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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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날을 믿는 종교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그날을 준비해왔다. 하지만 예언의 그날은 그냥 지나갔고,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부정하기보다는 그날이 언젠가 올 거라거나 자신들의 믿음과 행동에 신이 감복하여 멸망을 실행하지 않기로 했다는 해답(?)을 내놨다. 이런 사례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잘 바뀌지 않는다, 바뀌기 어렵다는 증거로 자주 사용된다.

소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주인공 혜령이 운 좋게 로또에 당첨된 시점에 엄청난 지진으로 인간 세상의 종말을 경험하면서 시작된다. 혜령은 종말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남편과 사별하고 결혼해서 독립한 딸 이레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60대 여성이었다. 지진이 났을 때 봉산에 있던 혜령은 산을 내려가던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고 홀로 산을 다시 올라와 전망대 근처의 짓다 만 화장실에 몸을 숨긴다. 지진과 폭우가 휩쓸고 지나간 세상에서 다른 생존자를 찾지 못했지만, 괜찮다는 메시지를 남긴 이레를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잔해 속에서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삶을 지속한다.



| 생존과 공존의 자세


홀로 지낸 지 17년 만에 혜령은 캠핑카에서 생활하고 있는 노바를 만난다. 혜령의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생존을 위한 고단함에 공감하며 따라가던 이야기는 노바를 만난 시점에 홀로 돌봄에서 서로 돌봄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따뜻함을 안겨 준다. 혼자도 잘 살아남았던 두 사람이지만, 둘이 되면서 서로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가며 따로 또 같이 흐뭇한 생존을 이어간다.

이후에 만난 윤주와 안섭은 이야기의 분위기를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 멸망의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안섭의 재력으로 맺어진 일종의 고용 관계인 두 사람은 복구될 세상에서 여전히 금, 보석, 돈 등이 중요할 거라는 윤주의 부질없는 믿음으로 유지되는, 보는 사람도 불편한 동거를 유지하고 있다. 노바에게 했듯 마음을 썼던 혜령마저 윤주에게는 단호하고 다르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자기 말밖에, 자기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은 세상이 달라져도 똑같다는 걸 윤주가 보여준다. 사전 양해도 없이 혜령과 노바의 주거지를 막무가내로 찾아왔을 때는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생존자 영락은 점차 복구되는 자연의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고립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며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열심이다. 이레를 만나야 하는 혜령, 그리고 안섭과 지금의 생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윤주는 영락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노바는 새로운 길이 발견되어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더불어 지체 장애인 안섭은 새로운 길로 떠날 때 몸이 불편한 자신이 버림받을 거라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삶의 의지가 인간의 본능이라면, 공존은 어떨까? 공존도 인간의 본능일까?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지만, 자신을 구해준 순간까지 적반하장으로 구는 윤주를 보고 있으니 공존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 피하는 게 상책인 상황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


역 오거리에 있던 유명 탕수육 가게 앞을 지나며 새삼 아쉬움이 들었다. 먹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항상 다음으로 미뤘다가 끝내 먹어보지 못했다.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왜 매번 미뤘을까. 아마도 언제든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이런 미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일 따위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어진 이 순간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이제 안다. 다들 내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무릎이 망가지기 전에 부지런히 여행도 다니고 치아가 약해지기 전에 먹고 싶은 것도 다 먹어보라고. 그래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中 p.140~141


혜령은 혼자 있을 때 영화를 봤다고 했다. 옛날 일들이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다고... 아마도 그 안에서 미처 해보지 못한 일들도 계속 생각이 났을 거다. 다음이라는 말로 미뤄두었던 온갖 사소한 일들이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기에 혜령은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일들을 실행해야 함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느끼고 있을 거였다. 그리고 그러기에 노바에게 더 마음을 쓰고, 생존을 위한 활동뿐 아니라 영락과 함께하는 길 찾기에도 열심일 수 있지 않았을까.

뭔가를 하고 싶은 이유만큼 할 수 없는 이유도 따라붙는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큰일이었던 것 같던 그 이유들이 별거 아닐 때가 많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해보라고 이야기 속에서 혜령도 말해주고 있는 거 같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의 배경은 은평구다. 낯익은 장소, 가게, 지명들이 12살부터 이곳에 살았던 나에게 더 큰 친숙함과 즐거움을 준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혜령이 머물고 채집 활동을 다니던 곳, 윤주와 안섭, 노바의 근거지 등을 그려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 본 도서는 아카 @aka_book_의 모집으로 자음과모음 @jamobook 출판사에서 도서는 보내주시고 #SF탐사단 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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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대신해 드립니다
하라다 마하 지음, 송현정 옮김 / 빈페이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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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여행은 스트레스 해소의 중요한 수단이자 자기 돌봄의 한 가지 방법이다. 몇 개월을 준비해서 멀리 떠나기도 하지만, 아주 짧게 다른 동네 탐험을 하기도 한다. 나 홀로 여행이 재미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기술이 잘 발달해서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이나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게 어렵지 않아 괜찮다. 같이 하는 재미도 있지만,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에 채워지고 치유되는 에너지도 중요하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고른 이 소설은 아이돌 출신 연예인 오카에리가 유일하게 출연 중이던 프로그램, '소소 여행'이 폐지된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여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리 여행을 의뢰받으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어느 여유로운 아침 기대치 않게 단숨에 읽어 내려갔고 결국에는 눈물을 글썽이게 되었다.


대리 여행의 시작은 난치병에 걸려 열아홉 살부터 투병 중인 딸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에서부터였다. 처음에는 난감함이 앞섰던 오카에리와 소속사 사장, 텟페키는 직접 만나게 된 모녀의 모습과 가족의 사연을 듣고 결국에는 의뢰를 받아들이게 된다. 촬영부터 편집까지 모든 걸 직접 감당해야 하는 두 사람에게 '소소 여행'의 스태프들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지만, 기운차게 첫 대리 여행을 시작한 오카에리는 겪은 적 없는 최악의 날씨에 절망한다.


첫 대리 여행지로 등장하는 아키타는 전에 나도 가 본 적 있는 곳이었다. 자유여행이 아니라 교류단 활동으로 정해진 스케줄을 소화하는 여정이었지만, 허리까지 오도록 쌓인 눈, 그 눈에 압사당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 그리고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과 순수하고 친절했던 사람들로 아직까지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투병 중인 마요가 원하는 풍경, 음식, 체험으로 채워가며 그녀에게 보여줄 영상 속에 그녀와 가족을 응원하는 마음까지 담으려 애쓰는 오카에리, 그리고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의 따뜻한 모습이 더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오카에리가 하는 대리 여행은 다양한 사람들의 삶, 바람이 얽혀서 단순한 여행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다. 직접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의 간절함과 오카에리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다정함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로 이토록 무해한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텟페키 사장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는 광고주 에츠코 회장의 대리 여행 의뢰는 마지막 오카에리의 결단까지 의외와 감동의 여정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성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누구보다 즐기며 하고 있었던 오카에리는 대리 여행을 통해 오히려 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 그리하여 성공해서 돌아오라던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비로소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와의 통화에서 '돌아가도 될까?'라고 묻는 오카에리의 물음에 힘껏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은 마음이 든 건 나만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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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하버 ㅣ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타나 프렌치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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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하버』 역시 뉴욕 타임스 선정 21세기 최고의 스릴러 50선 중에서 보고 골랐는데 작가 이력을 읽으면서 보니 전에 읽었던 『시크릿 플레이스』의 작가였고, 작품 역시 같은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에 속하는 것이었다. 『시크릿 플레이스』보다 이전에 출간된 소설로, 개인적으로는 타나 프렌치의 다른 작품 말고 이 작품이 선정된 이유가 궁금했다.



더블린 살인수사과의 베테랑 케네디 형사가 신입인 커런과 함께 부동산 경기 침체로 몰락한 주택단지 '브라이언스타운'에서 벌어진 스페인 가족의 몰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다루는 이 소설은 솔직하게 말하면 앉은 자리에서 쭉 읽어나가는 게 쉽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네가 정의하기에 달렸어. 리치, 너도 봤듯이 내게 냉정한 새끼란 제니퍼 스페인의 눈을 똑바로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 미안합니다, 부인. 가족을 살육한 자를 잡지 못할 거 같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만드느라고 너무 바빴거든요. 나중에 보죠. 그래놓고는 집에 총총 돌아가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하고 푹 자는 거지. 나는 그런 짓은 못 해.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과정에서 사소하게 냉정한 짓을 해야 한다면 난 그렇게 할 거야."

- 『브로큰 하버』 中 p.261


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고 싶은, 그리고 그만큼의 기대를 받고 있는 케네디 형사는 신입과 함께 수사하기에 증거, 용의자, 관련자를 다루면서 그 방법에 대해 꼼꼼하게 교육하는 것도 잊지 않는데 그게 읽는 사람까지 같이 훈련받는 느낌을 준다. 결과적으로는 이 때문에 흥미진진하다기보다는 숨이 막힌달까.

배경이 되는 '브라이언스타운'은 케네디 형사의 어린 시절 자살한 어머니와도 연관된 '브로큰 하버'의 장소인 데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동생 디나까지 등장해서 수사에 몰두하면 할수록 그의 피로감과 심적인 불편감도 고조된다. 예상보다 잘해낸다는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처음 합을 맞추는 커런 형사의 능력치도 불안 요소였다.


대체 커런 형사는 왜 그랬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크게 드는 의문이다. 그의 망설임은 누구에게도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사건을 해결하려는 케네디 형사에게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니퍼 스페인에게도, 그리고 주요 용의자인 코너에게도… 그냥 케네디 형사가 코너의 집을 수색할 때 느꼈던 쎄함이 맞았다는 거 알려주려고 그랬던 것인가?

이전에 읽었던 『시크릿 플레이스』처럼 이 작품의 인물들도 진짜 소통을 하지 못한다. 속 사정은 감추고,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피하고 마음속에 담는다. 스페인 가족을 누구보다 아꼈던 코너가 차라리 처음부터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파산 지경이었던 제니퍼와 패트릭이 자신들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면, 증거를 발견했던 순간 커런이 케네디와 공유했다면, 이 3가지 중에 하나라도 이루어졌다면 결말에서 누구 하나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시크릿 플레이스』가 더 좋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스릴러 50선에 선정된 이유를 굳이 찾아보자면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유지되는 심리적인 서스펜스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게 읽는 사람을 더 어렵게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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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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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과 의사 데이비드 벡은 8년 전 사랑하는 아내 엘리자베스를 잃었다. 당시 머리에 입은 부상과 마음에 남은 깊은 상처로 그저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벡에게 어느 날 의문의 메일이 도착한다. 발신자가 불분명한 메일은 오직 아내와 둘이서만 공유했던 비밀 단어들로 쓰여 있고, 약속된 시간에 맞춰 클릭한 링크에서는 그리운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스트리밍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휩싸인 벡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는 메일 속 경고에도 누나의 파트너인 쇼나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데 쇼나는 영상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때마침 8년 전 사건 장소에서 시신 2구와 범행 도구인 야구방망이가 발견되고, 경찰과 FBI는 이미 체포되어 복역 중인 연쇄 살인범 대신 벡의 범행을 의심한다.


뉴욕 타임스 선정 21세기 최고의 스릴러 50선에서 발견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할런 코벤의 작품 중 이 작품이 선정된 이유가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명성대로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초반에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가는 벡의 답답한 상황에 몰입했고, 중반 이후부터는 끝없이 위협받는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 과연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타이리스가 플로리다로 내려갔는지, 티제이와 라티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쇼나와 린다는 재결합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어린 아들, 마크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니까.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

-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中 p.428


결말에서 주인공 벡 외에 사건에 얽힌 다른 사람들의 안위와 후일담은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위의 문구를 발견했을 때 마치 작가가 내 속마음을 읽고 있는 거 같아서 움찔하고, 설마 정말 얘기 안 해 주는 건가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주인공 커플 외의 다른 사람들의 엔딩은 없었다.

아들 티제이의 병을 제대로 진단한 벡을 은인처럼 여기는 마약상 타이리스, 사랑으로 가정을 꾸리고 함께 아이를 키우지만 권태와 평온, 그 사이 어디쯤에서 위태로워 보이는 쇼나와 린다 등... 8년 전 사건의 주범들이 워낙 크고 강력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고 엘리자베스가 없어진 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족들 모두를 도청하고 감시할 정도로 치밀한 데다가 엄청난 능력치의 해결사 에릭 우까지 한패라 결말까지 벡과 관계된 모두가 괜찮을 수 있을지, 그들의 행복을 놓치지 않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얄궂은 작가는 안 알려주겠단다.

억만장자 그리핀 스코프의 거대한 그늘에는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호이트, 그리고 벡의 아버지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베테랑 형사인 아버지, FBI인 삼촌을 두고도 엘리자베스의 사건이 꼬일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이 사단의 출발 같은 벡의 아버지, 스티븐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던 호이트가 문제를 해결하고 사위인 벡의 어두운 비밀까지 짊어진 건 어쩌면 '결자해지'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난 벡이 계속 괜찮았으면 좋겠다. 몰랐던 장인과 아버지의 실체를 알았으니 브랜던의 죽음에 대한 마음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싶다. 어쨌거나 그 일은 자신과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최선이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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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 SF 미스터리 ㅣ 나비클럽 소설선
천선란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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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상상력의 SF를 배경으로, 찰나의 반전으로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는 미스터리의 향연을 통해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장르적 쾌감을 즐기시기를 바란다.

- p.304 기획 후기 中


9명의 SF, 미스터리 장르 작가들의 단편 모음인 『2035 SF 미스터리』. 이전에 작품을 읽어 본 작가들도 있어서 여러 가지로 기대가 되었는데 다 읽고 나니 기억에 남는 건 새롭게 접한 작가들의 단편이었다. 이런 게 또 앤솔로지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 아무도 모르는 죄의 무거움 - 「고난도 살인」

메타버스에 대한 투자로 부자가 된 순석은 나날이 발달하는 과학 기술 덕분에 해결되는 미제 사건들을 보고 혈육을 만들지 않기 위해 결혼, 연애까지도 포기하고 살고 있었다. 이대로 살면 어려운 시절에 저절렀던 범죄는 그대로 묻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가 남긴 오래된 사진 속 육촌 형제의 발견은 그에게 엄청난 공포를 선사한다. 육촌 형제인 성준이 교도소에 가거나 DNA 검사를 받아 혈육 찾기라도 시도하면 미제 사건의 DNA와 대조를 통해 본인의 평온한 일상도 끝난다는 데 생각이 미친 순석은 성준을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기로 하는데...

실제로 친인척의 DNA를 통해 해결되는 범죄를 본 적이 있어서 소재 자체를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설마설마하던 예상이 맞아들었던 반전의 순간에는 웃음이 났고, 다시 머리를 굴리는 순석에게 해피엔딩이 올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용케 과거의 범죄를 들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면 좀 착하게라도 살지. 과거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게 당연하다고 보면 순석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건 필연적일 수도 있겠다.

순석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메타버스 속에서와는 사뭇 다른 실생활의 모습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가상현실 속의 나를 실제와 얼마든지 다르게 꾸며낼 수 있기에 이것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쓰이는 댓글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 그럴만했던 죽음 - 「억울할 게 없는 죽음」

규나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동생 규빈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엄마의 등쌀에 한겨울에 사람들이 꺼리는 난민촌을 방문하게 된다. 자신을 스토킹하던 직장 상사가 일으킨 사고로 의수와 의족을 장착한 채 평생의 꿈도 잃게 된 규나보다 늘 아들인 규빈이 우선이었던 엄마는 단순 사고라는 경찰의 말을 믿지 않는데... 난민촌에서 만난 흥신소 할머니와 청년은 규나에게 예상치 못한 다정한 환대를 건네고, 규빈이 협박 받고 있다고 얘기하며 살인 청부를 문의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건 세상 낙담할 일만 남은 거 같은 규나가 보여주는 안정감 때문이었다. 스토킹을 당해 사지가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는데 그게 업무상 과실이라고 주장했던 피의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게다가 엄마라는 사람은 규나가 팔다리를 잃어 생긴 돈으로 아들 규빈을 어학연수 보내고, 규빈의 죽음에 계속 한탄하며 몸이 불편한 딸이 기어코 택시 기사들도 꺼려 하는 난민촌으로 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흥신소 할머니의 말처럼 규나는 규빈과는 달랐다. 단순히 태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규빈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이 바로잡을 수 있는 여지까지 고민할 줄 알았다. 이에 비해 덩치 큰 백수에 툭하면 시비에 휘말리던 규빈은 사고로 죽은 게 다행이지 않을까?


| 일급 AI 휴먼의 등장 -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한 선택」

깨끗하고 풍족한 환경의 제네시스 돔, 그 안의 생활자와 그 밖의 생활자로 구분되어 있는 세상. 일급 탐정 채휘는 잃어버린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난민이라고 주장했던 의뢰자 찬카가 사실 초상위 클래스 제네시스 그룹의 일원인 걸 알아챈 채휘는 의뢰 수락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찬카와 함께 다니는 AI 휴먼 구잔의 칩 속에 감시 코드가 있었던 걸 발견한 이들은 난민 막사의 취재진 중 감시자를 찾아 딸의 납치범이 누구인지 알아낸다.

마지막 채휘가 자신의 정체를 자각하는 부분 덕분에 이 이야기가 한층 흥미롭게 느껴졌다. 의뢰를 받고 일행과 같이 난민 막사로 가면서 난민들의 현실, 그들을 돕기 위해 찬카와 친구들이 진행하고 있는 연구, 그리고 그 연구의 상용화를 막는 인간의 욕심까지 보고 들은 채휘가 결국 깨달은 본인의 정체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더불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 선택하는 채휘의 모습까지, 초반에 탐정물로 생각했던 나는 전혀 다른 장르로 전환된 거 같은 후반부가 기억에 남았다.



위에서 언급한 3편을 포함해서, SF와 미스터리 어느 쪽의 팬이더라도 즐겁게 읽어낼 수 있는 9편의 작품이었다. 수록작 중 천선란 작가의 「옥수수 밭과 형」, 황세연 작가의 「고난도 살인」은 드라마화가 확정되었다고 하니 영상으로 구현될 모습도 기대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앤솔로지의 기획 후기 부분에 내가 좋아하는 랜달 개릿의 다아시경 시리즈가 언급되어서 좋았다. 행복한 책읽기에서 출간된 3권의 책을 끝으로 더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쉬운데 SF와 미스터리 팬이라면 요 작품도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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