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새벽에 깼다. 나는 울고 있었다. 축축해진 수면 안대를 벗고 벽에 기댔다. 눅눅하고 차가웠다. 내가 운다는 사실도, 등으로 느끼는 벽의 촉감도 낯설었다. 한쪽 벽에 나란히 세워둔 책장들이 파도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문고리를 잠가 세계로부터 유폐된 내 방에서 불안과, 불면과, 우울만이 익숙했다.

 

꿈에서 P의 트위터가 다시 열려있었다. 죽은 그 대신 그의 아내가 그를 가장해 글을 올리고 있었다. 링크한 유투브 동영상으로 그가 가르치던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낯익은 자들도, 그렇지 않은 자들의 모습도 있었다. 일상적인 풍경이었는데, 왜 그게 그렇게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방에는 시계가 없어서 몇 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 불빛으로 잠을 깨고 싶지 않아서 한참 웅크리고 있었다. 작은 짐승처럼 보였을까.


 

#. 2

 

사실, P는 생전에 트위터 같은 걸 운영한 일이 없다. 나도 아이디 하나를 잃어버린 이후에 트위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그 세계에서 내 트친들의 면면이 화려했는데 그 중에는 춈스키와 리처드 도킨스도 있었다. 사샤 그레이도 있었다! (수퍼 내츄럴에서 딘 윈체스터가 좋아하는 포르노 배우다. 앙칼진 고양이처럼 생겼다.)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는데, 그 뿐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가장 정제된 이야기는 책과 영상으로 볼 수 있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다가 비번을 까먹고 말았다.

 

며칠 전에는 다음에 접속이 안 됐다.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나.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 백번을 입력해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번호, 핀번호 비밀번호 찾기로도 실패. 고객센터에서도 영문을 모르겠단다. 아이디는 존재하는데 개인정보가 다르다고. 해킹 가능성을 말하자 그럼 사이버 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하는 게 낫단다. 몇 가지 옵션이 있긴 했지만 불법에 가깝고, 무엇보다 영 귀찮다. 그래서 17년을 넘게 사용된 나의 메일 계정은 저 세상으로 사라졌다. 입력된 친구들의 주소록도, 설문조사 패널로 참여하던 정부기관 연락처도, 재즈피아노 같은 추억의 카페들도 접속할 길이 없어졌다.

 

영원한 Log Out.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빌 게이츠는 죽음을 log out으로 표현했단다. 나의 죽음도 이렇게 불현듯 찾아오게 될까. 아마 그럴 것이다.


 

#. 3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의 입을 빌려 "죽음이란 삶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내가 죽음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것은 바로 그 구절의 영향이었다.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 체험’.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같은 본격적으로 죽음을 다룬 저작들은 죽음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줬고, 유학의 사상가들이나, 불교의 몇몇 경전들, 스타니슬라프그로프 같은 의학자들에게도 힌트를 얻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죽음에 익숙해질 수 있게 도와준 것은 꿈이었다. 꿈은 내게 수 없이 많은 죽음을 시뮬레이션 해 줬다. 남의 죽음도, 나의 죽음도. 나는 꿈에서 남의 죽음보다 나의 죽음에 관대한 편이었다. 꿈은 간혹 내게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했는데 꿈이 내게 죽음과 견주어 선택하게 하는 것들은 명예나, 대의나, 자존심 같은 관념적인 것들, 혹은 다른 누군가의 목숨처럼 소중한 것들이었고, 나는 그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주 내 목숨을 버렸다.

 

닥터는 이 점을 자살충동과 연관시키곤 했다. (물론 그렇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쉽게 알 수 있었다.)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삶의 의지마저 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녀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누군가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낮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하긴, 열여덟 살 때였던가. 내가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우편으로 스티커를 받아왔을 때 가족들은 식사 자리에서 그걸 자랑하는 내 모습에 깊은 빡침을 느꼈다. “내 말 좀 들어봐, 죽음이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까지 말 했을 때, 전례 없는 속도로 밥숟갈을 휘두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하다.

 


#. 4

 

불을 켜고, 책을 한 권 빼 왔다.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요즘 페미니즘 관련도서가 잘 나가는 모양이다. 듣자하니 ‘이갈리아의 딸들’까지 순위권으로 올라왔다고. 페미니즘 단체에서는 일베에게 공로상이라도 줘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은 영, 정이 가지 않는다. 어감이 아름답지 않다. 여덟 명의 필자들의 글을 엮었는데 임옥희 선생이나 정희진 선생처럼 반가운 이름들도, 시우, 나라, 루인처럼 새로운 필자들의 이름도 보인다.

 

책은 전반적으로 기획에 실패한 느낌을 준다. 책의 제목이 필자들의 논점과 관점을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의 윤보라, 임옥희, 정희진이 보수적인 페미니즘 진영(다른 표현 없나)을 대변한다면, 글과 뒤의 시우, 루인, 나라는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성 소수자 입장을 대변한다. 뒷쪽 양반들은 앞쪽 양반들의 젠더 이분법적 페미니즘 논의에 불만이 많다. 이들이 보기에, 마치 가부장제가 여성을 소외시켰듯 기존 페미니즘 진영은 성 소수자들을 소외시켜왔기 때문이다. 책은 비록 기획에는 실패했으나, 충돌하는 생각들이 불꽃을 만들어 내듯, 덕분에 더 반짝반짝해졌다.

 

임옥희 선생의 ‘주체화, 호러, 재마법화’는 성실하지만 식상하다. 학문적으로 보기엔 범상하고, 그렇다고 대중적이지도 않다.

 

정희진 선생의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에서는 여성혐오를 보는 시각 뿐 아니라 젠더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해 강한 피로감이 느껴진다. “여성혐오에 대응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은 그답지 않다. 그녀가 '여성학 연구가'에서 '평화학(?) 연구자'로 타이틀을 바꾼 것도 같은 맥락일까. 뭐, 이해한다. 흔한 일이다.

 

기성학자들은 지지부진했으나 새로운 필자들의 펜 끝이 매섭다. 특히, 루인은 ‘트렌스 젠더 퀴어, 바이섹슈얼 그리고 혐오 아카이브’에서 기존 페미니즘 논의에서 소외된 바이섹슈얼의 문제를 당돌하게 제기한다. “임옥희가 비非트렌스 페미니즘의 문제를 트랜스젠더 퀴어에게 덮어씌웠듯..”

새로운 필자들의 문제제기가 편협한 젠더 이분법과 교조적 습속에 갇힌 페미니즘의 한계를 확장시키기를 기대한다. 물론 쉽지 않은 투쟁이 될 것이다.


 

#. 5

 

B는 진중권과 페페페 논쟁에 대한 글을 읽어보라고 했다. 받은 링크에서는 더 긴 얘기였던 것 같은데 그걸 찾기는 귀찮고. (http://pinobook.com/hot1/74320)

 

진중권의 히스테릭한 반응이 지나치게 보이면서도, 또 어떤 맥락인지 짐작이 가기에 이해한다. 페페페의 유치함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일베니 뭐니 하는 애들이 세상을 15년쯤 후진시켰으니, 15년 전 쯤 페미니스트들의 덜 여문 사고방식이 튀어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때, 페미니즘을 말하는 자들은 참 절박했다. 그래서 논쟁이 필요한 자리를 공감으로 대체했고, 근거가 있어야 할 위치에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소중했기에 반론대신 박수를 받았다. 한국의 페미니즘 논의에 젠더 이분법적이고, 대결적 관념이 배태된 것은 아마 이 시기의 영향일 것이다. 너무도 협소한 외연을 급성장 시킨 부작용이다.

 

이제, 페미니즘은 외연을 넓혀서 대중적인 것이 되었다. 누구나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문제는 덩치 뿐 아니라 문제까지 함께 확장되었다는데 있다. 게다가 계몽과 극성맞은 교조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포지션을 잡지 못했던 것이 오늘날 페미니즘에 대한 역풍을 가져 온 것으로 보인다.

 

월장사태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이슈파이팅이라면 진창을 마다하지 않았던 역전의 용사 '진병장'도(그땐 그렇게 불렀다) 그들의 교조성에 대해 학발을 뗀 것일 게다. 젠더문제에 남근처럼 꼿꼿한 깃발을 꽃아 놓고 모든 의제를 선점했다고 믿는 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감하는 것이 익숙하다고 모든 문제를 감정적인 것으로 치환하고, 그 긴 글에서 "페미니즘은 관점의 문제다"한 구절을 찾아내 그게 전부인 것처럼 인용해 놓는 모습은 사려 깊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단지 분노할 것인가, 아니면 정의로울 것인가.

 

수많은 선행연구가 있지만 그 흔한 데이터 하나 인용하는 자가 없다. 가시 돋친 말들은 사실 본질을 겨냥할 생각조차 없어보인다. 허무한 말의 사체들이 사막 모래처럼 황량하게 쌓여갈 뿐. 이런 시대에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기보다는 정희진의 말처럼 “‘을’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약한 자가 되어 성실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낫다. 정희진처럼 나도 “그것이 같은 삶이기를 바란다.”

 

 

#. 6

 

누군가는 이 책이 유독 알라딘에서 잘 팔리는 이유를 키링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웃픈 얘기. 자신의 정체성을 뱃지로 표현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성매매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으나 지겹고, 마음이 심히 우울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젠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깨고 넘어가야 할 화두다. 젠더, 계급, 계층, 경제, 역사의 문제를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알라딘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하겠다. 육신이 소멸하더라도 의미는 남는 것처럼, 나의 페미니즘은 이제 삶과 실천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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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5-07-19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씬6, `존나` 공감이오.

키링이 뱃지인가 보죠? 그러니까 그거를 달면... 음...ㅎㅎ

`나의 페미니즘은 이제 삶과 실천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입장정리라는 생각입니다.

잘 읽었어유...

뷰리풀말미잘 2015-07-19 22: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한수철님.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일요일 저녁이네요. 오늘도 한잔 하고 주무실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