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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미스터리 유니온에서 발견하고 계속 읽고 싶었던 책. 도시민들의 삶, 평범한 일상을 표현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7점에서 영감을 받은 17편의 단편소설을 엮은 책이다. 소재가 된 화가와 그 작품만큼이나 작가진도 탄탄하기 그지없어서 정말 정말 읽고 싶었다. 마이클 코널리,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스티븐 킹 등 추리나 스릴러, 미스터리 장르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모를 수 없는 작가들이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멋진 이야기로 탄생시켰다.

원래는 총 18 작품이 수록될 예정이었는데 한 명의 작가가 소설을 쓰지 못했고 그가 선택했던 그림 <케이프코드의 아침>은 표지가 되었다. 이 소설집을 출간한 문학동네에서는 로런스 블록이 서문에서 밝힌 아이디어대로 독자들을 대상으로 <케이프코드의 아침>에서 영감을 받은 18번째 소설을 위한 공모전을 열었고 총 8편의 수상작을 모아 e-book으로 만들었다. 거장의 작품이 거장의 작품을 부르고, 여기에 국경을 초월한 또 다른 작품이 더해진 여러모로 근사한 콜라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여보. 사람들이 영웅을 응원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기억하는 건 악당들이야."
- 「음악의 방」 中
해피엔딩을 좋아하지만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로든 실제로 기억에 오래 남는 건 좀 어둡고 알쏭달쏭 한 이야기인 건 사실인 거 같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주는 느낌이 있기에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기대할 때도 크게 밝은 이야기를 상상하지는 않았는데 다 읽고 나니 단편이기는 해도 결코 기억에 짧게 머물 작품들은 아니었다. 단 한 컷의 그림은 사랑과 전쟁, 귀여운 사기극, 잔혹한 범죄물, 짠한(?) 첩보물, 아련한 판타지 등의 한계 없이 다양한 이야기로 다른 옷을 입었다.
각 작품은 앞에 영감이 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먼저 배치되어 있다. 읽으면서 수시로 앞의 페이지로 돌아와 그림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곤 했는데 그림 속 인물을 작가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고 설정했는지를 그림을 보면서 떠올리면 그림의 느낌이 달라지기도 하고 안 보였던 디테일이 눈에 띄기도 해서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대비를 즐길 줄 알아야 해, 리프헨. 씁쓸한 것과 달콤한 것. 한 가지 맛이 다른 맛을 더 강하게 하거든. 이 세상이 그렇듯이 테이블에서도 그래.
-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 中
달콤함은 씁쓸함이 존재하기에 더 그 맛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의 다양한 이야기가 공존할 때 개별의 이야기가 가진 감성과 개성이 더 또렷하게 드러날 수 있다. 작가들이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바탕으로 창작한 이 작품집이 바로 그런 시너지 효과를 확실히 보여주는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밤의 사무실」이 가장 좋았다. 작품 전체를 감싸는 허무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마음에 콕 박힌 탓이다. 그림을 좋아하던, 작가들 좋아하던 즐겁게 읽을 수 있고, 둘 다 몰라도 상관없다. 그리고 읽다 보면 그림이 나에게만 하는 다른 이야기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 뉴욕에 갔을 때 방문했던 휘트니 뮤지엄이 이야기 속에 등장해서 반가웠는데 도통 그때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봤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서 슬펐다. 에드워드 호퍼 전시가 스위스 바젤의 미술관에서 오는 7월 말까지 열린다는 기사도 봤고 며칠 전에 찾아갔던 동네 서점에는 책장에 이 책의 표지인 <케이프코드의 아침>이 놓여 있어서 뭔가 인연이 있는 건가 싶은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