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가 죽고 장비마저 비명횡사했다. 촉의 황제에 오른 유비는 두 아우를 잃은 비탄과 동오를 향한 분노의 반복 속에 대군을 일으켜 동정을 떠난다.
유비는 두 가지 실정을 범한다. 위, 촉, 오 삼국의 견제를 통한 균형 속에서만 지탱 가능하던 당시의 국가 운영을 무시하며 가장 세력이 큰 위를 두고 오를 공격했다. 위의 조비는 서로 싸우다 지친 늑대를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는 호랑이처럼 굴면 그만이었기에 촉의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다.
압도적인 군세로 승승장구하던 유비의 군대는 효정에 이르러 장강을 끼고 숲속에 주둔한다. 적벽대전 당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화공책으로 위의 대군에 승리한 바 있으나 유비는 당시의 승리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듯싶다. 한 여름의 마른 숲에 대규모 부대를 주둔시켰으니 육손의 화마에 참담한 패전을 겪고 퇴각한다. 유비는 육손을 약관의 서생이라 얕잡아 보았으니, 당시 육손의 나이 29세였고 적벽대전 당시의 공명은 28세였다고 한다.
유비는 이릉대전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 4월 세상을 떠난다. 그의 재위 3년이다. 친형제 이상의 우애로 엮여 있던 두 아우의 죽음으로 촉발 된 이릉전투는 거시적 관점에서는 국가 운영의 실정에 있어, 또 미시적 관점에서는 전술적 실패라는 점에서 모두 유비의 패착으로 보인다. 이후 촉이 중앙의 패권을 잡는 데 성공한 적 없이 삼국 중 가장 먼저 쇠락하게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김태권은 이렇게 썼다. ˝유비의 선택은 최고 결정권자로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 때문에 유비 집단의 돈독한 의리와 그 명성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경중의 판단은 각자에게 맡긴다. 여하튼 아직 공명이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