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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익숙한 것들과 이별.
타이밍이 적절한 때에 딱
맞는 소설책을 만나는 즐거움이란.
요즘 금토 저녁에는
딸아이와 <디어 마이 프렌즈>를 시청한다.

첫회보다 3회가 아니 그 이후가 더 와닿는 드라마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딱맞다.
이 드라마에
대한 내 감정은 지난주에 절정에 이르렀다. 마침 읽게 된 <수플레>.
전혀 다른 드라마와 책이 내 마음 속에서는
감정적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수플레 세
주인공들도 <디어마이프렌드>처럼 인생의 쓴 맛과 단 맛을 아는 이들이다. 세 도시, 세 사람의 인생이
나온다.
#1.
뉴욕에 사는 릴리아.
필리핀계 미녀화가였다. 고모할머니의 뒤를 이을 뻔했으나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온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 다른 이들의 뜻에 따라 삶을 이어간다. 남편과 돈독한 사랑을 가꾸는데 실패했고, 입양한 두
아이는 그녀와 거리를 둔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찾는 공간은 부엌뿐이었다.
#2.
파리에 사는 마크.
모든 삶이 아내, 클라라를 중심으로 돌아갔었다. 그녀가
갑자기 죽기 전까지. 그는 큰 상실감을 맛본다.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녀가 주로 머무르던 부엌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3.
이스탄불에 사는 페르다.
어릴 적부터 그녀의 어머니는 심신쇠약으로 힘들어했다.
엄마이기 보다는 딸의 보호아래 사는 걸 택했던 그녀는 심지어 성격까지 고약하다.
결혼 한
이후, 엄마와 떨어져 살았어도 언젠가는 어머니를 모셔야 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결국 엉덩이를 크게 다친 엄마를 모시게 살게 된다.
그녀의 일상은 무너진다. 그녀가 힘을 얻는 건 부엌에서 가족을 위한 요리를 하는 것이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인생을 크게 상심한 순간에 서점에서 <수플레>라는 책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수플레의
특징은 보통의 재료로 간단해보이는 조리법을 거리치지만 성공하기는 참 힘들다는 것.
세 사람은
수플레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낀다.
책의
뒷표지에 나오는 한 줄이 이 세사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외면당한
여자, 사랑을 잃은 남자. 삶에 지친 여자.
평소
소설책보다 실용서를 더 좋아했다. 밑줄도 실용서에 더 많이 긋는 편이고. 이 책은 나에게는 삶에 대한 실용서와 비슷했다. 와닿는 문장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이십대라도 그랬을까.
아마
<디어마이프렌드>도 나이대마다 와닿는 장면이 모두 다 다르지 않을까.
이 책에서는
페르다가 정신이 돌아온 엄마와 손을 마주 잡고 울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디어마이프렌드에서 바닷가에서 엄마를 보내드리는 장면과
맞닿아있었다.
나도 엄마의
딸이고, 내 딸의 엄마이기에
언젠가는
나도 마주할 장면이기에
더
울컥했을지도 모른다.
아직
수플레를 만나지 못해서
그 음식이 진심으로 먹고
싶어졌고,
가능하다면 나도 내 부엌에서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보고 난 후.
122쪽
마침내 오늘 이 토요일
아침에 그는 모든 걸 떠내보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지 않았고 꿈 때문에 생기는 고통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이불 속에서 한없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바로 그의 세계를 바꿀 날이었다. 용감해져야 했다.
먼저 자기자신과 싸워야 했고, 그다음엔 이
도시와, 나아가 그의 모든 기억과 싸워야 했다.
그는 침대에서 나오기도 전에 오늘이 지나가면 만신창이가 될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인생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132쪽
'음식'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다. 지구의 중심은
거대한 쇠공이 아니라 모든 집의 부엌이다.
140쪽
걷는 것도 피곤하고, 사람들에 시달리고 자신의 감정에
지칠대로 지친 그녀는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시켰다. 다른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은 앞에 쌓아놓은 잡지들과 책들에 고개를 파묻고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잊은 것처럼 보였다. 반면 릴리아는 그들 모두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아주 오랜만에 마셔보는 근사한 커피를 한껏
음미했다. 3년 전에 집에 있는 커피메이커 유리병이 깨지는 바람에 그때부터 냄비에 커피를 끓여 마셨고 그 이후 제대로 된 뜨거운 커피는 마시지
못했다.
141쪽
카페에 가는 이유
주문을 하느라 갖은 고생을 한 후에 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그 컵을 들고 한모금 한모금이 돈 값을 한다고 느끼면서 커피를 음미하며 마셨다. 그 덕분에 그분이 나아졌고 이 도시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도서관에 가는
이유
릴리아는 요리책들로 가득
찬 다섯 개의 책꽂이 앞에 서서 꿈을 꾸듯이 그 책들을 바라봤다. 특별히 찾는 책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중 하나가 자신의 관심을 끌고, 읽고
싶게 만들어서 인생을 바꿔주길 빌었다. 맨 위 칸에 있는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고 그 책이 바로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발끝을 세워 최대한
몸을 높이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서 그 책의 제목을 읽었다. 오늘처럼 힘든 날에 그녀가 미소를 지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144쪽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뮤즈인 부엌이
누군가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걸 조금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 뮤즈는 그의 한 주를 하루하루의 단위로 나눌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서 아주 오래된 좋은 친구처럼 다시 살아가도록 등을 밀어주었다. 게다가 마크가 자기 연민에 빠지게 놔두지도
않았다. 부엌에서는 멈춰서 생각하고 울 시간이 없었다. 때가 되면 사람들은 항상 그 뮤즈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녀의 가슴에 기대고, 그녀가 주는 물로 세수를 한다. 그렇게 그녀는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녀는 강인하게 기다리면서 아이들이 집에
왔을 때 빵을 줘야 한다. 부엌은 엄마의 가슴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며, 우주의 중심이다.
149쪽
페르다는 아주 어린 나이에 유년기와 작별하고 철이
들어야했다. 그녀는 힘들었을 때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울어본 적이 없었다. 감기로 아플 떄도 혼자 코를 풀었고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을 때도 혼자
상처를 치료했다. 그녀는 엄마의 자식이 아니라 항상 엄마를 보살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엄마가 되기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가 되는 법을
익혔다.
151쪽
페르다 역시 자신의 감정을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녀는 몽유병자처럼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마지못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게 산산조각 날까 봐 두려워서 자신의 심장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은 건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는 것이다. 한 번씩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건 감당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해야
한다는 건 지금까지 살아온 전 생애를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152쪽
페르다는 책들 주위에 있으면 박물관에 있을 때처럼 항상
뭔가 불편했다.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그녀에게 즐거움만 준게 아니라 고통도 줬다. 그런 예술작품을 보면 자신이 삶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창의성을 포기한 것 같은 패배감이 들곤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뭐너가 해볼 기회가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꽁허한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 실망한 그녀는 요리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어딘가에서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었다.
"우리가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의 진정한
기대와 희망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페르다는 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삶에서 진정으로
기대하는 게 뭔지 알아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실패와 직면해봤자 가슴만 찢어질 뿐이었다.
186쪽
"항상 침착해 보이는 사람의 마음속에선 화가 차오르고 있는
법이다."
284쪽
릴리아는
이제야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 됐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남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왔다. 그건 남탓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모든 결정은 그녀가 내린 결정이었지 다른 사람이
내린 게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아니와 결혼하기 전에 친구들이 했던 경고를
무시했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다.
그리고 덩과 장을 입양하기 전에 형제자매들이 했던 말도
듣지 않았따.
문득 맨해튼에서 친구와 치하철을 타고 가며 했떤 대화가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릴리아는 그때 하던 일을 그만두고 곧 입양할 아이들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그 결정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
릴리아.
여자는 자기돈은 자기가 벌어야
해."
290쪽
마크는
인생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는 아내가 죽기 전에도 항상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생전 처음으로
인생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마침내 그동안 자신이 놓치고 살아온 게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더 행복해졌는지 깨달았다. 요리가 그의 열정이
되었다.
356쪽
"페르다,
모든 게 다 미안하구나. 내가 저지른 모든 일이 다 미안해.
부디 용서해다오, 얘야. 정신이 흐릿해지면 나도 더 이상
내가 누군지 모른단다. 내가 뭐라고 하니? 대체 뭐라고 하던? 난이제 그것도 모르겠다. 내가 네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제발
용서해주렴."
그 순간 페르다의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마침내 풀렸다.
몇 달동안 쌓여 있던 모든 감정이 쏟어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울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