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브라운 신부 전집 4
G. K. 체스터튼 지음, 김은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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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에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갔었는데 2권 있는 게 모두 대출 중이었다. 그다음 주에도 마찬가지라서 이렇게 나랑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했었는데 다행히 신년에 처음 간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었다.

 

 

『비밀』은 스페인에 정착한 플랑보의 작은 성에 머물게 된 브라운 신부가 미국인 여행자 체이스의 요청으로 자신의 추리 비결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예전의 사건들을 회상하며 들려주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작품은 일반적인 추리 소설과는 좀 다르게 읽힌다. 단순하게 말하면 철학 책 읽는 느낌이랑 좀 비슷하다. 과학적인 증거와 논리적인 추리력을 뽐내는 탐정, 혹은 수사관 그리고 그에 감탄하거나 경탄하는 범인, 주변 인물들로 구성되는 이야기랑은 다르게 사건의 전말은 대개 브라운 신부의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나 '그래서 범인은 너야'라는 식의 범인 체포식이나 추리 발표식은 거의 없다. 게다가 신부는 이미 도망친 범인이나 도망칠 범인에 연연해하지 않고, 모두가 분노하는 범인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고도 용서하는 진정한 기독교적 정신을 표출한다.

 

우리는 그런 죄인들을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지옥에서 구해줄 말을 해야 합니다. 인간적 자비심이 그들을 내버릴 때 우리 신부들은 그들을 절망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용서하고 싶은 악덕과 죄만 용서하십시오. 정말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은 우리 어둠 속의 흡혈귀들에게 맡기시고요. 이 세상도 변호해주지 않고 자신도 스스로 변호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신부들 외에는 아무도 용서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  「마른 후작의 상주」 中


브라운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명쾌하고 개운한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자꾸 인간, 악, 죄 등 이런 것들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페이지가 두껍지 않아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된다. 통쾌하고 싶거나 명확한 권선징악의 결말을 원할 때 적당한 책은 아니다. ^^

책 마지막에 남긴 '추리소설 쓰는 법'이라는 글에서 저자는 자신의 추리소설 작가로서 실패했음을 뼛속까지 깨달았다며 자신은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이 피해야 할 전형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작가가 추리소설의 전형성에서 비켜서 있는 것은 분명하나 실패는 좀 다른 얘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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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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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자신의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 「나무 불꽃」 中

 

친구가 빌려준 마지막 책. 오늘 다 읽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읽다 보니... ^^;; 연작소설집으로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세 작품이 묶여 있다. 연작소설이라고 쓰인 걸 보지 못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인물과 이야기가 연결이 되길래 깜짝 놀랐다.

불편한 마음으로 읽다가 문득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던 초기에 봤던 한국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들이 생각이 났다. 넘치는 열정으로 우리나라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묶어서 상영해주는 프로그램들을 찾아서 보러 다녔는데 상영관은 사람이 거의 없이 텅텅 비어 있기가 일쑤라 전세 낸 것처럼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막 좋은 기억은 아니다. 재미를 떠나 이해나 공감할 만한 여지를 찾기 어려운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읽은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쓴 한강 작가의 작품인데 마치 한 사람의 속내를 180도 뒤집어 본 느낌이다. 그나마 「나무 불꽃」에서 영혜의 언니 마음에는 조금 다가설 수 있을 거 같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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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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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때문에 읽기 전까지 이 책이 여행기라는 걸 의심했다. ㅎㅎ 내 의심과는 상관없이 이 책은 저자가 캐나다에서 거주하러 가기 전까지 2달간의 여정으로 떠난 시칠리아 여행을 담은 여행기가 맞다.

 


여행을 좋아하는 만큼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기록을 읽는 것도 좋아하는데 이 시칠리아 여행기를 읽으면서 내가 여행 에세이라고 하는 작품들에 선호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탈리아에 가보지 못한 나는 저자의 시칠리아 여행을 따라가면서 계속 스페인이 떠올랐다. 발렌시아에서 사라고사로 이동하면서 봤던 메마른 풍경들, 작지만 문화적 향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소도시들- 작가가 언급한 톨레도도 이때 이동하면서 볼 수 있었다 -, 그리고 예의 바르고 세심하고 친절했던 사라고사 사람들까지...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머물다 올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머물렀던 리파리 섬에서의 여정을 제외하고는 저자의 에피소드보다는 도시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게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시칠리아에서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는데 뒷부분은 거의 각 도시를 거치면서 그곳에 얽힌 역사적인 상황이나 인물에 대해 작가의 소회를 서술하는 글로 읽혀서 여행기를 읽는다는 재미는 좀 덜했던 거 같다. 그런데 이건 내 아쉬움이니까...

다 읽고 나니 시칠리아 여행 못할 거 같다. 연착이니, 사전 공지 없는 취소니, 이런 거 너무 스트레스다. ㅋㅋㅋㅋㅋ 예약했던 발렌시아에서 사라고사로 가는 버스가 일언반구도 없이 캔슬된 걸 알게 된 순간, 정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예전보다 나아지기는 했는데 여전히 나는 정해진 시간이 사전에 공지나 양해 없이 어긋나는 게 짜증이 난다. 정신 건강을 위해 시칠리아의 철도 상황이 나아지는 걸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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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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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마음에 드는 소설이라며 친구가 빌려준 책. 친구 말고도 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다. 제목이 특이해서 궁금했는데 작가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포함해서 총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작품들 모두 공통적으로 친구나 연인, 가족과의 에피소드에서 비롯된 불분명한 감정의 경계를 다루고 있다.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이유는 누구도 명확한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왜곡되거나 해서이기도 한데 전반적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는 데 더 능숙한 인물들이 화자로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덕분에 다 읽고 나서도 인물들이 겪은 사건이나 감정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데 이 직전에 읽었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는 아주 대조적인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겪는 많은 순간들의 감정이란 게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기보다는 오히려 이 작품의 화자들이 표현하듯이 모호한 경우가 더 많은 거 같다. 그런 점에서 친구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고... 개인적으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으면서 Bernard 씨가 생각났다. 스위스 여행에서 만난 Bernard 씨는 열차에서 엉터리 영어로 딱 40분 정도 대화를 나눴을 뿐인 여행객인 나에게 지금까지도 때때마다 가장 먼저 축하나 축복의 메시지를 보내주신다. 헤더와 로버트가 나눴던 교감과는 다르지만, 혼자 했던 여행의 마지막까지 나는 Bernard 씨가 보여준 친절 덕분에 한층 안도감을 느꼈으니 헤더가 로버트에게 느꼈을 감정의 일부분은 내가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싶다.

감정을 안으로만 삭히는 게 익숙해져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요즘, 문득 친절하고 다정한 누군가에게 긴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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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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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유난히 내가 빨리 읽고 어땠는지 얘기해 주기를 바란 한강 작가의 책이다. 『채식주의자』와 이 책 2권을 빌려줬는데 만날 때마다 읽어봤냐고 물어봤다. 친구는 쉽게 읽히지가 않아서 페이지가 크게 많지 않음에도 오래 걸렸다고 어려웠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펼치고 앉은 자리에서 다 봤다. 소재가 소재인지라 한 번에 다 읽기는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어느새 마지막 장이었다.

5.18 광주를 배경으로 중학교 3학년,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갓 대학에 입학한 청년의 시선으로, 꽃다운 나이의 여공의 시선으로, 그리고 어린 아들이 잃은 슬픔을 품고 살아온 어머니의 시선으로 옮겨 간다. 누군가는 무참히 죽었고, 누군가를 살아남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누군가는 죽지 못해 살아가며 계속 되새김질하는 그날의 상처와 아픔을 작가는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정확한 문체 덕에 논픽션인지 픽션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이 이야기는 나처럼 그날의 참상을 무엇 하나 또렷하게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유능한 기자가 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모아서 엮어 놓은 기획 특집 기사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거 같다. 인물들이 겪은 모든 일이 참혹하고 끔찍한 -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거 자체가 믿기 힘든 - 사건이나 슬픔이나 분노를 강요하지 않는 작가 덕에 오히려 더 슬프고 아프다.

죽음 이후의 일을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남아 있는 싸움도, 슬픔도, 치욕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의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정말 슬펐다. 어린 막내아들을 잃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자신의 행동이 어딘가 잘못되었던 게 아닐까 틈날 때마다 되새기고 간간이 이곳저곳에서 아들의 모습을 회상하는 어머니... 부모를 잃은 아이를 고아라고 부르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는 그 슬픔이 너무 커서 붙일 이름도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역사적인 사건을 소설로 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나온 글과 기사, 관련된 텍스트들이 많고, 연관된 관계자들도 많아서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조심스럽고 한계가 있을 거 같다. 에필로그를 읽어보면 이 이야기의 시작점이 된 소년 '동호'가 어떻게 작가에게 왔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소년이 그렇게 작가에게 왔기에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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