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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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는 외롭고 고달팠다. 일찌감치 부모 노릇에는 관심 없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상처받고 나름의 방식으로 애니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어머니, 불의의 사고로 생긴 상처, 그 상처 때문에 벌어진 야반도주, 약화된 자존감으로 인한 도피성 결혼, 그리고 지키지 못한 아기... 그러나 기적처럼 첫사랑 파울로와 재회하고 비로소 행복한 가정을 꿈꾸게 된다. 결혼식을 마치고 기분 좋게 호텔로 향하던 두 사람은 타이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톨버트를 도와주게 되고 궂은 날씨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행한 선한 일로 인해 다시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고에 휘말리게 된다.

 

 

애니는 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왔다. 부모님을 화해시키려던 초콜릿 때문에 아버지에게 빰을 맞았고, 그 일로 놀란 어머니는 애니를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참지 않고 아버지를 쫓아 버렸다. 사고를 당한 이후에 벌어진 야반도주로 친구들까지 모두 잃었고, 어렵게 다시 시작한 학교생활에서 유일한 친구였던 파울로는 이민 때문에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조산으로 안아보지도 못했던 첫아이, 그 아이 때문에 결혼했다며 혼인 무효를 주장했던 첫 남편 월트, 미워하기도 사랑하기도 했던 어머니도 암으로 그녀를 떠났다.

이런 애니가 행복해졌으면 하지만, 이 소설은 애니의 죽음을 예고하며 시작된다. 가장 행복한 결혼식 날, 죽음은 당연히 기대 밖에 있어야 하나, 그동안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로 애니는 너무나 행복한 순간임에도 기습적으로 엄습하는 불안감을 한 번씩 체감하는데 결국 그 불안감이 맞았던 것인지 그녀는 결혼식을 치른 다음 날, 천국에 이른다.

읽으면서 애니의 외로움, 고통, 두려움 등이 그대로 느껴졌으나 그렇다고 마냥 슬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애니는 천국에서 자신과 관련된 다섯 영혼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깨달음, 위로를 얻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며 실수투성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그저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불행하기만 하다고 느꼈던 순간,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었고, 미처 살피지 못한 희생과 넘치는 애정도 있었다.

 

 "우린 치유하기보다 상처를 안고 있으니까. 다친 날은 정확히 기억해도 상처가 아문 날은 누가 기억하겠니?"


-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 中 p. 176

 

슬픔, 상처 등 부정적인 기억이나 감정은 빨리 잊으면 좋으련만. 사람이라는 동물은 기쁨보다는 괴로움에 매달리게 태어났나 보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애니도 행복한 순간보다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에 자신의 마음 대부분을 내어주고 있어서 더 괴롭고 힘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느꼈을 때, 감정의 문을 닫고 일에 몰두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감정이나 사람 대신에 일에 있어서 실수하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시간이었다. 파울로를 다시 만나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게 되기 전까지 말이다.

이야기 안에서 애니 스스로가 실수라고 생각하는 경험들에 '애니, 실수하다'라는 타이틀이 계속 붙어있는 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읽다 보니 이 타이틀은 오히려 이게 실수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하거나 잘못했다고 느낄 때, 보잘것없다고 느낄 때, 그게 그저 그 순간의 기분임을 인지하고 그보다 나아지기 위해 내가 들이는 노력을 더 기억하라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천국에서 만난 다섯 영혼은 애니에게 실수나 잘못은 없다는 것- 누구나 살면서 만회하거나 보상하게 된다는 것 -, 그녀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했으나 그녀의 삶 속에 무수한 애정과 행복의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 우리 모두의 인생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그녀가 타인과 자신, 모두와 화해하며 평안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작가 미치 앨봄은 이 소설에서 다시 죽음을 통해 인생을 이야기한다. 애니와 다섯 영혼과의 대화를 보면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애니가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지만 말이다. ^^ 애니가 온전한 평온함을 얻은 순간에 왠지 나는 눈물이 났다. 슬픈 일이 휘몰아치는 부분들에서는 멀쩡하다가 비로소 모든 두려움과 상실을 그저 겪어내면 되는 것으로 담담하게 전하는 애니의 마지막 말에 울컥한 것이다. 천국이 어떤 모습일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만일 만나게 된다면, 애니가 겪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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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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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유니온에서 발견하고 계속 읽고 싶었던 책. 도시민들의 삶, 평범한 일상을 표현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7점에서 영감을 받은 17편의 단편소설을 엮은 책이다. 소재가 된 화가와 그 작품만큼이나 작가진도 탄탄하기 그지없어서 정말 정말 읽고 싶었다. 마이클 코널리,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스티븐 킹 등 추리나 스릴러, 미스터리 장르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모를 수 없는 작가들이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멋진 이야기로 탄생시켰다.

 

 

원래는 총 18 작품이 수록될 예정이었는데 한 명의 작가가 소설을 쓰지 못했고 그가 선택했던 그림 <케이프코드의 아침>은 표지가 되었다. 이 소설집을 출간한 문학동네에서는 로런스 블록이 서문에서 밝힌 아이디어대로 독자들을 대상으로 <케이프코드의 아침>에서 영감을 받은 18번째 소설을 위한 공모전을 열었고 총 8편의 수상작을 모아 e-book으로 만들었다. 거장의 작품이 거장의 작품을 부르고, 여기에 국경을 초월한 또 다른 작품이 더해진 여러모로 근사한 콜라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여보. 사람들이 영웅을 응원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기억하는 건 악당들이야."


-  「음악의 방」 中

해피엔딩을 좋아하지만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로든 실제로 기억에 오래 남는 건 좀 어둡고 알쏭달쏭 한 이야기인 건 사실인 거 같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주는 느낌이 있기에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기대할 때도 크게 밝은 이야기를 상상하지는 않았는데 다 읽고 나니 단편이기는 해도 결코 기억에 짧게 머물 작품들은 아니었다. 단 한 컷의 그림은 사랑과 전쟁, 귀여운 사기극, 잔혹한 범죄물, 짠한(?) 첩보물, 아련한 판타지 등의 한계 없이 다양한 이야기로 다른 옷을 입었다.

각 작품은 앞에 영감이 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먼저 배치되어 있다. 읽으면서 수시로 앞의 페이지로 돌아와 그림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곤 했는데 그림 속 인물을 작가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고 설정했는지를 그림을 보면서 떠올리면 그림의 느낌이 달라지기도 하고 안 보였던 디테일이 눈에 띄기도 해서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대비를 즐길 줄 알아야 해, 리프헨. 씁쓸한 것과 달콤한 것. 한 가지 맛이 다른 맛을 더 강하게 하거든. 이 세상이 그렇듯이 테이블에서도 그래.


-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 中

달콤함은 씁쓸함이 존재하기에 더 그 맛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의 다양한 이야기가 공존할 때 개별의 이야기가 가진 감성과 개성이 더 또렷하게 드러날 수 있다. 작가들이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바탕으로 창작한 이 작품집이 바로 그런 시너지 효과를 확실히 보여주는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밤의 사무실」이 가장 좋았다. 작품 전체를 감싸는 허무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마음에 콕 박힌 탓이다. 그림을 좋아하던, 작가들 좋아하던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둘 다 몰라도 상관없다. 그리고 읽다 보면 그림이 나에게만 하는 다른 이야기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 뉴욕에 갔을 때 방문했던 휘트니 뮤지엄이 이야기 속에 등장해서 반가웠는데 도통 그때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봤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서 슬펐다. 에드워드 호퍼 전시가 스위스 바젤의 미술관에서 오는 7월 말까지 열린다는 기사도 봤고 며칠 전에 찾아갔던 동네 서점에는 책장에 이 책의 표지인 <케이프코드의 아침>이 놓여 있어서 뭔가 인연이 있는 건가 싶은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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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 -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토리의 원칙
윌 스토 지음, 문희경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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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야기도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영향력이 전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는 재미도 없고 잘 와닿지 않았던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를 통해 흥미진진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로 새롭게 전달될 때도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는 걸까?

바로 그 차이점을 찾아가는 여정이 이 책 안에 있다.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에 관한 책은 많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많은 이야기들의 구성이 우리의 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기자이자 소설가인 저자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몇 가지 개념이 심리학자와 신경과학자들이 우리의 뇌와 마음에 관해 연구한 내용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뇌과학 기반의 글쓰기에 대해 연구해 왔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대부분의 매력적인 이야기는 변화를 암시하며 시작하고, 결함 있는 주인공을 등장시켜서 그는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며 주인공이 통제력을 잃는 사건에 휘말리다가 결국은 - 여러 가지 의미에서 - 통제력을 되찾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구성은 우리의 뇌가 집중력을 발휘하도록 자극하고, 주인공과 우리를 동일시하고 응원하며 일련의 고난과 사건을 거쳐 함께 답을 찾고 변화하고 성장하게 만든다. 결국 이야기는 우리의 또 다른 생인 셈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제한다고 믿지만 주변 세계와 사람들에 이해 끊임없이 변형된다. 차이가 있다면 이야기와 달리 인생에서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극적 질문이 끝내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 『이야기의 탄생』 中 p.167

  우리가 행동하고 싸우고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우리의 영웅 만들기 뇌는 끊임없이 우리가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처럼 사고하기를 바란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낙관주의와 운명이라는 착각으로 삶의 플롯을 밀고 나간다.


- 『이야기의 탄생』 中 p.234

읽으면서 잠시 뇌한테 그동안 스스로 사기를 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 그 결말들, 모두 인간의 뇌가 선호하고 추구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가는 유형이었다는 생각에 영 찜찜했다고 할까.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의 뇌가 따라가는 방향을 특별하게 거스를 능력치가 나에게 있을 리가 없으니 그저 계속 다양한 이야기들을 즐겁게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

인간의 뇌가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특정한 유형과 플롯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해가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계속 회자되는 여러 작품들이 예시로 인용되어 있는데 이미 접한 작품이 새롭게 보이기도 하고, 아직 보지 못한 작품은 독서 및 관람 욕구를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만 깨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만 갈등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만 음침한 생각과 씁쓸한 회한과 때때로 증오에 찬 자아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니며 우리만 두려운 것 또한 아니다. 이야기의 마법은 현실의 사랑이 범접하지 못할 방식으로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준다. 이야기는 어두운 두개골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한다.


- 『이야기의 탄생』 中 p.266

이야기는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우리를 연결한다. 같은 작품을 읽고 공감할 때의 기쁨은 크다. 그게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말이다. 이 책 덕분에 앞으로는 그런 감상에 대해서 좀 다르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 쓰기에 고민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글쓰기 강좌를 축소시켜 놓은 듯한 부록의 작법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어필할 수 있는 이야기의 구조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 무수한 작품들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어렵다면, 이제 새롭다고 우리의 뇌를 속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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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오페라
캐서린 M. 발렌티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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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대의 음악 축제인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유럽방송협회(EBUㆍEuropean Broadcasting Union) 회원국 가수들이 경쟁해 우승자를 가리는 음악제로 1956년에 처음 개최된 이후 매년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경연 대회이다. 올해도 5월 16일에 규정에 따라 작년 우승자의 출신국 네덜란드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었다. 매년 약 2억 명이 지켜본다는 이 대회가 취소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경연 장소로 예정되었던 로테르담의 공연장은 코로나19 환자들을 위한 임시 병원이 되었고, 이 대회를 기다리던 많은 팬들과 참가하려던 아티스트들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유럽방송협회 회원국 방송사들은 '유로비전 히트곡 듣기', '유로비전 다큐멘터리' 등을 방송하고 네덜란드 한 방송국에서는 'AI 송 콘테스트'를 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바치는 헌사 같은 소설이다. 각 챕터의 제목을 콘테스트의 출전 곡명에서 따올 정도로 열렬한 팬심을 작가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크게 관심이 있던 행사는 아니었는데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이 이야기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잘 알면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인 유럽연합에 대해서 잘 알면 역시나 더 좋겠다는 느낌도...

100회를 맞이한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는 처음으로 지구의 인간이라는 종을 참여시키기로 하고, 자신들이 작성한 리스트로 참가자를 모색하다가 사망자만 가득한 리스트 속에서 '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트 제로스'를 지구 대표로 확정한다. 일렉트로펑크풍 글램록 밴드였던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트 제로스'는 절정의 인기도, 내리막도 겪다 멤버였던 미라의 죽음 이후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의 납치되듯 가요제가 열리는 리토스트 행성까지 온 데시벨 존스와 오르트는 불안과 중압감을 느끼며 계속 마찰을 빚는다. 대회에서 꼴찌를 하면 해당 종족의 태양계는 최소 5만 년 동안은 은밀히 격리당하고 그들의 문화는 즉결로 전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는데 과연 두 사람은 무사히 지구와 인류의 문명을 지켜낼 수 있을까?

 

 

데시벨 존스와 동료 오르트의 모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스토리는 두 사람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가요제에 참가하는 행성과 그 종족들, 그리고 가요제의 연혁과 관련 에피소드들을 두루 살피며 흘러간다. 작가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 행성과 종족들이 유럽연합의 각 나라와 민족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투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가진 것에 진정으로 만족하는 않는 법이다. 말라깽이 올드 루투가 그 증거다. 그는 포장 음식을 데우듯 행성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었지만 그렇게 썩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생물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곧 갖게 될 것 같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 전이나 후에는 모두 다 괴물이 된다.


- 『스페이스 오페라』 中 p.189,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스물한 번째 없앨 수 없는 사실

정의는 너무 오래 걸려서 이루었을 때쯤에는 변질돼서 오래된 시체 같은 냄새가 난다. 정의는 잊어버려라. 그냥 독한 술 한 사발 쭉 들이켜고 멍청이들이 좀 적은 마을로 이사 가라.


- 『스페이스 오페라』 中 p.259~260,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다섯 번째 없앨 수 없는 사실

 

인트 행성의 유르트마크 종족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동화 작가인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99.9퍼센트 믿을 수 있고 종합적인 우주의 법칙들이 담긴 책으로 수시로 언급되는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없앨 수 없는 사실들』의 인용 문구들은 공감이 갔다.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는 데시벨 존스를 달래기 위해, 또 이전 가요제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정리하면서 한 번씩 등장하는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날카로운 문장들은 수많은 종족들 만큼이나 분산된 스토리 안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거 같았다.

데시벨 존스와 오르트에 집중하고 읽으면 다소 지루하고 정신없을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다. 100회나 되어서야 인간이라는 종을 끼워주기로 한 유서 깊고 전 우주적인 인기를 끄는, 게다가 우승자와 꼴찌를 둘러싼 무시무시한(?) 규정까지 있는 엄청난 경연 대회 말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좀 미안하지만, 데시벨 존스와 그 친구는 잠시 잊고 이 엄청난 가요제와 그 대회를 100회나 겪은 각 종족들을 중심에 두고 읽다 보면 좀 다르게 읽힌다.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을 '인류애'라고 한다. 문득 우주 전체 종족에 대한 사랑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궁금해졌다. 케셰트족 외외가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트 제로스'에게 보여준 게 바로 그런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각 종족의 이름이 있지만, 그들의 생김새나 데시벨 존스와 오르트가 인지한 대로 물고기플라밍고, 로드러너, 너구리판다 등등 한 캐릭터가 여러 다른 이름으로 쓰여 있다. 처음에는 다른 누군가가 또 등장한 건가 싶어서 앞 페이지를 넘겨보고 했는데 그냥 아까 옆에 있던 그 친구를 다른 이름으로 쓴 거였다. 어리둥절할 수 있는데 그냥 개의치 말고 읽어나가다 보면 정리가 된다. ^^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스 제로스'가 부른 「모든 게 그냥 완전히 엉망이 될 때가 있다」가 꼭 지금 이 시기에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든 건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지구가 멈춘 듯 해서이기도 한 거 같다. 모든 게 그냥 완전히 엉망이 될 때가 있지만, 로드러너의 말대로 자신을 믿고 목표를 이루는 것, 그저 그걸 한번 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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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죽였습니까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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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읽을 타임이 된 거 같아서 헌책방에서 사가지고 온 『아내를 죽였습니까』. 결국은 내 속만 터지고 말았다. 제목을 '속 터지고 싶으십니까'로 바꿔야 한다. 심리 스릴러라는 게 그런 부분이 있을 때가 있는데 이 작품은 정말 그 끝을 보는 거 같다.

로펌 변호사로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월터는 능력 있는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하는 부인 클라라와 숨 막히는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아름다운 집과 믿음직한 친구들, 경제적인 부까지 무엇 하나 아쉬운 것은 없지만, 사사건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부인 때문에 절친들과 척을 지게 되는 일이 빈번해지자 월터는 이혼을 얘기한다. 없는 여자까지 만들어 몰아붙이는 통에 싸우고 집을 비운 날, 클라라는 자살 시도를 하고 이혼 얘기는 또다시 유야무야 없던 일이 된다. 어떻게든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노력하던 월터는 아내를 죽이는 악몽까지 꾸게 되고, 위독한 장모님의 전보를 받고 병원으로 가던 아내는 실제로 벼랑에서 떨어져 시체로 발견된다. 무고한 월터는 사건 당일 알리바이와 숨겼던 몇 가지 사항들 때문에 계속 궁지로 몰리게 되는데...

 

 

『아내를 죽였습니까』 첫 챕터에는 실제로 아내를 죽인 키멜이라는 남자가 나온다. 나는 그래서 주인공이 키멜인 줄 알았는데 두 번째 챕터부터 등장하는 월터가 주인공이었다. 키멜이라는 남자는 정말 살인자지만, 월터는 아내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지만 그저 합법적으로 이혼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클라라와 살 때도, 클라라가 죽은 후에도 정말 속 터지게 답답한 행보만을 거듭했던 월터는 아무래도 범인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형사 코비와 호기심에 한 번 찾아갔을 뿐인 키멜과 얽히며 마지막 챕터까지 환장의 콜라보를 완성한다.

가끔 세상일이 내 뜻과는 상관없이 흘러갈 때가 있다. 그리고 가끔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도 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그래봤다', 뭐 이런 일도 있다는 거다. 월터의 문제는 그런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니 숨기고 감추다가 악수를 거듭한 거다. 주변 사람들은 월터를 의심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클라라와 사는 그의 고충의 이해하고 불쌍히 여겼으니까... 하지만 변호사인 월터는 작은 이야깃거리 하나에도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미리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달까?

읽는 동안 정말 너무 속이 답답해서 몇 번이고 책을 덮고 쉬었다가 다시 읽었다. 심지어 모두 사악한 클라라가 꾸민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녀가 언제 재등장할지 기다리기도 했다. 월터가 버렸던 신문 기사를 다시 스크랩북에 끼워 놓은 사람이 클라라고 그 기사를 본 순간, 이런 자작극을 떠올린 거라는 생각도 해 봤는데 다 아니었다. 바보, 답답이, 월터... 월터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코비가 키멜을 고문하는 장면에서는 너무 심한 거 같아서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그 시절에는 그랬다고, 작가가 당시 경찰에게 자문을 얻고 확인까지 받아 책을 판매했다고 하니 놀랍다. 이전에 거의 단편으로만 접했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유럽에서 훌륭한 심리소설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근데 다른 장편들도 이런 스타일이면 내가 자주 읽을 수 있는 작가는 아닐 거 같다. 너무 지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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