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2032년, 유니언워크라는 대기업이 인간의 뇌에 ID칩을 심기만하면 각종 기억을 클라우드에 저장해 편리하게 관리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여 한참 상용화중인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현재 서른 한살의 여주인공 ‘안’은 16년 전, 유니언워크가 이 기술 개발을 위해 연구소에서 블루진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실험 중일 때 실험대상으로 동원되었다. ‘공동뇌’ 실험대상자로서 마치 한 방에 다섯명의 여자아이가 함께 살 듯 그녀의 뇌를 다섯이 공유하도록 하는 테스트였다. 그리고 12년전, ID칩 시술을 받아, 그녀는 현재 유니언워크 기업의 ‘기억의 소거’라는 서비스를 이용 중이다. 이 서비스는 “기억 간의 연상작용을 저지하여 떠올라야 하는 것들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원리”(p.13)로 안은 다섯 명의 자아가 공동뇌를 사용하도록 실험하며 망가진 기억들을 지워내야만 현재의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정한이다. 그 또한 블루진 프로젝트의 파편뇌를 담당하는 피실험체로 기억을 파편화시키는 실험대상이었다. 그 역시 12년 째 ‘기억의 반환’이라는 서비스를 이용중이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자 하지만 그가 원하는 어떤 기억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안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목소리들이 환청처럼 들리기에 기억의 소거 서비스를 이용 중이지만 기억이 소거된 자리에 누군가와 약속을 했던 것만 같은 기억이 맴돈다. “호수는 세이브존이야.”(p.126), “그러니까 우리는 약속을 하자. 아이가 말했다. 모든 걸 잃어도 우리는 호수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p.127) 정한 역시 파편뇌의 실험대상자로서 잃어버린 기억을 돌려받길 원하지만 돌려받지 못한 어떤 약속에 대한 기억이 분명 존재한다. “나는 떠돌지 않을 거야. 어떤 형태로든 너에게 갈게. 먼 길을 돌고 돌아도 결국은 너에게 닿을 수 있도록. 네가 누구인지 잊지 않도록 기억을 보낼거야.”(p.146) 그래서 정한의 뇌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는 서비스업자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반환 강도를 높인다.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이라는 책 제목이 인상적이다. 입에서 내뱉자마자 곧 사라지는 것이 언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누군가 왜곡된 기억을 쉽게 할 수 있다. 또는 이 소설처럼 유니언워크가 개발해낸 기술을 통해 파편화되어 소문으로 떠도는 수많은 말들이 있다. 하지만 상대방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기억이 존재하듯 사랑의 언어는 영원할 수 있다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들리는 제목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호수’라는 제목도 좋을 것 같았다. 호수라는 상징은 여기서 유채화나 박쥐의 초음파처럼 은폐되었지만 분명 존재하는 기억과 연결되어 쓰인다. 호수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낮과 밤의 정경이 다르다. 또 물 속에 은폐되어 잠겨있는 것과 떠 있는 것을 은유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던 기억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는 정한의 직업이 챗봇과 연결되어있는데 챗봇이라는 AI가 인간을 미러링하는 모습과 연결지어 호수에 비추어지는 모습만을 답습하는 챗봇과 챗봇이 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깊이에 대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챗봇은 인간과 호수 가장자리를 산책하지 않으니까. “기억은 객관적 사실에 그 일을 겪을 당시의 감정이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므로 기억의 다른 이름은 그리움이자 고통, 후회이자 기쁨일 것이다. ‘나를 잃어버리는 훈련’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날들에도 끝내 유령처럼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나를 기억하는 당신이 있어서다.”라는 최진영 소설가의 추천사를 읽으며 다시한번 감탄했다. 이 소설에 대해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지 않을까? SF를 좋아하지만 로맨스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쇼츠와 릴스에서 흩뿌려지는 언어들에 지친, 진심을 담은 글자를 읽어보고 싶은 이들에게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