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동물 해방 - 개정완역판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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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 해방

인간만이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권리를 부정하는 다시 말해서 동물들이 인간과 동등한 고려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이해하고 더불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동물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미디어에서 수 없이 다룬다고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법적 장치를 기대하고 응원하며 채식주의자를 보는 ‘유별나다‘는 편견을 거둬야 한다.

서문에서 피터 싱어는 이 책을 쓴 이유를 ‘ 나는 억압과 착취가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에서건 이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이익에 대한 동등한 고려라는 기본적인 도덕 원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 종 구성원에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썼다‘ 라고 했다.
제1장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평등이라는 기본 원리는 평등한 또는 동일한 처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원리는 단지 평등하게 배려하길 요구할 따름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들을 평등하게 배려하는 것은 그들을 서로 다르게 처우하며, 그들이 서로 다른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한 인간이 흑인이거나 여성이라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그 사람의 지적인 능력이나 도덕적 능력에 대해 추론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실제로 얼마만큼이 서로 다른 인종과 성의 상이한 유전적 특성에 기인하며, 얼마만큼이 과거 및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차별 결과로서의 열악한 교육 조건과 주거 환경, 그리고 다른 요인들에 기인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평등을 옹호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과학적 연구 결과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평등은 도덕적 이념이지 사실에 관한 단언이 아니다.
인간 평등의 원리는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이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이다. 모든 사람은 각각 한 명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아무도 그 이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행위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개별 존재들의 이익은 다른 존재들의 이익과 다를 바 없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또한 동일한 비중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벤담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유무‘를 어떤 존재가 평등한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특징으로 꼽고 있다..
제2장 연구를 위한 도구
우리는 인간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연구 결과가 그것을 입증할 수 없는 경우에도 무분별한 실험을 자행해 왔다.
그럼에도 동물실험의 즉각적인 폐지 요구가 대중들의 환심을 사지 못한 한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대중들은 그와 같은 요구를 실험자들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우리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주요 질병 치유법 발견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요 실험 분야에서 동물 실험을 대체할 방법을 찾고, 같은 유형의 실험 보고서는 반복 되지 않도록 공유해야 하며, 동물 실험에서 고통을 줄여 실험하도록 개선하며, 무분별한 실험이 만연되지 않는 규제를 위한 법을 강화해야 한다.
제3장 지금 공장식 농장에서는...
생산자의 이득을 위해 과학 기술을 혁명적으로 사용하고 동물들은 본능적인 행동 조차도 제약 받으며 고통 속에 삶을 마감하고 있다.
제4장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
동물에 고통을 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채식을 해야 하고 사례들을 말한다.
제5장 인간의 지배
인간이 동물을 차별하는 시대적인 변화를 서술했다.
1988년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창조주가 인간에게 허락한 지배권은 절대 권력이 아니다. 우리에게 사물들을 선용하고 오용할 자유가 있다고 말 할 수 없으며, 이들을 임의로 사용할 자유도 없다. 자연계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생물학 법칙의 지배를 받을 뿐만 아니라,우리가 거스를 경우 죄를 면할 수 없는 도덕 법칙의 지배를 받기도한다‘.라고 강조했다.
제6장 오늘날의 종차별주의
인간이 갖는 본래적인 존엄성이 본연의 가치라는 강한 이념이 동물에 대한 동등한 고려를 놓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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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해석학과 비평
FR.슐라이어마허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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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과 비평

중고 서점(청주)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행여 늦어서 헛걸음 칠까 한달음에 달려가 기분 좋게 구입했다. 그렇지만 정작 읽기 시작할 때까지는 시간이 제법 흘렀다.
해석학이란 분야를 범주로 묶지 않고 순서도 없이 이것 저것 읽었지만 다행히 슐라이마허 - 딜타이 - 하이데거 - 가다머 - 리쾨르 로 이어지는 책을 한권씩은 읽게 되었다. 아쉽다면 기억도 나지 않는 해석학에 대한 책을 조금은 체계적으로 읽고 이해해서 기억 속에 담아 두지 못했다는 거다.
우리는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면 옮긴이의 글도 보고 서론도 보면서 마음이 설레기도 하지만 잘 이해해야 하는 부담감도 있다. 그렇지만 완독하고 다시 옮긴이의 말을 훑어보니 시작할 때 접한 요약된 내용이 한눈에 쓱 들어온다.
이 책은 힘들게 이해하고 사색하는 내용이 아니라 언어와 사고의 이중성에 대한 기술적인 방법을 고찰했다. 아니, 기술적이란 부분이 단순히 방법을 나열한게 아니고 해석에 대한 사고의 방법이니 심히 고민해봐야 한다.

해석학
서론
해석학과 문법의 공속성은 모든 말이 오로지 언어 이해의 전제 하에서 파악된다.
해석은 기술이다. 요구되는 능력은 언어 능력과 개별적인 타자 판단 능력에 기인한다. 말과 사고 과정의 재구성에서 나타나는 난점을 예방하는 것이 해석학의 과제이다. 여기에는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의 두 측면이 있다.
신약성서의 역사적 해석부터 시작되는 해석학은 보편적 해석과 특수적 해석으로 구분되는데 보편과 특수 간의 경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규정은 다층적 등급의 관계이다. 즉 ‘보편은 사고 전개의 법칙이 동일한 데까지만 진행하며 우리가 차이를 발견하는 곳에서 특수가 시작된다. 고 말해야 한다. 해석의 기술이 말보다 글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회피되어야 하는 것은 이중적인 오해인데, 그것은 내용에 대한 질적 오해이며 어조에 대한 오해 내지 양적인 오해이다.
이해의 기술은 말이 언어의 총체성으로서 주어진 말에 대한 역사적, 예료적 재구성이며 객관적, 주관적 재구성이다. 따라서 전체에 대한 개관을 얻기 위해서 통독이 정확한 해석에 선행해야 한다.
제 1 부
문법적 해석
모든 해석은 말 자체의 무규정적인 부분을 규정자로 이해하는 것이 무한한 과제라는 사실이다. 해석 작업에서 의미의 다양성은 일련의 대립으로 분해되어야 한다. 첫째는 본래적인 의미와 비본래적인 의미의 대립이다. 둘째는 보편적 의미와 특수한 의미의 대립이다. 주어져 있는 텍스트의 자리에서 단어가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한히 무규정적인 다양성에 속하며 우리는 그때마다 정당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단어의 근원적 통일성과 그 주변의 말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통일성에서 사용 방식의 다양성이 가능해야 한다면, 이미 통일성에서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
특정의 구절이 담고 있는 모든 말의 의미는 이 말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말과 이 말이 맺는 연관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전체의 글은 다소 연관에 속하며 모든 개별적인 구절의 주변에 놓여 있는 말에 귀속한다. 말에는 유기적 결합과 기계적 결합, 즉 내적 혼합과 외적 병렬이라는 두 종류의 결합만이 있다. 여기에 규정적으로 구별하기 위한 전치사, 접속사 등 불변화사가 있다.
문장들은 문장들간의 관계를 가지며 말의 통일성에 대한 관계를 갖는다. 후자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 간의 대립이며, 전자의 경우에 관건이 되는 것은 병렬적인 결합과 종속적인 결합의 대립이다.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의 관계는 중복과 강조 간의 관계와 동일하게 파악되어야 한다. 문장이 병렬적인가 종속적인가 하는 것은 불변화사와 결합 방식으로부터 나타나야 한다.
결론적 고찰
우리가 전체에 대한 개관을 고려해야 하는 적절한 준비를 한 다음 이어지는 독서에서 한 문장의 개별 요소들을 낱낱이 그 주변의 요소들로부터 규정할 때, 우리가 이 문장을 저자가 생각한 대로 파악했다는 것이 추호의 의심이 가지 않는 사실이라고 직접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우리가 표제나 잠정적인 독해 방식을 통해서 전체를 개관하게 되면, 중심 사상과 강조적인 언어 요소를 동일한의미로 나타나게 하는 테두리나 경계를 규정할 수 있다.이러한 동일성의 기준은 오로지 말의 본질적인 부분을이루는 표현에만 적용된다.
사유 복합체에서 비본질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구절의 전개 과정에서 본질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대립을 추적해야 한다. 규준의 또 다른 확장은 저자 자신이 동일한 사유 복합체를 담고 있는 문장을 대립을 통해 설명할 때 등장한다. 우리가 이미 설정된 규준을 계속해서 추적한다면, 먼저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 그리고 단순한 서술 수단을 구별해야 한다.
역사 비평 해석학은 글의 생성과 그 근원적 성질에 대한 외적 증거가 충분할 때 순수 해석학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해석학적 처리와 비평적 처리는 상호 완성을 위해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의 문법적 요소와 심리적 요소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는 글을 언어적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여기서 저자의 심리적 특유성에 대한 척도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다만 모든 난점이 언어적 측면에서 해소되거나 아무런 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저자의 심리적 특유성을 정확히 안다면, 이것은 물론 어렵고 항상 언어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지만, 언어적 측면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다.
제 2 부
심리적 해석
심리적 해석의 측면과 문법적 해석의 공동적 출발은 작품의 통일성과 작품 구성의 특징을 파악하는 일반적인 개관이다. 문법적 해석에서 말하는 작품의 통일성은 언어 영역의 구성이며, 작품 구성의 특징은 결합방식의 구성이다.
심리적 해석의 최종 목표는 다름 아니라 전개된 시작이다. 즉 행위의 전체를 그 부분으로 직관하고 모든 부분 가운데서 다시금 실질적 내용을 운동자로 직관하며 형식을 내용에 의해 운동되는 속성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전체의 목표는 대상에 대한 표상의 수용과 배제로부터 나온다. 이 목표는 근접하되 구별할 수 있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심리적 해석에 앞서 시대적 상태와 내용이 고려되어야 한다. 전체의 해석 작업은 두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그것은 예언적, 예료적 방법과 비교적 방법인데 자기를 이른바 타자로 변화시키면서 자기와의 비교를 통한 예료적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보편자로 정립한다음 이것을 보편자 가운데서 파악되는 다른 존재와 비교함으로써 해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이념은 오로지 소재와 영향 영역이라는 두 계기로부터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심리적 해석의 과제는 일반적으로 그것이 그 자체로 고찰될 경우, 주어져 있는 복합적인 생각을 특정한 인간의 삶의 계기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제 심리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의 중심 구별을 고수함으로써 자연히 개인의 자극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며 총체적 삶이 전체의 전개에 끼치는 지속적인 작용으로 이해한다.
심리적 해석 과제
작품의 총체성과 특정의 필연성. 즉 외적인 것의 설명과 내적 맹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품의 특수한 경향과 특수한 목적에 대한 지식 없이는 작품의 구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저자의 작품 가운데 특정한 관계가 발생한다면, 과제의 해결은 이를 통해서 용이해진다. 그러나 개별자가 소재와 형식의 통일성에서 나다난다면, 그리고 심지어 남아 있는 것이 공동의 관계를 갖는다면, 여기에 저자의 감추어진 통일성과 비밀스런 목적이 들어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비밀스런 의도를 저자의 작품에서 찾아내어야 하는 여부를 알기 위해서, 저자의 삶의 관계와 상태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작품과 그때마다의 우연적인 창작물의 대립을 받아 들인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단순한 자극과 충동에 기인하며 그 자체로 존립하는 요소이다.
작품에는 소재와 형식의 관계로부터 이해될 수 없는 그 어떤 의미에서 가장 완벽한 예술작품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예술작품이 개별자의 작품으로서 아주 불완전하다는 데 있다.
해석 대상이 되는 일정한 사유 복합체는 대상과 형식의 관계 속에 있는 통일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상이한 구성 방식과 구성 영역에서 주관적인 보조 목적이나 하위의 통일성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관계의 규정은 본질적으로 작품의 통일성에 속하며 그 특성을 규정한다. 만약 대립이 지양되면, 작품은 훨씬 더 자유로운 사고의 결합이 되며 자유로운 운동이 된다. 이에 반해서 대립이 지배적이면 작품의 통일성은 더 규정적이며 더 고차원적인 것이 된다.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의 대립은 그것이 처음부터 의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항상 형식의 필연성으로부터 형성된다. 통일성은 그것이 대부분 저자에게 구속적이며 특정한 형식에 관계할 때 가장 생산적이며 가장 강하다. 이 두 최종점 사이에 개별적인 계기들의 전체 운동 계열이 놓여 있다.
우리가 저자의 명상과 구성에 대한 명확한 푱상을 갖고 있다면, 명상과 구성의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쉽게 나온다.
기술적 해석 과제
우리는 글이 생동적인 처음 결심으로부터 내용과 형식을 따라 어떻게 생겨나며 전체로서의 글이 어떻게 이어지는 결심의 전개인지를 고찰해야 한다. 이렇게 고찰될 수 있는 글의 모든 요소는 기술적 해석의 대상이다. 문법적 측면에서는 개인이 언어에서 행사하는 강제를 통해서 언어 요소의 확장과 수축이 논리적 측면을 향해 일어난다.
우리는 명상의 비가시적 영역에 있게 되는데, 모든 글이 그 특유의 생성 계열을 가지며, 여기서 근원적인 것은 개별 사상이 생각될 수 있는 질서이다.
모든 사람은 이러한 과제에서 자신을 통해 이것이나 저것을 향하는 지배적인 방향을 갖는다. 그러므로 해석학적 작업의 방식은 고유한 생각의 전개에 따라 규정된다. 우리가 형식과 개별적인 점들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정도만큼의 전체를 헝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해석학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저자의 명상과 구성의 관계를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하나의 글에서 형식과 내용이 서로에게 많이 나타날수록 명상과 구성의 구별은 더 적어진다. 어떤 영역에서 두 행위의 분리가 최소치이며 그것이 해석학적 관심에 대해 사라지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대부분 순수 학문적인 진술이다.
완전한 이해에는 내가 놓친 것뿐만 아니라 내가 저자에게서 대상에 대해 나의 생각과 모순되는 것을 발견한 것을 아는 것이 분명하게 속한다.
저자의 명상을 구성에 대해 다룬 것과 분리해서 이를 그 총체성에서 아는 관심이다. 명상을 이해하는 과제가 구성에 대한 이해에 의존적이라는 것은 참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전체 명상의 지식을 통해서만 구성을 발생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생각이 전개되는 내적 과정에 대한 고유의 경험을 가져야한다. 해석자는 이 생각의 전개를 말하자면 기초로 가지고 와야 하며미를 비교하면서 이 영역에 들어 있는 차이를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생각에 대한 처리 방식에서 타자의 특유성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은 해석학적 과제의 본질이다.
구성 자체에 대한 고찰을 이행하면 우리는 여기서 저자가 전체 작품을 지배하는 내적인 자극을 내적으로 완전히 전개시켰다는 것과 그가 작품에 이르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이제 구성을 시작한다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최초의 것은 항상 일반적인 개관이며, 이를 통해 총체성이 분명해지고 전체의 구조와 전체에 대한 규정적 정식이 발견된다. 만약 개관이 애매한 구절로 유도되고 이 구절이 구성의 중ㅛ점을 포함하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가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는 염려를 피할 수 없다.
결론적 고찰
역사에 대한 조심스런 관찰은 학문의 부흥 이래로 해석 작업이 해석의 원리를 더 많이 다룰수록 그것은 모든 측면의 정신적인 발전에 더 많이 기여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여기서 관심을 갖는다면, 역사에 대한 관심, 예술적 관심이나 취미 관심, 사변적 관심 즉 순수 학문적 관심과 종교적 관심 등 세단계로 구별한다.
비평
서론
비평은 어떤 의미에서 법정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며, 비교라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본래의 경향은 항상 개별 창작물을 그 이념과 비교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또한 개별자를 다른 개별자와 연관하여 고찰하는 법정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비평과 문헌학적 비평사이에 대립이 존재한다.
역사적 비평의 과제는 그 통일성을 가능한 한 총괄하는 것인데, 마치 관계가 사실에 관계하는 것처럼 관계로부터 사실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를 규정하는 것이다.
문헌학적 비평은 특히 고전적인 고대의 글을 다루고 심지어 이를 그 순정성과 관련하여 다룬다. 이것은 학리적 비평이나 평론적 비평과 어떻게 관계하는가? 이 비평 작업은 사람들의 작품을 오로지 그 가치와 관련해서 올바로 평가하는데 있다. 여기서 평가는 무엇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미 동일한 대상에 나타나는 두 비평 방식의 상이성, 즉 학리적 비평과 문헌학적 비평의 상이성을 본다. 왜냐하면 학리적 비평은 저자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작품의 이념에 대해서만, 즉 작품이 이념에 부합하는가에 대해 고려하며 문헌학적 비평은 글 자체에서 정확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다.
기술을 통해 대상을 정확하게 서술하는 과제는 오로지 상이한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으며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 비평의 과제는 관계로부터 사실을 규명해 내는 것이다. 우리가 해석학적 작업의 규칙을 특히 역사적 작품에 적용하면 사실의 규명은 해석학의 영역을 넘어가고 이야기가 출현한 지각에 대한 규명만이 해석학적 과제이다.
우리가 이제 비평의 세 가지 중심 과제를 서로 비교해보면, 학리적 비평이 윤리적 비평을 포괄하며 모든 인간의 상태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전적으로 보편적인 과제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학리적 비평은 개별자를 규정하는 존재가 개념에 대해 맺는 관계와 관계한다.역사적 비평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과제이며, 여기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대립한다. 문헌학적 비평은 수용과 재현, 수용성과 자발성 간의 운동을 통해 생겨나는 점진적인 변형과 관계한다.
‘모든 비평 작업을 제약하는 것은 글에 들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혐의의 발생이다‘라고. 이러한 혐의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비평적 처리도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혐의의 원인인 실수와 오류가 발생하는 방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아니면 혐의가 발생하는 방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비평의 작업이 출발하는 근원적 전제로부터, 즉 주어져 있는 것이 원래의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혐의나 추측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비평 작업을 구분할 때 우리는 추측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적으로 나누게 된다. 즉 기계적인 실수를 추론하게 하는 추측과, 사실과 관계의 차이를 유발시키거나 야기하는 중간에 등장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추론하게 하는 추측으로 나눈다.
제 1 부 기계적 실수에 대한 비평
관계와 원래의 사실 간의 차이에 대한 혐의가 생기는 일반적인 경우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글 자체의 관점으로부터 나오는 과제와 다수의 글에 대한 비교를 통해 생겨나는 과제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실수의 사실과 특정한 방식으로 부딪칠 때 이를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첫째는 차이와 실수를 발견하는 것이며, 둘째는 차이에 대해 결정하는 것, 즉 원래의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논리적으로 통일적이지 않은 것의 경우를 오로지 문장의 보편적, 논리적 형식과 보편적인 문법 규칙에만 관련지었다.
우리가 해석학적 과제를 그 직접성에서 받아들이면 아주 많은 경우에 비평의 과제는 전혀 나타날 수 없다. 비평의 과제는 보편적인 문헌학적 관점에서 비로소 그 진정한 깊은 의미와 내적 필연성을 획득한다.
우리가 보편적인 문헌학적 관점을 설정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언어가 그 모든 상이한 시기에서 다루어진 방식이다. 그 다음에는 저자의 기술 방식을 정확하게 고찰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마지막으로 또한 저자가 속한 시대를 알아야 한다.
제 2 부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발생하는 실수에 대한 비평.
다른 사람의 말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을 그것에 주입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두 경우로 환원할 수 있다.1)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만든 것을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의도되었든 텍스트에 집어넣는다면, 이것은 항상 의도적인 위조이다. 2)누군가가 어떤 것을 교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물론 모든 편집자가 수행하는 자유로운 변경이다.
우리는 이러한 변경이 생겨날 때 의도적인 것과 비의도적인 것을 구별해야한다. 우리는 여기서 좋은 의도와 나쁜 의도를 구별한다. 좋은 의도는 이미 나타나 있는 오류를 다시 좋게 만드는 것이며 올바른 것을 재생하는 것이다. 나쁜 의도에서 나온 변경은 어떤 사람이 스스로 저자보다 더 나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그는 저자의 진술과 표현을 변경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저자를 자기 견해를 위한 권위로 만들려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저자가 하지 않는 것을 그에게 돌리고 그가 범하지 않은 오류를 그에게 돌리기 위해서 변경을 하는 것이 생각될 수 있다.
해석학적 작업을 위해 텍스트를 형태화하는 독자와 비평적인 텍스트 편집자는 어디서 구별하는가?
고문서적인 비평과 예언적 비평의 결과에는 특정한 구별이 있다. 고문서적인 비평에서는 이 두 사람이 보편적인 문헌학적 관점 위에 있으며, 두 사람 다 가능한 한 근원적인 것을 규명하려고 한다. 예언적 비평과 관련해서는 이 두 사람이 해석학적 작업을 위해 일한다. 해석학적 작업은 보충을 요구하며 상이한 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독자는 고문서학적으로 밝혀진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텍스트가 중심 사실이고 주석이 보조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면, 텍스트를 전적으로 고문서학적으로 전달하는 일이 더욱 필연적이다.
역사 비평의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 요약하면 적절하게 입증된 총체적 사실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실의 이편과 저편에서 총체적 상태가 사실의 장소, 즉 이전의 상태와 이 후의 상태로 있어야 한다.
글은 적어도 역사적으로 충족되는 시대로부터 나와야 할 것이며 혹은 이 시대에 관한 확실한 소식을 획득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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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세계화의 윤리 - 실천윤리학의 거장 피터 싱어의
피터 싱어 지음, 김희정 옮김 / 아카넷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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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윤리

우리는 전 지구적인 문제를 어떤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그것을 대신하는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 힘과 권력을 조정하는 힘겨운 노력이 필요 할 것이다.
나 또한 먼 나라의 빈곤을 내 이웃의 어려움과 달리 봐 왔다.
앞으론 공동체의 의식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의지를 가져야겠다.

1장 변화하는 세계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강대국의 힘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는 전지구적인 윤리관을 가져야 할 필요가 생겼다.
2장 하나의 대기
인류 공동의 소유인 대지와 그 내용물은 사유화로 전환될 때 할당량 이상을 사용하는 경우에 그에 따른 보상을 해야 한다.
3장 하나의 경제
WTO로 세계경제를 하나로 묶고 회원국에 그 역할을 강요하면 세계는 국가 주권이나 민주적이거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관심사항을 전면에두고 비윤리적인 방법을 정당화한다.
4장 하나의 법률
국가 주권은 국가간의 평화 관계를 유지 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국가의 영토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하는 단순한 국가 권력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니기에 국민을 보호하려는 능력과 의지에 한계가 있다면 방지를 위한 개입을 정당화하는 전지구적 윤리 공동체의 의미가 주장된다.
5장 하나의 공동체
자국에 대한 편향적 선호를 벗어나 확장된 친족으로서 상호적인 공동체 의식의 정의가 필요하고 하나의 세계라는 생각에 기초한 윤리를 가져야 한다.
6장 더 나은 세계란?
우리는 세계의 시민이고 전지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힘겨운 도전을 위해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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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움받을 용기

삶은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진다. 그리고 모든 이를 친구로 여기면서 현재를 열심히 산다.
그 뒤에 내가 이루는 삶이 내 것이다. 단지 지금 현재가...

대담 형식으로 씌여져서 마치 내가 질문하고 대답을 듣는 것처럼 느껴져 중간중간 생각을 정리하게 되어서 좋다.
재미있다. 읽던 책을 접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그런 종류의 책을 보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는 노력을 참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돌아 보면 피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대개는 자기 자신이란걸 안다.
자기 계발서는 그것을 흔들어 놓고 자각하게 해준다. 일부분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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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 현대사상의 모험 1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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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다시 목차를 훑어본다. 수 많은 장과 절이 나뉘어 있다. 기억되는 내용들이 많지 않으니 목차들을 보면서 부담스럽기까지 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인데 기억되는 것은 욕망의 기계, 사회적 기계이다. 거기에 오이디푸스의 삼각형 구도는 스치듯이 흐릿하다. 이렇게 읽기가 어려운데 대체 누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질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고하는 것의 바탕에 오이디푸스화를 관련질 수 있는 그런 학문적 관심이 있다면 볼 수 있겠다 싶다.
이전에 읽었던 책이 이제껏 가장 어렵고, 이번에는 좀 단련이 되어 낫겠지 하는 기대를 갖지만 역시나 지금 읽는 책이 가장 어렵다. 거의 두 달에 걸쳐서 완독하면서 ‘ 뭣이 중한디!‘ 적지 않은 나이에 한 권을 마치는데 이렇게 세월을 허비하나 하는 회의감이 살짝 든다. 이런 종류의 책을 나는 ‘지루한 책‘이라고 묻는 이에게 소개한다. 철학자가 말하는 것은 읽어가며 책을 소개하는 글이나 다른 이의 블러그 속의 리뷰를 통해 이해를 더하면서 힘들게 마치게 된다. 정작 내가 책을 접하면서 좋은 점은 책을 펼쳐서 읽어가는 과정이다. 생각의 깊이나 폭이나 삶을 바라보는 방향을 다시금 조정하는 시간은 책 속에 빠져 그가 말하는 것을 고민하다 잠시 곁길로 빠져 잡념에 사로잡힐 때이다. 나를 돌아보기에 참 좋은 시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책을 펼쳐 보든, 책을 그리든 이렇게 책 속에 있는 시간이 좋다.
내용을 요약해서 밑에 붙인다. 거의 발췌다.더구나 그것도 좀 지나 읽어보면 엉망이다. 부끄럽다! 그렇지만 쓰는 이유는 쓰려고 다시 읽고 이해 해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1장 욕망 기계들
1 욕망적 생산
분열자는 생산적 과정만이 있는 욕망적 기계들이다. 과정의 목적은 영속화가 아니라 그 과정의 완성을 지향하는데, 분열증은 욕망 기계들의 우주요, 1차적인 보편적 생산이다.이항 규칙 또는 연합 체제에 따르는 이항 기계인 욕망 기계는 생산되고 절단되는 모든 대상에서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를 전제한다.모든 기계가 기계의 기계이듯, 욕망적 생산은 생산의 생산이다. 욕망이 삶을 욕망하는 까닭에 삶이 기관들이 작동하는 기계인 것처럼 아무 것도 작동하지 않는 비생산적인 죽음의 본능, 이것 역시 욕망하는 까닭에 기관 없는 몸도 생산한다.
2 기관 없는 몸
본원적 억압이 뜻하는 것은 기관 없는 몸에 의한 욕망 기계들의 밀쳐 냄이다. 이 편집증 기계는 욕망 기계들의 아바타이다. 기관 없는 몸이 행하는 사회적 생산의 형식은 사회체라고 규정된 충만한 몸을 포함하며 자본은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생산력과 생산기관을 귀속시킨다.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 자본의 분리를 이루는 등록의 생산의 영역은 그 둘 사이의 분리 종합이 같은 것으로 회귀하는 호환 가능 체계를 보여준다. 기관 없는 몸과 생산의 분리에서 분연자로서 맺고 있는 관계는 등록을 구성하는 계보학적 계열에 근거를 두고 있다.
3 주체와 향유
등록 에너지의 일부가 소비 에너지로 변형되는데 이 잔여 에너지가 결합 종합 또는 소비의 생산을 추동한다. 우리는 욕망 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의 대립에서 출발했다. 신인류 또는 영광소러운 유기체의 탄생을 위해 욕망 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 사이에 새 결연을 형성함으로써, 편집증 기계와 기적 기계의 뒤를 잇는 이 기계를 지칭하기 위해 <독신 기계>란 이름을 빌려 온다. 이것은 소비의 결합 종합과 다르지 않다. 독신 기계가 생산하는 것은 형태와 형식을 벗어 던진 순수하고 생생한 내공 상태들이다. 이 삶의 운동전체를 요약하면, 기관 없는 몸 위의 분리 점들은 욕망 기계들 주위에서 수렴원들을 형성한다. 그러면 기계 곁에서 잔여로서 생산된, 그 원의 모든 상태를 경유하고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이행한다. 주체 자신은 기계에 의해 점유된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고정된 정체성 없이 있으며, 중심에서 늘 벗어나고, 자신이 경유하는 상태들로부터 귀결된다.
4 유물론적 정신의학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기계론에 욕망을 도입하기, 욕망에 생산을 도입학라는 이중 작업으로 정의된다. 분열증을 자아와 관련시키면 자기 세계에 존재해 온 자아에게 욕망의 논리는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고 욕망의 현실 자체는 환상된 대상을 생산하는 <결핍의 본질> 속에 있다.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계를 생산한다. 현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결과물이다. 한편에 현실의 사회적 생산이 있고 다른 한편에 환상의 욕망적 생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생산은 특정 조건들에서 단지 욕망적 생산 자체이다. 욕망 기계들의 분신으로서 집단환상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망 기계들이, 이것들을 형성하는 거대 군중 속에서 바악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기계들이, 이것들을 형성하는 욕망의 요소적 힘들에 관련되는 방향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같은 기계들이다. 욕망의 생산은 기관 없는 몸의 투사가 아니다. 기관 없는 몸은 오히려 탈영토화된 사회체의 궁극적 잔여물이다. 자본주의의 흐름은 탈코드화의 문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 문턱은 사회체를 해체하여 기관 없는 몸을 출현시키고, 또 이 몸 위에서 탈영토화된 장 속에 있는 욕망의 흐름을 해방시킨다.분열자는 우리를 자연 안에 있는 형이상학적 과정과, 탈영토화된 사회 기계와 관련해서 욕망 기계들에 자율성을 회복시켜 주는 사회적 생산의 역사적 과정이라는, 과정의 두 양상이 합류된다. 이 두 생산 사이에는 현실의 생성이라는 단일한 생성만이 있다.그리고 유물론적 정신의학이 욕망 속에 생산 개념의 도입이라고 정의된다면, 그것은 분석 기계, 혁명 기계, 욕망 기계들 사이의 최종 관계라는 문제를 종말론적 견지에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5 기계들
욕망 기계에서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된다. 모든 기계는 이 기계가 자른는 연속된 물질적 흐름과 관련을 맺고 있다. 모든 기계는 자신이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자신에 연결되는 기계와 괸련해서는 흐름 자체 또는 흐름의 생산이다. 이런것이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다. 모든 기계는 자기 안에 가설하고 비축해 놓은 일종의 코들 지니고 있다. 모든 기계는 다양체 속에 하나의 사슬 또는 하나의 욕망적 코드로 말해진다. 각 사슬은 다른 사슬들의 파편들을 포획하여 그 파편들에서 잉여가치를 끌어오는 이탈-절단이 진행된다. 사회적 코드들에서 전제군주 기표는 모든 사슬을 부수고 선형화하고 일대일 대응시키며, 벽돌들을 만리장성을 짓기 위한 이동 불가능한 요소들로 써먹는다. 하지만 분열자는 욕망의 코드라는 새로운 다의성을 되찾기 위해 늘 이 벽돌들을 이탈시키고 떼어 내고 모든 방향으로 가져간다. 절단은 부분들이 되돌아 오는 하나의 공유된 몫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절단들은 분석의 사실이 아니다, 절단들 자체가 종합들이다.
6 전체와 부분들
욕망기계들 속에서 부분들은 다양체로서 통일체가 아닌 전체와 공존하고 인접하며 재생산하는 것이다. 부분 대상들을 전체와 관련지을 때에 욕망적 생산의 척도가 오이디푸스를 그 준거로 삼지말아야 한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부모가 욕망적 생산의 등록 표면에 나타난다. 그런데 정신분석이 광기를 <부모 콤플렉스> 속에 집어넣고, 죄책감의 고백을 오이디푸스에서 귀결되는 자기 형벌의 모습들에서 다시 찾아내는 한, 정신분석은 혁신을 행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정신의학이 시작했던 일을 완성하고 있다. 즉 정식병리학의 가족적 교화적 담론을 고양하고, 광기를 <반은 현실적이고 반은 상상적인 가족 변증법에> 묶고, 거기서 <아버지에 맞선 끊임없는 위해 행위>,<가족 제도의 견고함에 맞선, 가장 의고적인 가족 상징들에 맞선 본능들의 암투> 를 판독하는 일을.
2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 - 성가족
1 오이디푸스 제국주의
오이디푸스는 콤플렉스의 부정적 현실, 외연적 공존, 체계로서의 구조를 끌어낸다. 분열자가 분석적으로 갖게 되는 참된 차이는 오이디푸스와 욕망적 생산 사이에 있다. 생산적 무의식에서 절대권자 오이디푸스의 설립과 더불어 모든 것은 상실되거나 특이하게 타협된다. 무의식의 모든 사슬은 일대일 대응되고, 선형화되고, 전제군주 기표에 매달린다. 모든 욕망적 생산이 으깨지고, 재현의 요구들에 굴복하고, 재현 속에서 대표와 재현내용의 음침핫 놀이들에 굴복한다. 이후 정신분석가는 오이디푸수의 시녀, 욕망 속의 반생산의 큰 담당자가 되었다.
2 프로이트의 세 텍스트
프로이트는 성욕을 가족 콤플렉스에 용접하고 오이디푸스를 분석에 있어 성욕의 기준으로, 더할 나위 없는 정통성의 시금석으로 만듦으로써, 프로이트 자신이 사회적 관계들과 형이상학적 관계들을 둘 다 욕망이 직접 투자할 수 없는 하나의 나중 내지 하나의 너머로 설정했다.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환상을 집단적 성격에서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되기를 바란다. 환상의 두 유형, 또는 차라리 환상의 두 체제는, <재화>의 사회적 생산이 하나의 자아를 매개로 자신의 규칙을 욕망에 부과하느냐, 아니면 정감들의 욕망적 생산이 자신의 규칙을 제도들에 부과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개인 환상에서 집단들은 모든 사회적 생산과 반생산의 담당자들을 가족적 재생산의 형상들 위에 포갤 때, 우리는 불안에 빠진 리비도가 감히 오이디푸스를 떠나려 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이디푸스를 내면화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은 사이비 - 개인적 환상의 특성이다. 프로이트는 욕망의 경제학의 질적 요인들에 있어서 이것들이 치료의 장애가 되었고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마개는 견디지 못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와 거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오이디푸스화되기도 하고 거세되기도 한다. 정신 분석은 오이디푸스와 거세를 끌어 들였고 치료는 오이디푸스화의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에는 온통 오물이 뿌려져 있었다. 차라리 분열증화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우리는 치료에서 치유되었을 텐데.
3 생산의 연결 종합
무의식의 종합들이 주어질 때 오이디푸스의 삼각형화는 혼인적 사용에서 재생산된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적 성욕, 오이디푸스적 이성애와 동성애, 오이디푸스적 거세 - 즉 완전한 대상들, 온전한 이미지들, 특유한 자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거세와 오이디푸스화는 하나의 근본적 가상을 낳는다. 우리는 정신분석이 자신의 형이상학, 즉 오이디푸스를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의 혁명이, 이번에는 유물론적 혁명이 오이디푸스 비판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해야한다. 이것은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석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무의식의 종합들의 부당한 사용을 고발함으로써만 진행되며, 이렇게 하는 것은 무의식의 기준들의 내재성에 의해 규정된 초월론적 무의식과 이에 대응하는 분열-분석으로서의 실천을 되찾기 위해서이다.
4 등록의 분리 종합
욕망적 등록의 분리 종합들 속에 오이디푸스는 어떤 제한적 내지 배타적 사용이라는 이상을 강요한다. 분열자는 분리들의 의미를 나눌 수 없는 거리를 조망함으로써 분리를 긍정한다. 이 미분화를 그것이 창조하는 분별들의 이면으로 창조하는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미분화 속에서의 동일시라는 이원적 관계는 바깥의 사회적 권위 속에서 오이디푸스를 더 잘 찾기 위해 오이디푸스를 내면화하고, 그럼으로써 오이디푸스를 아이들에게 이주시키고 이해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중의 막다른 골목이 하나의 일상적 상황 즉 하나의 양자택일, 하나의 배타적 분리가 하나의 원리와 관련해서 규정하지만, 이 원리 자체는 두 개의 항 내지 두 개의 부분집합을 구성하며 그 자신이 양자택일 속으로 들어간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두 극을 가진듯하다. 동일시적 상상적 형상들이라는 극이 그 하나요, 분별적 상징적 기능들이라는 극이 다른 하나이다. 참된 본성의 차이는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인 것이라는 현실적 요소와, 상상계와 상징계로 이루어진 구조적 집합 사이에 있다.
5 소비의 결합 종합
기관 없는 몸이 사회적 욕망적 관계를 위한 결합은 현실계의 생명감 넘치는 현실 주체이다. 따라서 욕망은 이해관계를 지닌 주체들을 끌고가는 분열 분석의 목적이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리비도 투자들의 특유한 본성을 분석하는 것, 이를 통해 어떻게 욕망이 욕망하는 주체 속에서 자기 자신의 탄압을 욕망하게끔 규정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6 세 종합의 요약
욕망의 수동적 종합인 무의식은 의미의 문제가 아닌 사용의 문제들 만을 제기한다. 즉 ‘그것은 어떻게 작동할까?‘ 오이디푸스적 사용들과는 다른 종합들의 적법한 사용은 연결 종합들의 부분적 비-특유한 사용, 분리 종합들의 포괄적 내지는 비제한적 사용, 결합 종합들의 유목적 다의적 사용인 무의식의 내재적 사용에 맡기는 일이다.
7 탄압과 억압
탄압과 억압의 특유한 관계가 있으며 그 체계에서 오이디푸스의 특수한 상황이 있다. 욕망이 억압되면 사회의 기정 질서에 의문을 갖게되며 그 사회를 본질적으로 위협하게 된다. 탄압적 구조들 속에 포함되는 사회구성체의 재생산을 확보하기 위해, 탄압은 바로 억압이 필요하다. 가족적 억압이 주어진 사회적 생산 형식에 내재한 탄압과 관련해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가족은 한 사회의 경제 체계의 대중 심리학 재생산을 확보하는 한에서, 이 성적 억압을 위탁받은 담당자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를 현행화하고 또 탄압적 사회가 바라고 조직한 이 막다른 골목에 욕망을 연루시키는 것이 바로 욕망의 탄압 또는 성적 억압, 즉 리비도 에너지의 정체이다.
8 신경증과 정신병
신경증이건 정신병이건 장애의 원인은 언제나 욕망적 생산 속에, 즉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관계, 이 두 생산 사이의 체제의 차이나 갈등 그리고 욕망적 생산이 사회적 생산 속에서 수행하는 투자의 양태들에 있다는 것이다. 모종의 가치를 띤 자극, 욕망적 생산 속에 있는, 변하지만 늘 현행적이고 현재적인 힘들의 상태에 의존한다. 욕망적 생산은 현행적 실존만을 갖는다.
9 과정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은 욕망적 생산이지만, 그것은 끝에 가서, 자본주의의 조건들 속에서 규정된 사회적 생산의 극한으로서 두 과정이 합쳐진다. 이들은 극한을 사회구성체 내부로, 이들이 투자하는 사회적 생산 및 재상산과 이들이 복귀해서 모든 투자를 적용하는 가족적 재생산 사이로, 이행하게 한다. 이들을 오이디푸스에 의해 그렇게 그려진 영역 내부로, 오이디푸스의 두 극 사이로, 극한을 이행한다. 이들은 이 두 극 사이에서 끊임없이 내행하고 진화한다.
3장 미개, 야만, 문명
1 기입을 행하는 사회제
토지, 기술, 사회를 가르키는 영토기계 기술기계 사회기계는 욕망의 핵심이고 욕망을 코드화한다.
2 원시 영토 기계
원시 영토 기계에서 기계의 기능은 토지의 몸 위에서 결연과 혈연을 직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행하는 것은 흐름들을 코드화한다는 전반적 기획이다. 하나의 흐름이 코드화되는 것은, 사슬에서의 이탈과 흐름에서의 채취가 조응해서 행해지고, 서로 합해지고 결혼하는 한에서이다. 흐름들과 사슬들뿐 아니라 고정된 재고들과 이동 블럭들은, 제 나름 두 방향에서 사슬들과 흐름들 간의 관계들을 내포하는 한, 영속적인 상대성의 상태에 있다. 이 관점에서 원시 사회체, 즉 결연들과 혈연들을 직조하는 영토 기계를 고찰해야 한다. 이 기계는 절편 기계인데, 절편 영토 기계는 집단의 권력 집중을 막는데 그에 따른 위험은 탈영토화된 사회체 위를 흐르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이다. 자본주의가 보편적 진리라면 그것은 흐름들의 일반화된 탈코드화이다. 탈코드화 체제는 조직화의 부재를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음침한 조직, 가장 경직된 회계를, 즉 언제나 대립 추론에 의해, 코드들을 대체하고 코드들을 포함하는 공리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3 오이디푸스 문제
결연은 혈연에서 파생되지도 않고 연역되지도 않는다. 결연은 외연을 지닌 채 주어졌다고 상정되는 체계 속에 미리 실존하지 않는 확장된 혈연 가계들과 함께 조합되고 직조되면서 늘 있다. 외연을 지닌 체계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공적 조건들에서 태어나지만, 이것들에 반작용하고, 이것들과 무화하고, 이것들을 억압하며, 이것들에 신화적 표현만을 허용한다. 신화적 담론은 근친상간에 대한 무관심에서 근친상간 금지로의 이행을 주제로 삼고 있다. 암묵적으로건 명시적으로건, 이 주제는 모든 신화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따라서 이 주제는 신화적 언어활동의 공식 특성이다. 근친상간은 억압된 대표에 대한 억압하는 재현작용의 소급적 효과일 따름이다. 억압하는 재현작용은 자기가 관장하는 이 대표를 왜곡 내지 이전한다.
4 정신분석과 민족학
원시 사회에서 가족적 규정과 사회적 규정들을 정신분석적 민족적인 두 양상에서 분열 분석을 정의하면 하나는 무의식의 표현적 사이비-형식들의 파괴요, 다른 하나는 욕망에 의한 사회장의 무의식적 투자들의 발견이다. 혈연 집단에서 식민지인은 오이디푸스화에 대항한다는 것, 그리고 오이디푸스화는 식민지인 위에서 닫히려 한다는 것 이 두가지는 진실이다. 억압- 탄압의 일반 체계는 오이디푸스 이미지를 억압된 것의 왜곡으로 탄생시킨다는 점이다. 근친 상간의 금지는 오이디푸스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구성하는 코드화되지 않은 흐름들에, 또 이 흐름들의 대표인, 강렬한 전-인물적 흐름에 관계된다. 오이디푸스는 코드화할 수 없는 것을 코드화하고, 코드를 벗어나는 것을 코드화하는 하나의 방식, 또는 욕망과 그 대상을 이전하고 이것들을 덫에 빠지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오이디푸스는 보편의 극한으로서 탈코드화된 자본주의 구성체에서 실존하기 위한 조건은 식민화이다. 민족학과 정신분석의 관계에서 민족학자들과 희랍 연구가들은 상징을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지에 의해 정의된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은 기계들을 만드는데, 이 기계들은 욕망의 기계들이요, 분열-분석은 사회 기계들의 내재성 속에서 이 기계들의 사용과 기능을 발견한다. 욕망 기계들은 사회 기계들 속에서 기능한다. 상징과 물신은 욕망 기계의 현현들이다. 성욕은 결코 가족 집합 속에서 재현할 수 있는 그램분자적 규정이 아니고, 욕망의 현전과 생산의 장을 그려 내는, 즉 비-오이디푸스적 무의식 전체를 그려 내는, 본라는 사회적이고 2차적으로 가족적인 집합들 속에서 기능하는 분자적 하부 규정이다. 이 비-오이디푸스적 무의식 전체는 자신의 2차적 통계적 구성체들의 하나로서만 오이디푸스를 생산하며, 그것도 사회 기계들의 생성을 작동하는, 욕망 기계들의 체제에 비교되는 사회 기계들의 체제를 작동하는 역사가 끝난 후에야 오이디푸스를 생산한다.
5 영토적 재현
재현은 욕망적 생산의 억압 탄압이고 재현 체계의 심층에는, 억압된 대표, 억압하는 재현 작용, 이전된 재현 내용이라는 세 요소가 있다. 사회 기계들과 욕망 기계들간의 관계에서 2차적 억압은 1차적 억압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사회체에서 부채의 체제는 결연의 단위이다. 부채는 외연을 지닌 체계를 형성하고 벼려 내기 위해 확장 혈연들로 결연들을 조성한다. 부채는, 교환의 무의식적 사회 현실이 화폐로 바뀌는 하나의 상부상조, 하나의 의식적 형식이라는 것이다. 요ㅣ망이 교환을 모른다면, 이는 교환이 욕망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은 교환하기가 아니라 기입하기, 표시하기임을 보여준다. 영토적 재현에서 기표와 기의는 말하거나 읊조리는목소리, 맨살에 표시된 기호, 고통에서 향유를 뽑아내는 눈이다. 영토적 재현은 고통과 죽음을 코드화하면서 모든 것을 예견했다. 그들의 작업은 본능적인 형식-창조, 형식-각인이다. 니체는 새로운 사회체가 진행하는지를 암시했는데 그것은 모든 원시 코드화를 협의해서 파괴하며, 또는 더 고약하게도, 이것들을 조롱하며 보존하고, 이것들을 새 기계, 새 억압 장치의 2차적 부품들로 환원한다.
6 야만 전제군주 기계
전제군주 기계 또는 야만적 사회체의 창설은 ‘새 결연과 직접 혈연‘으로 요약될 수 있다. 새 결연과 직접 혈연은 새로운 사회체를 증언하는 특유한 범주들이며, 새로운 사회체는 원시 기계를 직조했던 방계 결연들과 확장 혈연들로 환원될 수 없다. 결연을 혈연에 환원하는 일이 불가능성, 결연 집단들의 독립성, 이 집단들이 경제적 정치적 관계들로 안내하는 요소 역할을 한 방식, 원시 신분들의 체계, 잉여가치의 메카니즘 등 이 모든 것이 이미 전제군주 구성체들과 카스트 질서들을 소묘하고 있으리라. 국가는 두 개의 근본 행위에 의해 시작된다. 하나는 거주의 고정에 의한 영토성 행위라 불리며, 다른 하나는 작은 부채들의 페지에 의한 해방 행위라 불린다. 아시아적 생산의 조건들 속에서 나타나는 전제군주 국가는 전제군주의 몸 위에서 생산되는 것이 옛 결연들과 새 결연의 연결 종합이요, 옛 혈연들의 직접 혈연으로 퍼뜨려 모든 신민을 새 기계에 규합하는 분리 종합이다. 이 두 부분 각각은, 소유자인 우월한 통일체, 재산을 가진 공동체들, 초코드화와 내적 코드들, 전유된 잉여가치, 사용된 용역권, 국가 기계와 영토 기계들로 귀착된다.제국 구성체에서 기입은 모든 결연과 혈연을 다시 절단하고, 이것들을 연장하며, 이것들을 신과 전제군주의 직접 혈연, 전제군주와 백성의 새로운 결연 위에서 수령시킨다. 전제군주 기계는 이 흐름들을 초코드화한다. 즉 탈영토화된 충만한 몸을 위해 토지를 탈취하고 이 충만한 몸 위에서 부채의 운동을 무한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초코드화이다.
7 야만적 또는 제국적 재현
근친상간은 결코 욕망이 아니었고, 다만 억압에서 결과한 그런 이전된 재현내용일 뿐이다. 재현의 표면 조직에서 특이하게 바뀌는 것은 목소리와 표기행위의 관계이다. 영토적 재현은 먼저 두 이종적 요소, 즉 목소리와 표기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방계 결연 속에서 구성된 낱말의 재현과 같으며, 다른 하나는 확장 혈연 속에 설정된 사물의 재현과 같다. 영토적 재현의 집합을 고찰하면 영토적 기호들의 사슬은 끊임없이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도약한다. 즉 그 사슬은 채취할 흐름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도 이탈들을 방출하며, 분리들을 포함하며, 잔여물들을 소비하며, 잉여가치들을 뽑아내며, 낱말들, 몸들과 고통들, 사물들과 정감들을 연결한다. 그 사슬은 언제나 다의적 사용 속에서 목소리, 표기행위, 눈을 함축한다. 이 모든 것은 전제군주 기계 및 제국적 재현과 함께 새로운 운명 속에서 뒤죽박죽된다. 표기가 목소리로 복귀함으로써 하나의 초월적 대상, 즉 무언의 목소리가 사슬 밖으로 도약하는데, 사슬 전체는 이제 목소리에 의존하는 것 같고 이 목소리와 관련해서 선형화된다. 영토 사술의 그물들을 구성하는 비표기적 기호들이 아니라, 모든 기호가 글의 탈영토화된 흐름 속에서 일정하게 흘러나오는 전제군주 기표, 인간들이 이 흐름들을 마시는 것이 목격되기까지 한다. 탈영토화된 글은 전제군주 기표에서 흘러나온다. 여기서 기표란 단지 탈영토화된 기호 자체일 따름이다. 억압하는 재현작용으로서의 기표와 이것이 유도하는 이전된 새 재현내용, 저 유명한 은유들과 환유들, 이 모든 것이 초코드화하고 탈영토화된 전제군주 기계를 구성한다.전제군주 기표는 그 효과로서 영토적 사슬을 초코드화한다. 기의는 바로 기표의 효과이다. 전제주의 기표는 원시 기계가 억압했던 것, 즉 강렬한 토지의 충만한 몸을 재구성할 계획이지만, 이 재구성은 전제군주 자신의 탈영토화된 충만한화된 몸 안에 주어진 새로운 기반들과 새로운 조건들 위에서 행해진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근친상간은 의미와 그 장소를 바꾸며, 억압하는 재현작용이 된다. 제국적 재현의 체계에서 제국의 야만적 법은 편집증적-분열증적 특징(환유) 조울증적 특지(은유)으로 초코드화하기, 이것이 법의 본질이며, 몸의 새로운 고통들의 기원이다. 벌은 복수가 된다. 복수는 죽음 본능, 그것은 죽음이고, 욕망의 욕망이며, 전제군주의 욕망의 욕망이고, 국가 장치의 가장 깊은 곳에 기입된 잠복성이다. 잠복은 욕망 자체에 억압의 작용을 실행하기 때문에 극친상간적 재현의 억압하는 작용에서 나와야 한다.
8 원국가
원국가, 모든 국가가 되고자 하고 욕망하는 영원한 모델. 국가는 점점 더 탈영토화된 흐름들을 위한 특유한 코드들을 발명해야만 한다. 즉 전제주의를 새로운 계급 관계들에 이바지 하기, 부와 빈곤의 관계들, 상품과 노동의 관계들을 통합하기, 시장의 돈과 징세의 돈을 조정하기, 도처에서 새로운 사태 속에 원국가를 다시 불어넣기 등. 맑스는 역사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가는 방식이 정말 있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국가는 우선 서로 떨어져서 기능하는 부분집합들을 통합하는 이 추상적 통일체였다. 국가는 더 이상 파편들을 통치하는 초월적 법이 아니다. 국가는 그럭저럭 하나의 전체를 설계해서 여기에 자신을 내재화해야만 한다. 국가는 인공적인 것이기를 그치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것이 되고, <구체화를 향하며>,이와 동시에 지배하는 힘들에 종속된다. 국가 생성의 두 양상이 있다. 그 하나는 물리 체계를 형성하는, 점점 더 탈코드화된 사회적 힘들의 장에서 국가의 내부화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의 형이상적 체계를 형성하는, 점점 더 초코드화하는 초지상적 장에서 국가의 정신화이다.
9 문명 자본주의 기계
자본주의와 그 절단은 단순히 탈코드화된 흐름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흐름들의 일반화된 탈코드화와 새로운 거대한 탈영토화 그리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에 의해 정의된다.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유동에서 미분 비가 표현하는 것은, 코드의 잉여가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환이라는 자본주의적 근본 현상이다. 자본주의적 탈영토화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행해짐과 동시에, 주변부에서의 흐름들의 탈영토화는 전통 부문들의 파멸, 외향적 경제 회로들의 발전, 3차산업의 특유한 비대, 생산성과 소득 분배에서 극단적 불평등을 확보하는 <탈분절화>를 통해 행해진다. 자본주의는 주변부에서 점점 더 분열증화된다.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미분 비들과 미분계수들의 놀이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내부 극한들인 한 언제나 더 큰 규모로 재생산하는 극한들의 본성뿐 아니라, 생산 자체 속에 있는 반생산의 현존 역시도 이 새로운 규정인 것이다. 잉여가치는 화폐가 노동자들 내지 생산 요인들에 분배됨으로써, 소득으로 할당됨으로써 구매력을 획득하자마자 재화와 맺게 되는 관계, 그리고 이 소득들이 현실적 재화로 변환되자마자 상실하게 되는 관계를 재현한다.
10 자본주의적 재현
비기표적 언어활동은 내용과 표현의 탈영토화된 흐름들을 결합 또는 상호 전제의 상태에 있으며, 이 상태는 내용과 표현의 궁극적 단위들인 형상들을 구성한다. 흐름및 형상들의 언어학은 욕망의 흐름들에 따라 형식과 실체, 내용과 표현을 흐르게 하며, 기호-점들 내지 분열-형상들에 따라 이 흐름들을 절단하는 순수하게 내재적인 언어활동 이론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문명은 자본주의 생산에서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로 정의된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확장된 규모로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고유의 내재적인 상대적 극한들로 절대적 극한을 대체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코드를 다른 코드로 대체한다. 코드는 사회체를 통과하는 흐름들의 성질 각각을 규정한다. 자본주의에서 코드의 잉여가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환함을 표현한다. 잉여가치에 의해 채워지는 그런 식의 미분 비들, 내적 극한들의 확대에 의해 <채워지는> 그런 식의 외부 극한들의 부재, 잉여가치의 흡수에 의해 채워지는 그런 식의 생산 속으로의 반생산의 유출 등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공리계의 세 양상을 구성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자본의 공리계 속에 붙잡히는 한에서, 이런 흐름들의 조절자이다. 자본주의 공리계의 관점에서는 오직 하나의 계급만이, 보편주의적 소명을 지닌 부르조아계급만이 있다는 점 말이다. 계급투쟁을 가로질러 역사 전체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탈코드화하며 동시에 탈코드화된 계급으로서 부루주아지와 관련해서 역사를 읽는다는 것이다. 계급의 이해관계는 그램분자적 거대 집합들의 차원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계급의 이해관계는 하나의 집단적 전의식을 정의할 따름이며 참된 무의식은 집단의 욕망 속에 있으며, 이 욕망은 욕망 기계들의 분자적 차원을 작동한다. 현대 국가의 기능이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조절이라는 것이 참이라면, 이 기능의 주요 양상들 중 하나는 재영토화를 행하고, 그리하여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사회 공리계의 어떤 끄트머리에서라도 도주하지 못하게 막는 일이다. 의고적 내지 인공적인 새-영토성들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결합 자체이다. 추상적이고 주체적이며, 산업적이고 탈영토화된 부의 위대한 본질을 발견할 때, 이 본질을 금세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속에 재영토화함으로써만 발견한 것이다. 현대사회들은 두 방향 사이에 붙잡혀 있다. 의고주의와 미래주의, 신-의고주의와 탈-미래주의,편집증과 분열증 사이에. 현대사회들은 두 극 사이에서 흔들거린다.
11 마침내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에서 사회장 전체가 가족에 적용된다. 여기서 개별 인물들은 이들 자신이 이 추상량들의 관계 또는 이 추상량들의 공리계 속에 놓임으로써, 이 추상량들의 결합 속에 놓임으로써 구체적이 된다. 이것들은 바로 기호-점들, 흐름-절단들, 자본주의의 순수 <형상들>에 의해 생산된 배열형태들 내지 이미지들이다. 가족은 사회적 재생산의 지배적 요인에서 자기 고유의 재생산 양식 속에 적용된다. 가족적 규정들은 사회 공리계의 적용이 된다. 각자가 사회장의 부분집합으로 복귀하며 오이디푸스가 도래했다. 오이디푸스는 이 이전된 또는 내면화된 극한이며, 욕망은 여기에 붙잡힌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재영토화의 모든 노력에 대응하는 내밀한 사적 영토성이다. 오직 자본주의 구성체에서만 오이디푸스의 극한은, 탈코드화된 흐름들에 의해 생산된 사회적 이미지들이 욕망에 의해 투자된 제한된 가족 이미지들로 실제로 복귀한다는 의미에서, 점유될 뿐 아니라 거주되고 체험된다. 오이디푸스는 자본주의 기계의 상상적 오이디푸스가 됨으로써만 채워지고 실효화된다.
4장 분열-분석 입문
1 사회장
오이디푸스는 신경증자의 어린 시절의 느낌이기에 앞서 편집증자인 어른의 관념이다. ‘아버지는 아이보다 먼저다‘ 라고 말할 때, 사회적 투자들은 가족적 투자들보다 먼저요, 후자는 전자의 적용 내지 복귀에서만 생겨난다. 사회장의 코드화나 공리계는 무엇보다 사회장 내 무의식들의 소통을 정의한다. 공통의 사회장에서 이들이 억압하는 또는 억압해야 했거나 억압하려 하는 첫째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의식인 것 같다. 무의식들의 이런 소통은 가족을 원리로 삼지 않으며, 욕망의 투자의 대상인 한에서 사회장의 공동체를 원리로 삼는다. 가족적 투자가 사회자의 무의식적 투자들의 의존물 내지 적용일 따름이라면, 아이가 사회장의 코드화 내지 공리화된 분열들 및 흐름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 모든 무의식적 투자는 투자 철회, 대체-투자, 덧투자의 망상적 놀이를 동원한다. 사회적 투자의 두 가지 유형 즉 망상의 두 극인 분리차별 유형과 유목 유형이 있음을 보았다. 전자는 파시즘화하는 편집증 유형 내지 극이고 후자는 혁명적-분열증적 유형 내지 극이다. 사회적 투자에서 모든 투자는 집단적이며, 모든 환상은 집단을 이루고 이런 의미에서 현실의 정립이다. 하지만 투자의 두 유형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한 유형은 분자들이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그램분자적 구조들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다른 유형은 군집의 구조화된 현상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분자적 다양체들과 관련되어 있다.한 유형은 예속 집단의 투자요, 다른 유형은 주체 집단의 투자이다. 편집증과 분열증은 충만한 몸으로서의 사회체의 정립 둘레를, 그리고 극한에서는 기관 없는 몸의 정립 둘레를 진동하는 진자의 진폭의 두 가장자리로 제시할 수 있다.
2 분자적 무의식
사회 기계와 욕망 기계들의 관계는 한 쪽에 분자적 영역 다른 쪽에 그램분자적 영역으로 구별 짓는다. 기계론은 기계들에서 하나의 구조적 통일성을 추상하여, 이 통일성에 따라 유기체의 기능을 설명한다. 생명론은 생물의 개체적이고 특유한 통일성을 내세워, 기계는 유기적 집요함에 종속되며 이 집요함을 자율적 구성체 외부로 연장하는 한에서 모든 기계가 이 통일성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유기체의 특유한 또는 인물적인 통일성을 의문시함으로써 생명론의 논제를 폭발시키고, 또 기계의 구조적 통일성을 의문시함으로써 기계론의 논제를 폭발시킨다. 기계의 구조적 통일성이 해체되면, 일단 생물의 인물적이고 특유한 통일성에서 탈각하면, 기계와 욕망 사이에 직접적 연줄이 나타나고, 기계는 욕망의 심장부로 이행하며, 기계는 욕망적이 되고, 욕망은 기계화된다.
3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무의식, 거세가 오이디푸스의 믿는 삼각 구도라면 무의식이 재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분석가의 신화와 비극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이제 정신분석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는, 비극적 신화적인 가족적 재현과 욕망적 사회적 생산 사이의 갈등이 남는다. 왜냐하면 신화와 비극은, 욕망을 특수한 객관적 코드들 -- 토지의 몸, 전제군주의 몸 -- 로 여전히 다시 데려오듯 특정한 외부 조건들로 여전히 다시 데려와, 이런 식으로 추상적 내지 주체적 본질을 방해하는 상징적 재현의 체계들이기 때문이다. 정신 분석의 양가성을 설명하면 첫째로 상징적 재현은 욕망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는 있으나, 다만 이것을 대상들, 목표들, 원천들을 고정하는 특수한 요소로서의 큰 객체성과 연관시키면서 파악한다.둘째로 정신분석과 자본주의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이런 발견은, 정치경제학에서는, 그리고 사회적 생산에서는 추상적 주체적 노동의 형식 아래서 이루어졌고 이와 똑같은 발견이 정신분석에서는, 그리고 욕망적 생산에서는 추상적 주체적 리비도의 형식 아래서 이루어졌다.자본주의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유재산이라는 주체적 요소 그 자체 안에서라는 점이 진실이다. 신화, 비극, 꿈, 환상 이런 것들이 정신분석이 생산의 선, 즉 사회적 욕망적 생산의 선을 대체하는 재현적 계열이다.상징적인 것은 요소로서의 객체성과 재현의 관계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 대상들 및 이들의 관계가 동시에 생겨 사오는 주관적 재현의 궁극적 요소들, 순수한 기표들, 재현되지 않는 순수한 대표들을 가르킨다. 이 재현의 계열은 이제 무한산 주관적 재현 구조적 재현으로 제시된다. 재현은 결핍으로 나타나고 결핍은 거세로 정의된다. 욕망적 생산이 자기 자신에 대한 부재와 결핍으로서만 존속될 수 있게 하는 재현의 공간이 펼쳐지자마자. 이는 욕망 기계들을 하나의 그램분자적 집합 속으로 집결하는 하나의 구조적 통일이 욕망 기계들에 강요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사적 인간의 상상적 재영토화와도 같은데, 이 재영토화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조건들 속에서 생산되며, 자본주의가 제국적 상징 내지 사라진 전제주의 의고주의를 재생산하고 되살리는 한에서 생산된다.
4 분열 분석의 첫째 정립적 임무
정립적 임무는, 모든 해석으로부터 독립해 주체에게서 그의 욕망 기계들의 본성, 형성 내지 작동을 발견하는 데 있다. 이 모든 기계에 대한 고찰은 욕망 기계들로 우리를 인도하는 기능적 지표들로서 고찰되어야 한다. 분적은 분자적 분산의 요소 속에서 파악된 기계적 배치체들에만 몰두해야 한다. 이 기계들은 두 개, 세 개, n개 기관들로의 교체. 형상적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갖고 놀며 끊임없이 해체하는 변형 가능한 다각형들. 이원성, 겹침 내지 교체를 통한, 이 모든 간접적인 수동적 종합은 욕망의 유일하고 동일한 기계장치이다. 이 기계들의 종합은 필연적으로 기관 없는 몸의 정립을 내포한다. 부분대상들은 기관 없는 몸의 직접적 권력들이며, 기관 없는 몸은 부분대상들의 원료이다. 부분대상들과 기관 없는 몸은 분열증적 욕망 기계들의 두 질료적 요소이다. 이 둘은 한데 어우러져 욕망의 분자적 사슬의 두 끝에서 연속성의 관계를 이룬다. 사슬은 욕망 기계에서의 전달 장치 또는 재생산 장치와 같다. 사슬이 기관 없는 몸과 부분대상들을 집결하는 한에서, 사슬은 기관 없는 몸 위로 부분대상들의 분배와, 전유의 유래인 기관 없는 몸을 부분대상들로 복귀시키기와 합류한다. 사슬은 포괄적 분리들이 생산적 연결들을 다시 절단하는 한에서, 기관 없는 몸 위에 있는 포괄적 분리들의 그물이다. 기관 없는 몸은 죽음의 모델이다. 죽음에 자신의 모델을 주는 것이 바로 긴장병적 분열증이다. 무의식의 일상이 주는 내공은 자기 고유의 삶 속에 죽음의 경험을 데리고 다니며 감싸고 있다. 죽음 본능의 할당은, 적어도 불안의 발생이라는 본질적인 점에서, 성욕에서 그 동력의 역할을 박탈하는데, 왜냐하면 불안의 발생은 성적 억압의 결과물이 아니라 성적 억압의 자율적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 본능은 삶과의 초월적 구별 속에서 이제 순수한 침묵일 뿐이지만, 그것이 이 동일한 삶으로 형성하는 모든 내재적 조합을 가로질러 순수한 침묵을 더 한층 전파할 뿐이다.욕망 기계들의 부품들은 사회 기계의 톱니바퀴들 자체 속에서 기능하며, 욕망의 흐름들은 사회적 욕망적 장치의 통일체 속에서 제작된 죽음의 모델과 경험을 그 기회에 끊임없이 전해 주는 코드들을 들락날락한다. 정립적 임무의 본질은 유연하게 꼭 들어맞는 방식으로 본원적 억압의 기계적 변환을 확보할 것이다.
5 분열-분석의 둘째 정립적 임무
.모든 투자는 그램분자적이고 사회적이다. 사회적 생산은 특정한 조건들 아래에서 욕망적 생산 자체이다.
.사회적 투자들 속에서 계급 내지 이해관계의 전의식적 투자와 욕망 내지 집단의 무의식적 리비도 투자를 구별하라.
.사회장의 리비도 투자는 가족적투자들과 관련해 1차적이다. 권리상의 관점 못지않게 사실상의 관점에서도, 가족적 투자보다 사회장의 리비도 투자들의 우의를 내세운다.
.사회적 리비도 투자의 두 극의 구별인데, 그 하나는 반동적 파시즘적 편집증적 극이며, 다른 하나는 혁명적 분열증적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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