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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농담은 체코 출신의 밀란 쿤데라가 1967년 38살 때 발표한 첫 소설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역사적 사건, 부친의 유산 등을 아주 적절하게 배합해 멋진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2016년에 두 번을 읽었습니다. 가을에 처음 읽었을 때 내용을 거의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겨울에 두 번째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훨씬 더 깊이 있게 다가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쿤데라의 책을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삶은 다른 곳에」, 「커튼」, 「우스운 사랑들」등 총 6권을 읽었습니다.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지적인 특징을 갖고 있어 쉽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2~3번 정도는 읽어야 하고 역사, 예술, 문학 등 다방면에 기본적인 소양이 좀 있어야 그 진면목을 제대로 알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20대 때 이 소설을 읽었다면 분명 지금과는 다른 소설로 읽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이런저런 굴곡을 겪고 나서 이 책을 보게 되니 등장인물들의 삶이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움직이는 게 너무나 생생하게 보이고, 쿤데라의 처녀작이 이 정도 완성도를 보이는 걸 보고 새삼 작가의 역량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50년대 초 소련의 무력 침공으로 공산주의가 득세하던 체코 수도 프라하의 어느 대학교 공산당 간부인 주인공 루드비크는 여자 친구를 놀리려고 다음과 같은 엽서를 보내게 됩니다.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트로츠키 만세!”
저 문구가 왜 문제가 되느냐하면 공산주의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누구나 차별없이 똑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낙관주의를 그 모토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호가 아편 먹고 정신없이 해롱거리는 사람들처럼, 인류의 아편이라니!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얼마나 사상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까?
평소 모든 것을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여자 친구를 놀리기 위한 농담으로 한 이 말이 발단이 되어 그는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정치범이 되어 군대에 입대해 탄광에서 막노동을 하는 등 끝없는 인생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15년의 세월이 흘러 그를 공산당에서 제명시켰던 친구 제마네크, 군대에서 막노동하면서 만나 사랑했던 여인 루치아, 어릴 적부터 친한 고향 친구 야로슬로프, 제마네크의 아내로 사랑을 찾아다니다 루드비크를 좋아하게 된 헬레나, 루치아를 거듭나게 한 루드비크의 대학 때 친구 코스트카 등은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시지프스처럼 각자 생의 수레바퀴를 열심히 굴리게 됩니다.
개인적으론 각자 삶에서 유린당한 공통분모를 지닌 채 만난 루드비크와 루치에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특히 루드비크의 군대 생활을 보면서 책을 읽을 당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위로가 되어 좋았습니다.
루드비크에게 공산당원에서 제명당한 후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충격적인 일은 친구인 제마네크에 대한 증오를 낳을 정도로 그에겐 엄청난 사건이었고, 15년이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아내 헬레나의 육체를 농락함으로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마네크는 루드비크와 달리 지난 일을 신경 쓰지도 않고 있고, 자기가 가르치고 있던 대학교의 학생인 22살짜리 예쁘고 멋진 여자 친구가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철저히 패배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마네크는 공산주의가 사회주의로 바뀐 것처럼 시대 변화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켰고, 루드비크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지만 루드비크는 젊은 날의 고통으로 그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마네크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돌아온 귀향이, 친구인 야로슬로프와 예전처럼 함께 악단을 연주하며 화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려는 찰나 야로슬로프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그를 안고 가며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쿤데라의 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체코 역사나 문화에 대한 무한 애정입니다. 「농담」에서도 체코 전통 문화인 ‘왕들의 기마행렬’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전통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고 모라비아 지역 전통 결혼 모습을 통해 과거를 돌아봅니다.
또한 4부에서 친구인 체코 민속 음악 악단의 단장인 야로슬로프를 통해 유럽 민속 음악의 기원과 발전, 나아갈 길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쿤데라가 음악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반증으로,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음악가로 그의 소설에서 음악은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입니다.
「농담」은 사람 이름이 들어간 총 7부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각각의 얘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져 결국엔 하나로 만나게 되며, 한 부만 갖고도 몇 시간을 토론할 거리가 있을 정도로 깊이가 있는 소설입니다.
수없이 줄치고 메모하고 나를 정신없게 만든 모처럼 몰입해 읽은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제게 지적인 만족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삶, 사상, 운명, 우정, 영혼과 육체 등 여러 묵직한 주제들에 대해 화두를 던져주었습니다.
나는 증오의 대상 제마네크를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귀향이 결국은 이렇게 땅에 쓰러진 내 친구를 두 팔에 안고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전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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