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책 - 괴테에서 톨킨까지, 26편의 문학이 그린 세상의 정원들
황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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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기안84가 한혜진의 하루를 따라다녀보는 유투브 컨텐츠를 보았다. 먹기 위해서(농사)가 아니라 예쁜 꽃을 보기 위해(가드닝) 모종을 심는 한혜진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기안84를 보았다. 나 역시 로즈마리와 고추씨로 가드닝(!)을 시작했던 사람으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예로부터 정원을 가꾸는 위인들은 많았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었을까?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펼쳐본다. 베르사유궁전처럼 유명한 정원도 이 책에 나오지만 볼테르, 버넷, 플로베르, 디킨스, 루소, 괴테, 키냐르, 톨킨 등의 유명한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그린 정원들을 치유, 사랑, 욕망, 생태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묶었다. 이렇게 묶은 이는 도서관 인문강좌를 편하게 줌으로 신청해서 들을 수 있던 코로나 시절, 신청시작하자마자 빠르게 마감되는 인기강사(!) 황주영씨였던 터라 반가웠다. 그 때 베르사유, 알함브라 등 궁전에 딸려있는 정원들을 비교하는 강의도 흥미로웠고 소설 속에 등장한 정원을 영화 영상으로 보면서 이야기해주시는 강의도 즐거웠던 기억으고 남아있다. 그때 강사님이 정원이라는 주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신의 관심사를 향해 뻗어나가는 가지를 가지고 있는 나무처럼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좋아하는 대상을 닮아가는 구나. “문학에서 미술사로, 또 조경사로 전공은 달라졌어도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 주제를 좁히면서 정원의 세계를 더욱 깊게 들여다보게 되었다.”(p.6) 3가지의 전공을 가진 저자의 학문적 고생(!)은 독자에겐 복이다. 정원 하나를 보더라도 다양한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고 고심한 결과일 이 책을 나같은 독자는 그저 쉽게 주워먹으면 되니 말이다.

이 책을 펴자마자 나는 프롤로그 다음으로 톨킨과 장 지오노, 김초엽작가가 나오는 4장 생태의 정원을 먼저 읽었다. 그 다음으로 재밌어 보이는 욕망이라는 키워드의 3장을, 뒤이어 플로베르와 디킨스가 나오는 1장 치유의 정원을 읽었다. 2장 사랑의 정원을 가장 기대하지 않았기에 끝으로 읽었으나 누군가 나에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죽음으로도 죽지 않는 사랑: 크리스티앙 보뱅, 《그리움의 정원에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저자가 불문학과를 전공했기에 쓰일 수 있었지 싶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프랑스어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을 저자가 알아서일까, 죽음이 빼앗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뉘앙스는 시처럼 다가왔다.

“인적 없는 정원에서처럼 침묵을 듣는다. 겨울 정원을 거닐 듯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고, 구절을 옮겨 적는다. 시가 아님에도 시를 읽고 난 듯 주변 공기가 맑고 시려진다.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감각을 이끄는 그런 정원을 거니는 상상을 해본다. 눈이 되고, 라일락이 되고, 태양이 된 지슬렌이 있는 정원. 눈물 아래 웃음이 있는 정원. 서리가 얇게 드리워져, 걸음마다 바스락거리며 발자국을 검게 남기는 정원. ”고독과 빛과 고요로 감싸인 도피네의 작은 처소“같은 정원. 지슬렌이라는 이름이 하얀 입김으로 사라지는 겨울 정원. 그리움 속에서 시들기도 하고, ”그 안에서 켜켜이 쌓이는 삶을 깨닫는“정원. 결국에는 사랑이 노래가 되어 흘러나오는 정원. 그 정원의 이름은 그리움이다. (pp.110-111)
직접적인 정원 묘사는 없지만 지슬렌을 향한 그리움으로 작은 정원을 가꾸어가는 보뱅의 문장이 겨울정원처럼 아름답다. 마지막 문장, ‘그리움 속에서 시들어가고 그 안에서 켜켜이 쌓이는 삶을 깨닫는 정원’. 내가 정원이라는 공간에서 읽고 싶은 문장은 이런 것이다. 이 부분이 111페이지에 쓰여있다는 것마저 좋았다. 마치 나무 세 그루가 서있는 그리움 가득한 정원이 그려졌다. 키케로가 말한 “서재에 정원이 있다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라는 문장을 이처럼 잘 설명할 수 있는 작품이지 않았을까, 하며.

순서대로 읽지 않아 정원을 가꾸는 ‘돌봄’이라는 키워드가 이 글에 담기지 못해서 안타깝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돌봄 이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다양한 인문학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책이다. 가드닝이라는 것이 작가들에게는 글을 쓰는 과정과도 같고 나같은 일반인 독자에게는 인생을 가꾸어나가는 것과 같이 읽힌다. 서울 근교에 전원주택을 지을 예정인 사람이 읽어도 좋겠지만 자신을 위해 꽃 한 송이 살 줄 아는 사람이 읽으면 더 좋겠다. 다양한 예술가들의 정원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정원이라는 카테고리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공간을 책으로 펴낸 황주영저자님의 정원에 들어올 수 있는 초대장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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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 나를 활자에 옮기는 가장 사적인 글방
양다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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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라는 책 표지에 이 책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편지 봉투 모양의 천에 여러 색깔과 모양, 패턴이 각기 다른 바느질로 꿰매있다. 까불이 글방’을 운영하는 양다솔 저자는 열다섯에 처음 글방을 찾아가 10년간 글을 쓰다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저자가 보내주는 편지를 받고 답장하면 된다. 편지는 같을지 모르지만 ‘쓰기로 마음먹은’ 수많은 당신들이 쓸 답장은 표지에서 본 것 처럼 똑같지 않은, 나만의 개성이 담긴 글이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 책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의 ‘행운의 편지’같은 면모가 있다. 어렸을 때는 그대로 베꼈을지 모르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과 그 용기가 부럽다. 이런 재미를 십대 때 깨달았다는 저자는 더 부럽다.

우리 동네에는 왜 이런 글방이 없었을까 싶기도 하고 이거 너무 영업 비밀을 다 퍼준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막 무언가 쓰기로 마음 먹은, 이제 막 시작할 당신은 알 것이다. 러닝메이트가 중요하듯 글쓰기도 시작단계에서는 글쓰기메이트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 처음을 함께 하는 메이트가 되어주는 책이다. 나 역시 인스타에 서평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 주변에 책읽는 분들에게 당장 쓰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 친근하게 느껴진 책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당차게 말한다. “당신과 내가 모여 매주 글을 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약속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p.9) 그리고 이어지는 6부, 에필로그로 마무리하는 이 책은 어르신들이 자서전을 쓰는 것처럼 유난한 글쓰기를 강요하지 않아 좋았다. 일단 1부에서는 편하게 ‘나’라는 사람을 글감으로 던져 준다. 정 쓸 것이 없으면 가계부라도, 오늘 하루라도 써보라는 독려의 편지다. 2부부터는 감정 글쓰기다. 어쩌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저자는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나 나의 분노 발작버튼에 대해, 기쁨과 슬픔, 그리고 상실에 대해 써볼 용기를 준다. 3부는 내 주변인들에 대해, 4부는 장소와 사물에 대해 쓸 거리를 주고 5부 쯤 되면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묘사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6부에서는 나만의 스타일을 첨가할 수 있는, 먼저 글쓰기를 시작한 경험자만이 쓸 수 있는 챕터다.

각각의 편지마다 제시해주는 글감외에 관련된 책을 추천해주는 것과 챕터가 끝날 때마다 글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체크리스트도 이 책에 호감을 더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도 모르게 내가 닮고 싶은 글을 따라 쓰거나, 익숙한 결론을 내지는 않았는가”(p.186)라는 문장이 와닿았다. 지금 나의 개미지옥같이 반복되는 글쓰기에 질려있던 나에게 꼭 필요한 방향이었다. 또 글쓰기와 더불어 읽어보고 싶은 책 추천도 잔뜩 받은 느낌이다. 뭐니뭐니해도 ‘글쓰기’라는 매력어필에 영업당했다는 것.
“모든 이야기는 초고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순도 100퍼센트의 용기로 구성된다.(p.7)”
“여러분, 글이란 언제나 스스로와 마주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스스로를 위한 글을 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p.37)
“이야기를 하는 존재는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p.46)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글쓰고 싶은 마음이 안 들수 있을까? 나 역시 서평 이 외에도 다른 것도 한번 끄적거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맨날 그 나물에 그 밥을 이야기하는 사적인 모임이 지겨운 사람에게 추천한다. 글쓰기만큼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장치도 없을 터,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하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글로 쓰고 나면 털어버릴 힘도 생기겠지. 그러고나면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모험을 떠날 힘이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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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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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아뇨, 아무것도>는 이 소설에 실린 15편의 글 중 하나다. 먼저 조금 소개하자면 주인공이 ‘아뇨, 아무것도’라는 대사를 언제 하게 될까를 마케팅팀 김대리보다 더 궁금해하며 독자는 책장을 넘기게 된다.

열 다섯가지 단편들이라 다양한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제목처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은 하는데 읽으면 느껴지는 기묘한 무언가가 있다. 이런 부분은 “마치 얼굴을 감싸고 있던 가면을 벗는 것처럼”(p.80), “일부러 헤아리지 않으면 까먹을 정도의 숫자”(p.240), “알 듯 모를 듯한 말”(p.246)처럼 문장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이런 매력을 ‘마트료시카’라고 하지만 나는 뭔가 가면 같다.

서두와 같은 <깊은 밤>을 지나 처음 만나는 우화, <날지 않는 새들의 모임>을 읽자마자 최근에 인형 뽑기 스토어에 가서 키위새를 뽑는데 삼일만에 뽑아내 뿌듯해하던 6학년 딸래미에게 각각의 새들을 연기하며 읽어줬더랬다. 이후 딸과 나는 뭔가 욱하는 일이 생기면 마지막에 나오는 유일한 닭 대사를 외친다.(스포를 할 순 없고 궁금하면 꼭 읽어보시라)

<딜레마>에서는 작가에게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 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안 써?”라고 새겨진 문신을 파스처럼 붙이고 사는 듯한 ‘창작의 고통’이었다는 것. <물과 숨>에서는 주인공 재희가 나 홀로 수영을 배우고 즐기는 와중에 맞게 되는 결말이 반전이다. 제목인 ‘물과 숨’, 이 한 글자씩의 의미 반전이 결말과 맞닿아있어 제목이 유레카네 싶었다. <아뇨, 아무것도>는 마침 눈이 오는 날이고, 그림책 <프레드릭> 인형을 떨어뜨리고 간 10년 전 그녀를 떠올리는 등 분명 주인공이 꿈꾸는 건 로맨스 장르인데 이 소설은 불가피하게(!) 크리쳐(!), 스릴러 소설이라는 점이 안타까웠다.

그러다 가나다순으로 중간 즈음 만나게 되는 <작가의 말>에서 속아넘어가는 내 자신을 한번 비웃어주고 도마뱀을 먹어야만 끊기지 않고 해병대의 전통이 유지될 것이라고 믿는 군대의 수직적 구조를 비웃는 <타협>을 읽게 된다. 그리고 나 역시 자주 가는, 편한 장소지만 강도 높은 노동 장소이기도 한 <48시 편의점>을 읽을 때 즈음이면 이 흔한 장소에 작가만의 상상력과 사회적 문제의 틈새를 포착하여 메꾼 블랙 유머에 감탄하게 된다.

유일하게 가나다 순의 차례가 아닌, 마지막 단편 <마트료시카>에는 작가 본인이 다른 이야기보다 조금 더 노출되어 있다. “이 무의미한 자기 지시적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마트료시카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 쓰고 있는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닐까 하는.”(p.235) 라며 마트료시카의 마지막 인형과도 같은 존재인 네모와 작가의 대화가 이어진다. 네모는 <해저 2만리>에 나오는 선장의 이름으로 “라틴어로 ‘아무도 아닌자’”(p.243)이다. 작가와 네모선장 사이의 소소한 대화가 나중에는 생사를 오가는 결투의 전반전에 불과했다. 네모, 아무도 아니고, 제목처럼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라고 노상 이야기하고 있는 작가다. 하지만 여기에 아주 많은 말들과 서사와 생사를 오고가는 작가의 정신적 분투가 있음을 나는 이제 안다. 글쓰기의 어려움, 고충가운데 아무도 모르는 결투와도 같은 글쓰기와 씨름중인 최제훈 작가의 이전 작품을 쭈욱 써 본다. ‘이 더운 여름에 다 읽고 말거야’ 치토스 대사를 패러디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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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한국사
김재완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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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다룬 책을 눈앞에 두자면 영국의 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역사란, 역사학자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보다 더 이상적인 정의가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명언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그리고 이들의 대화가 역사를 살아 숨 쉬게 만든다는 것. 저자는 역사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들어가며’에서 저자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로 “나의 안전한 오늘과 후세의 안온한 미래를 위한 의무이자,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며 역사를 쌓아나간 이들에게 최소한의 염치를 지키기 위함”(p.5)이라고 말한다. 지난 12월, 전 국민의 트라우마와도 같은 비상계엄 덕분(!)에 올해 전반에 출간된 역사와 정치 카테고리의 책 서두에는 대부분 전 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이런 부분이 저자가 말한 최소한의 염치일까, 생각해본다. 출간하면 끝일것만 같은 책 속에 살아있는 오늘날의 역사가 느껴진다.

김재완 저자님은 채널 B tv 뉴스의 ‘역사썰명회’ 단독 패널이자 <찌라시 한국사>, <찌라시 세계사>를 쓴 역사 스토리텔러이다. 기록이 있어 공식적인 역사는 아니지만 민간의 구전을 포함한 사적인 기록물과 야사, 설화를 활용하여 흥미진진하면서도 기묘한 이야기들을 이 책으로 묶었다.

총 4장으로 1장 ‘한국사 곳곳에 숨겨진 수수께끼’에서는 세한도, 정감록, 첨성대, 광개토대왕릉비를 다뤘다. 가장 첫 번째 주인공인 세한도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와 함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기까지 근대와 현대 한국사가 함께 녹아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특히 광개토대왕릉비 부분을 읽으며 분개했다. 전에는 일본이 우리나라 역사를 마음대로 날조하더니 잃어버린 30년을 보내게 되자 이제 미국을 상대로 힘이 커진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우리나라를 찍어 누르려 하고 있었다. 문과생들이 ‘문송합니다’만 되뇌일 때가 아니었다.

2장 ‘조선사를 관통하는 무덤 이야기’에서 나는 ‘이런 주제가 대체 왜?’ 라고 속으로만 되뇌었던 영화 <파묘>의 인기 이유를 깨달았다. 우리 조상들 DNA에는 풍수지리에 의한 묫자리의 중요성이 깊게 새겨져있었음을 읽었달까. 가끔 서울 노른자 땅에 위치한 높은 빌딩에 어떤 성씨의 회관을 보며 저런 곳은 어떻게 운영, 유지 되는가, 궁금했다. 그 이유를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400년 산송’에서 찾았다. 400년 동안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그 집안의 재력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로 양반은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게 또 아니구나, 하며. 또 이 두 세 가의 싸움 중, 박수하가 “탁하고 쳤을 뿐인데”(p.71) 죽어버렸다는 부분을 읽으며 저자의 기묘한 필력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장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에 대하여’에서는 스우파3의 쿄카가 띄운 ‘오사카’에 대한 호감이 국모의 원수를 갚은 고영근 부분을 읽으며 다시 장엄(!)해졌다. 이런 분들에 대해 최소한의 염치를 지켜야 한다는 저자의 ‘들어가며’를 떠올렸다. 독립군들의 선택에 다시한번 경의와 존경을 표하게 된다.

4장 ‘1,500년의 시간을 건너는 음모론의 실체’에서는 한국사를 관통하는 핵심 음모론들을, 5장 ’이런저런 직업을 가진 이들의 기막힌 신세‘에서는 교과서에 적혀 있지 않은 조선의 궁녀와 내시, 임금의 세작이었다는 화가, 조선 최고의 부자이자 외교 문제 해결사이기도 했다는 역관,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세계인으로 우뚝 선 신라의 사업가 등 비주류에 대해 다뤘다. 역사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걸어간 인간의 일생이 크게 읽혔다.

조선왕릉 42기 중 북한에 두 기를 제외하고 총 마흔 기가 있다고 한다. 이 능에 대해 저자는 “거대한 이야기 봉분이다”(p.72)라고 이 책에서 말한다. 나는 이 책이 저자가 말한 능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자가 모은 기묘한 이야기들이다. 그저 암기과목에 불과했던 역사라고 생각해왔는데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삶과도 닿아있는 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살아 움직임을 저자 덕에 느껴본다. 더운 여름 밤, 기묘한 이야기들을 읽는 취미가 있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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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엑시트 -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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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엑시트,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내가 자주 보는 유투버 중 영국에서 바리스타를 하며 동네 주민들과 스몰토크를 찍은 영상을 올리는 여성 한국인이 있다. 거기에 달린 댓글 하나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왜 이런 삶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나이를 먹었을까”였다. 그 유투버는 왜 한국이 아닌 영국을 택했을까? 그리고 댓글의 그 분은 왜 한국을 탈출하지 못했을까? 이 책의 서문에 답이 있었다.

<오픈 엑시트>는 우리가 탈출하고자 한다면 탈출할 수 있는 옵션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탈출하고자 하는가? 나의 경제적 이해와 정치적/종교적 자유가 타인 혹은 타인의 연합체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받았다고 ‘인지perceive’하기 때문이다.”(p.8)라고 말한다. 이 ‘인지’로 인한 선택지 3가지 -탈출exit, 저항voice, 그리고 충성loyalty-으로허시먼(Hirschman1971)이라는 경제학자가 이야기한 것에서 따왔다. 이 책은 그 첫 번째 옵션인 ‘탈출 혹은 이탈’에 대해 다룬다. “모세의 출애굽기, 19세기 대기근 중 아일랜드인들의 미국으로의 대 이주, 제 2차세계대전 중 유럽 유대인들의 미국으로의 대 이주, 2010년대 초반 내전 중 시리아인들의 서유럽으로의 대탈출”(p.10)은 탈출/이탈의 역사적인 예이며 이는 순전히 개인의 결정에 달려있다. 참고로 탈출의 반대축은 ‘저항’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에 한국이탈이 쉽지 않았던 1960년대의 “대단위 공장에 모여 작업하던 수많은 전태일에게는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집단적 저항’이라는 옵션 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탈출-엑시트에 앞서 ‘소셜 케이지’도 정의해야 이 책이 읽힌다. 이것은 “‘탈출을 좌절시키는 기제’다. 한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나 집단, 조직을 탈출하고자 할 때, 이를 좌절시키거나 단념시키는 ‘심리적-제도적-환경적 장벽’이 소셜 케이지다.(p.23)”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른다는 MZ가 아닌 나 역시 그동안 세대, 지역, 정치, 여성/남성등 철저하게 이분화된 한국은 답이 없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회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와중에 만났던 저자의 전작, <불평등의 세대>와<쌀, 재난, 국가>에서는 세대 간, 세대 내의 불평등 구조의 축들을 가리키고, 그 기원을 벼농사 체제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몇가지 대안을 제시했으나 우리 사회는 그런 대안을 받아들일만큼 유연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AI라는 4차산업혁명은 상황을 급변시키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앞으로 30년 후 불평등 구조를 만들어낼 주요 축으로 ”인공지능, 저출생/고령화 그리고 이민“(p.29)을 꼽는다. 이 세 가지가 만들어낼 기존의 축들과의 충돌과 새로 생성될 위기이자 기회는 한국의 미래세대에게 다양한 엑시트 옵션이라는 대안을 제안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의 마지막 한 장 반 정도는 그 대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한 열세가지 항목정도 되는데 그 중에 마지막을 소개한다.
”청년들은 수많은 일자리 중에서 자신들의 꿈과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 경험을 쌓으며, 수많은 창업 시도를 통해 혁신 경제의 새로운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명문 대학과 대기업 임사증, 특정 자격증)을 따내기 위해 유년/청년기를 갈아 넣기보다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는 데 보낼 것이다.(p.362)

저항이 가져다 줄 시스템의 전복이 아닌 개인이 선택할 옵션으로서의 엑시트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전에는 저물어간다고 표현했을 중장년층은 이제 120세 아니, 150세 인생에서 아직 지는 해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의 인공지능 업데이트를 응원한다. 출산을 포기하고 경력을 선택하는 여성들을 향한 선입견은 버려져야 한다. 그리고 동남아 등지에서 엑시트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우리는 더욱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는 더욱 많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으나 이렇게 간단하게 쓸 수 밖에 없는 나의 문장 포용력이 가련하다.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이 이 책의 주제에 닿아있는 작가의 통찰이 돋보인다. 도망이 아닌 탈출할 수 있는 옵션을 열고자 하는 이 책을 당신과 미래세대를 위해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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