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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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에서 쇼걸을 거쳐 공연 기획자로 활약하고 있는 티나는 자신의 커리어에 전환점이 될 골든 피라미드 호텔의 천만 달러 예산의 쇼, 「매직!」의 개막을 앞두고 있다. 1년 전에 아들 대니를 사고로 잃고 남편과도 이혼한 그녀는 압박감 탓인지 대니의 환영과 꿈에 시달린다. 급기야 대니의 방에서 '죽지 않았어'라는 글씨를 발견하고 전 남편 마이클의 장난으로 생각하고 찾아간다. 카지노 딜러로 일하는 마이클은 대니의 죽음과 관련해서 벌어진 일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고, 기분만 상한 채로 사무실로 돌아온 티나는 직원 앤절라가 가져다준 서류에서 다시 대니가 죽지 않았다는, 도와달라는 글씨를 발견하는데...

매3책 첫 번째 도서인 『어둠의 눈』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역주행 중이라고 한다. 이야기 속에 '우한-400'이라는 바이러스가 등장하기 때문인데 사건의 발단은 이 바이러스가 맞기는 하지만 바이러스가 주인공인 소설은 아니다. 이 작품의 메인은 어머니인 티나, 그리고 분노와 의심에서 확신으로 바뀐 아들의 생존에 위해 거침없이 직진하는 모정의 스펙터클한 여정이다.

 

 

첫 장부터 바이러스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던 나는 중반까지도 대체 바이러스와 대니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해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 바이러스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40년 전 '코로나19'를 예견한 소설'이라는 문구에 너무 연연해하고 있었던 거다.

지금 무서운 이유는 자신이 대니를 찾아내고도 혹시 구해내지 못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아이가 어디 있는지 찾는 과정에서 자신과 엘리엇이 죽을 수도 있었다. 대니를 찾아내 구하려다 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운명의 여신이 저지르는 고약한 속임수리라. 운명의 여신이 그 풍성한 소맷자락 속에 얼마나 고약한 속임수를 많이 담아두었는지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죽을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 『어둠의 눈』 中 p.285

대니와 티나의 진정한 적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바이러스는 대니를 이길 수 없었다. 문제는 바이러스가 이길 수 없는 대니를 이용해서 바이러스에게 이기는 방법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바이러스가 대니를 이길 수 있는가까지 알아내려고 연구라는 이름의 잔혹행위를 진행하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었다. 인간이라는 종으로 취급받고 싶으면 지켜야 되는 선이 있는 거다. 현실에서도 그 선을 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인간 취급의 마지노선이라도 천명해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떤 이는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취약한 부분들 봤다고도 하고, 그 나라 국민들의 국민성을 문제 삼기도 한다. 모두 나름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다만, 여행 때문에 가입했던 카페들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분란을 보면서 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우리 모두 각자의 가장 취약하거나 치졸한 부분을 드러낸 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드러낸 건 바로 자기 보존 본능, 생존 욕구 때문이 아니겠는가.

 

"단지 살인이 즐겁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면, 아니 책에 나온 괴짜 혁명가들처럼 오로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야만적인 거죠…… 미쳤거나. 하지만 당신이 한 일은 아예 달라요. 자기 보존 본능은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강력한 욕구라고요.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예요. 필요하다면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살아남아야 해요."

- 『어둠의 눈』 中 p.347

"… 적이 무섭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과 똑같은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건 결국 전쟁에서 지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 『어둠의 눈』 中 p.434

바이러스가 무섭다고 우리가 바이러스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바이러스보다 나은 존재여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답게 바이러스와 싸우고 이겨내면 되는 거다. 바이러스가 무섭다고 서로 싸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 또한 어려운 시기에 서로를 이용하려는 것도 인간이 할 짓은 아니라는 것을 이 소설도 알려주고 있는 거 같다.

티나의 여정만큼이나 스토리도 거침없이 직진하는 구성이다. 그 직진하는 이야기 속에서 액션, 로맨스까지 군더더기 없이 담아내고 있어서 역시 스티븐 킹과 함께 서스펜스의 양대 산맥이라고 불릴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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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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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빌려온 책 중에 정말 두꺼운 3권 중에 한 권이다. 오래 걸릴 거 같았는데 읽기 힘든 스타일은 아니어서 페이지 대비 빨리 읽었다.

 

 

지금부터의 감상은 많은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 작가들 작품에 많이 보이는 내가 공감하기에는 너무 먼, 그들의 DNA에 흐르는 거 같은 낭만 기류에 기인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원예가 가브리엘이다. 그는 어느 저녁 파리 식물원의 진화 전시관에서 두 아이와 함께 그곳을 찾은 빨간 후드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운명처럼 그녀에게 빠져든 그는 기억에 남은 두 아이의 이름을 발판 삼아 주변의 도움과 끈기로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 살고 있는지 알아낸다. 가정까지 버린 가브리엘은 오랜 세월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와 그의 두 연인, 앤과 클라라의 조언과 코치를 통해 어렵게 찾아낸 엘리자베트와 사랑의 전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유독 프랑스 작가 작품에서 많이 보이는 이런 혼외 사랑에 대한 한없는 낭만과 응원의 느낌은 나만의 착각인 걸까? 운명 같은 인연,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뭐 그게 잘못은 아니니까... 그런데 운명의 연인을 만났다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니지 않은가 싶은 탓에 내 마음은 소설 속 인물들마냥 이 전설의 사랑 기류에 마음껏 휩쓸려 주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엘리자베트는 가브리엘에게 남편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힌다. 사랑과 그리움으로 늘 목마른 그에게 허용되었던 것은 은밀한 통화와 첩보 작전 같은 만남, 외교관인 엘리자베트가 벨기에 파견 근무 나갔을 때 그곳에서 1년간 함께 한 생활이었다. 아, 하나 더 있다. 철저한 계획 하에 그녀가 낳은 가브리엘의 아들 미겔, 절대 죽을 때까지 진짜 아버지를 알지 못할 미겔... 소설이니까, 그래 맞다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 속 전설의 사랑 -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랑을 그렇게 불러줘야 하나 싶다 - 이라는 게 이렇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기욤 뮈소의 『아가씨와 밤』, 에밀리오 살가리의 『산도칸 몸프라쳄의 호랑이들』이 떠올랐다. 사랑을 위해 거침없이 직진하는 가브리엘에게서 산도칸이, 불륜으로 아이를 낳아 이미 다른 남자와 이룬 가정에서 아무렇지 않게 키우는 모습에서 『아가씨와 밤』의 토마와 막심이 생각났다. 아, 정말 얼마 전에 읽은 모파상의 『삐에르와 장』도 이런 설정이다. 공교롭게도 기욤 뮈소, 모파상도 프랑스 작가다. 유럽에서는 사생활과 일은 별개라서 불륜이든 치정이든 그런 문제가 있어도 일에서 프로페셔널하면 크게 개의치 않는 사회 분위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는데 작품으로 막상 접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그들과 사회적, 문화적 갭이 큰 사람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영화 개봉도 어려운 모 감독도 그렇게 유럽에서는 계속 상도 주고 좋아하나 보다.

하나같이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의 사랑을 응원하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참 낯설다. 운명의 사랑을 만났다고 가정을 버리고 새롭게 살겠다는 지인에게 응원을 보낼 수 있기는 할 거 같은데 어느 쪽이든 지금의 가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렇게 하겠다 - 이건 기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단순하게 말해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 는 데에는 나는 응원이 아니라 정말 적나라하게 팩트 폭격이나 할 거 같으니 말이다.

어릴 때부터 작가를 꿈꾸었다는 저자는 참 다양한 직책을 맡아 사회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 덕에 그의 다양한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에 그가 했던 활동들을 입혀 더 큰 생동감을 만들어 내는 거 같았다. 읽다 보면 작가가 가진 여유, 유머러스함과 박학다식함이 느껴진다. 역자는 작가가 그려낸 공간들에 매력을 느끼고 가브리엘의 행로를 따라 작품 속에 언급된 정원들을 두루 찾아가 보았다고 하는데 그런 마음이 들만하다. 이제 다음에 만날 전설의 사랑은 좀 다른 모양새이길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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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당 오가와 - 오가와 이토 에세이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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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유명한 『달팽이 식당』의 저자 오가와 이토는 일 년의 일상을 일본과 독일의 베를린을 오가며 보낸다. 이 책은 『츠바키 문구점』을 집필할 당시 기록한 1년간의 일기로 일본의 도쿄, 독일의 베를린, 그리고 출장으로 간 라트비아 등에서 보낸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디에서 지내던 맛있게 먹기 위해 요리를 하고 반려견 유리네의 건강과 미용을 신경 쓰는 등 정말 소소한 일기구나 생각하며 읽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옮긴이처럼 나도 저자를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었고 만나면 어색함 없이 반갑게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남편, 반려견과 함께 하는 일상의 이야기가 뭐가 특별할까 싶지만, 그 안에 있는 머물거나 방문했던 곳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감상 등이 공감과 호기심을 만들어 내고, 때로는 조근조근 풀어내는 분노와 안타까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여행 중에 4일간 머물렀던 베를린에 대한 인상이 저자와 완전히 다른 부분이 참 신기했는데 처음에는 거주하는 것과 여행하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 도시 중 베를린에서 가장 불친절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역 안에서 중딩? 고딩?으로 의심되는 남자아이들 무리에게 놀림당하기도 하고, S반 안에서는 앞에 앉은 할머니가 레이저 나올 듯한 눈으로 계속 쳐다봐서 불편했었다. 게다가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 카페에서 아무리 요청해도 빌지를 가져다주지 않는 웨이터 때문에 나름 이게 인종차별인가 싶어 안절부절하기도 했다. 물론 흡연에 대한 문제나 도심 한가운데에 큰 공원이 있고 나무가 많은 게 좋고 부러운 것 등 저자에게 공감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여러 시련에도 단정적으로 베를린은 그래서 별로인 게 아니라 자신이 베를린에 익숙해져서 행동반경이 넓어져 더 다양하게 경험한 것이고 그래도 베를린이 좋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성숙한 자세가 나랑 제일 큰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일부 정치가들은 마치 자기 돈인 것처럼 세금을 쓴다. 부디 혈세라는 사실을 잊지 않길. 그리고 정치가는 우리 세금으로 고용했다는 것을 명심하고 일해주길 바란다.


- 『양식당 오가와』 中 p.39

어쨌든 나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다. 아무리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걸 깨달아서 너무 좋다.


- 『양식당 오가와』 中 p.57

일상의 이야기 속에서 저자의 정치, 역사, 원자력발전소 같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생각 등도 녹아 있다. 특히 우루과이의 전 대통령인 호세 무히카 씨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덕분에 나까지 잘 알지도 못하는 이 분의 팬이 될 거 같았다.

 

내년은 어떤 해가 될까? 베를린에서 일어난 테러는 정말 유감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일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베를린에 사는 사람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평소처럼 사는 것이 최고의 레지스탕스라고 생각한다.


- 『양식당 오가와』 中 p.193

소설로 만나는 작가와 에세이로 만나는 작가는 같은 사람이더라도 좀 다른 거 같다. 물론 다 그 사람 안의 모습이겠지만... 행동반경이 넓어져 만나는 새로운 베를린처럼 소설에서 반경을 넓혀 만난 오가와 이토라는 사람이 반갑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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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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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목을 보고 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라니... ^^ 단편 모음집인 이 책에 담긴 모든 작품이 다 그랬다. 제목만 봐서는 가늠이 안 되기도 하고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때로는 등장인물들도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접한 작가였는데 일상의 이야기를 일상적이지 않게 풀어내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헤어진 연인, 미국 사람과 결혼한 고모, 전 남자친구의 결혼에 진상 떠는 여동생, 돌아가신 어머니의 노랫소리를 들은 누나, 입원한 병원에서 소설가를 만난 소설가, 방화범으로 잡힌 남학생의 담임 등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만날 법한 사람들을 만나 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들은 애잔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한 번씩 옅은 미소를 짓게 만들기도 했다.

읽으면서 약간은 추리소설 읽는 거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제목에서 추측이 안되는 이야기들이, 또 초반부 진행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몇몇의 결말이 그런 느낌을 주는 거 같다. 그럼에도 그런 흐름이 이상하거나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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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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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걸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설명에 거의 모두 해당되어서 역시 나는 이런 사람이었어라며 새삼스러워했었다. 그래도 먹방도 한 번씩 보고,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은 흉내도 내보고 하니 먹는 거에 완전히 손놓고 있지는 않는데 그 정도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저자의 어머니와 할머니, 고모, 그리고 동네 할매, 아지매들과 나눴던 음식을 통해 그립고 포근하고 때로는 아픈 이야기를 담담하고 다정하게 들려주고 있다.

 

 

저자는 안동 임하라는 곳에서 음식 솜씨 좋기로는 최고인 어머니가 정성으로 손질하고 조리한 음식들을 오감으로 경험하며 성장했다. 거의 한 일가가 마을 하나를 이루는 시골이었던 그곳에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신선한 재철 재료들을 이용해서 다양하고 건강한 방법으로 음식을 만들고 아낌없이 나눴던 어머니와 할머니, 동네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똑같은 레시피의 음식이더라도 만든 이의 사정, 이야기가 담기면서 그 맛이, 모양이 그럴 수밖에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감정은 그리움이다. 어린 시절 먹었던 정성 가득했던 음식에 대한 그리움, 그 음식을 나누며 도란도란 즐거운 이야기가 오가던 소박한 마실에 대한 그리움, 이제는 많이 잊혀가는 정겨운 옛말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음식으로 기억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리움을 얘기하는 작가의 문체는 따뜻하고 정겹다.

저자가 언급한 시장이나 동네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과 인접하여 개인적으로는 한층 더 친근감을 느꼈고, 도시 스타일로 자라서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도 건강한 간식을 먹이겠다고 애쓰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나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냉동실에 가득한 나물들을 보며 그걸 보내준, 종손 며느리로서 우여곡절 많은 생을 살다간 고모를 회상하는 글에서는 살짝 울컥했다.

 

아침저녁 빈소에 상식상을 지어 바치는 시어른 삼년상이 끝나고 여든이 됐을 때 고모는 내게 말하셨다. "야야 살아보니 인상이 참 허쁘다."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라고 토로하신 후 고모는 다시 십 년쯤을 더 사셨다. 그 나머지 십 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세월이었다. 시어른 밥상을 차리는 대신 철따라 끊임없이 생겨나는 나물을, 곡식을, 양념을, 장아찌를, 김치를, 젓갈을, 부각을, 정과를 다식을 모조리 내게로 보내고 또 보내셨다.


-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中 p.87

 

아픔은 사람을 사무치게 만든다. 그리고 사무침은 사람을 의연하게 만든다. 그래서 임하의 아이들은 열 살만 넘으면 대개 의젓해졌다. 그 의젓함은 특히 여자들이 더했다.


-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中 p.17

 

사람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무언가가 자라는 데는 정성과 사랑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작가의 성장에 자양분이 된 어머니, 할머니, 고모,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의 정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 그 사랑과 정성에 남자 어른들은 한참 비껴 서 있다는 느낌은 참 안타깝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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