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평점 :
광주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이미 우리 사회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또 인권적인 차원에서 상식적이고 올바른(최근 이 단어에 덧씌워지고 있는 `독단적`이라는 의미에 함몰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답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군부에서 군부로, 독재에서 독재로 정권이 이양되려 하는 정국의 끔찍한 데자뷰에 맞선 시민의 궐기와 그에 이어진 국가의 포악한 진압. 그 결과 남겨진 깊은 상처와 슬픔, 또 독재정권을 향한 분노와 공포. 아마 이것이 우리가 광주로부터 건네 받은 질문에 대한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답변일 것이다.
그러나 새정지라는 촌락과 광주를 오가는 공선옥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광주의 상처는 보다 뿌리가 깊다. 소설의 주요 인물인 정애와 묘자라는 두 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사건은 가난, 겁탈, 그리고 노래다. 새정지라는 궁벽한 시골의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다. 정애의 가족도 묘자의 가족도 그렇다. 그런데 이 가난한 마을에서도 목소리 큰 사람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새마을운동이라는 국가사업에 앞장 선 이들이다. 그들이 남의 집 닭과 개나 소를 훔쳐 먹고 또 정애나 묘자 같은 아이들을 겁탈한다. 이들은 완장을 차기 전에도 그랬던 위인들이었으나 완장을 차고 나서는 완장을 찬 구실로 그 짓들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작가의 통찰을 담아두어야 할 대목은 이 완장찬 이들이 베푸는 덕목에 있다. 이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감상에 젖어 불철주야 부지런하여 마을의 길을 닦고 넓히고 집을 세우고 한다. 또 외로이 사는 독거노인들을 찾아 사탕이라도 챙기는 번거로움도 마다앉는다. 물론 이들의 배는 날로 부르다. 없는 자들에게서 빼앗아 더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밤에 저지른 추행은 은폐하고 대낮의 큰 소리만 광고하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해도 모두가 쉬쉬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그들의 뒤에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광주를 향한 추모의 노래임에는 틀림 없다. 정애는 그날의 광주에서 그 탄압 중에 강간을 당해 미쳐버렸고, 묘자 역시 군홧발들의 구타에 죽다살아난 남편 박용재의 상처를 감싸안으려다 살인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날의 광주는 예비되어 있던 지옥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새정지라는 촌락까지 가야만 했을 것이다. 정애는 광주에서 미치기 이전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새정지에서 탐욕스럽고 알량한 권력을 지닌 자들로 인해 가족을 잃었고 몸을 유린 당했다. 묘자도 그랬고 정애의 여동생도 그랬다. 정애의 부모도 또 그 부모의 부모도 그랬을 것이다. 이들의 노래가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왔다는 사실, 사람의 온전한 말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온다는 사실은 이 비극의 흘러넘침을 솔직히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참담한 과거를 흘러간 일로만, 시간이 치유할 병으로만 여길 수 없는 시대를 직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경험 없이 광주, 또 수 많은 광주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비극을 되도록 온전히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 또 그것을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자들을 맞아 쉬쉬하며 침묵하지 않는 것, 그래서 다시 지옥이 이 땅 위에 재현되지 않도록 눈 감지 않는 것이 그 보다는 쉬운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