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재 속 고전 -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나무연필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스치는 인연이란, 그 표현에서 묻어나는 허무의 정서만큼의 허무도 가늠할 새 없이 깨끗하게 사라진다. 독서의 세계도 근본은 별로 다르지 않아서 우리의 끝 없는 책 읽기 속에서 망각의 저 편으로 넘어가는 책들의 행렬 또한 끝이 없다. 우리는 언제 작별을 한 지 모르는 것처럼 그 만남도 잊는다.
나는 사실 거기에 만남이란 말을 붙이고 싶지 않다. 혹은 꺼려진다. 만남이란 그보다는 훨씬 좁은 문을 통과하기를 요구한다. 만남은 상대를 기억하기를 요구하고, 내 가슴을 휘젓기를 요구하며, 뜨겁고 시린 감정의 충동과 동시에 냉철한 인식을 요구한다. 그 상대가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와 연인이나 친구, 혹은 사제 관계가 될 것이다. 그 상대가 책이라면 아마 나는 거기에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늘 곁에 둘 것이다.

재일조선인 학자이자 교수, 작가인 서경식 선생의 고전도 표현은 다를 수 있지만 가치의 맥락은 잇닿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인연으로 선생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으나 이미 여러 권의 저서가 국내에도 출간되어 있다.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나와 같이 선생의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이번의 책이 선생의 삶과 정신편력을 들여다보는 데는 무척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고전의 목록이란 선생의 삶과 가치관에 묵직한 영향력을 끼친 스승이자 벗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 코리안 디아스포라이면서 지식인이기도 한 선생의 고전 목록엔 동류 의식을 공감했을 만한 작가들, 이를테면 에드워드 사이드, 프리모 레비, 루쉰, 이브라힘 수스 등의 저서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전체주의자, 또는 그에 동조하는 반이성적 인간이자 반윤리적 인간들의 잔혹한 탄압 속에서 이성과 양심, 인간의 존엄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신념으로 끝까지 투쟁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이 어리석음과의 투쟁의 역사에는 마침표가 없다. 파시스트들의 참극을 경험한 유대인의 역사가 팔레스타인인에게 전가되고, 전범국가로서 인류 앞에 사죄한 일본은 군국주의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국민을 혼돈과 억압으로 몰고 가는 시대의 재현을 손수 택했다. 이성과 양심과 인간의 존엄을 앞장 서 외치는 이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늘 적어 보인다. 그들은 언제나 패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니, 결코 그럴 리 없다는 신념의 기록들이 선생의 정신적 기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단한 기둥이라기보다 금이 가고 위태로운 기둥이다.

˝˝이 <망각을 위한 기념>을 나는 20대 후반부터 30대에 걸쳐 글자 그대로 읽고 또 읽었다. (......) 그런 시절에 나는 조국의 동포들이 겪고 있던 고통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루쉰의 이 글을 읽고 또 읽었던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내 비관의 질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젊었을 때의 나는 ˝밤은 길고, 갈 길 또한 멀다˝는 것을 비관했다. 하지만 지금은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들을 생각해내고 다시 그들에 대해 말할 날이 오리라는 것˝이라는 부분을 비관하고 있다. 사람들은 희생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과거에서 배우지 않는다. 무서운 속도로 모든 것이 천박해지고 있다. 루쉰 따위는 읽지 않으며, 설령 읽는다 해도 그 부름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미학자로서의 심미적 욕망 또한 선생의 또 다른 정신적 기둥이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관장, 옥스퍼드 대학 교수 등을 지낸 미술 평론가 케네스 클라크의 저서 《그림을 본다는 것》을 다루는 다음과 같은 대목,

˝˝성모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 움직임 때문에 얼굴의 육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하나하나의 붓 자국 배후에 보이는 불굴의 의지는 거의 조각가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붓 움직임을 더듬어 가노라면 사람들은 어느덧 그것이 기술적인 확실성의 결과가 아니라 도덕적인 확신의 결과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기적과 같은 작품(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이 화가의 ˝도덕적인 확신의 결과˝인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누가 안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어투의 상승효과 덕에 작품이 주는 감명을 ˝아무렴, 그렇겠지˝ 하고 납득하게 된다.˝˝

회화에서 비롯되는 심미성에 더해 그것을 아름답고 지적인 문장으로 포착해 서술함으로써 증폭되는 미적 감각 앞에 즐거움을 아끼지 않는다. 나아가 마네와 고야라는 두 거장을 비교하는 케네스 클라크의 글이 있다. 그는 위대한 화가로서 마네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파리 사회 상류 중산계급의 가치관에 지배당했다˝고 덧붙인 뒤 ˝평생 궁정화가로 일했음에도 늘 혁명적이었다˝고 고야를 평가하면서 권위를 증오하면서도 ˝천부적 재주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천재로 치켜세우는데 선생은 케네스 클라크의 이와 같은 글을 ˝최고의 예술에 어울리는 최고의 말˝이라며 감탄한다. 예술 감상의 궁극적 목적이 작품 뿐만이 아니라 작가라는 인간 조건의 격을 통찰하는 데 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선생은 책 서문에 단편화 되는 인간이 오늘날 급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히 우려하며 이것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역시 파시즘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의 우경화, 전체주의화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한다. 스스로 의심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려할 수밖에 없는 사태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달리 어쩌겠는가, 독서라도 권해보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단면`으로 자신만의 `고전`을 찾아내고 그것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과정이야말로 형식화한 지식이 아니라 진정한 지적 태도로서의 교양이며, 인간을 단편화하려는 힘에 맞서는 지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