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혼미한 정신을 정리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어휘들이 머릿속에서 쉽게 조립되지 않는다. 이건 일기도 뭣도 아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언어로 나 스스로를 지지하는 방편이다.  

#. 1

새벽 4시. 누군가 침대가 흔드는 느낌에 잠에서 깬다. 아무도 없는 병실, 나 하나 뿐이다. 환각인가. 나는 다시 잠을 청한다. 그리고 곧 또 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에 잠에서 깬다. 실제로 침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지독한 환각인가. 그래, 무시하면 그만이다. 나는 다시 누워 설핏 잠을 청한다. 그리고 거의 잠드는 순간 원인을 알아냈다.

나는 떨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 병실에서, 침대가 흔들리도록. 

창 밖은 캄캄했다. 가로등 등불만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보름전이었다.

#. 2     

나는 퇴원하기를 원했고, 닥터는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놓고 온 일들과, 내가 업무의 스트레스로 몰아넣고 나온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더 이상은 편하게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이후 두번째로 자퇴 사유서를 썼다.

캐리어를 끌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더운 공기가 숨통을 틀어막는다. 햇볕이 쨍쨍한 날이었다. 올해 처음으로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단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새 옷을 입고 출근을 했다. 3주만에 돌아온 일상이었다.  

내 자리에는 내 동료가 앉아있었다. 나는 이전 직책으로 복직했고 내겐 거의 아무 일도 주어지지 않았다. 환청인지 실제인지 모를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내 오감은 나락으로 가라앉는다. 예상했던 일이다.

분노인지, 좌절인지, 변명인지 구분이 안되는 뭔가가 목구멍으로 자꾸 치밀어 오르고 나는 숨을 들이키고 담배로 입을 막아서 뭔지 모를 그것을 틀어막는다. 숨기고 싶다. 사실 내가 그렇게 나약하고, 무능하고, 평판에 연연하고, 한줌 밖에 안 되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내 허세를 들키기 싫었던거다.

이제야 최진실의 자살을 이해한다. 그 많은 돈으로 아무도 모를 곳으로 떠나 살 것을, 그렇게 새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을, 왜 죽음에 기댈 수 밖에 없었을까. 자존심이었을거다. 그것이 그녀의 발목을 묶어 집요하고 잔혹한 현실에 짖밟히게 만든거다.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에 그녀는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까.  

#. 3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내 오온이 이산하고 육신이 소멸하는 그 순간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현실의 불안과 고통이 두렵다. 그래서 닥터는 퇴원을 반대했다. 아마 그녀의 휴머니즘은 내가 죽음을 도피처로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불러일으켰을 거다. 하지만 죽음이 삶보다 편한 사람에게 삶을 강요하는 것이 올바른 휴머니즘일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살아서 노인이 되고 싶다.  

삶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내가 누릴 소소한 행복들을 놓치고 싶지도 않다. 그 사람과 사랑하고, 술 먹은 다음날 아침마다 해 주는 기름진 토스트를 먹고 싶다. 예쁜 여자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 아이에게 밤마다 팔베개를 해 주고 내가 아는 온갖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다. 세계 각국의 신화와, 사람과 동물의 역사와, 우주의 이야기. 그 아이가 자라면 복싱과 칼 쓰는 법과 총 쏘는 법도 가르치고 싶다. 도시 근교에 작은 집에서 살며 평범하고 소박한 일자리를 가지고 책 읽고 글 쓰고 싶다. 지금은 연락되지 않은 그 사람이 행복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매너리즘을 이기고 재기한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들을 보고싶다.  

아, 퇴원하기 전 날 무려 천장의 종이를 접어서 예쁜 항아리를 만들어 준 전직 조폭 아저씨와 빼곡한 편지로 나를 격려해준 그 간호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아직 못 했다.

그리고 예쁜 노인이 되서 씩 웃으며 이만하면 충분했어. 안녕. 하고 삶을 마치고 싶다.  죽음의 장소로는 깨끗하고 하얀 침대가 좋겠다.

#. 4

가끔 죽음이 삶을 뒤덮을 때 내 친구들, 아치, 뽀, 다락방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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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5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Forgettable. 2011-06-2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럴 때 미잘을 생각해요. 그러니 먼저 떠나면 안됩니다.

뷰리풀말미잘 2011-06-25 16:35   좋아요 0 | URL
살아서 노인이 될 거라구요. 가긴 어딜가. 다음에도 과일깍기의 진수를 보여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