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희망
고희석 지음 / 청동거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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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현직자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알게 된 고희석 작가님의 에세이 '절대희망'.

작가님은 물리치료사이면서 동시에 사회복지사로 30년을 근무해오셨다고 한다.

원래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하시다가, 28살에 슈바이처의 '나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 의료봉사의 삶에 매료되어 뒤늦게 입시 준비를 하시다가 현실적 여건에 부딪히게 되면서

물리치료학과로 진학하시게 되고, 물리치료사로서 사회복지시설과 신망애재활원 등에서 장애인을 위한 치료와 사회복지 업무를 평생 해오셨다.

이 에세이에 담긴 이야기들은 작가님께서 평생을 장애인과 함께 시설에서 생활하시면서 겪었던 것들을 모은 것이다.

예전에 고 이태석 신부님의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라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고희석 작가님께서 슈바이처의 책을 읽고 의료봉사의 꿈을 가진 것처럼, 나는 이태석 신부님의 책을 읽고 의료봉사의 삶을 꿈꾸었다.

그 책에서 결정적으로 감명받은 한 구절이 있다.

전쟁으로 버려진 땅인 남수단의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생각해봤더니, '그들과 함께 사는 것'. 이것만이 의식주,교육,의료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남수단의 사람들에게 신부님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국제적 여론의 그 어떤 '말'보다도, 역시 직접 '실천'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신부님의 책에서 배웠고, 이 책 '절대희망' 에서도 다시 한번 배우게 되었다.


작가님은 물리치료사로서 재활원에 근무하셨지만, 사회복지업무에 대한 뜻이 강하셔서 생활재활교사 업무에 지원하셨었다고 한다. 생활재활교사의 업무가 얼마나 고된 것인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작가님 또한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한 경험을 소개하셨다.

백명이 넘는 장애인들을 모시고 어느 단체의 초대를 받아 서울의 유명 아트홀의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관람 중에 한 지적장애인 분께서 대변실금을 하셨고 작가님께서 그분을 급히 모시고 화장실로 가서 바지를 타고 흘러내린 대변을 닦아내고 씻기고 하시는데, 한참을 그렇게 땀범벅이 되어 해결하고 나왔더니 공연 중이라 다시 못 들어간다는 안내에, 밖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연장 안에서 들리는 유명인사들의 축사 소리를 듣는데, 방금 화장실에서 타인의 대변을 닦느라 힘들었을텐데도, 작가님은 자신이 한 일이 저 공연장 안의 연설보다 더 값지고 귀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렇게도 꿈꿔왔던 봉사의 삶을 사는 것, 지금 누군가의 똥을 닦는 일에서 보람과 가치를 느꼈다고.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내가 진정 느꼈던 두가지는, 사회복지시설의 생활재활업무를 담당하시는 사회복지사의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와, 말로써 봉사의 삶을 외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 삶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였다. 작가님은 그 업무를 3년간 하시고 다시 물리치료의 일로 복귀하셨다고 한다. 단지 월급 때문이라면 그 고된 일은 절대 못할 것이다. 희생, 헌신, 사랑 이런 것들이 없다면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은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 현장에서 평생을 일해오신 모든 사회복지사분들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오롯이 오늘을 사는 분들이기에, 오늘의 행복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 사회복지사가 해야 할 일인 듯 싶다.' 라고 하신 부분에서 참 많은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사회복지사 본인의 헌신은 그 행복 이상으로 커야만 겨우 전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품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커야만 누군가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걸까? 봉사의 삶이란 정말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고희석 작가님께서 재활원의 장애인 환자들을 치료하실 때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셨다고 한다.

'신체'를 치료한다는 관점과 '사람'을 치료한다는 관점. 복지시설의 환자들은 소위 세상 끝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떻게해서든 세상의 '안'으로 밀어 넣고 싶으셨다고 한다. 사람을 지탱하고 세상의 안으로 밀어 넣는 일, 이것이 '사회복지'의 일이다. 작가님은 자기자신을 시설의 '일부' 라고 생각하시면서 장애인 환자들의 치료에 임했다고 하신다. 시설과 시설의 장애인 분들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오신 것이다. 그 오랜 세월 속에서도 항상 배우시고 행복하셨다고 한다. 이처럼 실천하는 삶을 살아오신 작가님의 '직업'으로서의 물리치료, 사회복지 일은 사랑과 헌신 그 자체의 삶인 것 같다.


작가님께서 신망애재활원에서 장애인분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은 세상이 있다고 하셨다. 첫째는 '뛰어난 현실 수용력', 둘째는 '욕심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속도 대신 흐름을 선택한다' 는 점이다. 특히 세번째에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비장애인들의 사회에서는 '속도'가 곧 생명이다. 빨리 성공하고, 지위를 획득하고, 성취하기 위해 살아간다. 몇개월 안에 자격증을 따고, 시험에 합격하고, 몇년 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몇년 안에 집을 사고, 몇년 안에 승진을 하는 등등. 신체적 장애를 가지지 않은 비장애인들은 최대한 빠른 기간 안에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고 노력한다. 이런 꿈들이 장애인이라고 없겠냐마는, 장애인에게 있어 속도에 해당하는 '느림'과 '빠름'은 선택 사항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흐름'에 삶을 맡긴다. 순간순간 존재의 욕심과 한탄이 있지만 결과에 바로 순응한다. 신체의 장애로부터 오는, 겪을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곧바로 순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운명'이라는 것은 절대 남한테 맡겨서는 안되는, 오로지 내가 선택하고 끌고가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결정할 수 없는 장애인의 삶과, 그들의 삶을 헌신과 희생으로 지탱하는 사회복지사들의 삶을 이 책에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기꺼이 맡기는 것과 그 운명을 따뜻하게 감싸고 돌보는 거룩한 공동체가 있음을 보았다. 희망으로 온전히 극복되는 것만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절대희망'이라는 것이 장애인과 그들을 지탱하는 복지시설의 많은 종사자들의 가슴 속 한 켠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는 걸 이 책에서 배웠다.

사회복지 일을 꿈꾸는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 공동체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움을 가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고희석 작가님께서 20대 시절 의료봉사의 꿈을 품게 되고 평생 실천해오신 것처럼, 나도 그 일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는 말이 이처럼 위로가 되는 날도 있다. 꿈을 포기할 순 없기에, 이젠 정면돌파 할 일만 남았다.

이 책을 쓰신 고희석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희망은 역시 약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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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달콤한 독약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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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되었을 때,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없이 대상을 바라본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최초로 그러했던 예술은 영화였고, 그 작품은 바로 '패왕별희'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점점 사라져가고 작품 속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린 파파야 향기'라는 베트남 영화를 볼 때도 그러했다.

어떠한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작품과 하나가 되는 기분을 느꼈지만, 그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이고, 왜 그런 감정을 느낀건지 알 수는 없었다.

'키치, 달콤한 독약'을 읽고 이제 나는 알 수 있다. 어째서 그 작품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건지, 왜 그 작품들이 진정한 예술인지를.

'키치'라는 단어를 접한 적은 있었지만, 이것의 명확한 개념과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저자는 키치의 정체를 거침없이 모조리 파헤친다.

키치에 속하는, 예술 아닌 예술들의 면모가 계속해서 제시된다.

그래서 우리는 책의 절반쯤 이르렀을 때, 키치라고 불리우는 예술과, 예술을 감상하는 '키치적 태도' 또는 '키치적 삶'에 대해서 능숙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독자들은 이것이 어떠한 작품을 예술이 아닌 것으로, 비판의 대상인 키치라고 부르는 것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예술인데 왜 당신은 키치라고 비판하는 거야'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법'이라는 게 단지 어떠한 것을 규제하거나 제한하는 기능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파악했다면 그건 이 책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이차적 눈물'일 것이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법률로 규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의 가능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이 바로 '일차적 눈물'인 진정한 예술 감상 태도인 것이다. 법은 단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제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 자체의 본질은, 인간이 행동할 수 있는 최대의 영역을 알려준다는 데 있다. 

키치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어떤 예술이 '키치'인지를 정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예술'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게 된다. 키치를 규정하는 것은 단지 예술 작품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진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이 책에서 진정한 예술을 감상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고, 예술을 창조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예술'에 다가간다면, 우리는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두고두고 감상할 수 있는 각자만의 예술 작품들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저자는 예술을 대면할 때 좋은 감상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언급한다. '몰아의 심적태도'. 거기에 자기는 없고 세계에 대한 심미적 요청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진실은 언제나 몰아를 요구하고, 감상자는 오로지 '작품에만' 집중한다. 이와 대비되는 '키치적' 태도란, 자신의 허영과 오만, 자기연민등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감정이입적 태도로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감정만을 위한 감상으로,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란 불가능하게 된다. 키치 예술이 보여주는, 품격과 고귀함을 가장한 상투성에 현혹되고, 거기에서 발생한 감정이입은 자신의 허구적 모습에 또한 현혹되게 만들어 삶의 본연의 의미가 아닌, 속물로서의 키치적 삶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좋은 문장들을 수없이 많이 읽었지만, 이 책으로 예술 공부를 하고 싶은 분들께 책 속 한 문장을 먼저 소개한다.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학문에 있어서도 성취의 첫 번째 요건은 스스로의 눈, 스스로의 감성, 스스로의 지성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이다.' 라는 문장이다.

이것이 우리가 키치에 현혹되지 않고 우리 자신만의 눈으로 예술을 감상하고, 또 만들어 내기 위한 전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먼저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그 상태에서 감상한 예술과 그것에서 느낀 것들은 철저히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이 키치가 아닌 진짜 예술에 접근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예술과 철학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그래서 이 책에는 철학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철학이 어렵다고 이 책을 읽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전혀 없다. 철학 잘 몰라도 이 책에서 진실한 예술과 삶의 태도를 배우고 느낄 수 있다.


키치에 대해서 읽고 공부했으니, 이제 한 작품에 적용해보려고 한다.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던 영화 중에 한 작품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 아름다움을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영화 속의 내용이 정말 어둡고, 현실에 절대 재현되어서는 안될만큼의 비윤리적이고 파멸적인 것이었는데도 나는 어째서 이 영화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는지 어렸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넋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키치를 알게 되고, 어떤 것이 진정한 예술 작품이고, 또 어떻게 작품을 감상해야하는지 이 책에서 배우면서 그 '아름다움'의 정체를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이 영화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자기연민, 방황, 불안한 내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청소년들이다.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녹색의 배경에 대비되는 아이들의 비극적 내면과 상황들에 어떤 감정이입을 요청하는 메세지 따윈 없다. 그들에게 공감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연민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아니, 할 수도 없다. 현실을 작품 속에 가져와서 그들의 삶과 내면에 적용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모두가 똑같은 비극을 겪었다해도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자신의 윤리적 잣대를 작품에 가져오면 영화가 받을 건 '비난'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감상했다면, 영화 끝에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감정이 바로 '아름다움' 일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느낀 오로지 미적인 것들만이 이 영화에서 남긴 유산이다. 하나 더 추가하면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난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무한한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마저 잊었다. 그걸 가능하게 했던 이가 바로 영화 속에서 드뷔시의 곡을 연주하던 한 소녀이다. 순수 그 자체였던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을 겪게 된다. (영화를 안 본 이들에게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자세히 적지는 않는다)

영화 속에서 아무도 그녀를 위로하지 않는다. 감독도, 작품 속 그 어떤 인물도, 심지어 자연도. 그녀를 위로하거나 따뜻한 메세지를 전하지 않는다. 그녀의 비극은 온전히 그녀만의 것이며, 그녀 홀로 극복하고 견뎌내야 하는 것인 양. 삭발을 하고 등교한 그녀를 모두가 어색하게 바라보지만, 그녀는 의연하고 초연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앞을 응시할 뿐이다. 드뷔시의 음악을 연주했던 그녀는, 그녀가 겪은 비극 이후에도 여전히 피아노 연주를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예술을 감상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녀에게 어설픈 감정이입을 하거나 그녀의 의지를 찬양하는 태도는, 이 책의 언어를 빌려 말한다면 '키치적' 태도일 것이다. 비극을 겪은 한 소녀가 자신의 머리를 깎고 학교에 나와 초연한 눈빛으로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해나간다는, 한 개인의 강한 '의지'는 이미 이 지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비극에 대한 어설픈 공감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모두가 똑같은 비극을 겪는다해도, 오롯이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똑같은 방법으로 시련을 극복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야되' 라는 식의 공감과 평가는 좋은 예술작품을 헛되게 감상하는 키치적 태도일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을 느끼길 강요하는 작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키치'라고 불리우는, 예술 아닌 예술일 것이다. 


좋은 예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아, 몰라. 난 내 멋대로 감상할거야. 내가 느낀 게 진짜이지. 왜 이래라 저래라야.' 라고 한다면, 굳이 권하진 않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한대로 '실존적 삶'을 살고자 한다면, 고통과 절망에 눈감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예술을 감상하는 태도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었을 때의 의연함과 초연함은 진정 눈부신 것이다. 그것을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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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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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예술이기에, 자신에게 가장 솔직하고 진실했을 때, 독자들은 그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삶의 경험을 소박하고 겸손하게 표현한 그녀의 모든 문장들이 아름답다. 살아있다고 느껴지게하는, 호흡을 정갈히 가다듬게 만드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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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 - 사랑에 관한 뜨거운 탐구로 전하는 차가운 위로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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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려운 것처럼 이 책도 어려울 수 있겠지만 ‘사랑‘의 실체에 대해 차근차근 분석해나가는 과정에서, 분명 나에게는 지금까지 사랑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인 편견들을 긍정적인 것들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남,녀 서로의 입장을 바꿔서 이해해볼 수 있는 부분들이 좋았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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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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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때 수능 국어 공부하며 처음 접했던
나희덕 시인의 '못 위의 잠'이라는 시가 있다.
당시에는 그저 문제 풀이의 대상으로만 생각했기에
깊이있게 느껴보지 못하고 지나친 시였다.
18살의 나이로는 이 시의 참뜻을 다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졸업하고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을 읽게 되면서
다시 한번 이 시를 읽었다.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하러 나온 실업자인 남편과 어린 아이들, 노동으로 인한 아내의 창백한 얼굴, 좁은 골목길을 함께 걸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
실업과 가난의 현실을 고발하는 시 중에 가장 감각적이며, 슬픈 시라고 생각한다.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라는
아내의 창백한 낯빛을 묘사하는 문장이,
하루종일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모든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너무나도 잘 나타내준다.
1993년도 이전에 쓰인 시라고 알고 있는데,
이때와 30년이 지난 지금이 어찌 나아지거나 달라진 것 없이 참혹할까.
얼마전에 xx 기업의 물류센터에서 장시간 고된 노동 때문에 심장 이상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뉴스기사를 봤다.
고인의 사망 직전 업무 cctv 영상을 보면,
심장을 움켜쥐고 박스에 기대어 서 있는 직원을 그 누구도 본척 만척 당연하다는듯이 다들 자신의 업무를 하고 있다.
조금 이상이 있었을때 휴게실로 데려가 몸상태를 보고 바로 병원으로 옮겼다면 살 수도 있었을텐데.
현장에 있던 다른 직원들의 탓이라고 하기엔 'xx'라는 한국 최대의 유통기업을 위해 1분1초가 바쁘게 움직여야 할 모든 직원들이 어쩌면 피해자에 속하지 않을까.
물류센터에 즐비한 박스들보다도 못한 것이 사람 목숨이라니.
빠른배송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홍보하는 대한민국의 물류 시스템이 원망스러웠다.
노동량에 걸맞는 수만큼 직원들을 채용했어야하고, 일의 강도에 따라 적절한 휴게시간을 보장해야만 하는게 법이자, 기본 상식인데도 기업은 인건비를 아끼고자 엄청난 노동량에 적은 직원들로 대응시켜 강도높은 노동을 부여한다.
산업현장에서 당당히 육체 노동으로 밥벌이하는 사람들의 인권은 아직도 제자리이다. 아니, 그 안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 모두가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열심히 살아내려는 노력이 허망한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좀 더 서로를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대부분이 고단한 밥벌이를 하느라 지친 몸으로 퇴근하고, 겨우 일어나 출근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도 다들 웃고 희망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에겐 살아갈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세상 그 누구도 빼앗을수도 없고, 빼앗어서도 안되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그녀의 시선으로 본 일상의 풍경이 담긴 담백한 수필들이 들어있다.
그녀의 시만큼이나 문장들이 아름답고 간결하고 감각적이다.
수필은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통찰이 담겨있는 예술이기에,
그 작가만의 진솔한 이야기들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독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뽐내는 글은 적어도 수필이라는 장르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유식함을 드러내고, 타인을 깎아내리는 내용은 '수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희덕 시인의 수필을 참 좋아한다.
오래전에 읽은 이 책을,
문학 문제집을 넘기다 발견한 그녀의 시를 읽다가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못 위의 잠'을 시린 가슴으로 다시 적어보며 마무리한다.

<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로만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샜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 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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