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인용문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익사》에서 아버지 `조코 코기토`가 장애를 가진 그의 아들 `아카리`와 모종의 사건으로 사이가 멀어진 상황을 두고 조코의 부인이자 아카리의 엄마인 `치카시`가 시누이 `아사`와의 통화 중 남편이자 아들의 아버지를 향한 불만 섞인 속내를 드러낸 대목이다.
소설가인 아버지 조코는 소설가로서 언젠가는 기필코 쓰려고 마음 먹었던 필생의 작품이 만년에 들어 좌초되자 커다란 우울에 빠져 들었다. 그러던 와중 생전에 서로를 깊이 이해했던 친구로부터의 유품으로 친구 자신의 메모가 곁들여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악보를 우편으로 받았다. 때마침 아들의 검진을 위해 병원에 방문해야 했던 조코는 우편으로 받은 소포를 포장 채로 가지고 갔다. 소포의 내용물이 악보라는 것은 병원에서 진찰을 기다리는 대기 중에 확인하고 알게 된 것이다. 조코의 아들 아카리는 음악에 눈부신 재능을 지니고 있고, 이미 클래식 작곡가로서 음반을 냈을 정도의 인물이어서 베토벤의 악보에 관심을 나타낸 것은 당연했다. 조코는 후에 지우개로 지울 생각으로 아카리에게 연필로 악보에 표시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심지어 아들에게 그 베토벤의 소나타 악보에서 모차르트 소나타에도 나타나는 공통점을 표시해주지 않겠느냐고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조코는 진료비와 처방전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데 이때 사고가 일어난다. 악보에 몰두한 아카리에게 관심을 가진 누군가가 자신의 볼펜을 빌려주었고 아카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볼펜을 사용했던 것이다. 조코는 악보에 볼펜 자국을 보고 자신의 아들을 향해 ˝넌 바보구나!˝ 라고 화를 내고 만다. 아카리가 얼마나 깊은 상심에 빠져 있는지, 이 사건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이미 길어진 글이 더 길어질 것이므로 인용된 엄마의 반응으로 유추해주길 부탁드린다.

독서 중 가장 강렬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은 문장이 독자의 구체적 삶에 대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듯 울리는 때가 아닐까?
인용에 다소 길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정황설명을 덧붙이기까지 한 이유는 결국 내가 이 문장,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의 어떠한 맥락 속에서 이어진 이 문장이 주는 울림에 나 자신을 깊이 반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구체적 삶에 관여된 만큼 전적으로 사적인 경험이겠지만 거기엔 언제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환원될 부분이 있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맥락에서 무언가 쓰고 싶어진 것이다.
엄마인 치카시는 아빠로서의 조코 코기토에게 아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못내 말하기 어려웠던 불만이 있다. 글에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아버지 조코 코기토는 아들을 대할 때면 늘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체로 자신의 권위를 바탕으로(조코 코기토는 노벨 문학상까지 수여한 명망 있는 문학가다. 물론이지만 조코 코기토라는 인물은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문학적 거울상이다) 자연스럽게 아들을 억압한다. 이때의 억압은 음악을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술을 마시고는 혼자서 좋은 생각이랍시고, 아카리가 흥미를 표할 거라고 여기고 새로운 CD를 찾아오거나 하는 짓˝ 정도라고 봐도 좋다(나를 포함한 개중의 누군가는 여기에서 사실 솔직히 말해 어떤 거리감을 느낀다고 해도 좋다.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라는 식의.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하면 치카시라는 여성의 섬세함과 인품에 감탄함과 동시에 차라리 우리의 둔감함을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치카시의 비난을 곱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앞서 언급한 바 있듯 나의 구체적 경험의 세계 속에서 이와 같은 억압을 별도의 반성도 없이 저질러왔다는 깨달음이 피할 길도 없는 홍수처럼 나를 휩쓸어 버린 것이다. 물론 우리는 지도와 억압의 그 모호한 경계를 분명히 구분해야 하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실상 우리가 우리와 가까운 관계인 상대를 대할 수록 그 경계는 더욱 모호하고 구분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경우를 돌아보자면 나는 어디까지나 ˝아카리가 흥미를 표할 거라고 여기고 새로운 CD를 찾아오거나 하는 짓˝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역시나 반성 없이 해왔다. ˝음악을 듣는 자유가 지켜져야 하듯 음악을 듣지 않는 자유도 지켜져야˝한다는 ˝기본적 인권˝은 무지의 소산이라는 듯이.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상대에게 주입하려는 파생된 욕망인 동시에, 타자의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자신이라는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기만적 행동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카시는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아카리에게 그 사람이 화해의 손을 내미는 방법이 표면적이거나 작위적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또 언제나 그런 식으로 화해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아카리에 대한 그 사람의 억압은 늘 존재해왔던 것 아닐까?
지금의, 아카리와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궁지에 몰린 상황을 그 사람이 여태까지 해온 방식으로 수습하려 한다면 나로서는 반대야. 특히 술을 마시고는 혼자서 좋은 생각이랍시고, 아카리가 흥미를 표할 거라 여기고 새로운 CD를 찾아오거나 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주었으면 해. 아카리의 삶에서 음악은 무엇보다 소중한 요소로 존재해왔어. 그런 음악에 대해 자유의지로 듣는다(강제로 듣지는 않는다)는 원리는, 절대로 지켜져야 해. 음악을 듣는 자유가 지켜져야 하듯 음악을 듣지 않는 자유도 지켜져야 해. 그거야말로 그 사람이 항상 강조하는 `기본적 인권`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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