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독서본능>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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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온 세상이 죽은 듯 고요하고 이따금 종소리 들리는 흠내골 오두막. 그 곳에 염소 먹이고 호박 심는 은자가 산다. 당랑거철螳螂拒轍하던 도시의 삶 내던지고 매화향 아득한 초야에 묻혀 조지오웰과 마르케스, 장정일과 김훈, 이탁오와 박지원을 벗 삼아 술잔 기울이는 사람. 낮에는 깨 볶고 밤에는 가득히 쌓인 서책과 독야청청‘讀’也靑靑하는 사람. 그가 파란여우다.

40이 넘어 읽기 시작한 글이라지만 그의 책 읽기는 바다처럼 넓고 우물처럼 깊다. 각 국의 문학과 고전, 인문과 사회, 인물과 평전, 환경과 생태, 문화와 예술, 역사와 기행, 심지어 만화와 아동도서까지 넘나드는 그 방대한 지적 탐구. 나 같은 게으른 독자는 그저 목차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겸손해질 뿐이다. 또 그런 망망한 인식과 관조의 바다 속에서 헤메이고 뒤채임이 일상이련만 치우침 없이, 국한됨 없이 가지런한 서평의 목록을 뽑아든 그녀가 또한 존경스럽다.  

이 책은 저자가 블로그에 지난 5년간 쓴 380편의 서평 중 86편을 엄선해 엮은 것이다. 원래도 좋은 글이었는데 추리고 다듬고 깔끔하게 편집까지 해 놓으니 구슬을 금실로 꿰어놓은 격. 책은 보기 좋고 문장은 향기롭다.

#. 2 

그의 문장에서 나는 이 냄새는 필시 시골의 냄새다. 책의 첫 챕터 첫 장부터 아찔한 라일락 냄새. 들여다보니 어쩐지, 그녀 독서인생의 ‘첫사랑’이었다는 장정일의 <독서일기> 서평이 아닌가.  

“나에게 장정일은 ‘독서인생’의 첫사랑이다.... 나는 이 독서일기 첫째 권을 시작으로 장정일이 대신 들려주는 책의 수다로 빨려 들어갔는데 그게 벌써 일곱 번째다. 첫 번째 독서일기로부터 14년이 흘렀고 그도 나도 마흔이 훌쩍 넘었다. 작가와 애독자가 함께 늙어간 세월이다. 이제 장정일은 대머리가 되어가고 나도 주름살이 늘기 시작했다.” 파란여우는 그가 독서인생에 불을 지폈으니 ‘첫사랑에 대한 보답은 충분하다.’며 쿨한 척 하지만 아직도 그의 신간을 궁금해 한다는 윗 단락의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연모에 대한 장정일의 보답이 충분했던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서평에서 94년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첫 출간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를 대관하며 늙어 부드러워지는 장정일의 글쓰기를 주목한다. 짧으나 긴 호흡으로 쓰인 글이다. 웬만한 정성과 애정 없이 쓰기 힘든 글이다. 하긴, 이 서평의 제목은 ‘당신과 함께 늙을 수 있어 기쁘네요.’ 오, 이런 달콤쌉싸름한 고백이라니.

박근혜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 대한 서평에서는 새파란 청양 고추처럼 매운 냄새가 난다. 저자는 사정없이 죽비를 휘두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박근혜의 첫 번째 자서전은 두터운 화장 냄새만 진동한다.... 박씨네 부녀가 한국 역사에서 한 축을 맡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어떤 역할이었는가를 독자는 물을 필요가 있다.” 이 서평에서 파란여우는 박근혜의 뻔뻔한 현실인식으로부터 출발해 그 정치가의 낡은 멘탈리티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가 품고 있는 정치, 경제의 어두운 측면을 추적한다. 그 치열한 논구에 끝에 내려진 그의 결론은 파격적이나 명쾌하다. “진실의 의도적인 은폐와 은닉과 봉합의 삼박자 리듬을 탄 박근혜의 자서전은 한마디로 역사의 날조를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여러 편의 곱씹어 볼 서평들이 있지만 꼭 이 한편의 서평을 소개하고 싶다. 촛불 시위의 현상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책 <어둠을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에 대한 서평 ‘촛불의 회계장부 왜 필요한가’. 여기에서 파란여우의 펜촉은 결 고운 참빗처럼 촛불의 환상을 훑어나간다.

저자는 우선 왜 촛불이 소멸했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이어서 촛불에 대해 비폭력 혁명 주장까지 하는 과도한 기대치를 지적하고, 그래서 결국 촛불의 실질적인 소득이 무엇이었는지 질책한다. 촛불을 들었던 이들이 애써 외면했던 지점을 가차없이 들춰낸다. 촛불이 결집된 에너지를 목표에 겨냥하지 못하고 거꾸로 돌려 문화제와 놀이마당에서 허무하게 소진했다는 비판도 통렬하다. 그녀는 현상을 파악하는데 그치지 않고 조분조분 촛불의 과오를 따져 묻는다. 결론은 역시 명징하다. 촛불이 비록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의식화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명박 정권의 역풍이 언론을 압박하여 촛불의 심지까지 강타했다는 것. 그래서 다시 촛불은 가능한 것일까? 촛불의 외연만을 신화화하고 찬양하기에 급했던 필자들에게 모골이 송연해질 지적이다. 

하지만 비판은 애정을 잃지 않고 명박 산성 언저리에서 흩어진 촛불들과 제 흥에 겨워 계통을 잃어버린 촛불들을 보듬는다. 그 어떤 촛불이 저희를 성장시키는 비판을 고깝게 들을 수 있을까. 만약 촛불에 관련해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독자가 읽는다면 새로운 담론의 거처를 모색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갈피에서 풍기는 청청한 솔향을 맡는다. 세한도의 소나무가 툭 튀어나와 풍길것만 같은 청청한 내음이다. 누구도 메스를 들이대기 어려운 부위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파란여우에게서 겨울이 진해질수록 깊어지는 초록의 기개를 본다.     

#. 3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책은 쓰인 부분과 쓰이지 않은 부분으로 나뉜다. 홀로 완벽한 책이 어디에 있으랴. 완전한 독해는 책의 이면을 꿰뚫는 서평과 보족補足하는 것이다. 파란여우는 절름거리는 책들을 부추켜 걷게한다. 독자는 이 책 ‘깐깐한 독서본능’에서 파란여우와 함께 걸어오는 여든 여섯권의 책을 만날 것인데, 읽은 책이라면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시선을, 아직 읽지 않은 책이라면 참신한 소개를 얻으리라. 풍요로운 독서 경험이었다.

책 맨 뒷장을 덮는데 문득, 하얗게 눈 내리는 날 산 봉긋하고 들판 너르다는 흠내골로 찾아가고 싶다. 파란여우와 눈에 파묻힌 배추를 걷고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생계의 고달픔과 더불어 탁주 한 잔 나누고 싶다. 오랜 친구처럼. 그녀가 그녀의 마르케스, 이탁오에게 그렇게 느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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