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아침
이경자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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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Auckland, 박정환. 받은 이는 최수영. 그녀의 나이 마흔 둘. 그녀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줄 알았다.

제일 첫 장의 한문장.



 

청춘의 상처를 내려놓을 수 없는 당신께 바친다.

그 남자와 그녀 사이에 어떠한 사연이 있었기에 마흔 둘의 그녀는 약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가. 궁금해졌다.

 

p15 한동안 연락을 끊고 있던 정환이 나타나서 허둥대며, 그러나 비장하게 자기 이름을 써서 보여주었다. 수영은 그때 그 글씨체를 보면서 느꼈던 단정하고 결연한 느낌을 기억했다. “나중에 내 필체를 보게 되면, 그때 나라고 믿어요.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이랬던가? 수영은 생각했다. 그랬던 거 같았다.

1985년의 정환의 모습이 그의 시선으로 펼쳐졌다.

p31 라면 훔치다 경찰에 잡혀서 고아원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우는 어린아이 벽에 내던져 죽이는 것도 보았다, 내가 형들이랑 고아원 담벼락에 땅 파고 애기를 묻어 줬다, 아무리 억울하고 서러운 거 많아도 형이 나 같지는 않을 것이다.

정환, 그가 재소자 신분일 때 만난 익수의 사연이다. 가난은 대물림이다. 가난은 사람을 사람이기 포기하게도 한다. 사람마다 감정이 심하게 동요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가혹한 운명에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가 가장 가슴을 때린다.

정환, 그는 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가난이 뭐길래, 양귀비를 키우다가 마약법 위반으로 징역살이를 했다.

101번지 그의 주변에 사는 여자들 또한 선원들을 상대로 돈을 번다. 그녀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리라.

그런 그가 수영을 만났다.

p88 ············당신께 예쁜 걸 사 줄 돈은 없지만 달빛을 엮어서 목걸이와 반지를 만들어 줄 순 있으리. 천 개의 언덕 위에 비친 아침을 보여주고, 입맞춤과 일곱 송이 수선화를 주리니.

그녀를 만나고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수영 그녀의 엄마, 귀옥. 남편이 끝내 돌아오지 않은 납북어부, 어머니가 연좌제 그늘에서 수영을 피신시키려 고향을 떠나왔다. 그리고 생선장사로 그녀를 그늘없이 키워냈다.

p101 인생은 저럴 것이다. 귀옥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저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것. 인생이 여기서 벗어나는게 어디 있던가.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귀옥, 그녀의 인생도, 딸 수영의 인생도 그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었다.

p291 최수영의 가족관계, 특히 귀옥의 신분도 파악해뒀다. 우스웠다. 정환이 수영을 예전부터 알고 있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귀옥이 사상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 신분인것도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 연좌제는 있었다. 하필 그런사람의 딸과 연애를 하다니·······도대체 유전자며 피라는 건 뭘까. 수영이 정환에게 끌리다니. 조사하면 걸릴 게 없겠지만 일단 사건은 만들기 나름이었다.

윤 형사는 겉과 속이 다른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알려질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한 인생들의 갈피를 갈고리로 잡아 올리는 자기 직업의 재미를 오랜만에 만끽했다.

그렇게 그는 간첩이 되었다. 그녀는 뱃속에 아기와 함께 그를 떠나보냈다.

p315 수영은 정환의 공판을 지켜보지 않았다. 그가 확정된 형을 살게된 형무소를 알려하지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 남자는 청춘의 최수영, 그 시절의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사랑은 그런 것일지 몰랐다. 또 다른 자기를 찾고 붙잡는 것. 혹은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직도 낯설어하는 나에게 또 다른 사랑을 보여준 책. 천개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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