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현대사상의 모험 13
질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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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긍정의 차이와 옷 입은 반복 그리고 각론.결론적인 영원회귀.
놀라운건 차이와 반복을 정의하며 덧붙여지는 이념, 개념, 사유의 논리들이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의미를 깊이있게 생각하는데 커다란 자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확신했었고 결론냈던 많은 생각들이 `나에게 너무 쉬웠구나! 쉬웠네~` 라는 회의감을 주었던 책이다. 논리의 풍요로움 속에 각론처럼 주어지는 후반의 내용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 기억 속에 가져왔다.

서론 반복과 차이
1절
반복은 한 사태에서 다른 한 사태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해서 두 사태 간의 본성상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환경에서 반복은 하나의 일반성의 질서에서 다른 일반성의 질서로 향하는 이행 안에서만 나타난다. 자연법칙의 반복은 오류가 있다.반복을 가능케할 법칙은 모순없는 반복을 규정하는 도덕적 사유가 있는 도덕법칙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면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애매성은 도덕법칙을 일반적인 선이라는 완전성과 통합성 아래에 나타나는 일반성에 매몰되어 버린다. 이 일반성이 가진 반복은 언제나 법칙에 종속된 특수자들에 반하여 어떤 독특성을 드러내며, 법칙을 만드는 일반성에 반하여 항상 어떤 보편자를 드러내면서 도덕법칙은 전복될 수 있다.
2절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반복을 언어와 사유의 어떤 고유한 역량, 파토스, 고등 병리학으로 만들었을 뿐 만아니라 미래 철학의 근본 범주로 만들었다. 이들에게서 모든 형식의 일반성에 대립한다. 거기에는 자연, 도덕, 습관, 기억 등 일반적인 것에 대한 대립이다. 반복되는 모든 것은 역량 안에서 하나로 집약된다. 반복 안에서, 반복을 통해서 자신을 언명하는 무한자, 한 순간을 통해 자신을 언명하는 영원, 의식을 통해 자신을 언명하는 무의식, `n승`의 역량을 의미한다.
이들은 철학의 극복을 말한다. 형이상학이 운동성과 활동성을 띠게 되기를 바란다,운동 자체를 어떠한 중재도 없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 매개적인 재현들을 직적적인 기호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운동의 본질과 내면성은 대립도 아니고 매개도 아닌 다만 반복일 뿐이다. 반복은 자기 안에 차이들을 포괄하면서 하나의 특이점에서 또 다른 특이점으로 직물처럼 짜여나가는 방식이다.
영원회귀가 지닌 힘은 결코 ` 같음` 일반을 되돌아오게 하는 힘이 아니라 창조하되 선별하고 추방하는 힘, 생산하되 파괴하는 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3절
개념 혹은 재현의 관점에서 반복과 일반성의 대립을 명시한다. 개념은 실존하는 특수한 사물의 개념일 수 있고, 그런 한에서 무한한 내포를 갖는다. 중요한 사실은 내포의 무한성이 현실적으로 가정된다는 점이다. 하나의 개념은 항상 규정들 각각의 수준에서, 자신이 내포하는 술어들 각각의 수준에서 봉쇄될 수 있다.규정으로서의 술어는 개념 안에서는 고정되어 있지만 사물 안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변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내포에 대한 봉쇄는 그 개념을 실존 안에서 이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에 부과된 외연은 개념의 관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실존 안에서 똑같은 독특성에 참여하는 어떤 개체들의 번식이다. 유한한 국면에서의 개념의 차이에서 오는 외연의 분열은 실존 안에서 어떤 참된 반복을 형성한다. 반복, 그것은 이처럼 실존으로 이해하도록 강요되고 유한한 내포를 갖는 개념의 순수한 사실인 것이다. 개념에 대한 의식이 표상을 나에게 연관짓는다면, 이때 나는 어떤 자유로운 인식능력을 갖지만 의식이 앎을 결여하거나 기억내용에 대한 철저한 되새김을 결여할 때, 즉자적 상태의 앎은 대상의 반복에 불과하다.다시 말해서 알ㅇ은 인식되는 대신 반복되고 행동으로 옮겨진다. 반복은 여기서 자유로운 개념의 무의식, 앎이나 기억내용의 무의식, 표상의 무의식으로 드러난다.
4절
반복을 정당화해 준다고 간주되는 것은 개념의 불충분성이자 그 개념의 표상에 동반하는 것들(기억과 자기의식, 재기억과 재인)의 불층분성이다. 이 논변들은 반복을 단지 명목적으로 정의하고 부정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칠 뿐이다. 프로이트는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대립하면서 혼합되어 섞여 있다고 했다.죽음의 본능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이 죽음의 본능은 반복을 설명하는 근원적이고 실증적인 원리의 자리에 오른다. 가면이나 가장복들에 대한 정신적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복이란 것읏 그야말로 자신을 구성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 위장하는 것, 스스로 위장함으로써만 자신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다. 가면이야말로 반복의 참된 주체이다.억압에 의존하는 현앙으로서의 반복을 멈추기 위해서 개념을 형성하고 표상하는 기억내용이 머물렀던 바로 그 곳에서 기억을 찾고 곧장 과거 안에 자리 잡는 가운데 앎과 저항, 표상과 봉쇄를 생생하게 결합해야 한다. 이 작업 과정을 전이라고 지칭한다. 그렇지만 전이는 여전히 반복이며, 다를 무엇이기 이전에 반복이다. 전이는 하나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분석적 경험 전체에 근거를 마련해 주는 어떤 원리이다.이런 의미에서 반복은 스스로 우리의 병과 건강, 우리의 타락과 구원을 선별하는 유희로 자신을 구성해간다.
5절
문제는 반복의 본질에 있다. 왜 반복은 개념이나 재현 안의 동일성 형식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지, 어떤 의미에서 반복은 우월하고 월등한 어떤 `실증적` 원리를 요구하는지 등을 아는 것이다. 반복은 내적인 차이를 함축하면서 상징의 질서를 예비한다.반복은 다만 어떤 이념이며, 그에 상응하는 어떤 공간 창조적인 순수한 역동성이다. 같음의 재생산처럼 배움은 표상에서 행위로 이어지는 관계 안에서 성립하지 않는다.그것은(다름과 부딪히는 마주침처럼) 기호에서 응답으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성립한다.반복은 더이상 같음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을 포괄하는 반복이고, 하나의 물결과 몸짓에서 또 다른 물결과 몸짓으로 이어지는 차이를 포괄하는 반복, 이 차이를 그렇게 구성된 반복의 공간으로 운반하는 반복이다.똑같은 개념을 지닌 동일한 요소들과 다른 이산적요소들, 이 반복되는 대상들과 구별할 것이 있다.먼저 반복되는 것과 반복하는 것의 두가지 형식을 구별해야 한다.이 두 가지 반복에서 동일성을 띤 요소들이 겉으로 드러내는 반복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어떤 잠복해 있는 주체에 의존하는지, 그리고 이 주체는 어떻게 그 요소들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반복하는 가운데 첫 번째 반복의 심장부에서 `또 다른` 반복을 형성하는 지를 보여준다. 이 새로운 반복이 개념 없는 차이의 본질을 형성하고 매개되지 않는 차이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며, 모든 반복은 여기에서 나온다.
6절
우리는 차이를 어떤 개념적 차이, 내생적으로 개념적인 차이로 파악한다면, 그리고 반복을 어떤 외생적 차이, 하나의 똑같은 개념 아래 재현된 대상들 사이의 차이로 파악한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 기초개념의 마주침은 반복의 본질로 이어지는 노선과 차이의 이념으로 이어지는 노선이 교차하고 간섭하는 모습을 들여다 볼 때에나 비로소 나타난다.
1 차이 그 자체
1절
차이는 본래적 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상태이다. 차이는 일방향적인 구별에 해당하는 이런 규정의 상태이다. 차이는 만드는 어떤 것, 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런 차이 혹은 본래적 규정은 여전히 또한 잔혹성이다. 그것이 규정되는 것은 미규정자와 본질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이 정확한 지점을 가르킨다. 차이가 저주의 상태에서 벗어나 동일성, 대립, 유비, 유사성이라는 재현의 요소로서 규정하고 개념 일반의 요구들에 종속시킬 때 차이를 구원하는 재현이 가능하다.그러므로 차이가 개념과 화해하는 듯한 행복한 국면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절
유비에 따른 존재 안에서 유적 차이는 대립이다.하나의 개념을 지녔다고 가정된 동일성에서 종차는 가장 크다. 차이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은 차이를 규정되지 않는 개념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것이다. 차이는 동일한 개념 혹은 공통의 개념으로 함께 존속한다. 그것이 존재의 개념이다. 이제 유적 차이는 차이를 규정 가능한 가장 일반적인 개념들의 유사-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데 만족한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기 동일성을 띤 유들로부터 그 유들이 이지적인 것 안에서 서로 유지하는 유비적 관계들로 이행할 수 있다. 재현은 바로 그런 차이를 통해 유기적 재현이 되는 것이다.
3절
일의성의 본질은 존재가 단 하나의 똑같은 의미에서 언명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단 하나의 같은 의미에서, 하지만 자신의 모든 개체화하는 차이나 내생적 양상들을 통해 언명된다는 점에 있다. 일의적 존재에도 여전히 위계와 분배는 있을 터이고, 이 위계와 분배는 개체화하는 요인들과 그 요인들의 의미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여기서 존재의 일의성은 또한 존재의 동등성을, 평등을 의미한다.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이다.존재의 내생적 양태나 개체화 요인들 안에서 파악하게 되면, 그때부터 존재는 `유비적이지` 않을까? 일의성 안에서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개체화하는 차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존재, 본연의 차이인 존재이다.일의성이 정교화되는 과정의 대표적인 인물에는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가 있다. 이들은 일의적 존재는 또한 형상과 속성들을 자신뿐 아니라 강도적 요인들이나 개체화하는 등급들에 관계시킨다. 그리고 이 요인과 등급들은 존재의 양태를 변화시키지만 존재의 본질은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했다.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원회귀는 동일자의 회귀를 의미할 수 없다. 회귀는 존재이다. 하지만 생성의 존재일 뿐이다. 영원회귀는 `같은 것`을 되돌아오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하는 것에 대해 회귀가 그 유일한 같음을 구성하는 것이다. 회귀는 유일한 동일성이다.그것은 차이나는 것을 통해 언명되고 차이나는 것의 둘레를 도는 동일자이다. 차이에 의해 산출되는 이런 동일성은 `반복`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영원회귀의 반복은 또한 차이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같음을 사유하는 데 있다.
4절
개념 일반의 한계들 사이에서 규정은 동일성을 띤 개념이나 유기적 개념들 안으로 기입되는 한에서 차이가 난다.극단은 큼이나 작음 안의 무한에 의해 정의된다. 자기 자신 안에서 그런 무한을 발견할 때, 재현은 더이상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의 모습을 취한다. 개념은 극단의 끝에서 변신을 취하는 규정을 따르며 규정과 더불어 짝을 이룬다. 그리고 그 규정을 근거의 자리에 놓는 가운데 순수한 차이로 재현한다.근거는 또한 차이가 소멸하는 동시에 생산되는 계기, 사라지는 동시에 나타나는 국면이다.규정을 사유 가능하고 선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무한이다. 따라서 차이는 망아적 재현으로 등장한다. 망아적 재현은 유한한 규정 자체를 통해 무한을 언명할 때만 자신 안에서 무한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무한이 유한을 통해 언명되는 한에서 무한하게 작은 것과 무한하게 큰 것은 새롭게, 그리고 보다 엄격하게 분리된다.
헤겔에 따른 모순은 ` 차이 일반은 이미 모순 그 자체`이다. 사물들은 부정성을 취하고 부정성은 내재적 충동이다.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의 생성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것의 회귀이다.
라이프니츠는 부수적 속성들이 관계하는 부차모순을 말한다. 아주 작은 차이의 극한은 현실적 실존에서 차이의 소멸이다. 연속성의 법칙과 식별 불가능자들의 원리를 이루는 기초개념 즉 모나드들 각각은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한다. 세계 안에 모나드들 자체는 최선의 세계를 선택하는 근거가 된다.
모순의 본성은 실존하는 것 안에 비-모순의 두가지 비를 기입하는 데 있다. 차이를 끝까지 밀고 나아가면 모순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다. 차이가 거기까지 가는 것은 동일성인 한에서만 참일 수 있다. 차이는 부정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있으며, 상사성과 유비 안에 갇혀 있다.
5절
차이는어떤 결정적인 경험에 맞물려 있는 다원주의적 차이가 전제된다. 다양체의 특이점과 미분적 요소들은 동일성과 추상적 보편성으로 반영되지만 거기에는 재현되지 않는 어떤 독특성이 항상 있다.
긍정은 차이, 거리를 긍정한다. 부정은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차이나는 긍정의 효과이다. 부정적인 것은 결코 발동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실증적인 미분적 요소들이 있을 뿐이며, 바로 이것들이 긍정의 발생과 긍정된 차이의 발생을 동시에 규정한다. 영원회귀는 모든 변신들 안에 현전하고 있으며, 자신이 되돌아오게 만드는 것과 동시적이다. 영원회귀가 관계하는 세계에서 차이들을 함축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차이를 통해 언명되는 일의적 존재이다.
6절
나눔의 방법은 진정한 차이의 철학에 모든 변증술적 역량을 집약하는 기법이다. 나눔은 종적 차이의 구분이 아닌 계통에서의 선별이다. 차이의 순수한 개념에서 나눔의 방법이 지닌 의미는 근거가 되는 일차적인 지망자와 분유하는 경쟁자들이다. 나눔의 목적은 어떤 계열적 변증술의 확립, 수직적 계열이나 계통의 확립에 있다. 변증술에 의해 제기되는 존재의 문제에서 비-존재, 부정적인 것, 모순은 긍정의 성격,긍정 옆에 머물러 있는 차이, 그리고 현상에 소통하는 존재의 그림자이다.
7절
플라톤 주의는 `사물 자체`와 허상들 사이의 어떤 구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전복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하고 허상과 반영들의 지배를 찬양한다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자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허상의 존재를 참된 특성 혹은 현상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허상은 차라리 원형이나 특권적 위치라는 생각 자체를 반대하고 전복하는 행위이다. 허상은 즉자적 차이를 포괄하는 심급, 두개 이상의 발산적 계열을 포괄하는 심급이다.

2 대자적 반복
1절
반복은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반복되고 있는 요소나 경우들이 어떤 차이를 통해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반복의 구성에는 즉자의 층위가 있다. 그 다음 수동적 종합에 따르는 대자의 층위가 있다. 여기에 기초한 반성적 재현의 층위가 있다. 시간의 종합을 이뤄낸 수동적 종합 안에서 반복은 살아 있는 현재로 존재한다. 유기체까지 확장된 반복된 행동은 습관의 문제이다. 습관이 수축이라고 말할 때 언급하는 것은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반복의 융합이다. 반복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훔쳐내고 반복에서 차이를 훔쳐내는 것. 이는 상상의 역할이거나 다양하고 조각난 상태에서 응시하는 정신의 역할이다. 게다가 반복은 본질상 상상적이다. 즉자의 상태에서 끊임없이 와해되는 반복과 재현의 공간 안에서 우리에 대해 펼쳐지고 보존되는 반복 사이, 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있고 시간 안에서 현재를 구성한다. 이 현재는 종, 개체, 유기체, 고려되는 유기체의 부분들에 따라 수명을 다하고 이행하는 현재, 변모하는 현재이다. 살아 있는 현재는, 그리고 이와 더불어 모든 유기체적이고 심리적인 삶은 습관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 수많은 습관들은 수동적 종합들의 기저에 영역을 형성한다. 본연의 수동적 자아는 감각 작용들을 구성하기 전에 이미 유기체 자체를 구성하는 수축하는 응시에 의해 정의된다.
2절
습관은 현재의 삶을 구성하고 기억은 과거의 존재를 구성한다. 과거는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 사이에 있다. 현행적 현재는 사라진 현재를 재현하고 또 그 차원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재현한다. 과거를 재구성 할 수 있는 것은 현재가 동시간성, 공존 그리고 선재라는 세가지 관점에서 과거와 관계할 때이다. 과거는 자신이 과거이기 위해 거리를 둔 현재 안에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보존하며, 이때 현행적 현재는 단지 자신과 공존하는 과거 전체의 최대 수축일 뿐이다.
3절
규정되지 않은 나의 실존은 오로지 시간 안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 단지 수동적 자아의 변용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세계의 지속을 시간의 내면화-사유하는 주체-로 주장한다. 퓌지스의 시간은 순수 과거 안에서 자신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시간의 원환 속에서 순수 과거는 여전히 필연적으로 현재의 관점에서 표현되고, 사라진 신화적 현재로서 표현된다. 시간의 텅 빈 형식, 시간의 원환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을 펼쳐낸다. 여기서 시간은 고유한 근거를 전복한 순서, 집합, 계열에 의해 정의된다. 즉 시간의 정태적 종합에 해당하는 선험적 순서, 이미지 안에서의 규정, 동등하지 않은 분배. 시간의 계열 안에서 모든 것은 반복이다. 과거를 구성하는 양태에 따라 반복하고, 변신의 현재 안에서 반복하고 그리고 영원회귀에 해당하는 미래의 반복이다. 반복되는 원환은ㅇ시간의 순서, 순수하고ㅈ텅 빈 형식으로서의 시간을 통해 와해 되어진다. 그리고 그 계열의 끝에서 다름의 원환을 재형성한다.
4절
쾌락이 획득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원리적 가치이다.습관을 쾌락에 종속시키는 한에서 습관 안의 반복은 이미 획득된 쾌락을 재생하려는 욕망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고 간주 된다. 흥분의 반복의 진정한 목적은 수동적 종합을 쾌락원칙과 그것의 미래 적용이나 과거 적용이 모두 유래하는 어떤 역랑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있다. 그러므로 습관 안의 반복 혹은 묶기의 수동적인 종합은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다. 이것은 쾌락 자체를 끌어 앉게 되는 원칙의 역학이다. 능동적 종합은 수동적 종합을 넘어서 전면적 통합과 총체화 가능한 자기 동일적 대상들의 정립을 향해 나아간다. 잠재적 대상은 과거적이다. 잠재적 대상에 대해 질이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현재에 선재하는 바로 이런 순수 과거이다. 사라진 현재는 반복되어야 할 사태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복의 과정 전체를 조건짓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상상력은 사라진 현재의 흔적들을 모으고 사라진 현재를 모델로 새로운 현재를 본뜬다. 현실적인 두 계열 안에서, 곧 두 현재 사이에서 출현하는 이 잠재적 대상을 통해 항들의 형태변화들과 상상적 관계들의 양태변화들이 규정된다. 반복은 무의식의 본성과 관련된 최종적인 귀결이 뒤따른다. 무의식적인 물음과 문제들은 의식 안에서 표현하는 위장과 전치와 관련되어 있다. 문제와 물음들은 무의식에 속한다. 하지만 무의식은 본성상 차이를 만드는가 하면 반복적이며 계열적일 뿐 아니라 문제와 물음을 제기한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수동적으로 체험하는 양태이고 `이전` 의 결핍의 양태를 통해, 이상적 자아의 양태를 통해, 초자아의 예고를 실현하는 `이후`의 양태를 통해 반복한다. 죽는다는 사실은 어떤 급진적인 전복을 끌어안고 있다. 죽음본능은 이 나르키소스적 리비도가 탈성화된 에너지이다. 시간의 순수한 형식에서 무의식을 구성하는 세가지 종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첫째 살아 있는 현재 위에 시간을 정초한다. 둘째 순수 과거를 통해 시간을 근거짓는다. 셋째 미래에 관계된 탈성화이다. 시간의 원환에서 죽음의 얼굴을 대신하는 것은 영원회귀이다.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허상, 시뮬라크르에 해당하는) 어떤 과도한 체계들에 관련되어 있다. 이 체계들은 차이나는 것을 차이나는 것에, 다양한 것에 우연한 것을 우연한 것에 묶는다.
5절
영원회귀에 의해 변용되는 체계에서 두가지 명제 유사성과 차이를 말한다. 차이는 차이나는 것을 차이나는 것에 관계짓되 동일한 것, 유사한 것, 유비적이거나 대립적인 것에 의한 어떠한 매개도 없이 관계지어야 한다. 차이가 즉자 존재를 숨기고 변질된 재현을 하는 이 체계는 죽음본능으로 귀결되는 주체들이 있어야 하고 또한 역동성이 있어야 한다. 차이를 일으키는 작인에서 저마다 어두운 전조를 포함한다. 전조에는 계열들 사이의 자기 동일성과 유사성이 있다. 투사된 동일성과 유사성은 전치와 위장의 과정이 있다. 그 크기는 크든 작든 언제나 내적이라는 점이며 체계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과 유사한 것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자체가 어떤 순수한 차이의 세계에서비롯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차이가 즉자 존재라면,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차이의 대자 존재이다. 반복은 다자의 유사성이 아닌 것처럼 일자의 항구성도 아니다. 영원회귀의 주체는 같은 것이 아니라 차이나는 것이고 유사한 것이 아니라 유사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6절
플라톤의 원형, 모상 그리고 허상을 구별짓고 허상은 유사성을 결여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관념을 주었다. 허상은 영원회귀의 탈중심화된 중심들을 통과하고 재통과하며, 그런 가운데 자기 자신 위에 발을 디딘 채 기능한다. 이것이 가르키는 것은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내재적 동일성, 영원회귀 안의 존재, 유별나고 굴곡이 심한 원환 등이다. 플라톤은 영원회귀를 어떤 규율 안에 가두어놓으려고 무진 애를 썼고 어떤 원형을 모사하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사에서 모사로 이어지는 운동, 그 타락해가는 유사성의 무한한 운동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의 본성이 변질하는 지점에 이른다.

3 사유의 이미지
1절
철학에서 시작의 문제는 언제나 미묘한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사람들 각각이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아, 사유, 존재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 모든 사람들은 ----임을 알고 있다.` 는 점을 부정한다. 철학의 암묵적 전제는 보편적 본성의 사유에 해당하는 공통감 안에 자리하고, 철학은 이 보편적 본성의 사유에서 출발할 수 있다. 사유가 사유하기 시작할 수 있고 또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선-철학적 이미지와 그 공준들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할 때뿐이다.
2절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인식능력의 자연스런 실행이고 이 인식능력은 어떤 선한 본성과 선한 의지를지닌다는 점은 권리적 차원에서 어떤 사유의 이미지를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철학이 권리상 타당성을 주장하는 어떤 사유의 이미지 안에서 자신의 전제를 찾고 있는 이상 그 이미지 안에 함축된 이 초월적 모델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재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능력들의 협동이라는 어떤 주관적 원리를 요구하고, 다시 말해서 인식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에 해당하는 어떤 공통감을 요구한다. 양식과 공통감, 이 둘은 독사의 두 반쪽을 구성한다. 본성상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하는 이미지가 있고 공통감의 순수 요소 그리고 재현의 형식이 있다. 재현은 특정한 요소들에 의해 정의된다. 개념 안의 동일성, 개념의 규정 안에 있는 대립, 판단 안의 유비, 대상 안의 유사성 등이 그 요소들에 해당한다. 차이가 재현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요소들과 관계 맺을 때이다. 재현의 세계는 차이 그 자체를 사유하는 데는 물론이고 또한 반복을 그 대자적 측면에서 있는 그대로 사유하는데 무능력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므로 재인의 공준의 그보다 훨씬 더 일반적인 어떤 재현의 공준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3절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어떤 지혜를 증오하는 것으로 사유는 출발한다. 대상을 마주침으로 갖는 사유는 감각 속에 감성을 분만하고 영혼을 뒤흔들어 어떤 문제를 설정하도록 강요한다. 감성은 마주침을 통해 감각되고 상기만이 회상하도록 만든다. 플라톤에게 순수사유는 인식능력들에 대한 우월한 사용이나 초월론적 실행을 발견하면서도 이런 사용이나 실행을 감성적인 것 안의 대립 형식, 상기 안의 상사성 형식, 선 안의 유비 형식에 종속시킨다. 이를 통해 그는 재현의 세계를 준비하고 있고, 이 세계의 요소들에 대한 어떤 최초의 분배를 실천하고 있으며, 사유의 실행을 전제하는 동시에 배반하는 어떤 독단적 이미지를 통해 이미 실행 자체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다. 사유는 오로지 `사유를 야기하는` 것, 사유되어야 할 것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강제와 강요의 상태에서만 사유할 따름이다. 또 여기서 사유되어야 할 것이란 또한 사유 불가능자 혹은 비- 사유이고,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직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영속적인 사실이다. 감성에서 상상력으로, 상상력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다시 사유로 어떤 이행이 일어날 때 어떤 자유로운 형태의 차이가 매번 인식능력을 일깨우고, 게다가 이 차이의 차이소로서 일깨운다. 사유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고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유 속에 `사유하기` 를 낳는 것이다.
4절
오류는 보편적인 본성의 사유라는 가설 안에서 자연스럽게 개진되는 `부정적인 것`이다. 오류는 사실상의 외적 인과성들에서 비롯되는 효과들을 권리상 모두 수용한다고 간주된다. 오류는 초월론적 차원으로 임의로 확대 적용되고 임의로 투사된 어떤 사실이다. 오류 개념은 비겁함, 잔혹함, 비천함, 어리석음 등는 단순히 어떤 육체적 역량들이나 개인적, 사회적 성격상의 사실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본연의 사유 자체 속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구조들이다. 어리석음은 결코 타인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어떤 물음의 대상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5절
의미는 참의 조건으로 정의된다. 참을 근거 짓는 하나의 명제는 이념적인 사태의 언표와 지칭되는 대상의 차원이 있다. 의미가 하나의 이름을 표현하는 것은 이념적 내용이나 내재적 소여를 간직한 분신을 끌어내는 이분화에 있다. 질문을 통해 의미를 표현하면 질문이란 것이 언제나 어떤 주어질 법한 대답들, 있을 법하거나 가능할 법한 대답들을 기초로 전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문이란 것은 상이한 것으로 포착된 해의 경우들에 따라 하나의 문제가 경험 안에서, 그리고 의식에 대해 분해, 환전, 왜곡되는 방식을 표현한다. 의미는 문제 자체 안에 있다. 참과 거짓은 해들과 관련되기는 고사하고 무엇보다 먼저 문제들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해가 진리를 지닌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신이 답하는 그 문제에 따라 마땅하게 주어지는 진리이다. `참으로 위대한 문제들은 단지 해결되는 순간에만 정립된다.` 본연의 문제가 지니고 있는 것은 내적인 성격이자 내면적인 명법적 요소이다. 문제들의 한복판에서 진리가 발생하고 사유 안에서 참된 것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보편적인 것은 단지 이념밖에 없고 문제밖에 없다. 문제가 해를 통해 일반성을 띠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통해 해가 일반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문제들은 무엇보다 먼저 어떤 플라톤적인 이데아들이고 변증법적인 기초개념들 사이의 어떤 이념적 연관들이며, 이런 이데아나 연관들은 `실존하는 것의 돌발 가능한 상황들` 과 관련되어 있다.
6절
앎은 어떤 경험적 형태에 불과하고 경험 속으로 거듭 떨어져 나오는 어떤 단순한 결과에 지나지 않지만, 배움은 어떤 초월론적 구조이다. 이 구조를 통해 차이와 차이, 비유사성과 비유사성이 서로 매개됨 없이 하나로 묶이고 시간은 사유 안으로 도입된다.
공준들의 요약
1. 원리의 공준 혹은 보편적 본성의 사유
2. 이상의 공준 혹은 공통감
3. 모델의 공준 혹은 재인
4. 요소의 공준 혹은 재현
5. 부정적인 것의 공준 혹은 오류의 공준
6. 논리적 기능의 공준 혹은 명제의 공준
7. 양상의 공준 혹은 해들의 공준
8. 목적이나 결과의 공준, 앎의 공준
한번은 자연적 공준이고 다른 한번은 철학적인 공준이다.

4 차이의 이념적 종합
1절
이념들은 참된 문제들을 구성하거나 정당한 근거를 지닌 문제들을 제기한다. 이념의 세가지 계기는 이념적 대상 안의 미규정성, 경험 대상들과 관련하여 성립하는 규정 가능성, 지성과 개념들과 관련하여 성립하는 무한한 규정성.
2절
미분의 철학 일반의 원리는 상징 dx가 나타나는 세 가지 원리가 상응한다. 즉 그 자체로 규정되지 않은 것에는 규정 가능성의 원리가, 실재적으로 규정 가능한 것에는 상호적 규정의 원리가, 현실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에는 완결된 규정의 원리가 상응한다.
3절
미분적인 것은 문제제기적인 것 그 자체의 본성을 표현한다. 해결 가능성은 문제들의 조건들을 규정하고 그 과정을 통해 해를 찾는 것이다.
4절
구조, 이념은 `복합성의 테마`, 어떤 내적인 다양체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미분적 요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다양하되 정위 불가능한 연관 체계이고, 이 체계는 실재적인 결합관계들과 현실적인 항들 안에서 구현된다.
5절
이념은 어떤 무한한 `배움`의 요소이다. 이념과 배움은 의식의 재현이 아니라 무의식의 현시인 것이다. 무의식을 정의하는 것은 역설감 안의 이념들이 지닌 명제 외적이고 비현실적인 특성일 수 있다. 이념들은, 초월적 실행에 놓인 능력으로서의 사유를 특징짓는 바로 그 보편적 근거와해와 관계한다. 문제와 물음의 차이를 규정해야 할 때 우리가 모색하는 것은 물음들이 이념 안의 문제들로 개봉되는 절차이고, 이 문제들이 사유 안의 물음들로 봉인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6절
반복은 이념들이 놓이는 `막-주름운동`의 원천에 있다. 반복의 비범한 역량을 정의하는 것은 독특성들 상호 간의 재취합과 응축이다. 독특성들은 같은 문제나 같은 이념 안에서는 물론, 한 문제에서 다른문제로 이어지면서, 또는 한 이념에서 다른 이념으로 이어지면서 서로를 재취합하고 응축한다.
7절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 대상을 구성하는 어떤 엄정한 부분으로 정의되어 있다. 잠재적인 것은 완결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것은 미분화와 분화라는 원초적 절차를 형성한다. 잠재적인 것은 언제나 차이, 발산 또는 분화를 통해 현실화된다.
8절
현실적 질과 연장들, 현질적 종과 부분들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는 시공간적 역동성들이 존재한다. 바로 이 역동성들이 현실화의 작인, 분화의 작인들이다.
4장의 요약은 472~473쪽에 있다.

5 감성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
1절
세계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결과 속의 불공정, 환원 불가능한 비동등이다. 감성적인 것의 이유, 나타나는 것의 조건은 공간과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즉자적 비동등 그 자체이다.
2절
차이는 연장 안에서 질 아래에서 스스로 부정되고 소멸하는 경향이 있다. 이성은 동일성으로 기우는 경향, 동일화와 동등화의 절차 등으로 정의되었다. 반면 부조리와 불합리는 이 동일화하는 이성에 맞서는 잡다의 저항으로 정의되었다. 과학과 철학에서 양식은 차이를 인정한다. 미친 차이와 소멸된 사이, 분할 가능자 안의 비동등성과 동등해진 분할 가능자 사이, 비동등한 것의 분배와 분배된 동등성 사이에서 양식은 어쩔 수 없이 어떤 보편적 배당의 규칙으로, 따라서 보편적으로 배당된 것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양식과 공통감의 관계를 한정지으면 공통감은 주관적으로는 모든 인식능력들의 통일성이자 근거에 해당하는 어떤 자아에 대해 가정된 자기동일성으로 정의되었고, 객관적으로는 모든 인식능력들이 관계한다고 간주되는 이러저러한 대상의 자기동일성으로 정의되었다.그럼에도 차이는 소여 자체가 아니다. 차이는 잡다를 창조하는 것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사유가 사유해야 하는 것은 차이, 사유와 절대적으로 차이나는 이 차이다. 철학은 양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설을 통해 드러난다.역설을 통해 객관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공통성을 띤 어떤 전체 속으로 총체화되지 않는 요소이고, 또 어떤 양식의 방향 안에서 동등화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차이다.
3절
강도로서의 차이는 연장 안에서 밖-주름운동을 펼치면서 소멸되지만, 그때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 안으로 안-주름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주름을 펼치는 것은 깊이다. 그리고 연장은 깊이에서 나온다.즉 깊이는 본질적으로 연장의 지각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존재 안에서 깊이와 강도는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차이를 통해 언명되는 같음이다. 깊이는 존재의 강도이고, 거꾸로 강도는 깊이의 존재다.
4절
강도는 즉자적 비동등을 포괄하고 이미 즉자적 차이 자체인 강도는 차이를 긍정한다. 깊이만이 질적 대립들을 해소할 수 있다. 우리가 강도 안에서 차이라 부르는 것은 실재적으로 함축하고 봉인하는 것에 해당하고, 거리라 부르는 것은 실재적으로 함축되거나 봉인되는 것에 해당한다. 영원회귀는 동일성도, 유사성도, 동등성도 갖지 않는 것에 대해 언명된다. 영원회귀는 차이나는 것에 대해 언명되는 동일한 것, 순수하고 불균등한 것에 대해 언명되는 유사성, 오로지 비동등한 것에 대해 언명되는 동등한 것, 모든 거리들에 대해 언명되는 가까움이다. 영원회귀는 차이에 대해,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 되돌아 오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질이고 연장이다.
5절
강도량과 미분량 그리고 분화의 범주에서 현실화하는 조건은 질의 분화와 연장의 특이점에 의한 분화이다. 개체화는 강도의 활동이다. 이 활동을 통해 미분비들은 현실화되도록 규정되고, 게다가 강도에 의해 창조된 질과 연장 안에서 어떤 분화의 선들을 따라 현실화되도록 규정된다. 우리가 개체화 요인들이라 부르는 것은 봉인하고 봉인되는 이 강도들 전체, 개체화의 장들을 가로질러 서로가 서로의 안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개체성은 통일된 자아의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분열된 자아의 체계를 형성하고 또 양육한다.
6절
체계는 현실화하는 이념의 질서를 통해 개체화된다. 체계는 차이의 점진적 감소에 부합해서 자신의 고유한 현상을 발견하고 내면화한다. 심리적 체계로서 나는 고유하게 심리적인 종별화를 형성하고, 자아는 고유하게 심리적인 유기적 조직화를 형성한다. 안-주름운동의 가치들을 봉인하는 중심에는 나-자아의 체계에 속하는 다른 구조가 구성되는데 이 구조를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어야한다. 타인은 그 어떤 사람이 아니라 -- 두 체계 안에서 성립하는 -- 타자에 대한 자아이자 자아에 대한 타자이다. 이런 타인은 어떤 섬험적 타인이고, 이런 섬험적 타인은 각 체계 안에서 자신의 표현적 가치, 다시 말해서 함축적이고 봉인하는 가치를 통해 정의된다.

결론 차이와 반복
1절
차이는 긍정의 차이고 반복은 헐벗은 반복이다.
2절
본질적으로 애매한 근거짓는다는 것은 재현을 근거지을 때에 규정되지 않는 것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3절
이념은 미분적 요소들, 이 요소들 간의 미분적 관계들, 그리고 이 관계들에 상응하는 독특성들로 구성된 어떤 다양체이다.
4절
표면적 반복 (물리적 반복), 심층적 반복, 존재론적 반복.
5절
존재는 영원회귀 안의 반복에 해당하는 일의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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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 한길그레이트북스 7
레비 스트로스 지음 / 한길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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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

오래전에 슬픈 열대나 황금가지를 읽었을 때는 미개 사회의 정신을 형성하는 토테미즘이 놀라웠다. 주술사가 갖는 절대적인 권위와 그에 대한 믿음이 때론 실제적으로 죽음을 야기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에 `믿는다` 는 사고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 책은 토템이 갖는 경이로운 풍요로움이나 다양성을 보는 즐거움을 줬고 그것을 해제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구조화시켰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토템의 다양함에 더 매료된다. 더불어 얻게되는 분류체계는 이해를 돕는데 만족한다.

제1장 구체의 과학
원시적인 주술적 사고나 의례란, 결정론적 작용을 인식하고 응용하기에 앞서, 결정론적 작용을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추측하고 활용하는 일이다. 그것은 훌륭히 구축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현상을 적용할 뿐이다.주술적 인식은 경험적 연관성을 가지고 현재에도 적합했던 관찰과 사고의 양식을 잔존 형태로 오늘 날까지 보존해오고 있다. `신세기시대의 역설` 이라 일컫는 거대한 업적은 자연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관찰 즉 감성적 표현에 의한 감각계의 이론적인 조직화와 탐색을 바탕으로 자연이 허락해준 결과이다. 또한 기술적인 면에서 `브리콜라주` 라고 이름하는 손재주는 신화적 사고와 기술적 측면과 지적 측면의 양자 관계가 설명된다. 신화의 세계가 한 번 이루어진 후에 다시 해체되고, 해체된 단편들이 다시 모여 새로운 세계를 이루지는 것은 계속적인 재구성이 이루어질 때 수단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항상 이전에 목적이었던 것이라는 점이다. `손재주`의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이 공식은 신화적 사고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용가능한 수단들의 총체가 암묵적으로 목록화되거나 구상되어야 하며 그 결과 재료 집합의 구조와 계획의 구조 사의의 절충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이 현상을 `객관적 우연성`이라고 표현했다.
제2장 토템적 분류의 논리
각 항이 심리적 또는 역사적 과정의 우연적 부산물로 구성되어 필연성이 결여된 것 같은 데에서 논리를 규명한다는 것은 확실히 역설적인 면이 있다. 논리란 필연적인 관계를 세우는 데 있다. 경험적으로 성립되는 필연성의 여러 조건은 형식적인 부분의 유사성과 긴밀히 결합된 집합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을 때에는 그 엄밀성을 보유한다. 각 항의 단편들은 그것 자체의 우연적인 파괴과정에서 일어나는 것들로서 형태, 색체의 화려함, 투명성 등 어느 정도 상사성을 가려야 한다. 새로운 형태의 실체를 형성하는 물체 자체와 동등한 가치 즉 기호가 그 지시 대상과 같은 위치를 획득하는 모형을 구성한다. 이러한 모형은 여러가지 변형의 가능성을 실현시킨다. 유한한 물체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배열과 균형의 관계에 우리들은 구체적 논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분류의 논리를 정리하면
하나의 동물이나 식물은 각각 자연의 어떤 요소와 대응관계를 가진다.
원주민의 분류법은 조직적이며 견고한 체계의 이론적 지식에 의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오늘날 동물학과 식물학에서 사용되는 분류법과 유사한 경우가 많다.
원시인의 어휘들은 체계가 잘 잡혀 있어서 우리들의 과학적 전문 용어들과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류의 원리에서 미리 결정된 공리란 없다` 는 것은 진리이다. 그것은 민족지적 조사, 즉 경험에 의해서만 귀납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
토템미즘이라는 것은 분류라는 일반적인 문제의 한 특수 사례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 분류를 체계화하는 데 있어서 종명이 빈번히 담당하는 역할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소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는 인접성이나 유사성에 기초를 둔 것이 많다.
토템적 논리의 난점은 문제가 있는 식물이나 동물이 과연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점이다. 각 종의 변종 내지 아변종들은 상징체계 안에서 수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러한 여러 역할 가운데 몇몇만이 유효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제3장 변환체계
원시사회에서 생활과 사고를 지배하는 실천적 이론적 논리는 변별적 구분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다. 그 특징은 형식적 조건을 갖춘 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변별적 특징의 체계를 사용하여 여러 내용으로 구성되는 사회학적 문제를 조직화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경험의 총체를 먼저 정리, 축소해서 서로 개별적인 것으로 간주한 다음에 여러 요소로 대립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논리의 원칙이다.토템적이라고 주로 일컫는 명명이나 분류체계의 활용가치는 그 형식적 특성에서 오는 것이다. 그 체계는 부호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합한 것이고 그 메시지는 다른 코드로 변환될 수도 있으며 또한 다른 코드에 의해서 받아들인 메시지를 스스로의 체계로 표현할 수도 있다.
토테미즘은 그 내재적인 성격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자율적 관습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여러 수준 사이에서 이념들을 변환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가진 하나의 형식체계에서 임의로 분리된 소수의 양식이다. 사회학의 기초는 `사회논리` 인 것이다.
`토템`형의 사고와 신앙이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그것은 형성하거나 차용한 사회에서 그것이 `부호`가 되고 개념체계의 형태를 띠게 되는바, 그로써 각 수준에 속하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언뜻 보기에 서로 무관한 메시지들, 즉 인간들 사이의 관계인 문화나 사회, 또는 인간과 자연의 문제로 간주되는 기술적 경제적 현상의 그 어느 한 쪽에만 속하는 듯한 메시지들 사이에도 변환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학적 해석이 특정한 객관적 조건에는 해당하지 않으나 높은 빈도를 나타냄을 설명하고자 할 때 내용보다는 형식이 중요시됨은 물론이다. 모순의 내용이 무엇인가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사회질서와 자연질서가 조화된 종합이 일거에 성취된다면 그것은 대단한 우연의 작용일 것이다.
제4장 토템과 카스트
어떤 민족이 토테미즘과 아울러 외혼제를 행한다면 토테미즘에 의해 수립된 사회의 결속을 더 한층 하나의 체계로 강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토템씨족인 부족사회와 카스트 사회는 각각 전문화된 기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전체 공동체에 대하여 필수불가결하고 다른 집단들의 기능과 상호 보완적이다. 내혼제 카스트와 외혼제 토템집단의 기본적인 특징은 사회집단과 자연종과의 상동성이 아니라 한 쪽은 사회집단의 수준에 나타나는 차이와 다른 쪽은 자연조의 수준에 나타나는 차이와의 상동성이다. 이론적으로 살펴보면 자연과 문화를 차이점들의 다른 두 체계로 보고 그 사이에 형식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각 분야에 고유한 체계성이다. 사회집단은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연대를 이루고 있으며 외혼규정은 이 다양성과 통일성 사이의 균형된 대립을 융화시키는 수단이 된다. 이것을 실체와의 관련 속에서 각각의 나름대로 고찰한다면 다양성의 관점이 통일성의 관점보다 우월하게 되리라고 예상된다. 각 사회집단은 세습적이라 할 수 있는 어떤 변별적 특성으로 체계를 구성하는 경향을 가질 것이다. 결국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인간이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인간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변형시키는 방법에 달려 있다. 사람 사이에 상호보완성과 협력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연계의 다양성이야말로, 분업과 직업의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참고할 수 있는유일한 객관적 모델이다.구체적인 다양성의 진정한 모델이 한 쪽은 자연면에서의 어떤 종의 다양성이고 또 한 쪽은 문화면에서의 어떤 기능의 다양성이다. 다양성의 모델로서 자연의 모델이 선택된 경우에는 유사성이 변별성을 능가하게 되고 다양성의 문화적 모델을 선택한다면, 문화면에 대응하는 변별성이 유사성을 능가하게 된다. 카스트에선 여성을 자연적인 면에서 이질성을 띤 것으로 보고 토템 집단은 문화적인 면에서 이질성을 띤 것으로 본다.토테미즘에 있어서 호혜성이란 동질의 행위로 구성되며 그것들이 단지 병치되어 있을 뿐이다. 카스트제에 있어서 호혜성은 직능 분화에서 나타난다. 단 하나밖에 없는 자연종, 즉 인간에게 제도화된 다양성을 사회적으로 도입하는 것과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동식물 종의 다양성을 사회면에 투영한다는 것은 같지 않다.인간은 두 체계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등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카스트는 스스로를 자연종으로 묘사하는 반면 토템 집단은 자연종을 카스트로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관점에서 사회기능의 체계가 자연종의 체계에 그리고 인간의 세계가 사물의 세계에 각각 대응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자연종의 체계와 제조물의 체계를 인간이 자연과 문화의 대립을 초월하여 양자를 하나의 총체로 생각하기 위해 사용되는 두 개의 매개 집합으로 보아야 한다. 외혼제와 음식물 금기는 하나의 `실천` 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두 가지 면 내지는 두 가지의 양식인 것이다. 관습적 행동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한정되고 또 생활양식이나 문명 형태의 변별적인 별개의 사실이라는 형태로 인류학자의 연구대사미 되어 있는 한 그것은 실천과 혼돈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천이라는 것은 인간에 관한 과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총체이다. 정신은 이처럼 경험적 다양성에서 개념적 단일성으로 나아가고 또 개념적 단일성에서 유의미한 종합으로 나아간다.
제5장 범주, 원소, 종, 수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동물이나 천체, 그 밖의 자연현상과 결부되어 즐겨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일이다. 토테미즘은 자연계나 사회를 하나의 조직된 전체로서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류도식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관련된 다른 신앙이나 관습에 결부된다.자연을 모델로 한 분류가 사용되는 것은 동물종은 서로 분명하게 개별화된 성격을 가지므로 이야기 중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나누어 맡기기 쉽기 때문이다. 생물학 종의 자연적 `변별성`은 인간사고에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모델을 부여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여러 변별체계들에 접근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다른 체계들에 생물학적 종의 변별적 모습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여러 가지 종의 존재는 인간에게 있어서 현실의 궁극적 비연속성의 가장 직관적인 심상이며 또한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다. 즉 종의 다양성은 객관적 부호와의 감각적 표현이다. 종 또는 종의 집합으로부터 특성이나 범주 체계는 관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여러 단계에서 새로운 분해와 재구성을 거듭하며 진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범주에서 원소로 원소에서 종으로 바뀔 수 있게 하는 분석적 과정은 각 종에 대한 이념상의 해체를 통해 진행되며 그것이 다른 측면에서 서서히 전체를 재구성하게 된다. 해체와 재통합이라는 이중 운동은 통시적인 면에서도 작용한다. 생물체가 갖는 이중성 - 하나의 체계이면서 체계 속의 도구가 되며 그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공시성과 통시성, 구체와 추상, 자연과 문화 사이에 위치하는 어떠한 분야도 해체하든가 재통합하는 것 등이 가능해진다. 중간적 분류매체로서 종의 수준은 그 망을 넓혀 위쪽으로, 즉 원소, 범주, 수의 방향으로 향할 수도 있고 또 망을 좁혀서 아래로 고유명사 방향으로 향할 수도 있다. 각 체계는 수평축과 수직축의 양축을 기준으로 해서 규정된다. 각 분류마다 사용되는 범주의 수에 따라 또 원소나 차원의 수와 선택에 따라 분류체계를 구별하게 될 것이다. 또 그들 분류체계를 거시적 분류법과 미시적 분류법으로 나누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고찰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표상과 관념, 어휘와 문법이 엄밀한 불변의 관계로 결부되어 있는 진실한 체계인가? 혹은 가장 구체적인 표상과 어휘의 수준은 어떠한 약간의 우연성과 자의성의 포함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전체의 체계를 의문시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토템의 목록은 자연환경을 어떤 철학적 도식에 의해 체계화하려는 의도이기보다는 역사적 축적의 결과이다.
우리는 분류체계를 `나무`의 모양으로 나타내왔다.나무의 성장은 변환의 좋은 예이다. 아래쪽의 가지는 좀더 많은 연유성을 갖고 있다. 굵은 가지는 공통의 지점에서 힘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위쪽으로 가면서 연유성의 부분은 감소하며 임의성의 그것이 증대한다. 구조는 출발점에서는 파악이 가능하지만 분기에 따라서 이른바 타성 또는 논리적 냉담에 이르는 것이다. 그 처음의 성질을 부정하지 않지만 구조는 다수 다양한 사건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제6장 보편화와 특수화
역사와 체계 사이에서 변천을 형성하는 통시적이며 또한 연유적인 구조체가 자리할 여지가 있다.이른바 토템분류법에 관련된 신앙이나 관습은 이 총체적 활동의 일면 내지 하나의 양식일 뿐이다. 토테미즘에 나타나는 특정한 형의 우주 분류는 토테미즘만의 미묘한 특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토테미즘을 구성하는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부분의 하나라는 의견을 갖고 있다.토템 친족의 관념은 생물학적 친족관계, 사회적 친족관계, 우주 분류적 친족관계의 3요소로 성립된다. 우주분류적 친족관계라는 것은 어떤 집단에 속하는 모든 인간을 이론상 같은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동물이나 사물에 결부시키는 것이다. 토테미즘은 각양각색의 원소로 된 혼합물일 뿐이다. 종의 개념에서 각각의 종의 일체성은 여러가지 분야를 분류도식내에 통합할 수 있게 되는 보편화와 자연 한계의 저쪽 즉 개별화까지 연장하는 특수화이다.첫번째 점에서 종의 격자는 사회학적 범주와 관련없이 흥미로운 유사성이 서로 거리를 둔 집단 사이에 대단히 중요한 논리적 관련의 표식으로 나타난다. 또한 분류체계는 사회적 시간이나 부족의 공간적 영역을 꽉 채워 더 확장되기 마련이다. 논리적인 면에 있어서 종 조작매체가 한 쪽에서는 구체와 개별의 방향으로, 또 다른 쪽에서는 추상과 범주체계의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처럼 사회학적 면에 있어서는 토템과 집단 내부에서의 개인의 신분 규정과 더불어 전통적인 틀을 넘어 집단의 확장까지도 가능케 한다.지금까지는 문제 분야의 폭이나 일반성에 따라 늘어 뜨려 보여 주었으나 이제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분류하기로 하는 명명만이 가능한 경계선 넘어서까지 체계 작용을 연장하는 것이다. 이 나눠진 조작은 떨어져 있기도 하고 포개지기도 한다. 장소나 개인이나 모두 고유명사에 의해서 이름지어지며 또한 지명이 인명과 서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은 많은 사회에 공통으로 빈번히 나타나는 상황이다. 유기체적 사회관으로 자연종의 여러 속성들 사이의 보편적인 대응 관계에서 분류는 상호의존적이다. 동물에 관한 신화적 종교적 관념과 각 단위사회에 할당된 정치적 기능 사이의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귀속을 정하는 개별화 규칙은 제도의 틀을 개인적 숙명의 심리면과 개인 명명의 소산인 그 사회면과의 관련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유명사가 우리들이 부호로 취급하는 체계의 구성 부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부호란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사항으로 체계를 전환시킴으로써 의미를 고정하는 수단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추구해온 사고 형태는, 한정적 수의 강을 사용하여 현실을 망라하면서도 상호 `변환` 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통합적 사고라는 점이다. 고유명사는 항상 자기의 토템과 관계한다. 집단호칭을 매개로 하여 또한 변환에 의해 개별화의 지평에서 가장 일반적인 범주의 지평까지 이동할 수 있다.여기에는 해체와 재통합이라는 과정이 있는데 하나는 종을 몸의 부분이나 태도로, 사회적 분절을 개인이나 역할로 해체하는 것이고 구체적인 몸의 부분에서 부분의 추상관념으로, 부분의 추상관념에서 개념화된 개체로 재통합하는 과정이다.
이름지어지는 고유명사는 동식물 이름, 음식물의 금기, 행동 내지 성격을 본딴 것, 타인에게서 투사되는 이미지, 주목할 만한 상황, 신분 귀속의 표식,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 등이 있다. 이처럼 고유명사라는 것은 다차원적 체계 속에서 제 위치를 지정해주는 수단이라고 정의 할 수밖에 없다.
제7장 종으로서의 개체
종으로서 개체가 갖는 명칭은 구조적 결합에 의한 복합적 체계에서 각기 구별되는 위치를 획득하게 된다.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 고유의 규칙과 관습에 의해서 연속적인 세대의 흐름에 견고하고 비연속적인 격자틀을 적용하여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동식물명은 고유명으로 동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많은 사회에서 고유명의 형성법이 자연과학에서의 종이 명칭의 형성법과 같음을 밝혔다. 계열관계 기능에 의해서든 통합연쇄 속으로 들어가든 동물들이 갖는 사회적 현상에 따라 은유 되기도 환유되기도 한 관계를 이룬다.
제8장 되찾은 시간
야생의 사고는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의 사고이다. 이 사고는 분석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이고자 하며 또 양 방향의 극한까지 진행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동시에 양극 간의 조종 능력을 보유하려고 한다.인간에게 주술은 자연의 인과적 고리와 동일한 필연성을 드러내며 행위자는 의례라는 형식하에 그 자연의 인과 고리에 그저 보조적인 고리를 첨가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덧붙여 인간 행동의 자연화 - 어떤 인간행동을 마치 자연계의 인과성의 일부분인 듯이 취급하는 - 라고 말할 수 있다. 토템의 분류체계를 의미체계로 보는 개념을 분명히 하면서 토템과 공물과의 관계와 그것의 기원 신화를 짚어보면 신화적 표상은 사회적.종교적 관습을 규정하는 현실 구조에 대응하는 것인가 아니면 원주민의 사고가 사라지는 실체를 고정시켰다는 환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의문이 생긴다. 진화론과 토템형 종합과의 양립불가능성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어떤 종류의 역사적 연쇄는 지속하고 있으나 회귀성을 가진다. 신화에 나타난 모든 역사는 현재에 대해서 이접적이면서 연접적이기도 한 패러독스를 가진다. 야생의 사고가 이중의 모순과 통시성을 극복하여 공시성과의 협력을 통해 통일된 체계를 위한 재료를 어떻게 끌어내는 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미개 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논리적 우수성과 감정적인 소용돌이라는 이원적 양상의 비합리성을 합리성 속에 수용하고자 합당한 방법을 전가시켜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분류체계는 역사를, 특히 체계에 저항한다고 생각되는 역사를 끼워 맞추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제9장 역사와 변증법
자아는 타자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과 세계는 대립하지 않는다. 인간을 통해서 배운 진리는 `세계에 속한다` , 또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류학의 탁월한 가치는 인간 사회의 경험적 다양성을 뛰어넘어서 상수에 도달하고자 한다. 샤르트르가 말하는 역사를 해석하는 변증법적 이성은 상황에 좌우되는 유동적인 진실성이다. 풍속, 신앙, 관습의 경이로운 풍요로움이나 다양성을 가진 야생의 사고는 유추적 사고라 정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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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세미나 11 -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자크 라캉 세미나 11
자크 라캉 지음, 맹정현.이수련 옮김 / 새물결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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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세미나 11
책을 읽으며 처음부터 떠오르는 생각. 얼만큼 이해해야 하나? 이해할 수 있나? 보통은 흥미를 잃어 책을 덮지 않으면 완독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간에 포기하는 때가 있다. 너무 어렵거나 아님 그럭저럭 읽어 가는 과정에서 앞의 내용을 정리하는 글을 접할 때에 많은 부분이 이해되지 않거나 기억나지 않으면 읽기를 포기한다. 읽기에 집중하고 참고할 글을 찾고 정리된 글로 이해를 더하면서 책을 읽다보면 진도가 너무 늦다. 그래서 역량껏 이해하거나 더 읽기를 포기하고 덮는 한계에 대한 균형이 필요하다. 또 정신 분석에 대한 용어를 파악하지 않으면 이해의 실마리를 놓치기 쉬운 책이다. 많은 부분이 스스로 정리가 안됐다고 판단하지만 우격다짐으로 마무리했다. 아쉬워서 다음에 라캉의 다른 책을 읽어야지! 하지만 선뜻 펼칠것 같지 않다. 재미는 그럭저럭.
함축된 대상 a 의 의미를 처음 시작 할 때와 달리 지금은 이해하는데 조금 나아진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무의식과 반복
2.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우리의 무의식
프로이트는 어떤 헛디딤이란 양상아래 발생한다는 점이고, 저자는 결여의 개념으로서 결정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주체인 것이다.
3. 확실성의 주체에 관하여
무의식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실현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제한된 가능성 속에 쾌락을 넘어서 한계에 맞닥뜨린 욕망을 유지되지만 그 열망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무의식은 짧은 순간에 드러내다 사라집니다.그에게 활력을 불어 넣는 진리를 갈망하는 열정은 무의식의 위상이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느냐는 의심의 점에서 데카르트적입니다. 그 의심이 바로 프로이트에게 확실성의 근거입니다. 의심은 무언가 지켜야할 것이 있음을 뜻하고 또한 드러나야 할 무엇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으로부터 확실성을 부여하는진리의 토대를 보증할 수 있는 것을 타자입니다.그렇지만 타자에 의한 평가가 확실한 것인가 아닌가의 척도에서 자유로울 수있는 것은 약간의 암시만으로도 주체와 관련된 흔적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주체의 문제와 관련해 욕망을 해결하는 방법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입니다.
4.시니피앙의 그물망에 관하여
무의식의 기능은 단절 기능을 말하고 주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사유에서 비롯된 언표 행위를 통해서 시니피앙을 제공하고 이것을 근거로 확실성을 정립한다.시니피앙의 그물망이 충만하고 완벽한 장소 다시말해 주체를 가르킨다.주체가 무의식 속에 형성되는 꿈은 망각되는 지각의 흔적들이 시니피앙의 공시태에서 형성되고 통시태를 통해 도입되는 은유를 구성하는 데서 기능을 하는 대비와 유사의 기능들을 발견한다. 프로이트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주체라는 토대에서 출발하는데 이 주체의 토대인 기억하기는 일상의 구어적인 언어들의 시니피앙적 구조에서 유래한다.
반복은 재생이 아닌 주체가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 자신의 전력을 회상해내는것, 이 모든 것은 실재라 불리는 어떤 일정한 한계에 도달하기 직전까지만 진행된다.
5. 투케와 오토마톤
실재를 우리는 어디서 만나게 될까요? 정신분석이 발견한 것 속에서 문제의 핵심은 실제로 만남, 어떤 본질적인 만남입니다.투케-실재와의 만남- 가 항상 오토마톤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 프로이트의 연구 전반에 걸쳐 주된 관심사를 이룬다. 투케는 항상 어긋남의 만남으로서의 실재의 기능은 트라우마의 형태입니다.1차 과정을 의식속에서 포착되는 표면적인 표상이라고 한다면 불쑥불쑥 출연하는 표상된 현실이 무엇때문인지 깨어남을 구성하는 현상, 거리, 간극 그 자체를 포착한다면 우리는 문제의 핵심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꿈은 본질적으로 어긋난 현실, 즉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어남 속에서 무한히 반복됨으로써만 이뤄질 수 있는 현실에 바치는 오마주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 즉 막아야만 했던 현실 속의 유감스러운 사고에 대한 표상 속에서 주체의 의식이 깨어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우리가 실재를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꿈의 저편, 즉 하나의 대리자만을 갖는 표상의 결여 뒤에서 꿈이 우리에게 감싸 숨기고 있는 어떤 것 속에서 입니다.
반복은 욕구의 반복이 아니고 주체가 남아있는 결여된 대상을 가지고 새롭게 사유하는 것입니다.
대상 a로서의 응시에 관하여
6. 눈과 응시의 분열
주체가 전의식적으로 은폐되는 부분이 깨어남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도 여전히 분열은 계속된다. 주체의 여정에서 현상학적으로 우리는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점에 의존한다. 존재적으로 나르시시즘은 우리가 세계의 광경 속에서 응시되고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를 의식하고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동시에 우리를 세계의 거울로 위치시킨다. 그러한 응시에 의해 우리는 응시되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7. 왜상
나를 바라보고 무화시키는 응시는 그것이 나의 관점들과 역선을 변화시키고, 내가 자리 잡고 있는 무의 지점으로분터 유기체들의 방사형 그물망을 통해 나의 세계를 질서 짓는다. 응시는 가시화된다. 불시에 수치심에 빠뜨리는 응시는 왜상으로 의미를 감춘다.아님 응시가 왜상일까?
8. 선과 빛
외양너머에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응시가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지는 빛의 공간 속에서 응시는 언제나 일종의 빛과 불투명성의 유희입니다. 일반적으로 응시와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의 관계는 미혹의 관계입니다. 주체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나타나며 그에게 보라고 주어지는 것은 그가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를 통해 눈은 대상 a 로, 다시 말해 결여의 수준에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지요.
9. 그림이란 무엇인가
욕망의 결여가 의태라는 현상으로 사물로부터 응시된 것을 제스처한 행위일까?
전이와 충동
10. 분석가의 현존
무의식에서 전이라는 개념을 원인에서부터 분석하는 것은 전이가 분석 상황 바깥의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그 안에서의 분석가의 현존은 무의식이라는 개념과 통합될 수 밖에 없다.
11.분석의 진리 혹은 무의식의 닫힘
주체는 본질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속성이 있다.주체가 시니피앙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하나의 표지로서 정의된다. 현실과의 관계에 있어 곤궁에 빠진 주체가 전이로서 무의식의 현실을 현행화한다.
12. 시니피앙들의 행렬 속에서의 성욕.
종족보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사회는 그 구조에서 성적현실의 통합이 필요하다. 조합을 위한 시니피앙이 도입된 이유이기도 하다. 무의식을 사유와 성적 현실 사이의 시원적 접합의 잔류 효과로 간주해야 하는 물음은 그 결절점이 욕망이라는 욕망의 요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성적으로 욕망하는 주체의 현존이 주체에게 시니피앙을 낳게 한다.
13. 충동의 분해
경험의 근원적 소여를 일컫는 충동 개념은 추동력, 원천, 대상, 목표라는 네가지 항목으로 구분한다. 추동력은 자극이라는 사태에 의해 발생하는데 실재로 충동은 자아를 유지시키는 프로그램되고 객체화된 주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충동자극에 의한 포텐셜 에너지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추동력은 항구성을 지니고 있다. 충동의 만족이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목표는 금제 되어 있기에 도달하기보단 승화된다고 할 수있다. 만족하는 `스스로` 라는 것이다.쾌락원칙의 기능이 환각을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이라는 개념은 충동에 있어 대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무관하다는 것이다. 원천적으로 충동은 욕구의 가두리 구조로서 확인된다.
14. 부분 충동과 그 회로
성욕의 생물학적 목적상 충동은 부분 충동이라는 것이다.항상성을 유지하는 체계의 현실 때문에 부분 충동의 형태로 기능한다. 충동은 구조의 측면에서 양쪽 끝은 시니피앙들의 기능과 욕망이라는 해석으로 정의된다. 충동을 구조화시키는 왕복 운동은 주체가 타자의 수준에서 나타날 때 순환적인 회귀가 이루어진다.타자의 등장 덕분에 충동의 구조가 나타난다면, 즉 한쪽 끝에서 다른 쪽 극으로의 전회가 일어나는 순간 타자가 개입하고 주체가 스스로를 충동의 끝, 종착점으로 간주되는 순간이다.이 순간에 고통이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주체가 타자를 통해 느끼게 되는 고통이다.
15. 사랑에서 리비도로
무의식의 주체에게서 우리는 부분 충동을 포착한다. 생식기적 충동에서 생식기를 제외한 주체에게 사랑에 대해 말한다면 사랑은 구조적인 면에서 본질적으로 성적 열정에 지나지 않으며 실재적 나가 구성되고 불쾌의 장, 잔여물과 이물체로서의 대상의 장이 구성된다. 또한 주체는 사랑으로서 수동적이고 자신의 충동을 경유해서만 능동성을 갖는다.
유성 생식의 주기로 인해 상실된 대상 a 는 삶에 대한 리비도적 본능이다.
타자의 장, 그리고 전이로의 회귀
16. 주체와 타자 --- 소외
주체와 타자의 장 사이의 분할을 말하면 모든 충동은 어떤 충동도 성충동의 전체성을 표상할 수 없다.성욕은 결여라는 통로를 통해 주체의 장에 자리 잡는다. 그 결여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도달하게 만드는 변증법이 작용하는데에 결함이 있고 다른 결여는 생명체가 재생산되면서 게체로서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니피앙의 구조로부터 출연한다.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는 전적으로 간극의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과정은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순환적으로 분절 되어야 한다.타자의 장에서 생겨나는 시니피앙은 과정 중에 있는 주체를 하나의 시니피앙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이다. 주체가 굳어지는 닫힘이 설정된다.
주체가 타자의 장에서 탄생한다는 측면에서 주체를 이해해본다면, 무의식의 주체의 특성은 그 주체가 그물망, 연쇄, 이야기 등을 전개하는 시니피앙 아래에 있으면서 어떤 비결정된 자리에 놓인다는 것이다. 소외는 오로지 주체가 타자의 장에서 출현하지 않기에 주체로 하여금 어떤 분열 속에서만 나타나도록 운명짓는 벨(선택) 속에 있다.소외를 야기하는 이 `벨` 은 언어 속에 존재한다.
17. 주체와 타자 ---- 아파니시스
이항적 시니피앙이 주체의 아파니시스 효과를 가져 주체가 분열되어 원환되는 것에 분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주체가 자유로워지려면, 그 이항적 시니피앙의 아파니시스 효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18.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최초의 이항체, 선에 대하여
전이는 주체와 정신분석가 모두가 포함되어 있는 현상이다.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가 어딘가에 존재하는 순간부터 전이가 존재한다. 주체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의 수준에서 작용하는 끊임없는 연쇄가 드러남은 그 주체의 자리에 분석가의 욕망도 해당되는 것이다. 시니피앙들을 잇는 틈새 속에 위치한 결여로서 출연한 것, 다시 말해 타자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주체는 시니피앙의 분절에서 그 기능을 파악하게 된다.상실의 대상 a 는 자아에게 쾌와 불쾌라는 주체의 분열 혹은 소외라 부른 것의 작용을 확실하게 구성할 수 있게 한다.
19. 해석에서 전이로
실재 내에서 자아는 쾌락의 효과에 의해 항상성으로 회귀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장에 반영된 부분만을 특권화한다.
어떤 시니피앙이 어떤 다른 시니피앙을 대체함으로써 은유 효과가 창출된다. 주체의 삶이 각 단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서, 그때마다 이 본원적 시니피앙에 의해 구성된 결정적인 지표값을 다시 수정하게 된다는 시실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바로 주체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에 의해 구성된다고 하는 변증법적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동일시의 주요 계기들인 이상화, 자아이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타자의 장을 통해서이다. 자아이상의 영향력의 본질적 원동력은 바로 이러한 교차, 즉 단항적 시니피앙을 쾌락의 장 속에서, 다시 말해 나르시시즘적인 일차적 동일시의 장 속에서 가능하도록 만드는 교차 속에 있다. 분리 과정에 의해 도입되는 대상 a 는 충동 속에서 인간의 삶에 성의 의미를 등장시키는 것이 바로 시니피앙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통해 규정되고 명시되는 부분을 지탱한다.
결론지어야 할 나머지
20. 네 안의, 너 이상의 것을
주체는 타자로 하여금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자신에게 확신시키게끔 거울상적인 동일시로 이끈다. 주체가 자신을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바라보는 지점과 주체가 자신을 a에 의해 초래된 결여로서 바라보는 지점, 그러면 주체의 시원적 분열로써 구성된 간극을 a가 틀어막고 있는 지점 사이의 거리를 유지시켜야 한다.이것이 분석 작업의 원동력이고 이렇게 동일시라는 국면을 뛰어 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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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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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채식을 하는 이유를 이해시켜야 하는지.. 대부분의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이 정상인지..
자신이 믿는 가치가 본능에 가까운 이기심의 발로가 아닌지..
살면서 살아야하는 이유를 꼭 찾아야 하는지..
자기를 안에서 찾기도 하고 밖에서 찾기도 하는데 이 둘 다를 잘하는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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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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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잠언의 형식으로 쓰여진 글은 그 함축된 의미가 간결해서 읽는 맛이 난다. 어떤 글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마음을 까발린 듯해서 상쾌하기까지 한다.때론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은 젖혀두고 한 두 줄이 갖는 의미가 전부인 것처럼 새겨져서 의미를 왜곡 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은 염세적인 또는 긍정을 숨긴 글들은 폐부를 찌른듯이 매력적이지만 한편 경향성있게 해석하기에 가치관이 정립되는 시기에 읽기에는 조심스럽다.
니체는 현대인이 원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 행복에 대한 본능을 노예의 덕성으로 보고 강한자의 덕을 회의하고 불신하는 사회적 약자가 갖는 도덕적 가치를 폄하하고 주인도덕이라는 힘있는 자의 의지로 표현하는 고귀한 인간의 준엄함과 엄격함으로 가치를 결정하며 노예도덕과 가치 차별을 뒀지만 `인간의 자기 극복` 이라는 향상을 위한 `거리의 파토스` 를 말했다.
잠언의 형식인 글은 일부분을 발췌하는 걸로 요약을 대신했다.
◇선악의 저편
제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
진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가치들의 대립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개개의 철학적인 개념은 자의적이지도 않고 스스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며, 상호 간의 관계와 유사성 속에서 성장한다.자기 원인은 인간이 사유한다는 점에서 오만한 자부심으로 자기 모순,논리적인 강요 그리고 부자연스러움에 빠져 버렸다.
제2장 자유정신
육화된 도덕의 위선, 정신적인 가면을 쓴 도덕적 치졸함은 스스로 복수심에 불타는 교활한 자와 독살자가 되어 버린다.즉 철학자의 순교와 그의 `진리를 위한 희생`은 그 자신 안에 있는 선동자와 배우가 숨겨왔던 것을 드러내도록 강제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의도라는 것은 한층 더 해석이 필요한 기호이고 징후일 뿐이며, 또한 기호는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하며 그 자체만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p 62)
도덕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도덕의 자기 극복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날 가장 섬세하며 정직하고 또한 악의적이기도한 양심에게, 살아 있는 영혼의 시금석으로 보존된 저 오랫동안의 비밀스러운 작업을 나타내는 이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p62)
자유정신을 가진 미래의 철학자들의 정신이 오늘날 필요하다!
제3장 종교적인 것
인간을 예술가로 조형할 수 있기에는,인간은 충분히 고귀하지도 준엄하지도 않다. 숭고한 자기 극복으로 천태만상의 실패와 몰락의 중요한 법칙을 지배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강하지도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가지고 있지도 않다.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위계 질서와 위계의 간극을 보기에는 인간에게 충분한 품위가 없다.
그러한 인간들이 그들의 `신 앞에서의 평등`으로 지금까지 유럽의 운명을 지배해왔다.(p103)
제4장 잠언과 간주곡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과 허영심을 짧게 표현하였다. 그 인간이 남성이라고 가정하면 아주 짧게 여성을 얘기했다.
제5장 도덕의 자연사
철학자들이 도덕의 정초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유행하는 도덕에 대한 훌륭한 믿음의 현학적인 한 형식일 뿐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새로운 수단이다.p138
도덕적 가치 판단을 지배하는 공리성으로 어떤 의견 속에,어떤 상태와 정동 속에,어떤 의지 속에,어떤 재능 속에 공공에 위험한 것,평등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많고 적게 있는가 하는 것, 이제 이것이 도덕적 관점이다.p159
`최대의 다수` 라는 무의미는 종식시키고 새로운 철학자에게 인간에게 인간의 미래를 자신의 의지로 만들 것을,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치며, 훈육과 육성이라는 위대한 모험과 총체적인 시도를 준비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다.p163
제6장 우리 학자들
학문적 인간이란 그는 고귀하지 못한 천성의 인간,즉 고귀하지 못하고 다시말해 지배력이 없고 권위가 없으며 자족할 줄도 모르는 천성의 덕목을 지닌 인간이다: 그는 근면하고, 참을성 있게 질서에 적응하며 능력과 욕구에서도 균형과 절도를 지니고 있다.p174
학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쁘고 위험한 것은 그의 속성 중 평범함의 본능에서 온다: 즉 비범한 인간을 본능적으로 근절하려고 하고,배려하면서 물론 부드러운 손길로 활시위를 이완시키며,친밀한 동정으로 활시위를 이완시킨다.p175
회의란 속된 언어로 말해 신경쇠약이나 허약함으로 불리는 어떤 복잡한 생리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정신적인 표현이다.p180
미래의 철학자의 비판가로서의 속성: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치척도의 확실성, 의식적으로 통일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 기지 있는 용기, 독립성과 자기 책임 능력 등이다. 그들은 부정을 말하는 것과 해부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과 피를 토할 듯 아픔을 느끼는 경우에도 확실하고 정교하게 메스를 잡을 줄 아는 사려 깊은 잔인함을 스스로 시인한다.p186
철학자의 자기 이상의 단면: 가장 고독한 자, 가장 은폐된 자, 가장 격리된 자, 선악의 저편에 있는 인간, 자신의 덕의 주인, 의지가 넘쳐나는 자가 될 수 있는 자가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p191
철학자의 덕은 모두, 즉 사상의 대담하고 경쾌하고 부드러운 발걸음과 진행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커다란 책임을 기꺼이 지고자 하는 각오, 지배자적인 눈길과 내려다보는 눈길의 고귀함, 대중과 그들의 의무나 미덕에서 스스로 격리되어 있다는 감정, 신이든 악마든 오해받고 비방받는 사람들을 상냥하게 보호하고 변호하는 것, 위대한 정의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 명령하는 기술, 의지의 폭넓음, 좀처럼 찬미하지 않고 우러러보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서서히 움직이는 눈 등은 하나하나 획득되고 보호되고 유전되고 동화된 것임이 틀림없다.p194
제7장 우리의 덕
자신에게는 도덕적인 분별심이나 도덕적 식별의 섬세함이 있다고 믿게 하는데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을 경계하라!이러한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우리 앞에서 잘못된 일을 하면 우리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p199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편협한 사람들이 덜 편협한 사람들에게 즐겨 쓰는 복수이고, 또한 그들이 자연에서 재능을 받지 못한 데 대한 일종의 손해배상이며, 결국 정신을 얻어 고상해지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p201
우리는 성실에서 벗어나 마침내 성자나 권태로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인생은 그 속에서 지루해하기에는 수백 배나 짧지 않은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원한 삶을 믿어야 할 거시다-------(영겁회귀)p213
어떤 사람에게 정당한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정당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만인을 위해 하나의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보다 높은 인간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p215
우리가 `더 높은 문화` 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은 잔인함이 정신화되고 심화한 데 바탕을 둔 것이다.p216
정신은 여기에서 자신의 가면의 다양성과 교활함을 즐기며, 여기에서 안정감을 즐긴다.
이러한 정신의 의지에 대항하여 사물을 깊이 있게 다양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생각하고자 하는 인식하는 사람의 저 숭고한 경향은 맞서 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인데, 용감한 사상가는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p219
제8장 민족과 조국
유럽인의 특징.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도덕의 두가지 유형으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이 있다. 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고귀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강자를 존경하며, 또한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이 있는 자, 말하고 침묵하는 법을 아는 자, 기꺼이 자신에 대해 준엄하고 엄격하며 모든 준엄하고 엄격한 것에 경의를 표하는 자를 존경한다. 노예의 시선은 강한 자의 덕에 증오를 품는다:그는 회의하고 불신하며, 거기서 존중되는 모든 `선`을 정교하게 불신한다.p279
고귀함의 표시: 우리의 의무를 모든 사람에 대한 의무로까지 끌어내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의 책임을 양도하려고 하거나 분담하려고 하지 않는 것. 자신의 특권과 그것을 행사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들 가운데서 생각해보는것.p297
한 인간의 높이를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천박한 점이나 표면적인 것은 더욱 날카롭게 바라본다----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p298
`여기에서는 전망은 트이고, 정신은 고양된다.`---그러나 높은 곳에 있고 전망이 트여 있는데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반대 부류의 인간이 있다.p304
높은 곳에서
후곡

◇도덕의 계보
----- 하나의 논박서
서론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p340
제1논문: `선과 악` , ` 좋음과 나쁨`
니체는 도덕이 가진 가치의 의미로서 `좋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원래 비이기적 행위란 그 행위가 표시되어, 즉 그 행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의 입장에서 칭송되고 좋다고 불렸다. 그 후 사람들은 이 칭송의 기원을 망각하게 되었고 비이기적 행위가 습관적으로 항상 좋다고 칭송되었기에, 이 행위를 그대로 좋다고도 느꼈던 것이다.
`좋음` 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 을 받았다고 표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에서 가치를 창조하고 가치의 이름을 새기는 권리를 비로소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좋음` 이라는 개념은 `공리적` , `합목적적` 이라는 개념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평가되며, 따라서 `좋음` 과 `나쁨` 을 판단할 때 인류는 `공리적이고 목적에 맞는` , 그리고 ` 해롭고 목적에 맞지 않는` 에 관한 잊지 못하고, 잊을 수 없는 바로 그들 자신의 경험을 요약하고 승인한 것이다.
고귀한 도덕의 가치로 볼 때는 유대인의 정신은 사악한 적이다.
유대인이야말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정연한 논 리로 귀족적 가치 등식을 역전하고자 감행했으며, 가장 깊은 증오의 이빨을 갈며 이를 고집했던 것이다. 즉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또한 유일하게 경건한 자이며 신에 귀의한 자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즉 유대인과 더불어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 시작된다.인류의 (즉 `주인`으로부터의) `구원`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니체는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 밖에 있는 것` , `다른 것` , `자기가 아닌 것` 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러산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약한 자에게 선한 존재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해도 약자의 약함 자체는 그의 본질이며 활동, 그의 유일하고 피할 수 없으며 분리할 수 없는 현실 전체를 말한다. 이런 종류의 인간에게는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신성시하곤 하는 자기 보존과 자기 긍정의 본능에서 선택의 자유를 지닌 중립적인 `주체` 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제2논문: `죄` , `양심의 가책` 및 기타
망각은 기억을 만들려는 망각의 제거로 능동적인 의욕의 상태,계속하려는 의욕 그리고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죄` , `양심` , `의무` ,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이 영역, 즉 채무법이다.현존하는 사람들과 조상의 관계에서 현대인들은 혜택을 받고 이익을 얻으며 잘못을 저지르고 형벌을 받으며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고 양심의 가책을 갖는다.우리 현대인들, 우리는 수천 년간 양심의 해부와 자기 동물성 학대의 상속인이다.
자기 자신을 다루는 데 준엄함과 고매함을 알게 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더 깊은 고통을 주며 근본적으로 사람을 갈라 놓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 그러나 언젠가는 썩은 냄새가 나고 자기 회의적인 이 현대보다 더 강한 시대가 되면, 위대한 사랑과 경멸을 지닌 구원의 인간이, 자신이 미는 힘으로 모든 것을 초월한 저편의 경지에서 언제나 되풀이하여 밀려나오는 창조적 정신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말 것이다.
제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한다.--- 이 의지는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는 것이다.-----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내 말을 이해했는가? -- `전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 이었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해석은 모든 고통은 죄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갔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는 결국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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