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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달콤한 독약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4년 3월
평점 :
진정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되었을 때,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없이 대상을 바라본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최초로 그러했던 예술은 영화였고, 그 작품은 바로 '패왕별희'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점점 사라져가고 작품 속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린 파파야 향기'라는 베트남 영화를 볼 때도 그러했다.
어떠한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작품과 하나가 되는 기분을 느꼈지만, 그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이고, 왜 그런 감정을 느낀건지 알 수는 없었다.
'키치, 달콤한 독약'을 읽고 이제 나는 알 수 있다. 어째서 그 작품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건지, 왜 그 작품들이 진정한 예술인지를.
'키치'라는 단어를 접한 적은 있었지만, 이것의 명확한 개념과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저자는 키치의 정체를 거침없이 모조리 파헤친다.
키치에 속하는, 예술 아닌 예술들의 면모가 계속해서 제시된다.
그래서 우리는 책의 절반쯤 이르렀을 때, 키치라고 불리우는 예술과, 예술을 감상하는 '키치적 태도' 또는 '키치적 삶'에 대해서 능숙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독자들은 이것이 어떠한 작품을 예술이 아닌 것으로, 비판의 대상인 키치라고 부르는 것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예술인데 왜 당신은 키치라고 비판하는 거야'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법'이라는 게 단지 어떠한 것을 규제하거나 제한하는 기능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파악했다면 그건 이 책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이차적 눈물'일 것이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법률로 규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의 가능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이 바로 '일차적 눈물'인 진정한 예술 감상 태도인 것이다. 법은 단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제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 자체의 본질은, 인간이 행동할 수 있는 최대의 영역을 알려준다는 데 있다.
키치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어떤 예술이 '키치'인지를 정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예술'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게 된다. 키치를 규정하는 것은 단지 예술 작품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진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이 책에서 진정한 예술을 감상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고, 예술을 창조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예술'에 다가간다면, 우리는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두고두고 감상할 수 있는 각자만의 예술 작품들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저자는 예술을 대면할 때 좋은 감상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언급한다. '몰아의 심적태도'. 거기에 자기는 없고 세계에 대한 심미적 요청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진실은 언제나 몰아를 요구하고, 감상자는 오로지 '작품에만' 집중한다. 이와 대비되는 '키치적' 태도란, 자신의 허영과 오만, 자기연민등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감정이입적 태도로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감정만을 위한 감상으로,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란 불가능하게 된다. 키치 예술이 보여주는, 품격과 고귀함을 가장한 상투성에 현혹되고, 거기에서 발생한 감정이입은 자신의 허구적 모습에 또한 현혹되게 만들어 삶의 본연의 의미가 아닌, 속물로서의 키치적 삶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좋은 문장들을 수없이 많이 읽었지만, 이 책으로 예술 공부를 하고 싶은 분들께 책 속 한 문장을 먼저 소개한다.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학문에 있어서도 성취의 첫 번째 요건은 스스로의 눈, 스스로의 감성, 스스로의 지성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이다.' 라는 문장이다.
이것이 우리가 키치에 현혹되지 않고 우리 자신만의 눈으로 예술을 감상하고, 또 만들어 내기 위한 전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먼저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그 상태에서 감상한 예술과 그것에서 느낀 것들은 철저히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이 키치가 아닌 진짜 예술에 접근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예술과 철학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그래서 이 책에는 철학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철학이 어렵다고 이 책을 읽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전혀 없다. 철학 잘 몰라도 이 책에서 진실한 예술과 삶의 태도를 배우고 느낄 수 있다.
키치에 대해서 읽고 공부했으니, 이제 한 작품에 적용해보려고 한다.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던 영화 중에 한 작품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 아름다움을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영화 속의 내용이 정말 어둡고, 현실에 절대 재현되어서는 안될만큼의 비윤리적이고 파멸적인 것이었는데도 나는 어째서 이 영화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는지 어렸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넋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키치를 알게 되고, 어떤 것이 진정한 예술 작품이고, 또 어떻게 작품을 감상해야하는지 이 책에서 배우면서 그 '아름다움'의 정체를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이 영화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자기연민, 방황, 불안한 내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청소년들이다.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녹색의 배경에 대비되는 아이들의 비극적 내면과 상황들에 어떤 감정이입을 요청하는 메세지 따윈 없다. 그들에게 공감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연민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아니, 할 수도 없다. 현실을 작품 속에 가져와서 그들의 삶과 내면에 적용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모두가 똑같은 비극을 겪었다해도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자신의 윤리적 잣대를 작품에 가져오면 영화가 받을 건 '비난'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감상했다면, 영화 끝에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감정이 바로 '아름다움' 일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느낀 오로지 미적인 것들만이 이 영화에서 남긴 유산이다. 하나 더 추가하면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난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무한한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마저 잊었다. 그걸 가능하게 했던 이가 바로 영화 속에서 드뷔시의 곡을 연주하던 한 소녀이다. 순수 그 자체였던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을 겪게 된다. (영화를 안 본 이들에게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자세히 적지는 않는다)
영화 속에서 아무도 그녀를 위로하지 않는다. 감독도, 작품 속 그 어떤 인물도, 심지어 자연도. 그녀를 위로하거나 따뜻한 메세지를 전하지 않는다. 그녀의 비극은 온전히 그녀만의 것이며, 그녀 홀로 극복하고 견뎌내야 하는 것인 양. 삭발을 하고 등교한 그녀를 모두가 어색하게 바라보지만, 그녀는 의연하고 초연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앞을 응시할 뿐이다. 드뷔시의 음악을 연주했던 그녀는, 그녀가 겪은 비극 이후에도 여전히 피아노 연주를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예술을 감상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녀에게 어설픈 감정이입을 하거나 그녀의 의지를 찬양하는 태도는, 이 책의 언어를 빌려 말한다면 '키치적' 태도일 것이다. 비극을 겪은 한 소녀가 자신의 머리를 깎고 학교에 나와 초연한 눈빛으로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해나간다는, 한 개인의 강한 '의지'는 이미 이 지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비극에 대한 어설픈 공감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모두가 똑같은 비극을 겪는다해도, 오롯이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똑같은 방법으로 시련을 극복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야되' 라는 식의 공감과 평가는 좋은 예술작품을 헛되게 감상하는 키치적 태도일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을 느끼길 강요하는 작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키치'라고 불리우는, 예술 아닌 예술일 것이다.
좋은 예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아, 몰라. 난 내 멋대로 감상할거야. 내가 느낀 게 진짜이지. 왜 이래라 저래라야.' 라고 한다면, 굳이 권하진 않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한대로 '실존적 삶'을 살고자 한다면, 고통과 절망에 눈감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예술을 감상하는 태도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었을 때의 의연함과 초연함은 진정 눈부신 것이다. 그것을 느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