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9쪽
"우리는 모두 보잘것없다는 것. 정말로 하찮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죠. 특별한 척해도 현미경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아등바등 살아가요. 어떻게든, 그저 존재를 확인받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존재를 어떻게 확인받아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뭘 확인받느냐고요." (.....)
"아마 그 고민은 죽을 때까지 하게 될 거예요. 백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생각할걸요. 외롭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고 끔찍하죠. 그런데 더 무서운거는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외면하죠. 마주하면 괴로운 데다 답도 없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것만 반복이니까.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100쪽
미안해. 나 아줌마들이 애 낳고 힘들단 뻔한 소리 하는 거 정말 듣기 싫었거든. 그런데 그 힘듦의 본질을 깨달았어. 그냥 육체가 힘들고 잠을 못 자서가 아니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화장실 가는 그 몇 초. 밥 한 숟갈 목구멍 넘기는 그 순간. 냉장고 문 열고 물 한 번 마시는 그 잠깐. 그런 순간 조차 좌절돼. 그런 사소한 행동이 하나하나 저지당하고 울음과 떼쓰는 소리로 멈춰지고 그런게 반복되잖아? 사람이 미친다. 농장에선 그냥 내 노동력의 속도와 숙련도를 높이면 됐거든. 그냥 힘들어도 꾹 참고 더 많이 하면 되는데, 이건 아니야. 고도의 심리적 고문이지. 진째 왜 옛날 아줌마들이 애 들쳐업고 밭에 나갔는지 알 거 같다니까. 차라리 밭 나가서 애 휙 던져놓고 일하는 게 나을걸. 거기다 남편이란 새끼는......"



82년 김지영은 울면서 읽었다면 88년 김지혜 이야기인 [서른의 반격]은 다르게 풀어간다. 책장을 덮고 나면 뭔가 후련하다. 그런데 가볍지 않다. 그래서 좋다.

택시 운전사였던 아버지, 지금은 어머니와 딸기농장을 하신다.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계열사 아카데미에서 인턴으로 일한다. 10개월차에 정직원이 된다. 부장은 나가기 전 지혜씨에게 이야기한다. 세상은 나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행동들에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든 내 몫이다.

우연히 아카데미 우쿨렐레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춤추겠다고 유학을 가버린 아내, 홀로 아이를 키우느라 힘들었던 남은 아저씨, 아이가 사춘기가 되자 아저씨는 외로워졌다. 홀로 먹방을 한다. 그는 요리를 했었다. 고생해서 떡볶이에 딱 맞는 장맛을 완성했다. 그런데 훌쩍 동업자가 앗아갔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

지혜 동생 지환은 대학을 가지 않았다.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정비소에서 일하다 영업사원이 되고 실적도 좋다. 목표도 뚜렷하다. 그가 말한다.


"난 사실 인문학이 무슨 뜻인지도 몰라. 요새 좀 유행하는 단어 같긴 한데, 잘난 척하면서 사람 기죽이고 싶을 때 들이밀면 되는 말 같더라? 근데 그거 알아? 인문계 나온 사람들 팔십 프로가 논대. 한마디로 사회에 전혀 쓸모 없는 사람이 되는거지. 누나처럼 말야."(122쪽)
"난 그게 다 겉멋으로 보여. 티비나 문화강좌에서는 핫해 보여도 현실에서는 인문대생은 아무도 환영 안 해주잖아. 허구한 날 뉴스에 나오는 거 못 봤어? 대학생들 비싼 등록금 내고 도서관에선 책도 안 빌려간다며. 다들 스펙인지 뭔지 쌓느라고 수험서나 파고 있다며. 근데 현실에선 왜 그렇게 인문학 운운하는거지?" (123쪽)
"내가 보기엔 다 허영이야. 그나마 최소한의 돈과 여유라도 있어야 하는 허영. 죽어라 자격증 따고 영어 점수 올려도, 막상 회사 들어가면 일이란 사람과 사람이 하는거거든. 하다못해 좌판에서 물건을 팔아도 판을 어떻게 짜서 어떤 물건을 배열하고, 누구한테 어떤 물건을 팔아야 잘되는가를 알아야 해.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지혜씨가 정직원이 된 후 강의를 기획하게 된다. 그렇게 선정된 강사는 알고보니 학창시절 자신을 그렇게 처참하게 만들었던 이였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어디까지 짓밟을 수 있나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지혜는 단 한번도 자신을, "나도 지혜야"라고 말한 적 없다. 지혜는, 그냥 지혜였다. 내가 백사장에 깔린 모래알 중 하나에 불과했다면 그 애는 고유명사였고 굵은 대문자로 써진 이름이었으며 오로지 그녀 그 자체였다.(152쪽)

지혜는 이야기했다. 강사가 된 지혜에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부당한지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둘이 친구가 아니라는 걸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 깊은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그 악몽을 이제는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혜는 깨닫는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아도 되는구나.


232쪽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이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책 마지막 줄이다.
그런데 왜 책 속 지혜씨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밝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82년생 김지영은 그렇지 않았던 것 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