서 일부를 인용해왔다.

주디 덴치가 말하고 있는 점들은 연극 무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을 '세상'으로 바꾸어서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정말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답다.

모든 사람들이 다 중요하고 저마다 기여하는 것이 있다는 점.

중요한 인물만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은 모두의 것.

두렵지만, 기회는 반드시 또 온다는 것.

끊임없이 오랫동안 배우고, 또 배워도 세상은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

엎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면서 다시 배우는 것.

그것이 삶에 대한 두려움에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


연극은 이토록 세상과 마주하게 만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다.

연극은 세상을 보게 만들고,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진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극한다.


억양이 좀 이상하고, 발음이 좀 부족하고, 목소리가 좀 작은 거,

키가 좀 작고, 좀 내성적인 거, 어쩌면 그런 건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건 진심. 진심이 배어나오는 'Feeling Tone'


무너질 것 같으면 차라리 움직여라.

음악이 느리더라도 비트Beat를 찾아서 'Make it Pop'해야 한다.

-<America's Best Dance Crew> 오디션 심사위원의 평


->아이유가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말했던 것이기도 하다.

'무너졌다는 생각이 들 땐 정신없이 움직이기'

실제로 일상에 적용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나도 수많은 걱정과 고민 속에 잠식될 것 같을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집안일을 한다.

그렇게 땀 흘리면서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다보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그 와중에 춤도 추고,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렇게라도 해결될 수 있는 우울에 한해서겠지.

정말 심각한 절망 앞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엔 아니었다.

힘들 땐 그냥 온 몸으로 힘든 걸 겪어냈다.

때로는 '정면으로 돌파'하기의 정공법이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선택은 알아서!


영화배우는 카메라를 보고 연기하지만, 연극배우는 관객의 눈을 보고 연기합니다.

영화배우는 자기가 한 연기를 볼 수 있지만, 연극배우는 숙명적으로 자기 연기를 볼 수 없습니다.

그것도 연극만의 재미.


->그래서 연극은 배우와 관객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내뱉는 모든 대사와 몸짓과 표정과 숨결은,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순간 허공에서 사라지게 된다.

오로지 관객만이 그걸 느낄 수 있고, 아주 희미하게 기억에 남게 된다.

그래서 일본 배우 '사카이 마사토'는 그의 수필집에서,

연극이 끝나고 마지막에 무대에서 다같이 관객을 보면서 인사할 때, 관객들에게 '응석부리는'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배우가 관객에게 응석부리는 것.

그 감정은 배우만이 알겠지만, 왠지 나도 조금은 느껴지는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완성이 되는 것!

연극의 매력은 끝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감독님께서 항상 연극은 '우주'라고 말씀하시는가 보다.


우리는 착각하도록 진화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않기 위해, 착각을 넘어 상상하기 위해 공부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겁니다. 세상은 우리 감각으로는 미처 알 수 없는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직감으로 인해 야기되는 오류를 분간하기 위해,

혹은 직감이 파악하기 어려운 현상에까지 상상력이 도달하게 하려고 공부를 해야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자유로 인도합니다.

-후쿠오카 신이치의 강연 일부


->감독님께서 이 책에 인용하신 부분들은 후쿠오카 신이치의 저서들에서 가져오신 것이 많다.

한 생물학자의 연구와 통찰이 연극 연출가에게 영감을 줄 만큼, 나도 이 학자의 글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특히나 이 부분은 고등학교에서의 강연 일부라서 더 뜻 깊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착각을 넘어 상상하기 위해서' 라니!

우리는 감각에 속고, 그것으로부터의 감정에 수없이 휘둘리며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감각과 지각에 속지 말고, '상상'해야 한다는 것.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고 믿고 거기까지 상상으로 도달하는 것, 바로 그것이 '공부'임을!


바둑 고수의 눈빛을 보면 참으로 참합니다.

교활한 생각으로는 좋은 바둑을 둘 수 없을 테니까.

교활함에서는 치열함이 나올 수 없을 테니까. 배우도 그래야 합니다.

흉하게 살면 눈빛이 흉해집니다.

고수는 압니다. 속임수로는 결코 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오직 공부! 정진할 뿐이라는 것을.


->끝없이 공부할 것을 감독님은 여러번 강조하신다.

교활하게 속임수 쓰고, 편법으로 이기고, 요령껏 하려는 마음으로는 '경지'에 오르는 건 불가능.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다.

매일 꾸준히 '내공'을 쌓아가는 것! 힘들다고 투정부리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평생.

배우는 걸 멈추는 순간, 창작은 끝이다.


연습하는 동안, 자신이 발전하고 있음을,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 느꼈다면 배우는 행복한 것.

다음으로 갈 준비가 된 것.


->난 왜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났을까?

지쳐 쓰러질 만큼 연습하고, 준비하고, 공부해왔는데 이제서야 내가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느끼는 게 너무 기뻤다.

무언가 성공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내가 끊임없이 노력해온 것들에서 나의 '변화'를 보는 게 이렇게 행복한 것일 줄은.

이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갈 준비가 되었다'고.


배우에게는 '재능', '자신감',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재능'은 갈고 닦으면 빛이 나지만, '자신감'은 경험 없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아무리 무대가 작더라도,

재미있는 사람들과 재미있게 쉬지 말고 경험을 쌓길.

최고의 공부는 '실전'.


->한가지 희소식은, '재능'은 갈고 닦으면 키울 수 있다는 것!

정말 그렇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꼭 자신을 믿었으면 좋겠다.

재능은 갈고 닦으면 태양처럼 빛날 때가 온다. 

그러니 자신의 재능이 미약하다고 포기하지 말 것.

문제는 '자신감'의 영역이다.

자신감은 연습과 노력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실전에 계속 부딪히면서, 거추장스러운 모습을 보일지라도 나를 보여주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경험은 정말 중요하다. 그 속에서 '나'를 마주할 수 있다.

혼자서 혼자만의 공간에 있으면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게 된다.

진솔한 생각은 많이 할 수 있겠지만, '나'를 알아가는 건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세상을,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밖으로 나와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

어렵게 내딛은 한 걸음에 지치지 말고 그 다음, 다음을 기대해보자.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은 최근에 면접을 보고 왔는데 연습했던 것 보다는 못했다.

역시 연습과 실전은 많이 다르다.

그래서 경험을 많이 쌓는 것이 중요하다.

내 머리 속에서 아무리 시뮬레이션 돌려봤자, 세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복잡하고 알 수 없다.

용기를 가지고 홧팅!


연주는 육체 행위에요. 육체가 정신보다 신성한 데가 있어요.

혹독한 데가 있어요. 스포츠도 마찬가지에요. 일주일만 안하면 못합니다.

정진 안하면 못합니다. 연주자는 매일 연주해야 합니다.

-황병기 명인 말씀


->수험생들은 알 것이다.

하루 공부를 안 하면 내일이 힘들고, 일주일을 안 하면 복습이 힘들고, 한달을 안 하면 그동안 공부했던 것 다 까먹는다.

그래서 공부든 뭐든 '꾸준하게'가 제일 중요하다.

공부를 못 할 상황이 와도 어떻게든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오늘 할 일 해내는 것.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들은 그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켜낸다.

못 지켰을 때 나에게 닥칠 일들이 너무 무섭기 때문이다.

문서 작성하다가 저장 안 눌러서 그동안 쓴 게 다 날라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동안 노력해온 것들이 날아가버렸을 때의 당혹감. 패배감.

연습을 게을리하면 반드시 그럴 때가 온다.

그래서 매일 하는 거다. 결코 부지런해서, 여유가 되서 매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 하루라도 빠지면 결국 내가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에.


파블로 카잘스가 91세 때 한 학생이 와서 물었다.

"선생님, 아직도 연습을 계속하세요?"

"그럼, 아직도 발전하니까."

-노먼 도이지<기적을 부르는 뇌>


->거장은 91세가 되어서도 연습을 한다. 그 나이에도 노력을 한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이 부분을 읽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오늘 얼마나 치열했는가?'

오늘 얼마나 발전했는가.

매일, 매순간 스스로에게 물으며 반성한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묻는다면,

나도 내가 생각하는 '경지'에 다다르고 싶으니깐!

나도, 당신에게도 '꿈'이 있을테니깐.


"선상님, 꽃 사진 어떻게 찍나요?"

"꽃을 찍으려구요? 그냥 꽃이 되세요.

들에서 그녀와 함께 피어나고, 그녀가 마시는 샘물을 마시고

들에서 산에서 그녀와 함께 피어나고, 그녀가 마시는 샘물을 마시고

들에서 산에서 그녀와 함께 살아야지요.

그래서 당신도 들꽃일 때 사진도 되지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인화지에 꽃들을 복제해놓으면, 옮겨다 놓으면,

그녀는 금세 시들어버리고 말지요.

우선 그녀에게 물어보세요. "당신 이름이 뭐지요?" "닻꽃"

그녀와 사랑에 빠져 마음이 통하면 이제는 카메라를 꺼내도 되겠지요.

그녀의 표정을 잘 살펴보세요. 살아 있는 사진이 될 것입니다.

시들지 않은 싱싱한 사진이, 향기 탐스런 사진이 될 것입니다."

-안승일 <우리동네 꽃동네>


->스스로 피사체가 되어 피사체와 사랑에 빠지는 것. 그때 진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

피사체를 제대로 알아야 '살아있는' 사진이 된다는 것.

알지도 못하면서 카메라 드는 것은 껍질만 보고 찍는 것.


사진만 그럴까?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런 진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쓰셨다니. 

사진작가 안승일 님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다.



<야생연극>의 제 3막, '야생연출'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소름이 돋고, 미쳐버릴 것 같고,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고, 가슴이 미어지고, 소리도 안 나오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나 자신이 그렇게 행복했던 순간, 그렇게 분노했던 순간, 그렇게 감동했던 순간을 기억해보길.

관객을 그런 상태로 만드는 연극을 상상하길! 그런 연극을 만들길!

객석에서 탄성이 터지는, 그런 연극을 만들길!

연극도 콘서트처럼 환호를 끌어내야-객석의 소리 없는 환호를!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그리고 그대가 만드는 연극은

더 멀리 보고 더 작은 소리를 듣고

더 넓은 세상을 읽어내는 그런 연극이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만드는 연극이

세상을 흔드는 바람이 될 수 있으리라."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야제 2024-12-13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글이 길어졌죠. 최근에 채용 면접이 있어서 자소서 쓰고 면접 스크립트 쓰고 준비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해야 했는데, 그러면서 이 책을 다시 꺼내서 읽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항상 답을 구해야 될 때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꺼내드는 책이기도 해서 이 참에 써보았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레이스 2024-12-14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연출을 배우셨군요,,,
전야제님 닉네임이 예사롭지 않더니만,,, !
사고때문에 꿈을 접으실때 힘드셨겠어요.
삶에 도움이 되셨다니,,, 진정한 공부입니다.
덕분에 희곡과 연출의 세계를 엿보았습니다.~♡

전야제 2024-12-15 06: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 닉네임 멋지다고 말씀해주셨던 것 절대 안 잊고 있어요ㅎㅎ
‘축제 전날의 설레임 가득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자‘라는 뜻으로 전야제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칭찬 감사해요.
뭐든 열심히 노력했던 일들은 좋은 거름이 되어 주는 것 같아요.
덕분에 여기 서재에서 멋진 분들 글도 읽을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어서 좋아요.
세상에 너무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저는 행복한 관객으로 열심히 감상하려구요.
혼란한 시기이지만, 그레이스님도 평안하고 즐거운 연말 보내시길 바랄게요!^^
 
죽음과 함께 춤을
베르트 케이제르 지음, 오혜경 옮김 / 마고북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죽음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마치 우리의 시계(視界)에 한계가 없듯이 그 한계가 없다." - 비트겐슈타인


저자 베르트 케이제르는 철학을 공부한 철학도이며, 뒤늦게 의학을 공부하여 네덜란드의 한 요양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사이다. 이 책을 비롯해 <비트겐슈타인 철학 입문>이라는 철학서도 저술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시니컬하고 냉소적이며,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종종 보인다.

본인이 의사이면서도 의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냉소적,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보기엔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더 닮았을만큼 모든 일에 있어서 질문이 많은 사람이다.

안락사를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도, 동료 의사들과의 가벼운 대화에서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그는 진지하고 무거운 철학적 질문들을 서슴없이 계속 던진다.

그것이 안락사를 가장 많이 다루게 되는 이 곳 요양병원에서의 일을 잘 수행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짐작해본다.

안락사를 요청하는 환자들의 확고한 의지를 파악하는 일에는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안락사의 의지를 보였으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흔들리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채 안락사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확고한 의지를 포착하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임을 저자의 의사로서의 고뇌와 딜레마에서 알 수 있다.


네덜란드는 안락사가 가장 먼저 법제화된 나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요양병원과 비교해볼 때 죽음을 결정하는 안락사의 문제가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생의 마지막까지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풍경이 아니라 환자, 가족, 의료진 이 세 영역의 의견이 활발하게 오가는 적극적인 모습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법제화 된다는 사실이, 삶에 있어서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이 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추측해본다.


나는 지금까지 안락사에 관한 문제를 철저히 '주체'의 측면에서만 생각해왔다. 죽음을 결정하는 데에 '나'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편협하게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안락사를 결정하는 주체가 엄격하게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 말고도 안락사에 관한 문제는 본질적인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안락사가 가장 많이 행해지는 요양병원에서 그 현장을 세세히 기록한 의사의 책이기 때문에, 단지 법으로 명시된 것에서는 알 수 없는 '현장'의 내용들이 자세히 드러나있다.


이 책은 저자가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환자들의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기록한 병원 일지에 가까운 글이 담겨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게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저자가 경험한 환자들의 죽음을 독자 또한 같이 경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 밝혀두자면 이 책은 의학 드라마처럼 인물들의 '감정'이라는 것이 개입되어있기보다는, 환자가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질문들과 그에 대한 솔직한 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왜 저자는 이상해보일수도 있는 철학적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지는지 나는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으로 고통받고 이제는 삶의 끝에 와 있는 환자들에게, 그 마지막 순간에도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끊임없이 질문을 제시하는 걸까? 그 의문이 결국 책에 마지막에 이르러서 풀렸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알지 못하면서 죽는다. 생각해보면 도대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죽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표현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처럼 죽는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못하듯이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서 죽어간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죽어 간다'라는 표현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나 분명하게 보이는 현상이며 대체로는 지난 후에 되돌아보았을 때나 분명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이 구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태어나는 것과 같이 죽는다고 한다.

태어나는 순간에 '내가 태어났구나'를 전혀 느낄 수 없듯이, 죽는 순간에도 '나는 죽는구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죽음이 그저 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할 때도 산모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무사하게 치를 수 있도록 돕는 의료진들, 출생신고부터 생애 주기에 따른 행정적 절차들 담당하는 공무원들 등과 같이 마찬가지로, 죽음에 부수되는 절차와 사람들이 있다.

의사의 사망선고가 내려지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절차들.

시신이 영안실로 이동되고, 장례식 절차가 행해지고, 남겨진 가족들이 사망신고 하는 등의 행정적 절차들과 상속에 관한 법적인 절차들이 진행된다.


죽음은 절대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인간을 자유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것이 안락사에 관한 문제에 있어 참 까다로운 문제들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결정짓는 문제들에 사회적인 문제들이 맞물린다.

그러나 죽음에 부수되는 사회적인 절차들보다도, 죽음을 결정하는 주체의 '의지'에 대해서 저자는 초점을 맞춘다.


93세 왈데이크 부인은 이 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5년 전의 어려운 수술을 거치고도 살아서 주어진 생을 어떻게든 영위하고 있는 와중에 동맥폐색으로 인한 다리 절단을 결정해야하는 순간이 왔다.

다리를 절단해야만 삶을 연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두 아들은 5년 전부터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끈질기게 살아있다는 듯이, '이제 끝이 나야 합니다' 라고 의사에게 안락사를 요구한다.

이 아들들이 어머니를 싫어해서 이런 말과 행동을 던지느냐고? 전혀 아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머니가 5년 전, 아니 그 전부터 겪어온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보아온 그들이다. 어머니의 고통을 보면서, 어머니의 아름다운 시절들을 떠올리며 속절없이 망가져 가는 비참한 모습을 두 아들은 지켜보기가 괴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이 아들들의 행태에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병든 애완동물도 안락사를 해준다는 비유를 들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안락사를 시행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 어머니는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의사는 화가 나서 답한다.

그러나 나는 이 다음 아들의 말에 조금은 수긍이 갔다.

"아니요, 차라리 개였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머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안락사를 요구하는 아들의 행태가 겉에서 보기에 비정함과 잔인함만이 보인다면, 당신은 병으로 인한 끔찍한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거나 가까이에서 그 고통을 지켜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온 몸을 파괴하는 끔찍한 고통은 불굴의 의지로 가득 찬 정신마저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의 정신과 의지마저 무너뜨리고야 만다.

그래서 말기에 이른 암이나 그 밖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님을 지켜보는 자식들이 부모님의 안락사를 요구하거나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환자는 괴로워하고, 가족들은 협박을 하며, 동료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죽음은 미소를 짓는데 젊은 의사는 이 난동 속에서 미친 듯이 지그 댄스(아일랜드의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서 추던 춤으로 탭 댄스의 원형이 되었다) 를 춘다.

한때 그 의사는 죽음과 함께 완벽하게 통제된 탱고를 추면서 무도회장을 미끄러질 수 있을 것이라고 꿈꾸었다."


죽음에 가까워지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 앞에서, 연명치료 중단이나 안락사를 의논하는 가족들과 난감해하는 의료진들. 이들이 다함께 병동에 있는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만 하는 의사의 심정이 바로 이 문장에서처럼 '지그댄스'를 춘다고 비유되었다.

이 책의 제목 '죽음과 함께 춤을'은 죽음이 가까이 온 상황에서도 즐겁게 맞이하며 춤을 추라는 낭만적인 뜻을 포함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환자, 가족, 의료진 이 모두가 원하는 방향이 서로 어긋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완벽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오랜 기간 공부하고 수련해왔을 한 의사의 현실 파악이라는 비극적인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리. 담당의사는 어쨌든 결정해야만 한다.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요양병원 의사는 모든 순간에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 앞에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안락사를 요구하는 왈데이크 부인의 두 아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그녀의 생명은 본인이 분명하게 요구할 때에만 끝낼 수 있다."


그에 반기를 들며, 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통을 끝내 드릴 수도 있다는 아들의 말에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건 '살인'이라고.

살인과 안락사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장기간의 고통 속에서도 안락사를 스스로 요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환자에게, 설령 그 자식들이 부모님의 고통을 지켜보기가 괴롭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행하는 것은 '살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끝내 환자 자신의 안락사를 결정할 수 없을 만큼 의식을 잃게 된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이 안락사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왈데이크 부인의 사례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환자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과량의 모르핀을 주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동맥폐색으로 인한 다리절단을 하지 않아도 될 유일한 방법이라고 두 아들에게 말한다.

끝내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과량의 모르핀을 주사해도 생이 일주일 안에 끝날 것이라 의사는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환자, 가족, 의료진이 합의볼 수 있는 현실적인 결정이다.

그러면서 의사는 두 아들에게 말한다.


"안락사를 결정하는 일이 쉽게 처리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결국 이러한 숙제는 환자의 마지막 일주일간 주사를 놓고 매일 다리를 소독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의 어깨에 고스란히 지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이 직면하는 어려운 결정의 상황이 있고, 그에 따르는 의료진들의 어려운 숙제와 무거운 짐이 있고, 그 고뇌는 모두에게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우리들은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혼자만의 숙제가 아니라, 모두와 함께 숙제를 끝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안락사에 관한 법과 기준을 만드는 것에 꼭 반영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관련된 절차들이 모든 게 무 자르듯 딱 맞추어서 진행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고뇌와 부담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잡음이 일어나리라 예상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남겨진 가족들의 심정 속에는 슬픔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 뒤의 절차들이 진행되면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보아온 경험이 있다.

죽음에 대한 비통함은 의료진에 대한 날선 증오와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것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던 적이 있다. 실제로 의료진은 할 도리를 다했을 뿐 어떠한 것을 더 하지도, 덜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그들이 어떠한 것을 잘 못 했거나, 무기력하게 덜 했을 것이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망자의 가족들을 비난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의료진을 향한 그들의 원망은 어쩌면 인간이기에 가지게 되는 당연한 심리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미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성적인 사고가 제대로 작동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이 과량의 모르핀만을 주입하는 것이 전부인 무기력한 상황에서, 죽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의료진들이 무기력한 존재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옳은 걸까?

그렇게 의료진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런 사회에서는 절대로 안락사가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다.

의료진과 환자, 그리고 그 가족들 간의 서로 다른 입장을 헤아리고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 일은,

안락사를 법으로 결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는 선결문제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인생은 한 포기 풀과 같다. 들판의 꽃처럼 핀다. 바람이 불면 사라진다. 꽃이 있던 자리는 더 이상 꽃을 알지 못한다."


성경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서 성경을 잘 모르지만 이 구절이 정말 와 닿았다.

냉정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살아서 있던 자리에는 또 다른 생명들이 와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명이 이어져 가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죽음을 결정짓는 문제가 자칫 허무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결국 사라져서 잊히게 되는, 언젠가는 그 누구도 존재 자체를 모르게 되는 이름 모를 들풀일테니.

그러나 죽음이 탄생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최초에 탄생했을 때 세상 모두가 기뻐했듯이 죽음 또한 적어도 그만큼의 관심과 존중을 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것은 말만 그렇듯해서는 안된다.

저자는 병원의 이사진들이 안락사에 대한 조례를 제정하는 문서에서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안락사에 대한 문구들을 보며 비판적인 어조로 말했다.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을 다루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이사들이, 인간의 자기 결정권에 견고한 형이상학적 기초를 부여하는 당당한 머리말을 만듦으로써 그러한 경험 부족을 보상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회의 중에 그들은 모두 지나치게 윤리적으로 굴면서 언제 이 삶을 떠나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특권을 찬양하는 데 치우치느라고 실제적인 문제들, 이를테면 어떤 독극물을 사용할 것인가 같은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윤리적이고 신념적인 것보다는 실제로 죽음을 결정하는 이에게 다가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죽음 이후의 순간에 나의 육체에 관한 것은 철저히 남에게 맡겨진다.

매일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며 단장했던 나의 행동은 죽음의 순간 이후로는 내가 할 수 없다.

나의 시신이 곱게 단장되고, 묻히는 과정은 남겨진 가족들과 그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하게 된다.

이럴 때면 세상에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것에 참으로 안심이 된다.


말렌스타인 부인의 사례에서 우리가 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답을 찾았다.

말렌스타인 부인은 폐 기능이 심하게 떨어져서 혼수상태로 계속 누워있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남편은 참다 못해 의사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소리 지른다. 그 '어떻게 좀 해보세요!' 라는 말에는 안락사를 시행해 줄 것을 요구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녀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의사에게 그것을 바란다. 그러나 저자는 거절하며 안락사를 시행하는 자신만의 철학에 대해서 제시한다.


"나의 제 1계명은 미관상의 이유로 생명을 종결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는 사람이 고통을 지켜보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생명을 끊지는 말자는 뜻이다."


환자 본인이 안락사를 결정할 수 없을 만큼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괴로운 가족들이 안락사를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을 행하는 것은 어쩌면 '살인'일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그것을 '미관상의 이유'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지켜보기 괴롭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행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환자 자신의 확고한 의지로써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안락사를 허용할 수 없음을 저자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결국 말레스타인 부인의 안락사가 진행되고, 저자는 약을 주입하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병실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얼굴 위에 올려진 베개를 보며 경악을 한다.

아내가 힘겹게 죽어가는 과정을 며칠 동안 곁에서 지켜보며 참다 못해 남편이 그녀를 베개로 질식시킨 줄 알고 놀랐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설명을 덧붙이자면, 죽어가는 아내를 곁에서 남편이 괴로워하며 지켜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상황에 저자는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안락사를 계속 미루었던 상황이었고, 안락사를 결정한 순간에도 남편은 그것을 믿지 못해 결국은 베개로 아내를 질식시켜서 고통에서 드디어 해방시킨 것 아닐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는 이토록 당사자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들이 참혹한 상황에 갇히게 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한 사람의 임종을 대하는 존엄한 행동이 담겨 있다.

'아내의 얼굴에 베개를 올려놓은 행위'

그것은 안락사를 행하는 약물을 주사한 후, 죽은 아내의 입이 힘없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턱을 받치기 위해서 베개를 올려놓은 것이었다. 

죽어가는 마당에 입이 벌려지든 말든 그 모습에 누가 과연 신경이나 쓸까.

나 자신의 마지막 모습은 내가 단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약물이 주입된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주기 위해서 입이 벌려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아내의 폐기능이 떨어지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계속해서 곁에서 지켜봐 온 남편은 그녀의 '죽음의 순간' 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죽은 아내를 편안한 자세로 바꿔 놓고, 틀니를 다시 끼우고, 머리를 빗기고, 손을 가지런히 모아 놓고, 얼굴을 닦아주고, 입을 다물게 하려고 베개를 올려 놓은 행위들.

이미 죽은 아내의 몸을 그렇게 소중하게 다루는 남편은 흔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했다.


안락사를 결정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만이 존엄한 죽음을 대하는 의식이 아니다.

이미 죽은 모습을 아름답게 단장하며 한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있다.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에 관해 논의할 때, 죽음을 맞이한 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보살피는 정성 또한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들' 또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의식으로서 챙겨야 할 부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년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

그 때는 코로나가 나타나기 전이라서 병문안 가는 일이 지금보다는 엄격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급성 폐렴으로 입원하시고, 폐암 초기 진단을 받았으나 결국 급작스럽게 폐 기능이 떨어지시는 그 모든 과정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지켜보았다.

이 책의 환자들의 죽음을 묘사한 설명들과 다르지 않았다.

폐 기능이 심하게 떨어져서 혼수상태에 빠지시고 가만히 누워계셨던 모습이 나에게 남아있는 생의 마지막 모습이셨다.

그러한 상태로 며칠을 계속 누워계시던 중 나는 잠시 할머니 댁에 들러 할머니께서 부탁하신 일을 처리하러 나갔고, 그 사이에 할아버지께서 임종하셨다.


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정의내릴까?

저자는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 말한다.

의학적으로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 말고도 죽음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와 할머니가 느꼈던, 한 사람의 죽음을 체감했던 순간이 있었다.

화장터에서 가족들과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모든 과정이 끝나고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보았는데 가루 속에 묻힌 어떤 물질이 보이는 것이었다.

가족들과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그것이 바로 인공 관절 금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입원하기 몇 년 전에 다리 관절 문제로 인공 관절 수술을 받으셨다.

무릎 안에 들어있던 금속을 유골함에서 보게 되다니.

그제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죽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던, 빛나던 육체가 가루가 되어 병 속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들의 육체가 다른 무엇으로 변하는 것이, 어렸을 때 내 눈에 새겨진 죽음의 모습이었다.


병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은 어쩌면,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정신마저도 회피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체감하는 순간은 훨씬 더 이후가 되는 것 같다.


"제인구달은 새끼가 죽은 후에도 며칠 동안 새끼를 안고 다니던 어미 침팬지가 축 늘어진 새끼의 시체에 대고 자신의 젖을 헛되이 내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어린 침팬지가 시체가 되었다는 깨달음이 그렇게 서서히 찾아오는 과정이,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급작스러운 변화보다 더 이해하기 쉽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급작스러운 변화를 지각하지 못한다."


어미 침팬지의 행동이 정말 이해가 된다. 나도 할아버지가 병상에 계셨을 때 그 임종 순간에는 오히려 슬픔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화장터에서 유골함에 든 인공 관절 금속을 보았을 때나, 장례식장에서 차를 타고 납골당까지 가는 길에 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셨던 동네를 창 밖으로 바라볼 때, 그 때 처음으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의 죽음을 체감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보다 훨씬 더 이후에 다가오게 된다는 걸 침팬지도 안다.

우리들의 지각과 감정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존재한다는 걸.

그래서 지각과 감정 사이에 작용하는 것들은 불가사의이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이것이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에서 작용하는 난제의 본질적인 것임을 꼭 다루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문제에서 각자가 보고 느끼는 것 사이에 있는 괴리감이, 안락사를 결정하는 문제에 어설프게 개입하게 되면 안락사의 본래 취지는 실현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의료적, 행정적, 법적인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죽음에 부수되는 절차들이 진행되면서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은 사라져간다. 



"삶을 계속하시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덤까지 가시오."


저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환자들의 안락사 요청을 거부했다.
자신의 중요한 결정들을 남에게 미루는 환자의 안락사 요청도 거부한다.
삶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열렬히 부딪혀 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만을 안락사의 결정에 있어서 허락한다.
그마저도 냉소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안락사를 행하는 자신의 고뇌와 딜레마에서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의사로서의 모습이 안락사를 행하는 사람의 진정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환자가 안락사를 요청하는 것에서 그저 형식적이나 의학적인 것만 판단한다면,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 같은 것은 포착할 수 없을테고, 그러한 상태에서 안락사를 행하는 것은 살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까지 용기내서 삶에 부딪혀 본 사람과 마지막까지 환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의지에 대해 질문을 하는 의사. 이 두 영역이 맞아 떨어질 때 안락사의 진정한 취지가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역시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의 문제라는 걸.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안락사에 관한 논의가 좀처럼 잘 진행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의연한' 것일까?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죽음을 대하는 의식'에 대해 살아있을 때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이미 예전에 절판된 책이지만, 현재의 네덜란드의 안락사 관련 법률을 첨부해서 다시 편집되어 출간되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11-28 0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28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4-11-28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야제님의 긴 글을 읽으며 너무 마음이 복잡해졌어요. 일단 안락사란 단어 안에 들어 있는 의미들이 사람들 각자 다르게 느껴질 것 같아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완전 달라지겠지만 이것이 또 법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더 복잡해지잖아요. 한 인간의 의지로만 성취되는 일도 아니고요.
전야제님이 말씀하신 주체의 문제가 그나마 몸이 좀 건강할 때 가능한데
안락사를 결정할 시점은 그렇지 못할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그때는 정신적 문제까지 있으니 더 난감해집니다 ㅠㅠ
빨리 이런 상황들이 고려되어 현실적으로 법제화되면 좋겠습니다^^

전야제 2024-11-28 12:15   좋아요 1 | URL
제가 본의 아니게 페넬로페님을 복잡하게 만들었네요ㅠㅠ 맞아요! 이 책의 저자는 환자가 안락사를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그 의지만 가지고는 안락사를 쉽게 결정하지 않더라구요. 그렇기에 자신의 안락사를 결정할 수 없을만큼 의식이 사라진 상태에서 가족들이 지켜보기 괴롭다는 이유만으로 안락사를 결정하지 않고 사망이 확실하게 다가온 시점에 이르러서야 결국 결정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만큼 죽음을 결정하는 건 환자, 가족, 의료진 모두에게 어려운 일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어요. 네덜란드는 우리나라와 상황이 많이 다른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법으로 제정되기까지 서로의 이해관계를 잘 풀어나가는 일도 어려울 뿐더러, 법제화되었을 때도 그것에 순응하고 잘 따라갈지도 참 불분명해서 안락사가 법으로 딱 그 기준이 정해지는 일이 쉽지 않아 보여요. 서로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 문화가 정착되어야만 가능한 것 같아요. 제가 괜히 이 글을 써서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저자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죽음은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누구에게든 죽음을 결정하는 일이 어려울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점을 잘 알고만 있다면, 어떻게 삶 속에서 그 문제를 대해야 할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 말씀처럼 저마다의 생각이 자신의 종착지를 결정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ㅎㅎ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그레이스 2024-11-28 14: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력존엄사 라는 말이 있지만 저는 조력안락사라고 말합니다. 존엄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서요.
한번 법으로 정해지고 나면, 그에 다른 무엇인가가 추가되겠죠. 생존비용이라든지, 무연고자일 경우라든지 점점 느슨해진 틈을 타고 어떤 가치가 끼어들지 알수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자신을 향한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기도 하고, 타인을 향한 칼을 자신에게도 겨누기도 하는게 인간이라서... 조심스럽네요.
의사의 고뇌는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성경인용 부분에서 그 구절의
맥락은 인생은 풀과 같고 들에 꽃과 같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미치는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인용해드릴께요.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편 103:15-18)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저도 고민하는 부분이라.

전야제 2024-11-28 15:41   좋아요 2 | URL
아ㅎㅎㅎ 감사합니다! 성경의 구절이 이 책에서 장례식 장면이 나오면서 자주 언급되는데 저 부분이 딱 저 문장까지만 인용되어 있어서 저는 굉장히 냉소적으로 해석했습니다ㅠㅠ 저자 또한 냉소적인 철학도라서 그 결을 따라가다보니, 제 글이 다소 어두울 수도 있다고 뒤늦게 생각이 드네요. 감사해요! 이렇게 아름다운 성경의 구절을 그레이스님께서 제대로 해석해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정말 인생이 들꽃처럼 피었다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만 기억에 남을 뻔 했네요ㅎㅎ 그레이스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진정 존엄한 죽음이 무엇인지, 법 뒤에 가려져 있는 개인의 권리들이 좀 더 조명되고 지켜져야 하는 것 같습니다. 눈길 조심하세요!^^

appletreeje 2024-11-30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mma Kirkby가 부르는 Nulla in mundo pax sincera sine felle가 각별한 주말 아침입니다.
11월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요.ㅋ 행복한 12월 보내세요.^^ 굿주말!

전야제 2024-11-30 15:13   좋아요 1 | URL
몇년 전에 영화 <샤인>을 보면서 알게된 비발디의 칸타타인데 가사에 너무 감동받아서 잊을 수가 없더라구요.
다시 예전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고 겨울을 맞아 서재 공간도 다시 따뜻하게 가꾸어보았습니다!
알아봐주셔서 감사해요 appletreeje님^^
10월의 마지막 날에도 꽃으로 마무리하셨었죠ㅎㅎ
벌써 12월이라니. appletreeje님도 즐겁고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최근 3주 동안 나에게는 내가 심지어 따라가기도 벅찬 무수한 변화들이 있었다.

자취를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어가는 시점에서 급하게 새로운 집을 구해야만 했고,

이번에는 꼭 제대로 된,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을 찾고 싶었기에 하루의 절반을 집 구하는 시간에 쏟을 정도로 신중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게 된 나의 공간은, 너무 오래된 건물이라서 그런지 온갖 벌레들이 사방에서 출현하여 나의 방 뿐만 아니라, 같은 층의 다른 방 세입자들도 벌레가 나타날 때마다 비명을 지르곤 하였다.

한밤 중에 비명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또 벌레가 나타났구나!'

무엇보다 관리비에 난방비가 포함된 중앙 난방인 곳이었는데, 집주인께서 한겨울에 보일러를 잘 틀어주시지 않아서,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데 방 바닥이 얼음처럼 차가운 곳에서 자야만 했다. 그러고 작년 겨울을 보냈던 내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올해 봄이 되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나는 겨울의 혹독함을 금새 잊어버리고 다시 재계약을 했다.

그 곳에서 벗어나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는 어째서인지 이동할 의지도 용기도 나지 않았다.

절망 안의 세계에 너무 익숙해지면 점점 헤어나올 수 없는 늪 속으로 자꾸만 가라앉게 된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불과 6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토록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그러던 와중에 집을 옮겨야겠다고 강력하게 마음을 먹은 계기가 바로 앞 집 세입자 분의 담배 냄새였다.

방 안에서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셔서 그 연기가 바로 앞인 내 방으로 다 들어왔다.

오래된 집이라 현관문 아래에 틈이 있어서 같은 층의 모든 냄새들이 방으로 다 들어오는 구조였다.

낮에는 창문 열고 환기라도 시킬 수 있다지만, 밤새도록 담배 연기가 내 방 안으로 가득 차서 정말 괴로웠다.

영하 15도에 육박하는 맹추위 속에서도 보일러 없이 어떻게든 버티었던 나였는데, 정말이지 담배 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흡연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방 안에서의 흡연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분이 담배를 피우시는 매일,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연기를 같이 들이마시게 되는 꼴이니.

집주인께 몇 번씩 말씀드려도 해결이 전혀 되지 않아, 나는 결국 방을 옮기게 되었다.

재계약을 한 상태라서 내가 부동산에 방을 내놓고 복비도 부담하고, 방이 나가기 전까지 월세도 내야한다는.

금전적 손실이 엄청난데도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살 수가 없다고 판단했고, 좋은 집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도 이제서야 생겼다.

10월 말부터 급하게 새로운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꼼꼼하게 모든 조건들을 미리 확인하고 구하리라, 단단히 마음 먹었기에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집 구하는 일에 몰두했었다.

하지만, 좋은 조건의 집들은 부동산에 연락하면 방금 계약되었다는 절망적인 답변만 들을 수 있었고,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11월 안에 집을 구하지 못할까봐 눈물까지 났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동산에 올라온 내부 사진은 조금 낡아보였지만 왠지 정이 가는 한 집을 발견했다.

실제로 집을 보러 가봐야 자세한 걸 알 수 있기에, 부동산에 곧바로 연락하여 아직 계약이 안 되었다면 집을 보러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세입자 분께서 아직 짐을 안 빼셔서 시간이 좀 걸린다는 내용의 답변을 들었다.

11월로 넘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조급했지만, 급하게 집을 구하면 지난번처럼 또 그렇게 안 좋은 곳에서 살게 될까봐 나는 초조한 마음을 어떻게든 가라앉히고 기다렸다.

그 사이에 내가 원하는 조건의 다른 집들이 나오면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부동산 공인중개사님께 말씀도 드렸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린 보람이 있는걸까.

세입자 분께서 모든 정리가 끝났고, 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부동산으로부터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보러간 날,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나는 "여기가 바로 내가 살 곳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배와 장판, 싱크대 수도 등 아직 수리가 안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친절하신 집주인께서 집의 모든 곳을 거의 새 집 수준으로 교체해주셨다.

보통 월세는 들어갈 때 벽지와 장판을 매번 새로 교체해주시지 않는다.

나도 그것까지 바란 것은 아니라서 다른 조건들만 충족하면 조금 낡아도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집주인께서 정말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주셔서 눈물이 날만큼 감사했다.

1년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11월 10일에 드디어 나의 두번째 공간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일주일 간 이삿짐 정리를 하고, 가구와 책상 등 여러가지를 조립하고 배치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보다 넓은 집이라서 이번에는 인테리어에 대한 욕심도 조금 생기게 되어, 나만의 공간으로 꾸미는 데 일주일은 걸렸다.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여, 나는 이 글을 쓰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내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실감이 났다.

집을 구하기 시작했던 3주 전부터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었고, 이사를 와서도 난생 처음 내 공간을 가꾸는 일을 해보았기 때문에 거의 한 달 동안 수면 부족에 시달리다가 이제서야 잠을 깊게 청해본다.


짐 정리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16일 밤에, 주황색 조명의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았는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 갇혀 있었던, 무기력했던 지난 날들이 눈 앞에 스쳐 지나갔다.

더 좋은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에도 어찌할 도리 없이 의지마저도 바닥이 났었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새롭게 변화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내 스스로의 힘 만으로는 절대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더 좋은 내가 되고 싶다, 더 좋은 내일을 살고 싶다. 그렇게 차츰 의지를 갖게 될 수 있었던 건 올해 나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많은 인연과 기적같은 사건들 덕분이다.

혼자였다면 분명 나는 빛나는 꿈을 품고 있었음에도 또 무기력하게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용기내서 내딛은 한 걸음과 그에 맞추어 나에게 다가왔던 다른 이들의 한 걸음이 만들어낸 인연들.

내가 걸어온 길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사람들.

내가 쌓아온 노력들이 아주 조금은 싹 틔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따뜻한 집에서 이제서야 겨우,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인지.

아니, 상상조차도 못했던 것이었다. 더 나아질 가능성도 나는 철저히 버렸었기 때문에.


책상에 다시 앉아,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시 그려보면서 행복함과 동시에 무한한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스탠바이 웬디>에서 공들여 써온 소설이 공중에 다 날아가버렸을 때, 주인공 웬디가 적은 소설 속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Captain, there is only one logical direction in which to go : Forward."

"함장님,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 전진입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웬디는 영화 스타트렉의 광팬이자, 작가가 꿈인 소녀이다.

소설 공모전에 출품할 소설을 빼곡히 적은 종이들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며 꿈마저 무너져버렸을 때, 웬디는 주저앉아 다시 소설을 써나간다.

그 장면에서 나온 영화 속의 명대사이다.

모든 것이 날아가버렸고, 무너졌음에도 역시 '전진'하는 것이 정답이라니.

얼마 전에 나는 분명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에서 몇 차례 폭풍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난 붉은 백일홍의 강인한 생명력에 대해 글을 썼었다.

내가 몇 차례 폭풍을 겪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지금껏 내가 겪은 고통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앞으로 살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전진'하는 것. 적어도 주어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는 전진할 것임을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이것이 나에게 허락된 행복에 보답하는 길임을.


나의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온 지 일주일 째 되는 17일이 마침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좋은 식당을 찾고, 어머니께서 가보고 싶다는 곳을 하루 종일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춘천에 오래 머물렀으면서도 의암호, 그 멋진 호수를 제대로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

집을 구하는 여정 동안의 걱정과 눈물을 이 날에, 눈부신 호수를 바라보며 다 날려 보냈다.

흐르는 강물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리라 다짐도 했다.

강물에 산산 조각이 나듯 흩뿌려진 금색의 태양빛은 언제나 아름답다.

잔상이 눈을 감아도 떠오를 만큼 강렬하게 남아있다.

자연은 태초에도, 최후에도 생명을 품어내는 거룩한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여행 중에 직접 찍은 사진을 여기에 살며시 기록해본다.



-> 관광지로도 유명한 소양강 처녀상이다. 춘천에 계속 살았음에도 이 앞에 정면으로 마주해 본 것은 처음이라 신기하다. 



->11월 중순의 추위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붉은 꽃이 예뻐 사진으로 남겨보았다. 푸른 강물과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레트로한 느낌으로 사진에 담겨서 신기했다.



-> 의암호 스카이 워크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마침 보트도 지나가고 있다.



->춘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호수가 보이는 그 어디든!'이라고 답하고 싶다.

특히 노을 질 때의 호수에 비친 금빛 물결은 입을 꾹 다물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이 날의 태양과 구름의 형상이 장관이었다.



-> 의암호 근처 <리버레인> 이라는 카페에 앉아서 찍은 풍경. 사진 속 인물은 어머니입니다^^



->부끄럽지만 어머니께서 찍어주신 제 사진도^^



-> 새로운 공간에서 만들어 본 간이 코타츠! 난방비를 줄여보고자 따뜻한 코타츠를 만들었는데 상판 밑에 히터가 없는 코타츠인데도 의외로 엄청 따뜻하다. 앞으로 내년 봄이 오기 전까지는 이 포근하고 아늑한 곳에서 책도 읽고 공부도 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페넬로페 2024-11-18 0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 구하고 이사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전야제님 맘에 쏙 드는 집이라 제가 더 좋습니다.
이 집에서 맘과 몸, 둘 다 따뜻하게,
대박 나시기를 기원합니다.
춘천은 저의 형님(시누이)가 사시는 곳이라 한 번씩 간 적이 있어요.
재작년에는 케이블카 탔는데, 삼학산인가요?
담엔 의암호 스카이 워크 도전해 보겠습니다.
전야제님 모습 보니 좋고요.
코타츠, 넘 맘에 들어요.
여기에서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길요^^

전야제 2024-11-18 06:32   좋아요 1 | URL
새로운 공간에서의 시작이 설레면서도 두렵기도 한데, 대박 기원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좋은 결과 거두어서 또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해볼게요ㅎㅎ 페넬로페님의 가족분께서 춘천에 계신다니! 넘 반갑네요. 삼악산 케이블카 사실 아직까지 못 타 봤어요ㅎㅎ 저도 다음에는 도전해보겠습니다! 매일 따뜻한 나날이라서 행복합니다ㅠㅠ 알라딘 서재 운영자님들 덕분에 독서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항상 좋은 글 읽으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느낌이 너무 소중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랄게요^^

2024-11-18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18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