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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논 아이가 행복한 어른이 된다 - 놀지 못해 불행한 아이, 불안한 부모를 위한 치유의 심리학 ㅣ 행복한 성장 1
김태형 지음 / 갈매나무 / 2016년 2월
평점 :
[300]실컷 논 아이가 행복한 어른이
된다_한국어린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

일요일 아침, 독후감을 쓰려는 엄마와 7시에 눈이 떠져버린 아이가
있다.
아이는 아동용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있다.
엄마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 밖에
안되는 아이이다.
빈 시간에는 뭐든
해야하는 엄마를 둔 아이는 피곤하다.
엄마는 아이에게
설명한다.
" 엄마는 지금 세수하고 나왔고, 미역국에 밥을 먹은 건데, 너도
먹을래?
엄마는 밥먹고 나면 독후감 쓸거야.
넌?"
아이도 뭐든 하면
좋겠다는 압박감을 주려하는 것이다.
<실컨논 아이가 행복한 어른이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불쌍해졌다.
놀아본 기억이 없는 80년대 세대가 딱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한 동네에 살면서 저렇게 친하게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남편은 살짝 비켜간 70년대 생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 응답하라처럼 골목에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나는 앞집 아주머니까 속독법, 기억법을 배운 기억이
있지만,
나보다 한 살 어린 그 집 딸과 놀았던 기억은 없다. 앞집 또는
뒷집에 가서 밥먹은 기억도 없다.
뒷집은 열쇠가 없어 담을 넘을 때, 부탁하러
갔었고
앞집은 수업을 들으러갔었다.
아버지 회사로 인해 창녕에서 2년 정도 살았다. 7살 8살 무렵이다.
그 때는 사원아파트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가끔 꿈을 꾸면, 그때가 떠오르는데 아마도 열심히 놀아서
인가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그때 기억이 선명하고 오히려 시간상으로는 나중인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기억에 없는지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놀았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중학교에서는 도서실
풍경만 기억에 있다. 도서부였던 나는 혼자서 넓은 도서실을 지켰던, 아마 혼자 놀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같이 놀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놀아라고
한다.
논 경험이, 놀았던 기억이 아이를
성장시킨다고.
내 기억에 우리엄만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하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시험 날 아침 마음 속으로 백 번은 더 되뇌이며 학교로 걸어갔다.
'시험 잘보게 해주세요. 일 등하게
해주세요.'
초등학교 3학년 기억이다.
그래서 지금 난?
무엇을 위한 공부였나?
남편과 아이 공부에
대해서 종종 이야기한다.
남편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건 딱
한가지다.
"공부하라고 하지마. 걱정된다 정말. 네가 첫째한테 공부하라고
시킬까봐.
왠지 잡을거 같아."
그래서 '공부하라고 하지말자. 아이가 놀 수 있게
해주자.'
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아이가 노는 모습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 그런지 정말
몰랐다. 내면으로 갈등도 심했다. 놀게 해주자 다짐했는데 나는 왜 계속 뭘 시키려고 하는 걸까. 그것도 강압적으로.
내 기억 속에 어린시절이 그랬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놀지 못하고
집으로 바로와야했다. 하교 후 노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더랬다.
130쪽
현실 도피 식으로 결혼한 여성들이 손상된 자존감을 보상받기 위해
남편과 아이에게 유달리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건강한 관계는 두 주체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상태에서 만나야 비로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남편에게 의존하고 집착하는 아내와 그 자존감을 보상해주기 위해 애쓰는 남편 사이
관계가 건강할 수 있을까?
설령 남편이 사회적으로 성공한들
그것만으로 아내의 자존감이 회복될 수는 없으며, 남편이 성공하지 못하거나 부부 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식에게 집착하게
된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좋은
학교에 진학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상처받은 자존감이 회복될 거라는 착각에 빠지는 탓이다.
131쪽
전업주부의 가치를 자녀 교육에 따라 평가하는 사회 풍조 역시 엄마들로
하여금 놀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공부만을 강요하도록 부추긴다.
한국 엄마들에게 아이가
성적 때문에 무시당하는 두려움은 가난 때문에 무시당하는 두려움 못지 않다.
137쪽
부모가 불안하면 아이도
불안하다.
나는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 8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세상에 대한 공포가 극심하다는 점에 근거해 '공포세대'로 규정한 바 있다. 이 세대가 이제 성인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있는데, 이들의 불안 수준은 어릴 때에 비해 낮아지기는커녕 더 높아졌다. 세상에 대한 불안, 사람에 대한 불안은 끝내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광범위한 불안으로 확산되기 마련이다. 특히 불안이 심한 부모일수록
아이에게 놀이를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139쪽
일부 공포세대 부모는 아이의 놀이에
대해 흔히 두 가지로 반응한다.
아이에게 당연히 놀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부모로서 아이와 어떻게 놀아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작년 아이 학교에서 일이 있었다.
전학 오기 전, 1학기 때 학교는 정말 즐거운 공간이었다.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하지만 이사오면서 학교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지옥으로 변했다. 나는 며칠 불면의 밤으로 이어졌고 스트레스로 먹어서 살이 쩠으며, 아이는 학교생활을
힘들어했다.
1학기에는 정말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피아노학원만 가고 놀았다. 전학오고 난 후 일이 있은 후, 나는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다.
우리가 무시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학교는 즐거운 공간이 아니라 "공부하는 공간"이라는 것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고작 1학년인데, 공부를 잘 하지 못하면 학교에서
무시당할 수 있구나 느꼈다.
물론 내 느낌이다. 사실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환경에서 그나마 덜 무시당하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는 내가
싫었고, 그 환경도 너무 싫었다. 전학을 심각하게 고려할 무렵 학년 말이 되었고, 여기서 일년을 더 보내보기로 했다. 지금 3월초다. 아직 새
학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잘 모른다. 하지만 작년보다는 평온해졌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제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될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공부시키는 엄마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교육환경도, 그렇게 엄마들을
만드는 교육환경이 문제다.
140쪽
21세기가
가까워지면서 한국인들은 인간을 인간
그대로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사회가 사람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자본주의
사회, 특히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사회가 된 데서 비롯된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 역시 상품화된다. 즉 사람을 가장
존엄한 존재로서 대우하며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러 상품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상품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상품 가치가 상승하면 사랑하고 하락하면 사랑하지 않는, 상품의 가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지는 변덕스러운
사랑이다.
141쪽
자식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은
자식이 상품 가치가 높을 때만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식의 성적과
상품가치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오로지 상품 가치에 따라 평가하자면
공부를 잘하는 자식을
훗날 높이 평가 받고
돈을 많이 버는 값비싼 상품이 되겠지만,
공부를 못하는 자식은
훗날 가치도 떨어지고
돈까지 못버는 후진 상품이 될 것이다.
145쪽
상품 사랑, 조건부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아이의 마음에는 평생 동안
불안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공부를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성적이 떨어지면 사랑을 잃어버릴거라는 두려움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
더구나
부모의 건강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타인의 사랑도 의심하기 쉽다. '부모조차 나를 무조건 사랑해주지 않았는데, 하물며 타인은 어떻겠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혼 10년차, 이제야 비로소 남편이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항상 불만에 가득차 있었고(실제 그런 기간도 있긴 했지만.) 깊은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었다.
그래서 산후우울증으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 밝은 기억을 기억해내기 힘들었던 나이다. 엄마가 되어 내 안의 어린아이와 실제 어린 내 딸사이에서
정말 힘들었었다. 왜 그런지, 분명 화목했던 것 같은 가정에서 자랐는데, 나는 왜 분노와 불만, 상실감으로 가득찼는지
몰랐었더랬다.
한동안 심리학서적에
심취해서 이랬었겠구나, 저랬었겠구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혼자 치유했다. 육아서를 읽으면, 두 번 운다.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올라서, 그리고 내가 커온 방식으로 내 아이를 키울 것 같다는 불안감에 두 번 가슴 아프다.
이 책은 나에게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넌 어린 시절에 놀지 못했어."라고.
29쪽
놀 권리를 뺏기면 분노가
쌓일 수 밖에 없다.
자유를 박탈당하는 사람은
무력감을 느끼는 동시에
박탁하는 상대에게 분노를 품기 마련이다.
놀이, 곧 자유를 박탈당한 아이들은
이를 박탈하는 부모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유가 삶에서 결정적인 가치인 만큼 놀 권리를 뺏기면서 자라날
경우 부모에 대한 반감이 쌓이는 것은 결코 피할 수없다.
부모에 대한 분노가 심하더라도
어린 아이에게 아직
이런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수동적으로 저항하거나 공부를 게을리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소년기가 되면서 부모에 대한 분노 표출은 다소 표면화되지만, 이 시기 역시 무차별적 반항, 개인적 일탈, 자기 학대와 같은
간접적인 방식이 대부분이다.
결국 자녀의 분노는 부모와
자녀의 역할이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하는
부모의 노년기부터 직접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자유는 아이 뿐아니라 어른에게도 보장되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결혼
후, 양가 어른들과 한 건물에서 생활했던 시절엔, 분명 편한 부분이 많았다. 맛있는 음식도 얻어먹고, 과일 뿐 아니라 외식도 가계지출보다는
해주시는 부분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주말외출도 평일 저녁 외출도 자유롭지 못했고, 아이 육아 부분에서도 내 뜻대로 하기에 눈치가 보였다. 첫아이
때는 그랬다.
우울감과 무기력감, 이유 모를 분노로 인한 잦은 부부싸움도 그
부분에 있었던 것이다. 내 생활, 그리고 내 공간, 내 스스로에 대한 자유가 없었다.
자유는 스스로 판단을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지금 내 생활을 돌이켜보니 그렇다. 둘째 육아는 첫째보다 백배는
수월하다. 그리고 매일 밤 시달리던 지긋지긋한 불면증에서도 조금은 아니 꽤 많이 벗어난 듯 하다.
내 아이에게도 이 자유를 맛보게 해주어야
할텐데.
지금 종종 아이를 보면
분노가 보인다.
나도 분명 뭔가 아이 자유를 억압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론은 알게 되어도
생활 속 실천은 항상
어렵다.
내 행동의 어떤 부분이
아이를 어떻게 힘들게 하는지
관찰하고, 더 나아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앞으로
할일이다.
육아서가 좋은
점은
생활 속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깨닫을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어떤
내용이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