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오페라
캐서린 M. 발렌티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유럽 최대의 음악 축제인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유럽방송협회(EBUㆍEuropean Broadcasting Union) 회원국 가수들이 경쟁해 우승자를 가리는 음악제로 1956년에 처음 개최된 이후 매년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경연 대회이다. 올해도 5월 16일에 규정에 따라 작년 우승자의 출신국 네덜란드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었다. 매년 약 2억 명이 지켜본다는 이 대회가 취소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경연 장소로 예정되었던 로테르담의 공연장은 코로나19 환자들을 위한 임시 병원이 되었고, 이 대회를 기다리던 많은 팬들과 참가하려던 아티스트들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유럽방송협회 회원국 방송사들은 '유로비전 히트곡 듣기', '유로비전 다큐멘터리' 등을 방송하고 네덜란드 한 방송국에서는 'AI 송 콘테스트'를 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바치는 헌사 같은 소설이다. 각 챕터의 제목을 콘테스트의 출전 곡명에서 따올 정도로 열렬한 팬심을 작가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크게 관심이 있던 행사는 아니었는데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이 이야기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잘 알면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모인 유럽연합에 대해서 잘 알면 역시나 더 좋겠다는 느낌도...

100회를 맞이한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는 처음으로 지구의 인간이라는 종을 참여시키기로 하고, 자신들이 작성한 리스트로 참가자를 모색하다가 사망자만 가득한 리스트 속에서 '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트 제로스'를 지구 대표로 확정한다. 일렉트로펑크풍 글램록 밴드였던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트 제로스'는 절정의 인기도, 내리막도 겪다 멤버였던 미라의 죽음 이후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의 납치되듯 가요제가 열리는 리토스트 행성까지 온 데시벨 존스와 오르트는 불안과 중압감을 느끼며 계속 마찰을 빚는다. 대회에서 꼴찌를 하면 해당 종족의 태양계는 최소 5만 년 동안은 은밀히 격리당하고 그들의 문화는 즉결로 전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는데 과연 두 사람은 무사히 지구와 인류의 문명을 지켜낼 수 있을까?

 

 

데시벨 존스와 동료 오르트의 모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스토리는 두 사람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가요제에 참가하는 행성과 그 종족들, 그리고 가요제의 연혁과 관련 에피소드들을 두루 살피며 흘러간다. 작가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 행성과 종족들이 유럽연합의 각 나라와 민족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투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가진 것에 진정으로 만족하는 않는 법이다. 말라깽이 올드 루투가 그 증거다. 그는 포장 음식을 데우듯 행성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었지만 그렇게 썩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생물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곧 갖게 될 것 같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 전이나 후에는 모두 다 괴물이 된다.


- 『스페이스 오페라』 中 p.189,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스물한 번째 없앨 수 없는 사실

정의는 너무 오래 걸려서 이루었을 때쯤에는 변질돼서 오래된 시체 같은 냄새가 난다. 정의는 잊어버려라. 그냥 독한 술 한 사발 쭉 들이켜고 멍청이들이 좀 적은 마을로 이사 가라.


- 『스페이스 오페라』 中 p.259~260,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다섯 번째 없앨 수 없는 사실

 

인트 행성의 유르트마크 종족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동화 작가인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99.9퍼센트 믿을 수 있고 종합적인 우주의 법칙들이 담긴 책으로 수시로 언급되는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없앨 수 없는 사실들』의 인용 문구들은 공감이 갔다.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는 데시벨 존스를 달래기 위해, 또 이전 가요제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정리하면서 한 번씩 등장하는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날카로운 문장들은 수많은 종족들 만큼이나 분산된 스토리 안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거 같았다.

데시벨 존스와 오르트에 집중하고 읽으면 다소 지루하고 정신없을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다. 100회나 되어서야 인간이라는 종을 끼워주기로 한 유서 깊고 전 우주적인 인기를 끄는, 게다가 우승자와 꼴찌를 둘러싼 무시무시한(?) 규정까지 있는 엄청난 경연 대회 말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좀 미안하지만, 데시벨 존스와 그 친구는 잠시 잊고 이 엄청난 가요제와 그 대회를 100회나 겪은 각 종족들을 중심에 두고 읽다 보면 좀 다르게 읽힌다.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을 '인류애'라고 한다. 문득 우주 전체 종족에 대한 사랑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궁금해졌다. 케셰트족 외외가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트 제로스'에게 보여준 게 바로 그런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각 종족의 이름이 있지만, 그들의 생김새나 데시벨 존스와 오르트가 인지한 대로 물고기플라밍고, 로드러너, 너구리판다 등등 한 캐릭터가 여러 다른 이름으로 쓰여 있다. 처음에는 다른 누군가가 또 등장한 건가 싶어서 앞 페이지를 넘겨보고 했는데 그냥 아까 옆에 있던 그 친구를 다른 이름으로 쓴 거였다. 어리둥절할 수 있는데 그냥 개의치 말고 읽어나가다 보면 정리가 된다. ^^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스 제로스'가 부른 「모든 게 그냥 완전히 엉망이 될 때가 있다」가 꼭 지금 이 시기에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든 건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지구가 멈춘 듯 해서이기도 한 거 같다. 모든 게 그냥 완전히 엉망이 될 때가 있지만, 로드러너의 말대로 자신을 믿고 목표를 이루는 것, 그저 그걸 한번 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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