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해석학과 비평
FR.슐라이어마허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0년 9월
평점 :


◇해석학과 비평

중고 서점(청주)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행여 늦어서 헛걸음 칠까 한달음에 달려가 기분 좋게 구입했다. 그렇지만 정작 읽기 시작할 때까지는 시간이 제법 흘렀다.
해석학이란 분야를 범주로 묶지 않고 순서도 없이 이것 저것 읽었지만 다행히 슐라이마허 - 딜타이 - 하이데거 - 가다머 - 리쾨르 로 이어지는 책을 한권씩은 읽게 되었다. 아쉽다면 기억도 나지 않는 해석학에 대한 책을 조금은 체계적으로 읽고 이해해서 기억 속에 담아 두지 못했다는 거다.
우리는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면 옮긴이의 글도 보고 서론도 보면서 마음이 설레기도 하지만 잘 이해해야 하는 부담감도 있다. 그렇지만 완독하고 다시 옮긴이의 말을 훑어보니 시작할 때 접한 요약된 내용이 한눈에 쓱 들어온다.
이 책은 힘들게 이해하고 사색하는 내용이 아니라 언어와 사고의 이중성에 대한 기술적인 방법을 고찰했다. 아니, 기술적이란 부분이 단순히 방법을 나열한게 아니고 해석에 대한 사고의 방법이니 심히 고민해봐야 한다.

해석학
서론
해석학과 문법의 공속성은 모든 말이 오로지 언어 이해의 전제 하에서 파악된다.
해석은 기술이다. 요구되는 능력은 언어 능력과 개별적인 타자 판단 능력에 기인한다. 말과 사고 과정의 재구성에서 나타나는 난점을 예방하는 것이 해석학의 과제이다. 여기에는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의 두 측면이 있다.
신약성서의 역사적 해석부터 시작되는 해석학은 보편적 해석과 특수적 해석으로 구분되는데 보편과 특수 간의 경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규정은 다층적 등급의 관계이다. 즉 ‘보편은 사고 전개의 법칙이 동일한 데까지만 진행하며 우리가 차이를 발견하는 곳에서 특수가 시작된다. 고 말해야 한다. 해석의 기술이 말보다 글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회피되어야 하는 것은 이중적인 오해인데, 그것은 내용에 대한 질적 오해이며 어조에 대한 오해 내지 양적인 오해이다.
이해의 기술은 말이 언어의 총체성으로서 주어진 말에 대한 역사적, 예료적 재구성이며 객관적, 주관적 재구성이다. 따라서 전체에 대한 개관을 얻기 위해서 통독이 정확한 해석에 선행해야 한다.
제 1 부
문법적 해석
모든 해석은 말 자체의 무규정적인 부분을 규정자로 이해하는 것이 무한한 과제라는 사실이다. 해석 작업에서 의미의 다양성은 일련의 대립으로 분해되어야 한다. 첫째는 본래적인 의미와 비본래적인 의미의 대립이다. 둘째는 보편적 의미와 특수한 의미의 대립이다. 주어져 있는 텍스트의 자리에서 단어가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한히 무규정적인 다양성에 속하며 우리는 그때마다 정당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단어의 근원적 통일성과 그 주변의 말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통일성에서 사용 방식의 다양성이 가능해야 한다면, 이미 통일성에서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
특정의 구절이 담고 있는 모든 말의 의미는 이 말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말과 이 말이 맺는 연관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전체의 글은 다소 연관에 속하며 모든 개별적인 구절의 주변에 놓여 있는 말에 귀속한다. 말에는 유기적 결합과 기계적 결합, 즉 내적 혼합과 외적 병렬이라는 두 종류의 결합만이 있다. 여기에 규정적으로 구별하기 위한 전치사, 접속사 등 불변화사가 있다.
문장들은 문장들간의 관계를 가지며 말의 통일성에 대한 관계를 갖는다. 후자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 간의 대립이며, 전자의 경우에 관건이 되는 것은 병렬적인 결합과 종속적인 결합의 대립이다.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의 관계는 중복과 강조 간의 관계와 동일하게 파악되어야 한다. 문장이 병렬적인가 종속적인가 하는 것은 불변화사와 결합 방식으로부터 나타나야 한다.
결론적 고찰
우리가 전체에 대한 개관을 고려해야 하는 적절한 준비를 한 다음 이어지는 독서에서 한 문장의 개별 요소들을 낱낱이 그 주변의 요소들로부터 규정할 때, 우리가 이 문장을 저자가 생각한 대로 파악했다는 것이 추호의 의심이 가지 않는 사실이라고 직접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우리가 표제나 잠정적인 독해 방식을 통해서 전체를 개관하게 되면, 중심 사상과 강조적인 언어 요소를 동일한의미로 나타나게 하는 테두리나 경계를 규정할 수 있다.이러한 동일성의 기준은 오로지 말의 본질적인 부분을이루는 표현에만 적용된다.
사유 복합체에서 비본질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구절의 전개 과정에서 본질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대립을 추적해야 한다. 규준의 또 다른 확장은 저자 자신이 동일한 사유 복합체를 담고 있는 문장을 대립을 통해 설명할 때 등장한다. 우리가 이미 설정된 규준을 계속해서 추적한다면, 먼저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 그리고 단순한 서술 수단을 구별해야 한다.
역사 비평 해석학은 글의 생성과 그 근원적 성질에 대한 외적 증거가 충분할 때 순수 해석학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해석학적 처리와 비평적 처리는 상호 완성을 위해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의 문법적 요소와 심리적 요소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는 글을 언어적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여기서 저자의 심리적 특유성에 대한 척도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다만 모든 난점이 언어적 측면에서 해소되거나 아무런 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저자의 심리적 특유성을 정확히 안다면, 이것은 물론 어렵고 항상 언어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지만, 언어적 측면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다.
제 2 부
심리적 해석
심리적 해석의 측면과 문법적 해석의 공동적 출발은 작품의 통일성과 작품 구성의 특징을 파악하는 일반적인 개관이다. 문법적 해석에서 말하는 작품의 통일성은 언어 영역의 구성이며, 작품 구성의 특징은 결합방식의 구성이다.
심리적 해석의 최종 목표는 다름 아니라 전개된 시작이다. 즉 행위의 전체를 그 부분으로 직관하고 모든 부분 가운데서 다시금 실질적 내용을 운동자로 직관하며 형식을 내용에 의해 운동되는 속성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전체의 목표는 대상에 대한 표상의 수용과 배제로부터 나온다. 이 목표는 근접하되 구별할 수 있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심리적 해석에 앞서 시대적 상태와 내용이 고려되어야 한다. 전체의 해석 작업은 두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그것은 예언적, 예료적 방법과 비교적 방법인데 자기를 이른바 타자로 변화시키면서 자기와의 비교를 통한 예료적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보편자로 정립한다음 이것을 보편자 가운데서 파악되는 다른 존재와 비교함으로써 해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이념은 오로지 소재와 영향 영역이라는 두 계기로부터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심리적 해석의 과제는 일반적으로 그것이 그 자체로 고찰될 경우, 주어져 있는 복합적인 생각을 특정한 인간의 삶의 계기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제 심리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의 중심 구별을 고수함으로써 자연히 개인의 자극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며 총체적 삶이 전체의 전개에 끼치는 지속적인 작용으로 이해한다.
심리적 해석 과제
작품의 총체성과 특정의 필연성. 즉 외적인 것의 설명과 내적 맹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품의 특수한 경향과 특수한 목적에 대한 지식 없이는 작품의 구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저자의 작품 가운데 특정한 관계가 발생한다면, 과제의 해결은 이를 통해서 용이해진다. 그러나 개별자가 소재와 형식의 통일성에서 나다난다면, 그리고 심지어 남아 있는 것이 공동의 관계를 갖는다면, 여기에 저자의 감추어진 통일성과 비밀스런 목적이 들어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비밀스런 의도를 저자의 작품에서 찾아내어야 하는 여부를 알기 위해서, 저자의 삶의 관계와 상태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작품과 그때마다의 우연적인 창작물의 대립을 받아 들인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단순한 자극과 충동에 기인하며 그 자체로 존립하는 요소이다.
작품에는 소재와 형식의 관계로부터 이해될 수 없는 그 어떤 의미에서 가장 완벽한 예술작품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예술작품이 개별자의 작품으로서 아주 불완전하다는 데 있다.
해석 대상이 되는 일정한 사유 복합체는 대상과 형식의 관계 속에 있는 통일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상이한 구성 방식과 구성 영역에서 주관적인 보조 목적이나 하위의 통일성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관계의 규정은 본질적으로 작품의 통일성에 속하며 그 특성을 규정한다. 만약 대립이 지양되면, 작품은 훨씬 더 자유로운 사고의 결합이 되며 자유로운 운동이 된다. 이에 반해서 대립이 지배적이면 작품의 통일성은 더 규정적이며 더 고차원적인 것이 된다.
중심 사상과 보조 사상의 대립은 그것이 처음부터 의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항상 형식의 필연성으로부터 형성된다. 통일성은 그것이 대부분 저자에게 구속적이며 특정한 형식에 관계할 때 가장 생산적이며 가장 강하다. 이 두 최종점 사이에 개별적인 계기들의 전체 운동 계열이 놓여 있다.
우리가 저자의 명상과 구성에 대한 명확한 푱상을 갖고 있다면, 명상과 구성의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쉽게 나온다.
기술적 해석 과제
우리는 글이 생동적인 처음 결심으로부터 내용과 형식을 따라 어떻게 생겨나며 전체로서의 글이 어떻게 이어지는 결심의 전개인지를 고찰해야 한다. 이렇게 고찰될 수 있는 글의 모든 요소는 기술적 해석의 대상이다. 문법적 측면에서는 개인이 언어에서 행사하는 강제를 통해서 언어 요소의 확장과 수축이 논리적 측면을 향해 일어난다.
우리는 명상의 비가시적 영역에 있게 되는데, 모든 글이 그 특유의 생성 계열을 가지며, 여기서 근원적인 것은 개별 사상이 생각될 수 있는 질서이다.
모든 사람은 이러한 과제에서 자신을 통해 이것이나 저것을 향하는 지배적인 방향을 갖는다. 그러므로 해석학적 작업의 방식은 고유한 생각의 전개에 따라 규정된다. 우리가 형식과 개별적인 점들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정도만큼의 전체를 헝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해석학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저자의 명상과 구성의 관계를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하나의 글에서 형식과 내용이 서로에게 많이 나타날수록 명상과 구성의 구별은 더 적어진다. 어떤 영역에서 두 행위의 분리가 최소치이며 그것이 해석학적 관심에 대해 사라지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대부분 순수 학문적인 진술이다.
완전한 이해에는 내가 놓친 것뿐만 아니라 내가 저자에게서 대상에 대해 나의 생각과 모순되는 것을 발견한 것을 아는 것이 분명하게 속한다.
저자의 명상을 구성에 대해 다룬 것과 분리해서 이를 그 총체성에서 아는 관심이다. 명상을 이해하는 과제가 구성에 대한 이해에 의존적이라는 것은 참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전체 명상의 지식을 통해서만 구성을 발생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생각이 전개되는 내적 과정에 대한 고유의 경험을 가져야한다. 해석자는 이 생각의 전개를 말하자면 기초로 가지고 와야 하며미를 비교하면서 이 영역에 들어 있는 차이를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생각에 대한 처리 방식에서 타자의 특유성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은 해석학적 과제의 본질이다.
구성 자체에 대한 고찰을 이행하면 우리는 여기서 저자가 전체 작품을 지배하는 내적인 자극을 내적으로 완전히 전개시켰다는 것과 그가 작품에 이르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이제 구성을 시작한다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최초의 것은 항상 일반적인 개관이며, 이를 통해 총체성이 분명해지고 전체의 구조와 전체에 대한 규정적 정식이 발견된다. 만약 개관이 애매한 구절로 유도되고 이 구절이 구성의 중ㅛ점을 포함하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가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는 염려를 피할 수 없다.
결론적 고찰
역사에 대한 조심스런 관찰은 학문의 부흥 이래로 해석 작업이 해석의 원리를 더 많이 다룰수록 그것은 모든 측면의 정신적인 발전에 더 많이 기여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여기서 관심을 갖는다면, 역사에 대한 관심, 예술적 관심이나 취미 관심, 사변적 관심 즉 순수 학문적 관심과 종교적 관심 등 세단계로 구별한다.
비평
서론
비평은 어떤 의미에서 법정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며, 비교라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본래의 경향은 항상 개별 창작물을 그 이념과 비교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또한 개별자를 다른 개별자와 연관하여 고찰하는 법정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비평과 문헌학적 비평사이에 대립이 존재한다.
역사적 비평의 과제는 그 통일성을 가능한 한 총괄하는 것인데, 마치 관계가 사실에 관계하는 것처럼 관계로부터 사실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를 규정하는 것이다.
문헌학적 비평은 특히 고전적인 고대의 글을 다루고 심지어 이를 그 순정성과 관련하여 다룬다. 이것은 학리적 비평이나 평론적 비평과 어떻게 관계하는가? 이 비평 작업은 사람들의 작품을 오로지 그 가치와 관련해서 올바로 평가하는데 있다. 여기서 평가는 무엇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미 동일한 대상에 나타나는 두 비평 방식의 상이성, 즉 학리적 비평과 문헌학적 비평의 상이성을 본다. 왜냐하면 학리적 비평은 저자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작품의 이념에 대해서만, 즉 작품이 이념에 부합하는가에 대해 고려하며 문헌학적 비평은 글 자체에서 정확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다.
기술을 통해 대상을 정확하게 서술하는 과제는 오로지 상이한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으며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 비평의 과제는 관계로부터 사실을 규명해 내는 것이다. 우리가 해석학적 작업의 규칙을 특히 역사적 작품에 적용하면 사실의 규명은 해석학의 영역을 넘어가고 이야기가 출현한 지각에 대한 규명만이 해석학적 과제이다.
우리가 이제 비평의 세 가지 중심 과제를 서로 비교해보면, 학리적 비평이 윤리적 비평을 포괄하며 모든 인간의 상태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전적으로 보편적인 과제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학리적 비평은 개별자를 규정하는 존재가 개념에 대해 맺는 관계와 관계한다.역사적 비평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과제이며, 여기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대립한다. 문헌학적 비평은 수용과 재현, 수용성과 자발성 간의 운동을 통해 생겨나는 점진적인 변형과 관계한다.
‘모든 비평 작업을 제약하는 것은 글에 들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혐의의 발생이다‘라고. 이러한 혐의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비평적 처리도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혐의의 원인인 실수와 오류가 발생하는 방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아니면 혐의가 발생하는 방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비평의 작업이 출발하는 근원적 전제로부터, 즉 주어져 있는 것이 원래의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혐의나 추측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비평 작업을 구분할 때 우리는 추측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적으로 나누게 된다. 즉 기계적인 실수를 추론하게 하는 추측과, 사실과 관계의 차이를 유발시키거나 야기하는 중간에 등장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추론하게 하는 추측으로 나눈다.
제 1 부 기계적 실수에 대한 비평
관계와 원래의 사실 간의 차이에 대한 혐의가 생기는 일반적인 경우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글 자체의 관점으로부터 나오는 과제와 다수의 글에 대한 비교를 통해 생겨나는 과제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실수의 사실과 특정한 방식으로 부딪칠 때 이를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첫째는 차이와 실수를 발견하는 것이며, 둘째는 차이에 대해 결정하는 것, 즉 원래의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논리적으로 통일적이지 않은 것의 경우를 오로지 문장의 보편적, 논리적 형식과 보편적인 문법 규칙에만 관련지었다.
우리가 해석학적 과제를 그 직접성에서 받아들이면 아주 많은 경우에 비평의 과제는 전혀 나타날 수 없다. 비평의 과제는 보편적인 문헌학적 관점에서 비로소 그 진정한 깊은 의미와 내적 필연성을 획득한다.
우리가 보편적인 문헌학적 관점을 설정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언어가 그 모든 상이한 시기에서 다루어진 방식이다. 그 다음에는 저자의 기술 방식을 정확하게 고찰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마지막으로 또한 저자가 속한 시대를 알아야 한다.
제 2 부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발생하는 실수에 대한 비평.
다른 사람의 말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을 그것에 주입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두 경우로 환원할 수 있다.1)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만든 것을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의도되었든 텍스트에 집어넣는다면, 이것은 항상 의도적인 위조이다. 2)누군가가 어떤 것을 교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물론 모든 편집자가 수행하는 자유로운 변경이다.
우리는 이러한 변경이 생겨날 때 의도적인 것과 비의도적인 것을 구별해야한다. 우리는 여기서 좋은 의도와 나쁜 의도를 구별한다. 좋은 의도는 이미 나타나 있는 오류를 다시 좋게 만드는 것이며 올바른 것을 재생하는 것이다. 나쁜 의도에서 나온 변경은 어떤 사람이 스스로 저자보다 더 나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그는 저자의 진술과 표현을 변경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저자를 자기 견해를 위한 권위로 만들려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저자가 하지 않는 것을 그에게 돌리고 그가 범하지 않은 오류를 그에게 돌리기 위해서 변경을 하는 것이 생각될 수 있다.
해석학적 작업을 위해 텍스트를 형태화하는 독자와 비평적인 텍스트 편집자는 어디서 구별하는가?
고문서적인 비평과 예언적 비평의 결과에는 특정한 구별이 있다. 고문서적인 비평에서는 이 두 사람이 보편적인 문헌학적 관점 위에 있으며, 두 사람 다 가능한 한 근원적인 것을 규명하려고 한다. 예언적 비평과 관련해서는 이 두 사람이 해석학적 작업을 위해 일한다. 해석학적 작업은 보충을 요구하며 상이한 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독자는 고문서학적으로 밝혀진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텍스트가 중심 사실이고 주석이 보조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면, 텍스트를 전적으로 고문서학적으로 전달하는 일이 더욱 필연적이다.
역사 비평의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 요약하면 적절하게 입증된 총체적 사실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실의 이편과 저편에서 총체적 상태가 사실의 장소, 즉 이전의 상태와 이 후의 상태로 있어야 한다.
글은 적어도 역사적으로 충족되는 시대로부터 나와야 할 것이며 혹은 이 시대에 관한 확실한 소식을 획득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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