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줄 꽂아놓고 - 옛사람의 사귐
이승수 지음 / 돌베개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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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이 본문보다 더 풍부하다. 읽고 난 뒤에 여운이 짙고, 옛 사람들의 사귐이 풍기는 그윽한 향기에 전염이 되어 벗을 향한 그리움이 짙어진다. 행간이 풍부하여 읽기에 시간이 걸리기도 하거니와, 문장 중간 중간 들어 있는 한자가 거슬거리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한시를 되새김질하느라 들인 품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해내느라 들인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책이다. 뭐랄까? 단번에 소화시키기 어려울만큼 꽉찬 책이 그윽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신묘하다.
책 속에 인용한 니체의 말 그대로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딱이다. 조선이란 나무에 관다발을 채워 온 옛 사람들의 한정 없는 깊이가 만들어내는 향기 짙은 숲을 지나온 듯 내 속 건조했던 한 부분이 촉촉해져오는 걸 느낀다.

<거문고 줄 꽂아놓고>는 말 그대로 ’지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잠깐을 만나도 서로의 심장 속에 오래도록 남는 벗들의 우정의 기록이다. 저자가 우정의 본질을 말한 대로,  성숙한 영혼들이 허허로운 벌판 속에 선 상대를 알아보고, 그 깊이를 헤아리며 공감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시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엮어낸 아름다운 사람들의 역사이다.


- 나옹화상과 이색
이 둘은 생전에 사귀지 않았다. 이색은 나옹화상을 추모하는 석종과 사리탑에 그를 기리고 추억하는 글로 나옹화상을 만났다. 영혼과 영혼이 만나 깊은 우정을 쌓았다. 요즘의 시선으로 말하자면 당치 않은 이야기다. 유자와 불자로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나, 서로의 길을 이해할 수 있었던 힘을 저자는 두 사람 모두가 지녔던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철저함에서 찾는다. 같은 시공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둘을 각자가 지닌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신념과 맑고 깨끗한 엄정한 성품에서 찾는다.
패거리 지어 서로의 이익을 찾아 움직이는 세상에서 진실한 가치를 지고지순하게 지켜내려 분투했던 나옹화상과 이색은 서로의 분투를 진정으로 공감하여 우정의 기초인 신뢰를 쌓아갔다.

- 정몽주와 정도전
정몽주가 고려를 끝까지 지켜낸 사람이라면 정도전은 조선의 시작을 열어간 사람이다. 벗이 지키다간 자리에서 벗이 살아남아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아마도 그 둘은 예리하게 부딪혔으리라. 한 쪽은 지킬 것을 한 쪽은 버릴 것을 요구했으니. 그러나 본질은 철학적으로 통했다. 진정한 ’질’을 향한 부단한 싸움과 노력과 경주를 하는 이였기 때문이다.
<거문고 줄 꽂아놓고>에서는 그 둘의 공히 갖고 있던 모습의 이유를 묻는다.
"왜 어려운 길만 골라 갔을까?" 하며, 그리고 정몽주의 삶을 통해 이렇게 해석한다. 

"정몽주의 행동들은 하나의 내면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섬세한 감성이다. 순수했기 때문에 태산처럼 무거운 일들을 마다하거나 회피하지 않았고, 섬세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문제를 얼버무릴 수 없었다. "

저자는 이 두 벗의 이야기를 꺼내며 영화 ’빅 피쉬’에 나오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말을 인용한다. 
"저들에게 더 많은 공간을 주면 더 크게 자라게 된다. 지향하기 때문이다."
"큰 물고기는 안 잡히기 때문에 자기 길을 갈 수 있다." 
참 상반된 이야기 같으나 정몽주와 정도전 두 사람에게 깃든 깊이와 풍모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고려 말 정몽주를 품기에 시대는 작은 호수였던 것이며, 정도전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큰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둘 모두는 우리 역사에 뚜렷한 획을 남긴 큰 사람이었다.


- 김시습과 남효온
이 둘 역시 세상을 떠난 곳에서 자신의 깊이를 만들어 나갔던 사람들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신을 지키려 외로움을 기꺼이 감수한 사람들. 그 외로움의 깊이를 헤아려 줄 벗을 만나 단 몇 차례의 조우로도 깊은 우정을 쌓았다.

"우리는 사과가 떨어지는 소리는 들어도,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나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는 듣지 못한다. 감각기관의 감지 영역 밖에 있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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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한 사람은 소리 없는 데서 듣고, 모습이 이루어지기 전에 본다"(한서)
"큰 존재는 일정한 형태가 없고, 위대한 소리는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노자)
"큰 사랑은 사적으로 친애함이 없고, 위대한 변론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회남자)


둘의 만남은 겨울 산수를 담은 여백 많은 수묵화 처럼 소리 없는 그윽함으로 남는다.


- 허균과 매창
남녀 사이에 우정을 쌓고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제가 필요한 지를 잘 보여준다. 시대의 울타리를 뛰어 넘는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두 예인의 사귐은 지금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처럼 내 가슴 속에 있다. 마치 바람의 화원의 ’정향과 윤복’을 보는 듯, 더 없는 흥취와 깊은 교감과, 절제를 바탕으로 한 그리움이 어우러져 화려한 채색을 드러낸다. 

책 속에서 인용한 박지원의 글,
"부부 사이도 관계의 기본은 믿음에 바탕을 둔 우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더구나 스승과 제자는 같은 세계를 열어가는 도반이 아닌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우정이 없다면 아마도 권위와 비굴, 눈치와 파벌만이 남을 것이다." 처럼 남녀라 할지라도 만남의 바탕에 두둑한 신뢰를 쌓는다면 우정의 향기를 오래도록 남길 수도 있다는 실증을 보았다.


사람을 사귐에는 여러 갈피가 있게 마련이다. 요즘같이 각박하고, 속도 빠른 세상에는 사귐이나 벗은 생활 밖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벗이 꼭 있어야 하나? 한가로이 벗과 노닥거리다가는 아무것도 못 이루고 뒤쳐지고 말지. 하는 생각을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거문고 줄 꽂아놓고>을 권하고 싶다. 벗이라는 존재가 나와 세상에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결정을 확인하게 되니까 말이다. 심연에서 부터 벗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맑은 물방울로 올라와 내 삶의 주변으로 파동을 만들어간다.

풍부한 행간을 남기는 책이니 만큼, 책을 읽을 때 유난히 밑줄도 많이 긋고, 노트 한 구석에 옮겨 놓은 글도 많았다. 주옥같은 글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흐릿하게라도 남기고 싶은 글들을 여기에 옮겨 본다.

"겨울 숲을 산책할 때 문득 친근하게 다가오는 두 그루의 나무와, 눈보라가 몰아치는 벌판을 삿갓에 도롱이 차림으로 나란히 걷는 두 벗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역사 속을 거닐다 보면 유난히 황량한 시절에 이르게 되고 그래서 우울해질 때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있다. 김시습과 남효온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김시습과 남효온의 관계는 마치 겨울 숲에서 두 그루 나무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느낌을 준다."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니체)

"스승이 곧 벗임을 모르고, 그저 허물없이 사귀는 사람만을 벗이라고 여깁니다.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그와는 벗이 될 수 없고,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또한 스승으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 이 세상에는 벗만 한 스승이 없고, 스승만 한 벗이 없다는 말입니다. "

"공자는 삼무(三無)를 말한 적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소리 없는 음악’(無聲之樂)이다. 종을 치고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없어도 백성들이 즐거워한다는 뜻이니, 통치자가 요란하게 선전하거나 폭죽놀이 같은 이벤트를 베풀지 않아도 천하가 잘 다스려짐을 의미한다."

"상층의 패거리가 배타적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재생산할수록, 하층의 패거리는 거기에 비례해서 어둠의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둘은 공생 관계에 있는 유사 집단인데, 굳이 선후를 따지지면 후자는 전자의 그늘에서 자라난 버섯과 같다."


P.S. 
- 책 내용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서 정확한 문장이 아닐 수도 있따. ’목숨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며, 그 사람들이 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 말이며,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시다.’ 옛 사람들은 모두 시로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과 서로를 깊이있게 성찰하기에 가능할 것이다. 가벼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권하기도 했지만, 여유가 되면 더 구입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책이다.

by 키큰나무숲 http://blog.naver.com/win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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