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잠언의 형식으로 쓰여진 글은 그 함축된 의미가 간결해서 읽는 맛이 난다. 어떤 글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마음을 까발린 듯해서 상쾌하기까지 한다.때론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은 젖혀두고 한 두 줄이 갖는 의미가 전부인 것처럼 새겨져서 의미를 왜곡 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은 염세적인 또는 긍정을 숨긴 글들은 폐부를 찌른듯이 매력적이지만 한편 경향성있게 해석하기에 가치관이 정립되는 시기에 읽기에는 조심스럽다.
니체는 현대인이 원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 행복에 대한 본능을 노예의 덕성으로 보고 강한자의 덕을 회의하고 불신하는 사회적 약자가 갖는 도덕적 가치를 폄하하고 주인도덕이라는 힘있는 자의 의지로 표현하는 고귀한 인간의 준엄함과 엄격함으로 가치를 결정하며 노예도덕과 가치 차별을 뒀지만 `인간의 자기 극복` 이라는 향상을 위한 `거리의 파토스` 를 말했다.
잠언의 형식인 글은 일부분을 발췌하는 걸로 요약을 대신했다.
◇선악의 저편
제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
진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가치들의 대립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개개의 철학적인 개념은 자의적이지도 않고 스스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며, 상호 간의 관계와 유사성 속에서 성장한다.자기 원인은 인간이 사유한다는 점에서 오만한 자부심으로 자기 모순,논리적인 강요 그리고 부자연스러움에 빠져 버렸다.
제2장 자유정신
육화된 도덕의 위선, 정신적인 가면을 쓴 도덕적 치졸함은 스스로 복수심에 불타는 교활한 자와 독살자가 되어 버린다.즉 철학자의 순교와 그의 `진리를 위한 희생`은 그 자신 안에 있는 선동자와 배우가 숨겨왔던 것을 드러내도록 강제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의도라는 것은 한층 더 해석이 필요한 기호이고 징후일 뿐이며, 또한 기호는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하며 그 자체만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p 62)
도덕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도덕의 자기 극복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날 가장 섬세하며 정직하고 또한 악의적이기도한 양심에게, 살아 있는 영혼의 시금석으로 보존된 저 오랫동안의 비밀스러운 작업을 나타내는 이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p62)
자유정신을 가진 미래의 철학자들의 정신이 오늘날 필요하다!
제3장 종교적인 것
인간을 예술가로 조형할 수 있기에는,인간은 충분히 고귀하지도 준엄하지도 않다. 숭고한 자기 극복으로 천태만상의 실패와 몰락의 중요한 법칙을 지배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강하지도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가지고 있지도 않다.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위계 질서와 위계의 간극을 보기에는 인간에게 충분한 품위가 없다.
그러한 인간들이 그들의 `신 앞에서의 평등`으로 지금까지 유럽의 운명을 지배해왔다.(p103)
제4장 잠언과 간주곡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과 허영심을 짧게 표현하였다. 그 인간이 남성이라고 가정하면 아주 짧게 여성을 얘기했다.
제5장 도덕의 자연사
철학자들이 도덕의 정초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유행하는 도덕에 대한 훌륭한 믿음의 현학적인 한 형식일 뿐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새로운 수단이다.p138
도덕적 가치 판단을 지배하는 공리성으로 어떤 의견 속에,어떤 상태와 정동 속에,어떤 의지 속에,어떤 재능 속에 공공에 위험한 것,평등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많고 적게 있는가 하는 것, 이제 이것이 도덕적 관점이다.p159
`최대의 다수` 라는 무의미는 종식시키고 새로운 철학자에게 인간에게 인간의 미래를 자신의 의지로 만들 것을,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치며, 훈육과 육성이라는 위대한 모험과 총체적인 시도를 준비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다.p163
제6장 우리 학자들
학문적 인간이란 그는 고귀하지 못한 천성의 인간,즉 고귀하지 못하고 다시말해 지배력이 없고 권위가 없으며 자족할 줄도 모르는 천성의 덕목을 지닌 인간이다: 그는 근면하고, 참을성 있게 질서에 적응하며 능력과 욕구에서도 균형과 절도를 지니고 있다.p174
학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쁘고 위험한 것은 그의 속성 중 평범함의 본능에서 온다: 즉 비범한 인간을 본능적으로 근절하려고 하고,배려하면서 물론 부드러운 손길로 활시위를 이완시키며,친밀한 동정으로 활시위를 이완시킨다.p175
회의란 속된 언어로 말해 신경쇠약이나 허약함으로 불리는 어떤 복잡한 생리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정신적인 표현이다.p180
미래의 철학자의 비판가로서의 속성: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치척도의 확실성, 의식적으로 통일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 기지 있는 용기, 독립성과 자기 책임 능력 등이다. 그들은 부정을 말하는 것과 해부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과 피를 토할 듯 아픔을 느끼는 경우에도 확실하고 정교하게 메스를 잡을 줄 아는 사려 깊은 잔인함을 스스로 시인한다.p186
철학자의 자기 이상의 단면: 가장 고독한 자, 가장 은폐된 자, 가장 격리된 자, 선악의 저편에 있는 인간, 자신의 덕의 주인, 의지가 넘쳐나는 자가 될 수 있는 자가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p191
철학자의 덕은 모두, 즉 사상의 대담하고 경쾌하고 부드러운 발걸음과 진행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커다란 책임을 기꺼이 지고자 하는 각오, 지배자적인 눈길과 내려다보는 눈길의 고귀함, 대중과 그들의 의무나 미덕에서 스스로 격리되어 있다는 감정, 신이든 악마든 오해받고 비방받는 사람들을 상냥하게 보호하고 변호하는 것, 위대한 정의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 명령하는 기술, 의지의 폭넓음, 좀처럼 찬미하지 않고 우러러보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서서히 움직이는 눈 등은 하나하나 획득되고 보호되고 유전되고 동화된 것임이 틀림없다.p194
제7장 우리의 덕
자신에게는 도덕적인 분별심이나 도덕적 식별의 섬세함이 있다고 믿게 하는데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을 경계하라!이러한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우리 앞에서 잘못된 일을 하면 우리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p199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편협한 사람들이 덜 편협한 사람들에게 즐겨 쓰는 복수이고, 또한 그들이 자연에서 재능을 받지 못한 데 대한 일종의 손해배상이며, 결국 정신을 얻어 고상해지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p201
우리는 성실에서 벗어나 마침내 성자나 권태로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인생은 그 속에서 지루해하기에는 수백 배나 짧지 않은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원한 삶을 믿어야 할 거시다-------(영겁회귀)p213
어떤 사람에게 정당한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정당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만인을 위해 하나의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보다 높은 인간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p215
우리가 `더 높은 문화` 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은 잔인함이 정신화되고 심화한 데 바탕을 둔 것이다.p216
정신은 여기에서 자신의 가면의 다양성과 교활함을 즐기며, 여기에서 안정감을 즐긴다.
이러한 정신의 의지에 대항하여 사물을 깊이 있게 다양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생각하고자 하는 인식하는 사람의 저 숭고한 경향은 맞서 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인데, 용감한 사상가는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p219
제8장 민족과 조국
유럽인의 특징.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도덕의 두가지 유형으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이 있다. 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고귀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강자를 존경하며, 또한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이 있는 자, 말하고 침묵하는 법을 아는 자, 기꺼이 자신에 대해 준엄하고 엄격하며 모든 준엄하고 엄격한 것에 경의를 표하는 자를 존경한다. 노예의 시선은 강한 자의 덕에 증오를 품는다:그는 회의하고 불신하며, 거기서 존중되는 모든 `선`을 정교하게 불신한다.p279
고귀함의 표시: 우리의 의무를 모든 사람에 대한 의무로까지 끌어내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의 책임을 양도하려고 하거나 분담하려고 하지 않는 것. 자신의 특권과 그것을 행사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들 가운데서 생각해보는것.p297
한 인간의 높이를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천박한 점이나 표면적인 것은 더욱 날카롭게 바라본다----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p298
`여기에서는 전망은 트이고, 정신은 고양된다.`---그러나 높은 곳에 있고 전망이 트여 있는데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반대 부류의 인간이 있다.p304
높은 곳에서
후곡

◇도덕의 계보
----- 하나의 논박서
서론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p340
제1논문: `선과 악` , ` 좋음과 나쁨`
니체는 도덕이 가진 가치의 의미로서 `좋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원래 비이기적 행위란 그 행위가 표시되어, 즉 그 행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의 입장에서 칭송되고 좋다고 불렸다. 그 후 사람들은 이 칭송의 기원을 망각하게 되었고 비이기적 행위가 습관적으로 항상 좋다고 칭송되었기에, 이 행위를 그대로 좋다고도 느꼈던 것이다.
`좋음` 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 을 받았다고 표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에서 가치를 창조하고 가치의 이름을 새기는 권리를 비로소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좋음` 이라는 개념은 `공리적` , `합목적적` 이라는 개념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평가되며, 따라서 `좋음` 과 `나쁨` 을 판단할 때 인류는 `공리적이고 목적에 맞는` , 그리고 ` 해롭고 목적에 맞지 않는` 에 관한 잊지 못하고, 잊을 수 없는 바로 그들 자신의 경험을 요약하고 승인한 것이다.
고귀한 도덕의 가치로 볼 때는 유대인의 정신은 사악한 적이다.
유대인이야말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정연한 논 리로 귀족적 가치 등식을 역전하고자 감행했으며, 가장 깊은 증오의 이빨을 갈며 이를 고집했던 것이다. 즉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또한 유일하게 경건한 자이며 신에 귀의한 자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즉 유대인과 더불어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 시작된다.인류의 (즉 `주인`으로부터의) `구원`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니체는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 밖에 있는 것` , `다른 것` , `자기가 아닌 것` 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러산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약한 자에게 선한 존재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해도 약자의 약함 자체는 그의 본질이며 활동, 그의 유일하고 피할 수 없으며 분리할 수 없는 현실 전체를 말한다. 이런 종류의 인간에게는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신성시하곤 하는 자기 보존과 자기 긍정의 본능에서 선택의 자유를 지닌 중립적인 `주체` 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제2논문: `죄` , `양심의 가책` 및 기타
망각은 기억을 만들려는 망각의 제거로 능동적인 의욕의 상태,계속하려는 의욕 그리고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죄` , `양심` , `의무` ,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이 영역, 즉 채무법이다.현존하는 사람들과 조상의 관계에서 현대인들은 혜택을 받고 이익을 얻으며 잘못을 저지르고 형벌을 받으며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고 양심의 가책을 갖는다.우리 현대인들, 우리는 수천 년간 양심의 해부와 자기 동물성 학대의 상속인이다.
자기 자신을 다루는 데 준엄함과 고매함을 알게 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더 깊은 고통을 주며 근본적으로 사람을 갈라 놓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 그러나 언젠가는 썩은 냄새가 나고 자기 회의적인 이 현대보다 더 강한 시대가 되면, 위대한 사랑과 경멸을 지닌 구원의 인간이, 자신이 미는 힘으로 모든 것을 초월한 저편의 경지에서 언제나 되풀이하여 밀려나오는 창조적 정신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말 것이다.
제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한다.--- 이 의지는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는 것이다.-----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내 말을 이해했는가? -- `전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 이었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해석은 모든 고통은 죄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갔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는 결국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