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고양이 소피 - 동화로 읽는 철학
차이즈친 지음, 마오실리우 그림, 라미파 옮김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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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인 필로. 최근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노는 것만 같다. 그저 상상에 불과한 걸까, 고민하던 중, 수의사 아빠는 길고양이를 집에 데리고 온다. 아빠 말로는 이 고양이가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았는데 필로의 품에는 쏙 안긴다.

그런데 이 고양이 범상치 않게 생겼다. “털 색깔은 대부분 하얀색인데 정수리 양쪽으로 검은 털이 한 뭉치씩 나 있어서 대머리처럼 보이는데다 입 주변에도 검은 털이 콧수염이 나 있어서 고양이라기보다는 고생을 많이 한 대머리 할아버지 같았다.”(pp.12-13) 철학 고양이 소피의 외양이다. 나이든 철학자를 상상하면 다들 이런 머리를 상상하려나, 나는 사실 소크라테스보다 빽투더퓨처의 박사님을 떠올리긴 했다.

4월 22일 일요일 친구인 태오의 생일날, 태오가 퍼즐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물로 퍼즐을 준비하고 함께 맞춘다. 빨간색과 초록색 퍼즐을 구별하지 못하는 태오의 비밀을 듣고 “나와 세상이 다르게 보이다니!” 라는 질문을 갖게 된다. 이후 4월 22일은 계속 반복된다. 똑같은 날이 8번 지나서야 철학 고양이 소피는 “네가 철학적 사고를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이 그날에 머물러 있는 거야.”(p.27)라고 이야기해주며 그렇게 소피의 눈을 통해 철학 세계로 로그인하는 필로. 그 곳에는 원형 탁자 위, 9개의 꺼진 등이 있다. 벽을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문이 있다. 그렇게 소피는 필로가 궁금해하는 질문의 대답을 해 줄, 플라톤의 동굴이 있는 문으로 인도한다. 이런식으로 질문이 생길 때마다 필로는 소피와 이 철학의 세계로 향한다. 그리고 궁금증을 해결할 때마다 탁자위에 놓인 지혜의 등이 켜진다. 필로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방출하는 정신 에너지를 먹는 소피는 오동통 살찌기 시작한다.

플라톤, 브루노, 데카르트, 퍼트넘,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토머스 네이글, 칸트, 사르트르, 롤스, 데오게네스, 에피쿠로스, 카뮈, 소로, 러셀 등 고대부터 현대의 철학자들까지 다양하게 등장한다.

아빠는 술 왜 마셔요? 담배를 왜 피워요? 라고 묻는 아이들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한다. 집에 데려왔던 검은 고양이의 죽음, 그리고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필로를 철학의 방으로 이끈다. 소피는 죽음에 관한 철학을 했던 소크라테스와 토머스 네이글을 소개한다.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 줄로 아는 아이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이 책을 쥐어줘야 한다. 수두를 앓아 격리기간을 겪게 되는 필로는 자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렇게 칸트를 만난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던질법한 질문들과 그에 맞는 철학가들의 이야기를 쉽게 따라갈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롤스의 무지의 장막을 이렇게 쉽게 설명가능한 것이었구나에 대해 새삼 놀랐다. 센델 선생님... (또, 공산권의 중국인 저자라 그런가 더 자신있게 설명하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

또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이 책도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읽다보면 필로+소피가 보여주는 이 케미에 퐁당 빠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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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의심 - 어린이를 위한 깊고 깊은 생각 훈련
서보현 지음, 박우희 그림 / 뜨인돌어린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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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예능이나 유투브를 보다보면 자막으로 ‘합리적 의심’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합리적 인 의심’ 이 주제에 대해 우리 아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책이다. 일단 이 책은 그림책이다. 그냥 보면 저학년용 책 같지만 ‘생각훈련’이라는 단어처럼 한번 읽고 끝,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저학년과는 흥미로운 그림을 보며 이야기할 거리도 많겠지만 결국은 질문, 반대 의견, 정보 확인이라는 생각훈련을 할 수 있어야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오기에 우리 아이 같은 초 고학년과도 충분히 함께 여러번 읽을 수 있다.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야’에서는 ”뚱뚱한 사람은 운동을 잘 못한다“는 편견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고 스포츠 종목마다 다를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필요한 상황을 쉽게 설명해준다.

2장, ‘모르면 더 용감해져!’에서는 아이들이 자주보는 동영상의 알고리즘 원리에 대해 그림으로 쉽게 나와있다. 그리고 조금 아는 사람이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더닝 크루거 효과에 대해 다룬다. 단편적인 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임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다. “정말 ‘잘 알고’ ‘잘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을 항상 의심한단다.(p.43)”라는 문장이 아이의 마음에 새겨지길 바라며 함께 읽었다.

3장, ‘내가 가진 생각과 나는 달라’에서부터는 슬이 머리가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가진 생각이 내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지만 생각과 나는 다르다는 것을 구분할 필요에 대한 부분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면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이 있어.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거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틀렸다고 하면 화내는 사람도 있어.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거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 내 생각이 곧 나일까?“(p.46)
‘너는 고양이를 좋아하고 민초를 싫어하지. 그렇다고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고 민초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척을 질거야?’ 라는 설명을 해보지만 ‘이왕이면 고양이 좋아하고 민초 싫어하는 친구가 더 호감이 가긴 하는데’라는 말에는 나 역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다음 장에
”자신과 자신이 가진 생각을 구분할 수 있어야 스스로 생각을 점검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의심해도 기분 나빠 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p.48)라는 문장이 있어 한시름 놓이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좌지우지할 게 아니라 저 친구는 고양이를 싫어하고 민초 좋아하는, 나랑 안맞는 애!라고 단정짓는 게 위험하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봐야 하는게 아닐까?’하고 아직은 입씨름에 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줘서 뿌듯해한 내 자신..( 여기서 막상 글로 써보니 초라하다..역시 말로 하는 것보다 한번 그 상황을 글로 써보아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글도 합리적인 의심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저 말이 맞는지를 확인해봐야해.“(p.49)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리터러시라는 것.

4장, ‘새로운 건 피곤해!’ 장에서 슬이는 ”아닌데, 난 편의점에서 새로운 맛 먹어보는 게 좋은데.“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결국은 좋아하던 초코가 들어간 신상품이고 좋아하던 자동차 장난감 중에 새로운 모델이었을 뿐이고 좋아하던 핑크색인 새옷에 불과했음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이 책을 통틀어 제일 나에게 좋았던 부분은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지만 그것이 길이 막혔을 때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도전을 귀찮아하고 쉬운 길만 가려는 슬이에게 가장 필요한 장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요새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한 5장이다. ‘가짜 뉴스에 속지 않는 방법’이다. 인터넷에, 여러 사람이, 또는 신뢰감 있는 책으로, 그리고 증거처럼 보이는 동영상이 존재한다면 그 기사를 사실이라고 믿을 법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게 전부는 아님을 글과 그림을 통해 알려준다. 딥페이크처럼 거창한 기술이 아니더라도 오래된 사진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는 등 작성하는 사람이 나쁜 의도만 가지고 만들어내는 기사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아야 하는지 이젠 알겠지? 생각의 그물을 촘촘하게 짜 놓고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거야.“라는 이 책의 가장 큰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책을 같이 다 본 후 그림을 그린 박우휘작가님의 다른 책들을 찾아읽기로 했다. 그림이 그냥 너무 찰떡이었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슬이는 1장에서부터 ”뚱뚱한 사람은 운동을 못해!“라고 크게 말하는 두페이지 그림부터 먼저 반했고 나는 ‘편견에 젖는다’는 문장이 있는 페이지에서 큰 물방울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림을 보며 감탄했다.

엄마말은 잔소리로 듣지만 선생님이 이야기하거나, 좋아하는 유투브 채널 운영자가 말한 거나 리더형 친구들이 전해준 소식은 찰떡 같이 믿는 사춘기가 올락말락한 아이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합리적인의심#뜨인돌어린이#비판적사고#편견#거짓정보#생각훈련#올바른판단#의심#논리적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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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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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 사이에 숨어 있는 이 호랑골동품점을 찾아올 방문객이 누구일까 궁금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책들 사이에 끼어있게 될 이 책을 집게 될 독자를 환영한다. 참 재미있는 책을 고르셨다. 일단 축하드린다.

작가의 성이 ‘범’씨라 ‘호랑’골동품점일까 궁금해하며, 또 한편으로는 표지 그림에 그려진 벽지를 보고 어릴 적 방을 떠올리며(정말 딱 저 모양이었는데!!) 책을 펼쳤다. 사실 작년에 <오후에 출근합니다>라는 책에서 ‘마법소녀 계약주의보’ 라는 작가의 판타지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터라 더 반갑게 책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소설의 세계관은 이렇다. 산의 주인인 백호가 눈병에 걸린다. 백호의 신음소리에 산에 살던 짐승들은 산을 떠나 인간을 해친다. 그러던 중 죽으려고 작정하던 한 청년이 눈병을 치료해주고, 백호는 고마움의 표시로 자신의 속눈썹 하나를 뽑아 청년의 눈썹에 심어주며

“너는 앞으로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사람 아닌 것들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영생을 살며 나의 눈을 고쳤듯이 사람들을 구하라.”(p.9) 라며 능력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 청년은 영생을 살고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호는 다시 제안한다.
“힘을 넘기기를 원하면 안개 속으로 들어가라. 그 속에서 헤매는 아이를 구하면, 그 아이가 후계자가 될 것이다.”(p.10)라고 대답해준다.

이후 그는 원한이 담겨 문제를 일으키는 물건들을 기운 좋은 터에 두어 정화시켜 문제를 해결했다.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은 수상쩍은 물건들을 가지고 그에게 몰려왔다. 사람들은 그를 ‘호미’라 불렀다. 호미는 정화해야 할 물건들은 가게에 두어 전시하고 그렇지 않은 물건들은 팔았다. 그렇게 호미의 가게는 ‘호랑골동품점’이 된다.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이 책을 들여다 보면 된다. 차례의 여섯가지 골동품 이름은 이 소설의 각각의 여섯가지 이야기가 된다.

여섯가지 에피소드마다 각종 사회적인 문제 –노동인권, 가정폭력, 왕따문제, 외모지상주의 등을 다뤘음에도 이렇게 재미있다니. 이야기마다 각각의 매력이 있어 뭘 소개해야 한참 고민한다.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편은 콜센터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김규리가 호랑골동품점을 지나다가 홀린 듯이 들어가 “나를 가져. 나를 가져가” 하는 성냥갑의 목소리를 듣고 도둑질을 한다. 이후 무명천으로 턱을 감싼 여자 귀신들을 매일 같이 마주치며 시달린다. 어린 시절 다 한번 읽어봤을 ‘성냥팔이 소녀’에서 그 소녀가 추울 때 성냥을 그어 잠깐 동안의 행복과 따뜻함을 느끼는 그 부분이 이 소설에서는 콜센터 흡연실에서 급사한 이미선 아줌마의 환영과 같은 기이한 호러의 문법으로 사용된다. 이 성냥이라는 상징은 콜센터에서 화장실 마저 순번으로 돌고 휴가나 반차를 쉽게 쓰지 못해 병원에 가기도 힘든 노동자들을 대변한다. “이미선은 타 죽었다. 저 성냥처럼, 자기 자신을 끝까지 태우다가 소진되어 죽었다.”(p.37) 알고 보니 이 성냥갑은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회사에서 만들던 제품이었다. 이 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나이의 여자아이들은 인 노출로 인해 턱이 녹아내려 암이 되는 인중독성 괴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죽어가던 여자아이들의 원념이 담긴 이 성냥갑은 호랑골동품점에서 정화 중이었던 물건이었다. 그렇게 성냥을 만들던 시대의 사회적 약자와 오늘날의 사회 속 약자들이라는 접점은 성냥이 부딪히듯 불꽃튀는 이야기가 되는 매력, 아니 마력이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이야기에서 ‘운수좋은 날’을 계속 떠올리며 읽게 되는 구성이 좋았다. 세 번째 이야기는 벽괘형 공중전화기가 마치 시그널에서 무전기같은 매개체가 되어 가슴따뜻한 이야기로 변신한다. 네 번째는 자신을 호구로 아는 두 남자아이들에게 학창시절부터 당해온, 심리적으로 구덩이에 갇힌 심길용이라는 대학생이 진짜 구덩이에 파묻히게 된 토끼 롭을 구하면서 구원을 받는 이야기이다. 다섯 번째부터는 호랑골동품점과 깊은 인연을 쌓아가는 소하연이라는 아이를 눈여겨 보며 읽었다.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는 지금 호랑점을 운영하는 이름부터 수수께끼같은 이유요와 사부의 관계, 그리고 소하연이라는 아이가 미래의 호미가 될 재질인데 어떻게 안개 속에서 데리고 왔을까 각종 궁금증이 증폭하던 가운데 끝나버렸다. 처음에 이 책을 잡을 때보다 더 궁금해져버린 느낌이랄까. 다행인 건 후일담에서 ‘호랑골동품점 영업 시작 [열림]’이라니 앞으로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남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한 골동품점이 있다. 오늘날의 사회적 약자들도 그렇다. 보려고 하는 이들은 턱없이 적고, 보일 법도 한데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는, 똑같은 크기의 파이를 들고 있는 나와 같은 이들이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각박함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이런 씁쓸함이 남았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달라진 나는 이미선 아줌마가 체조할 때 옆에서 같이 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p.s 아이가 전천당을 읽을 때 부모는 이 책을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가독성이 좋아 청소년이 읽어도 좋다! 사회적인 이슈가 많아 토론용으로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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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23 - 피아니스트 조가람의 클래식 에세이
조가람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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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에 대해 ‘나무막대기를 두드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겸손한 저자이자 피아니스트인 조가람씨의 에세이 <Op.23>을 소개한다. 나는 이 분을 유투브 채널 또모를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썸네일에 ‘연습실에서 10년동안 은둔하며 어려운 곡들을 전부 마스터해버린 레전드’라고 써 있어 호기심에 클릭했던 기억이 있다. 그 영상에서 또모운영자들이 어렵다고 소문난 곡들을 계속해서 요청하다가 극난이도의 ‘스트라빈스키의 불새’까지 요청했는데 “오른손으로 동그라미 그리면서 왼손으로 세모, 그리고 왼발로 하트 그리며 오른발로 별을 그려 봤느냐, 그런 느낌이 드는 악보다”라고 설명하시더니 막상 칠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를 완성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각종 콩쿠르 수상과 우수한 졸업점수, 수많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그리고 교수진으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저자는 또한 칼럼니스트로서 클래식 에세이를 연재 중이다. 그래서 예술가와 관객을 이어주는 <Op.23>이라는 책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총 세 파트로 파트 1에서는 여러 피아니스트들을 소개한다. 가장 처음으로 이보 포고렐리치를 소개하며 1980년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현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익숙한 패턴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악보 해석의 왜곡’(p.16)과 과감한 질감으로 쇼팽을 연주한 그에 대해 심사위원들 중 반은 찬사하고 반은 반대하여 결국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이치 그라모폰은 이 대회에서 1위 수상자가 아닌 포고렐리치와 계약을 맺는다. 이후 그의 혁명적인 음악을 사랑하는 대중들로부터
“음악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를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쏟는다.”(p.14)
재능은 있으나 재정문제로 곤란한 음악도들에게는 장학금을, 발칸 전쟁 당시의 병원 재건을 위해 쓴다. 뿐만 아니라 콘서트를 열어 아픈 아이들의 의료비용을 조달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가 있었음을 저자는 소개한다.
“세월호가 도착해야 했던 제주항으로 달려간 그는 리스트의 ‘사랑과 죽음’과 베토벤의 ‘비창’을 연주한다. 달리할 바를 몰라,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그.”(p.65)
백건우 피아니스트이다. 그 뿐 아니라 파트 2에서는 예술로 총검을 잡으라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폴란드 망명자 생활을 하며 곡을 썼던 쇼팽의 삶을 묘사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변화가 필요한 시대에서 보여주는 예술의 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저자가 느껴졌다. 이후 라흐마니노프, 리스트, 라벨, 조지 거슈윈 등 다양한 음악가들의 각 곡과 작곡가에 얽힌 당시의 시대와 개인적 서사 그리고 감정들에 대한 저자만의 음악적 경험이 2부에 함께 한다.

파트 3에는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는 저자만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담겼다. 어려서부터 특별한 레슨 없이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긴 시간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모든 심사위원의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평균치에 합당한 연주를 해야 하는 콩쿠르와의 타협없이 좁은 길을 선택한 저자는 비록 2와 3이라는 콩쿠르의 성적으로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긴 순례길처럼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피아니스트 조가람씨를 알게 되는 것은 덤이다. 또 피아노를 치는 아티스트 내면의 목소리를 이렇게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미래의 음악가들을 꿈꾸는 아이들이라면 선배의 비밀일기장을 읽는 느낌으로 한 층 더 레벨 업할 수 있는 예술가적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관객으로서도 그렇다. 일반인이 표현하기 힘든 예술가의 고뇌를 공감할 수 있도록 언어화한 이 에세이를 읽는 독자에게는 또 다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만의 고유한 음악적 감성을 따라 향유할 수 있는 찬스이면서 음악을 추앙하는 각각의 예술가들을 책으로 읽는 것같은 경험이기도 해서 이 한 권으로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추천받은 느낌이라 나는 다 읽고나서도 음악가들과 곡을 리스트업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흡수해서 피아노로 그 아픔들을 예술로 바꾸려는 삶을 살아가는 음악가들을 응원한다. 그렇게 삶이 음악이 되고, 음악이 생이 되는 순간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다양한 예술가들을 향한 여행길을 소개하는 책이었다. 별점 다섯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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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터 2 허블청소년 2
이희영 지음 / 허블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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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출간한 <테스터 1>은 달에 호텔을 짓고 화성에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하는 근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SF 장편소설이다. 200년전 멸종당한 오방새(Rainbow bird)를 관광용으로 복원하던 중 위험한 바이러스가 함께 부활한다. 그래서 1권은 오방새가 살고 있던 동굴에 제물로 바쳐지는 전설 속 아이와 화성복권에 당첨된 사람 그리고 마오와 같은 테스터에 대한 주제가 담겼다. 따끈따끈한 후속 <테스터 2>는 류온과 하라의 서사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강회장으로 대표되는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욕망에 의해 고도의 과학기술이 이용되고, 이 기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테스터들을 1권에서 그렸다면 이 기술 개발을 위한 결과값인 기후위기 속에서 삶의 터전이 사라진 사람들을 2권에서 등장시킨다. 서해바다 근처에 살던 이들은 2년 전 바다에서 생겨난 재난으로 큰 해일이 덮쳐 가족과 이웃을 잃었다. 정부에서 급하게 지어준 좁은 거주지와 채소와 과일 농사를 그린돔 몇 개만이 이들에게 남은 생명줄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하층민에 가까운 이들의 사이는 돈독하다. 이반이 소장님이 운영하는 보건소에는 가족과 이웃을 잃은 이들이 찾아오고 J사장이 운영하는 로봇들의 무덤인 정크랜드에서는 류온이 폐기휴머노이드를 조립하여 고장은 잦지만 메이드 로봇이나 강아지 로봇을 선물한다. 강회장과 그의 아들 본부장, 그리고 며느리는 COO, 쿠라고 불리우며 이름도 주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휴머노이드는 에이와 비 같이 알파벳으로 불리우지만 정크랜드 마을 속 사람들은 류온, 새별이처럼 이름이 있고 각자의 로봇에게는 -메이드 로봇의 이름은 미스터킴, 강아지 로봇은 파랑이- 인간다운 이름이 존재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분명 2권을 읽으며 주인공이 류온과 하라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에 남는 캐릭터는 로봇인 정우와 진솔, 보보였다.

이 휴머노이드 로봇들은 강회장같은 소수의 권력자들에게는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최고의 보안용 비서로 쓰인다. 하지만 휴머니즘을 간직한 인간과 함께 했던 정우와 진솔, 보보는 그 인간적인 이름 만큼의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이 말하는 ‘부탁’에 있다. 사람이 부탁을 하면 부탁을 했지,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 로봇봤는가? 이 책엔 있다. 그것도 셋이나.

일단 정우.
“부탁드립니다” 그가 손을 뻗어 살짝 온의 무릎을 건드렸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온의 두 눈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에 의해 비밀을 간직한, 인간에 의해 파괴되어 버린, 이 휴머노이드를 보며 온은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란 사실이 좀처럼 견딜 수가 없었다.(p.107)

그리고 보보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멍하니 서서 오래된 구형 메이드봇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아이를 지켜준 건, 자신이 만든 치료제가 아닌지도 몰랐다. 이 낡고 고리타분하며, 인간보다 훨씬 꼬장꼬장한, 바보처럼 착한 저 친구였는지도.(p.205)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솔.
“그것이 하라님이 아닌 저를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p.274)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들은 많다. 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강회장과 하라, 그리고 류온과 류휘라는 가족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 로봇들의 부탁하는 마음이 인상적이었다. 휴머노이드들에게도 있는 이 마음이 왜 지구를 고쳐쓰면 되는데 고칠 생각은 안하고 화성 땅따먹기하고, 가족에게 잘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로봇에게 시키는 인간들이 많냐고. 인간은 왜 이 모양이냐고 묻는 작가의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어마어마한 숙제가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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