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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평점 :
제목인 <아뇨, 아무것도>는 이 소설에 실린 15편의 글 중 하나다. 먼저 조금 소개하자면 주인공이 ‘아뇨, 아무것도’라는 대사를 언제 하게 될까를 마케팅팀 김대리보다 더 궁금해하며 독자는 책장을 넘기게 된다.
열 다섯가지 단편들이라 다양한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제목처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은 하는데 읽으면 느껴지는 기묘한 무언가가 있다. 이런 부분은 “마치 얼굴을 감싸고 있던 가면을 벗는 것처럼”(p.80), “일부러 헤아리지 않으면 까먹을 정도의 숫자”(p.240), “알 듯 모를 듯한 말”(p.246)처럼 문장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이런 매력을 ‘마트료시카’라고 하지만 나는 뭔가 가면 같다.
서두와 같은 <깊은 밤>을 지나 처음 만나는 우화, <날지 않는 새들의 모임>을 읽자마자 최근에 인형 뽑기 스토어에 가서 키위새를 뽑는데 삼일만에 뽑아내 뿌듯해하던 6학년 딸래미에게 각각의 새들을 연기하며 읽어줬더랬다. 이후 딸과 나는 뭔가 욱하는 일이 생기면 마지막에 나오는 유일한 닭 대사를 외친다.(스포를 할 순 없고 궁금하면 꼭 읽어보시라)
<딜레마>에서는 작가에게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 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안 써?”라고 새겨진 문신을 파스처럼 붙이고 사는 듯한 ‘창작의 고통’이었다는 것. <물과 숨>에서는 주인공 재희가 나 홀로 수영을 배우고 즐기는 와중에 맞게 되는 결말이 반전이다. 제목인 ‘물과 숨’, 이 한 글자씩의 의미 반전이 결말과 맞닿아있어 제목이 유레카네 싶었다. <아뇨, 아무것도>는 마침 눈이 오는 날이고, 그림책 <프레드릭> 인형을 떨어뜨리고 간 10년 전 그녀를 떠올리는 등 분명 주인공이 꿈꾸는 건 로맨스 장르인데 이 소설은 불가피하게(!) 크리쳐(!), 스릴러 소설이라는 점이 안타까웠다.
그러다 가나다순으로 중간 즈음 만나게 되는 <작가의 말>에서 속아넘어가는 내 자신을 한번 비웃어주고 도마뱀을 먹어야만 끊기지 않고 해병대의 전통이 유지될 것이라고 믿는 군대의 수직적 구조를 비웃는 <타협>을 읽게 된다. 그리고 나 역시 자주 가는, 편한 장소지만 강도 높은 노동 장소이기도 한 <48시 편의점>을 읽을 때 즈음이면 이 흔한 장소에 작가만의 상상력과 사회적 문제의 틈새를 포착하여 메꾼 블랙 유머에 감탄하게 된다.
유일하게 가나다 순의 차례가 아닌, 마지막 단편 <마트료시카>에는 작가 본인이 다른 이야기보다 조금 더 노출되어 있다. “이 무의미한 자기 지시적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마트료시카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 쓰고 있는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닐까 하는.”(p.235) 라며 마트료시카의 마지막 인형과도 같은 존재인 네모와 작가의 대화가 이어진다. 네모는 <해저 2만리>에 나오는 선장의 이름으로 “라틴어로 ‘아무도 아닌자’”(p.243)이다. 작가와 네모선장 사이의 소소한 대화가 나중에는 생사를 오가는 결투의 전반전에 불과했다. 네모, 아무도 아니고, 제목처럼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라고 노상 이야기하고 있는 작가다. 하지만 여기에 아주 많은 말들과 서사와 생사를 오고가는 작가의 정신적 분투가 있음을 나는 이제 안다. 글쓰기의 어려움, 고충가운데 아무도 모르는 결투와도 같은 글쓰기와 씨름중인 최제훈 작가의 이전 작품을 쭈욱 써 본다. ‘이 더운 여름에 다 읽고 말거야’ 치토스 대사를 패러디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